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이번 연재가 20회째이다. 2월 8일에 첫 연재를 시작하였고, 매회당 적을 때는 200자 원고지 70매 정도, 많으면 130매를 넘게 썼으니, 평균 회당 90매는 넘을 것이다. 이번 20회까지의 연재물을 모두 합한다면 200자 원고지로 최소 1800장이 넘을 것이다. 본 연재를 시작할 때 50회는 가려고 했으나, 상황을 보아서 30회를 상회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 이후에는 애서가로서 새로운 연재물을 준비하려 한다.

(18) ‘지리지’와 ‘강역고’

우리 민족의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강역고(疆域考)이다. 어쩌면 강역고는 우리 민족사학에서 핵심이라 할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 다룬 실학자들의 역사지리학(歷史地理學) 연구에 관한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지리학 발전과 변천을 고찰을 한 박인호 교수의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2015)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참고하였다.

가. ‘강역’과 ‘강역고’

역사학의 한 분야로 역사지리학이 있다. 역사지리학은 『세종실록지리지』 등과 같은 지리지(地理志) 형식과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과 같은 강역고 형식으로 편술된 문헌으로 세분할 수 있다.

강역(疆域)이란 “강토의 구역” 또는 “국경(國境)”을 의미한다. 즉 강역이란 요즘의 말로는 ‘영토(領土)’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강역이란 단어는 근대 이전에 사용된 개념이라 할 수 있고, 국경이나 영토는 근대적 개념의 용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국경이라는 것은 산악(山嶽)이나 강하(江河)에 따라 경계가 이루어졌으며, 자연환경에 따라 생활 문화권이 형성되어 영역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국경을 하고 있던 지역은 강이나 하천, 뜨는 산세(山勢)를 경계로 하는 지역으로 각국의 성이나 초소 간에는 상호 간의 거리가 있었다. 즉 국경에는 대부분 완충지대가 있었고, 그 완충지대에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또는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경계와 경계인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고 측량술이 발전함으로 해서 국경은 선의 개념으로 구체화하였다. 현재 남북 간의 국경은 남북 간의 휴전선이다. 그 모습은 판문점에서의 남북 간의 대치선(對峙線)으로 상징한다. 측량술과 지도 제작의 발달로 인하여 지금의 국경선의 폭은 땅 위에 그어진 도로 표지선 같은 선에 불과하다.

나. 역사지리학

역사지리학은 역사시대(歷史時代)의 공간, 즉 역사가 이루어진 지역공간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지리학의 한 부문이다. 역사지리학에서는 문헌적 자료의 성질에 따라 선사지리학(先史地理學)과 역사지리학으로 구분한다.

선사지리학은 인류가 출현한 이후 문명의 발달에 따라 인류가 문자(文字)의 지식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문헌이 나타날 때까지 시대의 지역적 공간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연구자료의 성질이 주로 유물‧유적에 따를 때는 고고지리학(考古地理學), 문헌에 따를 때는 역사지리학이라 부른다.

역사지리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자료로는 고문헌(古文獻), 고지도(古地圖), 유물‧유적 등이 있다. 고문헌과 유물‧유적이 있는 역사지리학의 연구는 비교적 용이하나, 그 이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물‧유적이 유일한 자료가 된다. 그럴 때는 이론적으로 추정하여야 하며, 그 추정 과정에서 현재의 자연 및 문화 유적을 분석 조사하여야 한다. 역사지리학의 연구에 언제나 현지 조사가 뒤따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고문헌에 나타나는 과거의 지명(地名)과 현재의 지명은 역사지리학 연구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다. 고려와 조선의 지리지

『삼국사기』권제37, 「잡지(雜志)제6 지리(地理)4」 (부분). 1512년 목판본.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리지(地理志)는 1145년(고려 인종 23)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34 잡지(雜志)제3 「지리(地理)」이다. 사진은 「지리4」의 고구려 지리지의 시작 부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삼국사기』권제37, 「잡지(雜志)제6 지리(地理)4」 (부분). 1512년 목판본.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리지(地理志)는 1145년(고려 인종 23)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34 잡지(雜志)제3 「지리(地理)」이다. 사진은 「지리4」의 고구려 지리지의 시작 부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세종실록』 「지리지」, 첫 부분. 원고본.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에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에 첫 시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독립된 『세종실록지리지』 8권8책이 편찬되었고, 1937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세종실록지리지』를 발간하면서 그 내용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이 책을 제1기 민족사학자들이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세종실록』 「지리지」, 첫 부분. 원고본.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에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에 첫 시기의 민족사학자들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독립된 『세종실록지리지』 8권8책이 편찬되었고, 1937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교정세종실록지리지』를 발간하면서 그 내용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이 책을 제1기 민족사학자들이 이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지리지는 1145년(고려 인종 23)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34 잡지(雜志)제3 「지리(地理)」이다. 『삼국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 28권, 잡지(雜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지리(地理)」는 잡지 9권 가운데, 제3권부터 제6권까지로, 각 주(州)와 군(郡), 주요 읍(邑) 등의 위치와 연혁에 치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는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지리학을 연구하는 기본 사료로서 가장 중요한 고문헌은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이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인 1424년(세종 6) 11월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지지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먼저 편찬되었으며 이어 나머지 도의 지리지가 순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재편집하여 1432년(세종 14)에 맹사성(孟思誠), 윤회(尹淮), 신장(申檣) 등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고, 세조 때인 1453년 양성지(梁誠之) 등이 이것의 수정과 보완에 착수하여 성종 때인 1477년(성종 8)에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완성하였다.

성종은 1479년(성종 10)에 『팔도지리지』를 토대로 『동문선(東文選)』 등에 수록된 문사(文士)들의 시문(詩文)을 첨가하여 각 도의 지리와 풍속 등을 정리하도록 명했고, 이에 1481년에 50권으로 된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은 편찬된 뒤에 교정과 증보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성종 때인 1485년(성종 16)에는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연혁과 풍속, 인물 등에 대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 성씨와 봉수, 고적 등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도 임사홍(任士洪)·성현(成俔) 등에 의해 2차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3, 목판본, 1611년 태백산 사고에 내사한 내사본을 조선총독부가 경성제국대학에 이관한 본(本)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3, 목판본, 1611년 태백산 사고에 내사한 내사본을 조선총독부가 경성제국대학에 이관한 본(本)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이후 중종 때인 1530년(중종 25)에는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홍언필(洪彦弼) 등에 의해 55권으로 된 증보판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앞에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기술한 뒤에 새로 증보된 내용을 각 항목의 끝에 ‘신증(新增)’이라고 밝히며 덧붙이고 있다.

라. 역사지리학의 시작과 발전

조선전기에 편찬된 여러 지리지는 임진왜란 이후에 역사지리학을 불러온다. 우리 역사의 무대를 지리학적(地理學的)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은 16세기 중반의 유학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으로 본다.

필자는 본 연재의 13회에 “「기자(箕子) 진위 논란과 『고금역대보감』」”을 기고하면서, 한백겸이 1607년(선조 40년)에 평양에서 기자의 정전(井田)이라고 주장하는 유적을 발견”했고, “이후 간행되는 평양 지도와 풍경화에는 꼬박꼬박 기자 정전을 그려 넣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그의 “저서 『동국지리지』는 60장 분량의 작은 책자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 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당시)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하지만 한백겸의 연구 “실적(의 상당 부분)은 허구의 실증을 조작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한백겸의 기자의 정전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임진왜란시 명나라 원군(援軍)의 위세에 편승하여 조선에서 세력을 탐한 의도가 다분하다. 더군다나 그는 기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청주한씨이다.

그런 한백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지리 전문서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조선전기의 삼조선-사군-삼한-삼국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달리 발전하였다는 ‘남자남 북자북(南自南 北自北)’의 이원적인 발전 체계를 제시하였다.

특히 삼한의 위치 문제에서 최치원의 마한-고구려 설이나 권근의 변한-고구려 설을 비판하면서 북방의 고구려와는 별개로 남방에 삼한이 있었으며, 그 경계를 한강 일대로 보았다. 삼한과 후대 국가에 대해서는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설을 제시하였다. 북방과 요동 지역은 중국의 정사 자료를 활용하여 내용을 보강하였다. 그는 강역과 관방에 대한 역사와 지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의 성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한백겸의 연구를 계승하거나 발전시킨 16~17세기에 유학자로는 오운(吳澐, 1540~1617), 홍여하(洪汝河, 1620~1674),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정극후(鄭克後, 1577~1658), 허목(許穆, 1595~1682),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이세구(李世龜, 1646~1700), 이이명(李頤命, 1658~1722), 홍만종(洪萬宗, 1643~1725) 등등을 들 수 있다.

오운은 『동사찬요(東史簒要)』의 초기본에서 조선전기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역사지리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한백겸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면서 삼한설의 내용을 듣고서는 오히려 남쪽과 북쪽이 별개의 세계를 구성하여 발전하였다는 한백겸의 주장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점은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과 『휘찬여사(彙纂麗史, 木齋家塾彙纂麗史)』를 편찬한 영남 남인 출신의 홍여하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17세기 사략형(史略型) 사서나 강목체(綱目體) 사서를 편찬한 선구적 인물이며 유교적 포폄사관(褒貶史觀)과 정통관(正統觀)에 입각한 역사서를 편찬하였지만 역사지리학적 측면에서는 한백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유형원은 역사와 지리에 관한 연구를 사회 개혁적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실학의 개조(開祖)라는 평가를 받는 유형원은 당대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면서 전국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편찬하였다. 유형원은 이를 바탕으로 사회 개혁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를 완성하였다.

『동국여지지』는 현실을 파악하는 자료로서,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리지였으나, 역사적 연원을 중시하였던 그는 연혁조에 지역의 역사지리적 내용을 크게 보충하였다. 특히 북방의 고구려와 남방의 백제에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였다. 유형원은 한백겸의 삼한설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나라 상고사가 남북이 따로 이원적으로 발전하였음을 인식하였다.

한백겸 이후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상호 계승되는 측면이 있었다. 유형원의 연구 성과도 『여지지(輿地志)』라는 이름으로 18세기 실학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地理考)」나 신경준의 『강계고(疆界考)』‧『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에 계승되었다.

마. 18세기 실학자들의 역사지리학 연구

18세기에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실학자들은 매우 다양하다.

임상덕(林象德, 1683~1719), 이익(李瀷, 1681~1763), 유광익(柳光翼, 1713~1780), 이돈중(李敦中, 18세기 초),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윤동규(尹東奎, 1695년~1773년), 이만운(李萬運, 1723~1797),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이종휘(李種徽, 1731~1797),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긍익(李肯翊, 1736~180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등이 주목된다.

이들 대부분은 후대에 실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들이다. 18세기에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통로가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 관직을 독점하면서 비주류 세력이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특정한 전문 분야를 일생 동안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 집단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가운데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하였으며, 특히 이익, 신경준, 안정복 등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지리 연구는 연구 내용이나 방법이 이전 시기보다 훨씬 정교하였다.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의 『동사평증(東史評證)』에서 보이듯이 18세기 주자학의 심화와 함께 등장하여 도덕적 평가를 주로 진행하였던 사론(史論) 형식의 역사학 분야에서도 역사지리 연구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신경준은 한백겸과 유형원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지리학의 토대 위에 역사지리학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당시까지의 연구를 총정리하였으며, 그의 연구는 『강계고(疆界考)』에 집약되었다. 그의 역사지리 연구는 영조 때 만들어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은 유형원의 글을 보면서 역사지리 연구를 심화시켰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地理考)」를 집필할 때 유형원의 글에서 시사 받은 바가 크다. 안정복의 역사지리학 연구는 내용상 당대에 나온 역사서 가운데 정확성과 정밀성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 안정복의 연구는 『동국문헌비고』를 계승하여 이만운이 편찬하였던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의 생각은 당시 학자들과 비교해 특별하였다. 이종휘는 상고시대 영역을 일반적인 학계 동향에 비해 파격적으로 넓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군을 본기(本紀)로 설정함으로써 우리 상고사의 기원을 더욱 확장했다. 고유한 우리 문화와 신교(神敎)에 대한 이종휘의 생각은 개화기 지식인과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8세기 학자들은 압록강 북쪽에까지 우리나라 상고시대 소국가들이 활동하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료사(遼史)』나 『금사(金史)』와 같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북학파(北學派) 계열의 학자들은 중국으로의 연행(燕行) 경험으로 인해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대사의 중심 무대를 요동이나 영고탑 일원으로 비정하였다.

18세기의 역사지리학 연구자들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의 흐름을 명확히 인지하여 상고시대 서술은 대부분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기자조선과 한사군의 영역을 아예 요동 일원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역사지리적 인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지도류에서도 기자나 한사군의 일부를 압록강 이북에 비정하고 있다. 이러한 북학파들은 20세기 초 민족주의 사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편 18세기는 국내의 역사지리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서학의 지리서들이 들어오면서 관심 영역과 연구대상이 국외까지 확대되었다. 이돈중(李敦中)의 『동문광고(同文廣考)』, 위백규의 『환영지(寰瀛誌, 新編標題纂圖寰瀛誌)』,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위사』 등에서 보듯이 요동을 포함하여 서역제국(西域諸國), 일본, 대만, 유구(琉球), 북아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 대상을 넓혔다.

바. 19세기 역사지리학의 재편과 계승

19세기 전반을 이끌어 나간 학자들은 성해응(成海應, 1760~1839),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한치윤(韓致奫, 1765~1814), 한진서(韓鎭書, 19세기 초), 홍석주(洪奭周, 1774~1842), 홍경모(洪敬謨, 1774~1851), 이원익(李源益, 1792~1854)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연구 가운데 실학자의 연구로 주목되는 인물은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연구는 이전 시기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811년 『아방강역고』에서 이전 시기 연구와는 달리 상고사의 중심 무대를 한반도 이내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조선 강토의 범위와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다산 정약용의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민족주의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며,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는 증보 및 수정되게 된다.

정약용에 반하여 성해응을 비롯하여 홍경모나 이원익과 같은 이들이 18세기의 안정복이나 이만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고증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었다. 성해응과 홍경모 등은 비록 전문 저술 형태는 아니었으나 역사지리에 대한 많은 논설을 제시하였다. 북방 지역에 대한 행정적 관심은 폐사군복구론(廢四郡復舊論)으로, 요동 지역과 두만강 북쪽 지역에 대한 아쉬움은 요동수복론(遼東收復論)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과 다산의 제자로 이어지는 다산학파(茶山學派)의 역사지리학 인식은 이들과는 달랐다. 다산과 그 제자들은 단군, 기자, 사군의 중심 위치를 한반도에 비정하였고, 예맥과 발해를 우리 역사에 수용하기를 주저하였다. 또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선 확보가 역사상이나 국방상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다산학파의 역사지리학 연구는 전통시대 학문의 고증적인 연구 수준에서 나온 것으로 중화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대표적인 연구성과로 정학연(丁學淵)의 『유산필기(酉山筆記)』, 이강회(李綱會)의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잡저(雲谷雜著)』, 이청(李晴)의 『정관편(井觀編)』, 윤정기(尹廷琦)의 『동환록(東寰錄)』 등이 있다.

한편 자료들을 별다른 비판 없이 인용하였던 이전의 연구와는 달리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그 신빙성을 고증하려는 연구 경향이 증대되었다. 『료사』, 『성경지(盛京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의 자료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정사(正史) 자료와 비교하여 이들 자료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이전의 연구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극복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신경준의 연구였다. 이 시기 역사지리학은 신경준의 연구성과를 고증적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역사지리학자들은 실학의 가르침을 받은 마지막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전통적인 역사지리학 연구 경향을 계승하였던 학자로 김정호(金正浩), 박주종(朴周鍾, 1813~1887), 윤정기(尹廷琦, 1814~1879) 등등을 들 수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김정호(金正浩)가 전국지로 편찬한 지리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지도제작자이자 역사지리학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18세기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까지 수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동지지(大東地志)』, 김정호(金正浩)가 전국지로 편찬한 지리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지도제작자이자 역사지리학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18세기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까지 수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 김정호는 전국지로 편찬한 지리서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18세기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까지 수렴하고 있다. 박주종은 사찬(私撰) 백과사전인 『동국통지(東國通志)』에서 이익과 이종휘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도회(都會)와 같은 문화권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윤정기는 역사지리 백과사전인 『동환록(東寰錄)』에서 정약용의 지리고증을 조술하면서 이전의 연구성과를 사전식으로 편집하고 있다. 이는 실학파 지식인들의 사상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조선후기 역사지리학을 연구하였던 실학자들은 자신의 사회개혁과 부국강병의식을 역사지리학 연구에 투영하면서 대체로 조선전기 관부(官府) 학자들에 비해 국가의 계승과 수도의 변천, 종족의 행방과 지명의 변동, 지역의 산물과 관방시설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영역관에 있어서도 조선전기에 비해 북쪽으로 올려보거나 요동쪽으로 비정하였다. 실학자들은 확장된 강역의식을 통해 과거의 우리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실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러한 역사연구와 지리고증은 양반 사대부들의 잡기로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자료의 수집이나 해석이 풍부해지고, 고증적인 연구 방법을 도입하면서 엄밀한 사료 비판이 이루어져 실학자들은 이전과 다른 연구 결과를 산출하였다. 조선 후기의 역사지리학은 이러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연구성과를 통해 17~19세기 조선에서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 『흠정만주원류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00부 한정판, 1책(양장본), 국내 첫 영인본이다. 1978년 6월 10일 조용승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100부 한정판, 1책(양장본), 국내 첫 영인본이다. 1978년 6월 10일 조용승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건륭 42년인 1777년에 대학사 아계(阿桂)‧우민중(于敏中) 등등이 칙명을 받들어 당시 한림원(翰林院) 최고의 학자들과 관리 30여 명이 참여하여 편찬한 역사지리서로서, 1778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건륭제는 한족(漢族) 역사가들이 만주에 이해가 얕아 고증을 제대로 못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명성 있는 대학사들에게 문헌들을 모으게 하였고, 이 모인 문헌들을 근거로 하여 한족중심사관에 의한 사서 기록에서 벗어나 만주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편찬한 것으로 여진족에서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민족을 부각시키는 문헌이다.

내용은 기본적으로 여진, 만주인이 시대별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여진(건주, 완안) 등으로 그 계통이 이어지고, 청나라의 건국은 1,000여 년 동안의 이어져 온 계통의 고유한 정치적, 문화적 발전과 진보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선 만주의 원류로 읍루, 물길, 완안 같은 숙신계 종족들은 물론 친척뻘인 옥저, 부여, 발해도 다루고 있고, 심지어 백제, 신라를 포함한 삼한까지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고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선 백제나 신라 같은 한반도 왕조도 만주족의 원류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여진족을 지배했던 것으로 판단하였던 거란이나 선비 몽고 등 몽골계 부족이나 고조선 고구려는 다루지 않고 있다. 특히 청나라가 시작된 만주 한복판에 자리 잡았던 고조선과 고구려가 안 나온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특이한 현상이 있어도, 어떻든 『흠정만주원류고』는 우리 민족의 옛 강역을 연구하는데 많은 수고를 덜어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소는 한때 동북삼성을 지배하였던, 즉 자신들이 선조를 지배하였던 고조선과 고구려를 배제함으로서 고조선과 고려를 이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여러 국가들을 청나라와 동일한 민족으로 엮어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을 모청사대사상(慕淸事大思想)으로 만들려 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인지한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민족사학계에서는 이 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 책이 우리나라의 제2기 민족사학자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도봉구 미아동에 사는 조용승씨가 100부 한정판 영인본을 1978년 6월 10일자로 발행한 일로 인한 것이다. 이후 이 책은 영인본 전문 출판업자들에 의하여 다시 영인되었고, 근래에는 번역본까지 나왔다.

아. 정약용 원저 『아방강역고』와 장지연 증보 『대한강역고』

『아방강역고』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편저한 책이다. 그런데 다산의 『아방강역고』는 우리 측 사료보다는 중국 측 사료를 더 중요시하는 문제점이 있다. 우리측 사료를 불신하는 이유로 황당하며 근거가 없는 비합리적인 신화, 전설적인 면을 갖고 있는 점을 거론하였다.

그런 한계에서 1811년에 우리나라의 강역을 문헌을 중심으로 살피고 고증해서 썼고, 이후 증보작업을 계속하여 1833년에 「북로연혁(北路沿革) 속편」, 「서북로연혁(西北路沿革) 속편」을 증보하였으며, 1830년대를 전후하여 「발해속고(渤海續考)」를 증보하였다. 다산의 강역 관점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상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정약용(丁若鏞) 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를 장지연(張志淵)이 개편 및 증보하여 9권2책으로 만들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상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정약용(丁若鏞) 편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10권를 장지연(張志淵)이 개편 및 증보하여 9권2책으로 만들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상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상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하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권5에 「발해고(渤海考)」가 들어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하권, 190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권5에 「발해고(渤海考)」가 들어가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따라서 원래 고본(稿本) 10권이 전해 오던 『아방강역고』는 1903년(광무 7)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개편 및 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로 서명(書名)을 바꾸어 근대식 연활자본 9권으로 간행한다. 한편 1936년에는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이 교열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6집에 4권으로 개편하여 수록하였는데,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아방강역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1에 조선고(朝鮮考), 사군총고(四郡總考), 낙랑고(樂浪考), 현도고(玄菟考), 임둔고(臨屯考), 진번고(眞番考), 낙랑별고(樂浪別考), 대방고(帶方考), 삼한총고(三韓總考), 마한고(馬韓考), 진한고(辰韓考), 변진고(弁辰考), 권2에 변진별고(弁辰別考), 옥저고(沃沮考), 예맥고(濊貊考), 예맥별고(濊貊別考), 말갈고(靺鞨考), 발해고(渤海考), 권3에 졸본고(卒本考), 국내고(國內考), 환도고(丸都考), 한성고(漢城考), 위례고(慰禮考), 팔도연혁총서상(八道沿革總敍上), 팔도연혁총서하(八道沿革總敍下), 패수변(浿水辯), 백산보(白山譜), 권4에 발해속고(渤海續考), 서북로연혁속(西北路沿革續), 북로연혁속(北路沿革續) 등을 실었다.

자. 이원태의 『배달족강역형세도』는 제1기 민족사관의 강역관

『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族疆域形勢圖)』 「제일 동이구종분구도(第一 東夷九種分區圖)」, 이원태(李源台, 1899-1964) 편, 김교헌(金敎獻, 1868~1923) 감수. 1918년경. 등사기 등사본. 1972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 인쇄.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의 강역 변천을 44도(圖)나 되는 방대한 ‘강역형세도’로 그려내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族疆域形勢圖)』 「제일 동이구종분구도(第一 東夷九種分區圖)」, 이원태(李源台, 1899-1964) 편, 김교헌(金敎獻, 1868~1923) 감수. 1918년경. 등사기 등사본. 1972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 인쇄.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의 강역 변천을 44도(圖)나 되는 방대한 ‘강역형세도’로 그려내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族疆域形勢圖)』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이원태(李源台, 1899-1964)가 100여 종의 역사서를 조사하고 고증하여 등사기(謄寫機)로 인쇄한 책이다. 『배달족강역형세도』는 만주와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들, 즉 청나라까지를 배달족(倍達族)의 국가로 보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의 강역 변천을 44도(圖)나 되는 방대한 ‘강역형세도’로 그려내고 있다.

즉 『흠정만주원류고』가 청나라가 고조선과 고구려를 배제하면서 동북삼성과 한반도에서 건국한 모든 나라를 광범위(廣範圍)하게 청족(淸族)의 한 갈래(民族)로 다룬 반면에, 이원태의 『배달족강역형세도』는 이를 뒤집어 청족(淸族)을 우리 민족의 한 갈래로 포함시킨 것이다.

이원태는 17세인 1916년 만주로 갔다고 한다. 당시 그는 독립운동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의 집을 왕래했고 김교헌의 집에서 기숙했는데, 김교헌의 역사인식에 크게 감화를 받았고,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그는 김교헌의 지도를 받으며 『배달족강역형세도』를 저술했고 19세이던 1918년에 귀국하였다.

이 책은 1923년에 간행되었다고 전하나 이 책에 간행기라든가 서발(序跋)이 없어 간행연도가 1923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책은 대종교 2대 교주였던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의 감수를 받아 내놓은 저술이고, 편자인 이원태가 1918년에 귀국한 것으로 보아, 그리고 이 책을 교재로 썼다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1920년 가을에 폐교한 것으로 보면, 이 책은 1918년을 전후로 하여 발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책을 영인하고 한문 및 한글 번역본을 합본한 재판본이 1972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인쇄하고 이동준이 발행하였다.

필자는 본 연재의 첫 회 「사색을 시작하며」에서 “김교헌이 1909년 1월 15일(음력)에 나철(羅喆, 1863~1916)이 중광(重光)한 대종교(大倧敎)에 1910년에 입교하여 2대 대종사(大宗師)가 되어 민족주의적 대종교 경전 『신단실기(神檀實記)』 (1914년)와 『신단민사(神檀民史)』 (1923년)를 편찬한 (중략) 것은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하면서 체득한 우리의 민족정신과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한 시도였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 이 책 『배달족강역형세도』는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여러 관점 가운데서 민족주의적인 강역관을 발췌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책은 이원태가 편찬하였다고 해도 이 책은 곧 감수자(監修者) 김교헌의 관점인 것이다. 이는 곧 이 책의 강역관은 김교헌을 비롯한 제1기 민족사학자들의 강역관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현재의 대종교에서 황 모씨 계열의 황당사관론자들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인정할 경우에는 대종교 스스로가 쌓아온 역사와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

차. 맺음말

이원태의 『배달족강역형세도』는 북학자(北學者)들과 실학자(實學者)들의 연구성과를 참조하여, 김교헌이 감수한 우리 민족의 강역도(疆域圖)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역을 넘어서는 공상적 강역을 말한다면, 그것은 역사지리학자들과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을 멸시하고 부정하는 망동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와 본질을 왜곡하는 반민족 행위로 보아야 한다.

필자는 1980년 초에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에게, 중국과 우리나라의 동일한 지명 문제와 황 모씨 황당사관에 대하여 물어 본 적이 있다. 안호상 박사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원래는 우리 말로 있던 옛 지명을, 후일에 한자 지명으로 변경하면서, 뜻이 유사한 중국 지명이나 글자를 빌려왔다”라 하였고, 황 모씨의 황당사관에 대해서는 “그걸 믿어요?”라고 반문(反問)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증상이 심각해서요”하고 말을 흐렸다. 당시 안호상 박사는 황 모씨의 황당사관은 대종교의 민족사관을 부수기 위한 유사(類似) 민족사관으로 인식하였다.

종교 교리의 포교는 ‘전도(傳道)’ 또는 ‘선교(宣敎)’라 한다. 사상의 전달은 ‘선전(宣傳)’이라한다. 병균의 전파는 ‘감염(感染)’이라 한다. 병균도 없는 정신의 몽상(夢想)은 열등감을 매개로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민족적인 정신 황폐를 감염시킨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조선왕조의 사대주의와 패배주의가 불러온 열등감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족(蛇足)

지난 19회 연재의 맺음말에서 필자는 “결국 황 모 씨파 부류는 「진흥왕순수비」라든가 「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등등의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금석문을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곧 이것은 우리 민족의 거의 모든 문물(文物)‥‥‥, 즉 신라라든가 백제, 고려와 조선의 사적(史蹟)과 영토(領土)를 부정하는 몽상이자 망상이다. 이는 결국 우리 민족을 공중에 띄워 버리는 망동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신라와 백제 가야의 역사가 중국 대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우리의 영토를 부정하면, 그 자리에 일본의 임나(任那)가 들어오게 된다. 가당키나 한 말인가?”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언급에 대한 반응이 필자가 들어가 있는 카톡의 한 대화방에서 아래와 같이 나왔다.

C 회장 : 김부식외 13인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지명이 중원대륙에 있습니다. 2008년 권철현 국회의원이 상고사학회회원들과 직접 답사를 했고 정부가 8억을 지원하여 ‥‥‥ (중략) ‥‥‥ 한단고기는 전 명지대교수 임승국교수가 번역했고 전 성균관대대학원장 이기동교수가 공개적으로 극찬한 책이므로 말을 삼가하기 바랍니다. 물론 사마천의 사기에도 공자가어에 위반되는 내용이 있으므로 100% 진리만 기록된 역사책이 있겠습니까?
2022년 6월14일 전 OOOO협의회장. 한국OO학회장 OOO 올림

C 회장 : 유학자 이기동 교수 "『환단고기』는 결코 위서가 아닙니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303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기동 교수는 ‥‥‥ (중략) ‥‥‥ 「환단고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계기로 「환단고기』를 읽어보고나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결코 위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환단고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필자 : 선생께서는 제2기 민족사학자로 활동한 문정창 박시인 박창암 안동준 안호상 윤치도 이유립 임승국 최인 황상기 등등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가까이 교유한 적이 있어, 그들의 대립과 견해차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립에게서는 커발한을 직접 받고 제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강화도에서도 본적이 있죠. 안호상 박사의 명륜동 집과 임승국의 누상동 집, 최인의 안양 거처를 찾아 본 적도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만들어지고 확산된 경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폐혜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C 회장 : 안호상, 임승국. 박창암 장군과 86년 이후 활동했고 안호상 박창암 고준환 최민자 최용기 김정권회장으로 국사찾기협의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단고기 내용중 공자가어, 사마천의 사기 등 25사 및 삼국사기와 일치하는 부분만 인용하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책을 비난하지 마십시요! 한반도에 국한한 역사관은 친일파 매국노들이 만든 사관입니다.

필자 : 제게는 충분한 자료가 있습니다.
초기 국사찾기운동에 대한 실제 자료를 천천히 공개하려 합니다.
(별 다른 격론이 오고 간것도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제3자가 등장한다.)

제3자 : 여기는 OOOO방이니 다른 역사방에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필자 : 옙.

필자 : 좋은 날입니다.
여러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앞으로 이 방에는 “국혼의 재발견”은 올리지 않고 통일 지향적인 연재물 “문화 제주, 문화 Korea”만을 올리겠습니다.
40년의 침묵을 깨고 연재하는 “국혼의 재발견”은 인터넷 ‘통일뉴스’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정국사교과서의 국정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 편찬 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 청구의 소』 소장, 1978년. 석판 유인물. [사진 제공 - 이양재]
『국정국사교과서의 국정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 편찬 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 청구의 소』 소장, 1978년. 석판 유인물. [사진 제공 - 이양재]

왜? C 회장은 카톡방에서 “안호상, 임승국. 박창암 장군과 86년 이후 활동했고”라고 10년이나 틀린 말을 했을까? ‘국사찾기협의회’는 1976년도에 낙원동 낙원빌딩 5층 사무실에서 조직되었고, ‘국사찾기협의회’가 시도한 ‘국정교과서 사용금지 가처분신청’은 1978년도에 있었다. 정확히 필자는 1978년에 안호상 임승국 김득황이 제기한 국사찾기 소송서류를 들고 용태용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들었고, 박창암으로부터 『자유』지를 받았으며, 필자와 박창암은 1992년도까지도 간헐적으로 만났다. 필자는 C 회장이 1986년 이후에 ‘국사찾기협의회’ 활동을 했다는 말은 사실과 어긋난 것으로 본다.

C 회장이 언급한 “한반도에 국한한 역사관은 친일파 매국노들이 만든 사관”이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역사 터전을 중국으로 옮겨 우리 민족의 실체를 왜곡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흐리는 것은 우리 민족을 중국인으로 만들려는 당시(1970~80년대) 중국(대만)의 정치 공작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XX”라는 심한 말까지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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