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이 지난 6월 27일 산내학살사건희생자위령제에서 붓글씨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앞쪽부터 전선혜, 홍성옥, 김미화 회원.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이 지난 6월 27일 산내학살사건희생자위령제에서 붓글씨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앞쪽부터 전선혜, 홍성옥, 김미화 회원.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잠시 내리던 비가 그치자 흰 천을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는 큰 붓에 먹을 묻혀 붓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락가락하는 비에 글씨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섯 명은 많은 고민을 했어요. 고민도 잠시 현수막은 젖어도 되니 글씨를 쓰는 걸로 결정을 하게 되었죠.”

지난 6월 27일, 산내 학살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서 붓글씨 퍼포먼스에 참여했던 전선혜의 말이다. 

그날 붓글씨 퍼포먼스는 전선혜 씨를 비롯해 세종손글씨연구소 5명의 회원들은 함께 했다. 후덥지근하면서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붓글씨 퍼포먼스뿐 아니라 위령제를 진행하는데도 무척 애를 먹었던 날이었다. 

위령제가 끝난 후 일주일여가 지난 7월 5일, 기자는 세종손글씨연구소(세종시 대평동)를 찾았다. 세종손글씨연구소 김성장 소장을 비롯해 붓글씨 퍼포먼스에 참가했던 회원들이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쉽게도 유미경 씨는 직장 생활로 인해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두 분 선생님과 글씨를 먼저 쓰게 되었는데 처음 쓰는데도 떨림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저 숙연한 마음으로 글씨를 쓰는데 잠시 멈췄던 비가 갑자기 쏟아졌죠. 써진 글씨에 떨어지는 빗물이 영혼들의 통곡의 눈물 같았어요. 굵어진 빗줄기에 글씨를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게 잘 마쳤습니다. 유족들도 숨죽여 글 쓰는 것을 지켜봐 주셨죠.”

전선혜 씨는 위와 같은 말을 이어갔고, “앞으로도 위로와 힘이 되는 일이 있다면 함께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홍성옥 씨도 “비와 땀과 먹이 어우러지고 검정 글씨 위에 빗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며, “그래도 이런 현장에서 글씨로 함께하는 시간이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전에 살면서도 골령골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23회차 합동위령제가 이어지는 동안 끊임없이 앞서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고맙다”고 덧붙였다.

김미화 씨는 “빗속에서 울컥거리는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며, “김희정 시인의 <서사시 골령골>을 울면서 읽었는데, 글씨를 쓰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써놓은 글씨는 빗물에 번져서 마치 글씨가 펑펑 우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어요. 이번 위령제 참가를 계기로 몰랐던 역사에 대해 한 걸음 더 알게 되었고, 그런 역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나는 왜 글씨를 쓰는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세종손글씨연구소에서 다시 만난 홍성옥, 전선혜, 엄태순, 김미화 회원(왼쪽부터). 가장 오른쪽 모자를 쓴 이는 김성장 소장이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세종손글씨연구소에서 다시 만난 홍성옥, 전선혜, 엄태순, 김미화 회원(왼쪽부터). 가장 오른쪽 모자를 쓴 이는 김성장 소장이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은 붓글씨 퍼포먼스 참가에 앞서, 최근 김희정 시인이 펴낸 시집 <골령골 서사시>를 읽고, 골령골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엄태순씨는 “우리 일상에 스며있는 폭력성은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잔악함일 뿐이란 것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산내 골령골로 들어서며 초록이 무성한 나무들을 보았죠. 그 아름다운 장소에 수많은 주검들이 누워 통곡하고 있다는 것에 무서운 마음이 들었어요. 글씨가 빗물에 젖어 고통이 검은 눈물로 피어나는 것 같았죠. 먹물과 빗물이 뒤섞여 버린 글씨들은 되살릴 수 없어도 상관없지만, 무참히 학살된 억울한 죽음들의 진실은 밝혀야만 해요.”

세종손글씨연구소 엄태순, 유미경 회원이 붓글씨를 쓰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세종손글씨연구소 엄태순, 유미경 회원이 붓글씨를 쓰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유미경 씨는 “학살 현장에서 힘없이 쓰러져간 영령들과 70여 년 동안 만신창이의 삶을 살아온 그들의 가족들에게 위로를, 숱한 과거사 청산과 진상규명의 할 일을 해야 하는 국가를 향해, 학살의 전면에 섰던 가해자에게는 반성 요구를 붓의 힘을 빌어 우리는 아우성쳤다.”고 전했다.

세종손글씨연구소 김성장 소장과 회원들은 여러 장의 만장 글씨를 써와 골령골 주변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위령제 날 붓글씨 퍼포먼스로 쓴 글씨들은 먹물과 빗물이 뒤섞이어 버려 매달아 놓을 수 없었지만, 미리 써와 매달아 놓은 만장 글씨는 위령제가 끝난 지금도 골령골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이들이 만장에 써 놓은 문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반짝이는 눈빛이 있다(김미화 붓)”
“권력이 지켜야 할 것은 이념이 아닌 오직 평화(엄태순 붓)”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피고 지는 저 꽃을 보라(김성장 붓)”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전선혜 붓)”
“국가는 밝혀라 숲에 묻힌 진실을(유미경 붓)”
“몸이 흙이 될 때까지 얼마나 아팠을지(김희정 詩 中 홍성옥 붓)”

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은 붓글씨 퍼포먼스 외에도 사전에 여러 장의 만장 글씨를 써와 골령골 현장에 매달아 놓았다. 만장 글씨는 위령제가 끝난 지금도 골령골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은 붓글씨 퍼포먼스 외에도 사전에 여러 장의 만장 글씨를 써와 골령골 현장에 매달아 놓았다. 만장 글씨는 위령제가 끝난 지금도 골령골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회원들의 붓글씨 퍼포먼스 참여를 독려했던 세종손글씨연구소 김성장 소장은 “이번에 참여했던 분들이 시대와 만나고 역사의 통증을 가진 분들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 생각한다”며, “역사와 사회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글씨가 시대의 상처와 만나서 더 아름다워지는 길에 힘을 보탰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세종손글씨연구소 회원들은 <4.16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를 읽고 손글씨로 쓴 세월호 손글씨전 ‘그날을 쓰다’도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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