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식 / (사)국민통합비전 이사장(법학박사, 통일헌법학)

 2줄 왼쪽 세 번째부터 신익희·신규식·이시영·이동휘·이승만·손정도·이동녕·남형우·안창호 등 주요인사들. 맨바닥인 1줄 세 번째가 김구(1921.1.1.백범의 위치 실증). [사진출처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줄 왼쪽 세 번째부터 신익희·신규식·이시영·이동휘·이승만·손정도·이동녕·남형우·안창호 등 주요인사들. 맨바닥인 1줄 세 번째가 김구(1921.1.1.백범의 위치 실증). [사진출처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대한민국임시정부 태동의 뿌리인 ‘3·1운동’의 전개 사실이 [AP], [뉴욕타임즈] 등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자 북경대 진독수 교수는 “이번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명료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신념 하의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세계 시민혁명사상의 신기원을 열었다”며 중국인들에게 항일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했고,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이 된 ‘5·4운동’을 촉발시켜 이끌었다. ‘3·1운동’은 유혈혁명이었던 프랑스시민혁명과 차원을 달리하는 비폭력시민혁명의 새 장을 연 것이다.

‘3·1혁명’은 1919년 4월 5일 인도에서 전개된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진리수호) 운동을 비롯한 비폭력 독립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체류 중에 3·1운동 소식을 들은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곧바로 귀국해 ‘3·1운동식 비폭력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3·1혁명 당시 큰 감명을 받은바 있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는 10년 지난 뒤인 1929년 3월 28일 ‘동방의 등불’이라는 3·1혁명 회고시를 우리민족 앞에 헌사(1929.4.2.동아일보 게재)한 바 있다.

<The Lamp of the East>                         <동방의 등불>

In the golden age of Asia                         아시아의 황금기에
Korea was one of its lamp bearers        한국은 이의 등불지기 중 하나였다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그 램프는 다시 빛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동방의 빛을 위해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초헌법(1919.4.11.임시헌장)에는 우리민족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을 채택하였음은 물론 만민평등,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참정권 등 기본권 보장 조항과 병역의무, 납세의무 조항 등이 명문화되었다. 국내외 학계에서 현대헌법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는 바이마르 헌법(1919.8.11.)보다 5개월 앞서 공포된 ‘임정헌법’이야 말로 명실상부한 세계 현대헌법의 원조인 셈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현대헌법의 원조인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이처럼 아시아는 물론 중동지역의 민족운동과 세계 현대헌법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등 세계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3·1혁명과 그 결정체인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임에도 초기 실상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창조·개조 양파로 대립하던 ‘임정’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어 파면(1925.3.23.)에 이르면서 극도의 분열상은 더욱 확산되었다.

그때가 세계대공황으로 국내에서도 소작쟁의, 노동쟁의가 일어나던 시기와 맞물려 해내외 동포들이 보내오던 독립자금도 급감해 노동력이 없는 임정 원로들은 하루 한 끼 정도로 겨우 연명하며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무렵 백범은 임정의 실세라 할 수 없는 변방의 인물이었다. 임정 탄생 3년차이던 1921.1.1. <사진>에서 자기보다 연하의 국무위원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앞줄의 맨바닥에 있는 백범의 모습은 당시 임정에서의 그의 위치를 보여 준다.

백범이 ‘임정’에서 이승만, 안창호 등과 함께 처음부터 감투를 쓴 것처럼 언급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학식이 짧은 나는 임시정부 문지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며 ‘임정 요인’ 그룹에 참여하는 것을 한사코 고사하다 안창호 내무총장(행자부장관 격)의 강권으로 경무국장(경찰청장 격)을 맡아 왔던 백범은 임정이 난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원로들에 의해 임정의 중심으로 소환된다.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위원과 국무령(의원내각제 수상격)을 맡게 된(1926~1927) 백범은 미주 지역은 물론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교포들에게까지 ‘편지보내기 정책’을 펴며 모인 자금으로 ‘일왕’을 제거하고자 이봉창 의거(1931.1.8.)를 기획해 결행토록 했다.

이봉창 의거가 실패하자 백범은 3개월여 후 윤봉길 의거(4.29)를 통해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이던 시라카와(白川義則),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등을 즉사시키며 세계적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이 두 사건은 임정과 백범을 전 세계로 알리는 일대전기가 되어 ‘임정’의 위상이 한껏 높아졌고 국내외에서 독립성금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윤봉길 의거 성공 후 임정으로부터 군권을 총괄하는 군무장까지 겸직(1932)하게 된 백범은 각개약진식의 항일 독립군들을 임정 산하 광복군으로 조직화해 국가의 핵심 저력인 국군의 초석을 다졌다. 윤봉길 의거 성공에 고무된 당시 중국의 실세 장개석 제안으로 이뤄진 요담(1933.5.10.)에서 백범은 중국이 세운 낙양군관학교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국광복군특별반(한광반)’ 설치를 확약받아 독립군을 조직적으로 육성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통합의 리더십으로 임정을 세계가 주목하도록 한 백범

미미한 한직을 자원했던 백범을 이동령·이시형 등 원로들이 임정의 중심으로 불러낸 것은 그의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을 주목한 결과였다.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과의 관계가 ‘백범리더십’의 대표적인 경우다.

백범은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파면되어 정치적 낭인으로 전락해 있던 우남(이승만 대통령 호)을 국제연맹 파견 전권대사로 임명(1932.11.10.)토록 했다. 백범 자신보다 여러모로 비교우위에 있던 경쟁자인 우남이 국내외 정치에서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통합적 리더십에 기초한 것이었다.

백범은 항일독립의 성취를 위해서는 임정의 터전인 중국은 물론 세계역사를 새롭게 주도해 가고 있는 미국과의 유대 강화가 절심함에 주목했다. 우남은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재학시절 자신을 총애한 스승이었던 윌슨(T.W.Wilson) 총장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1913~1921)하던 시기 말엽에 임정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1919.4.11.)했고, 실제로 우남의 대외적인 역량과 외교력은 임정의 큰 자산이기도 했다. 하여 독선적 노선 경주로 임시의정원에서 파면되기는 했으나 우남의 대외적인 탁월한 역량을 백범은 높이 샀고, 우남을 통해 미국 정계는 물론 군부와 연계점을 찾는 공익을 취하고자 했다.

후일 UN사령관이 되는 맥아더(D.MacArthur,1880.1.26.~1964.4.5.)와는 령관 장교시절부터 5년 연상인 우남과 절친한 사이였다. 우남과 맥아더가 의형제와 다름없는 관계였음은 해방 후 귀국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우남을 위해 맥아더가 전용비행기(일본점령군 총사령관 전용기)를 제공(1945.10.16.)한 사실이 실증한다.

백범은 임정내 유학파 측근들인 김규식과 조소항 등을 통해 우남이 대미외교에서 긴요한 인물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하여 임정 주석에 선출(1940.10.)된 백범은 1941.6.4. 우남을 주미 외교위원장(주미대사)으로 임명한 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임정 승인’을 요망하는 공문을 전달하도록 했다.

백범의 전적인 신임을 기반으로 우남은 미국의 정가는 물론 유럽까지 오가며 세계 언론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하는 등 광폭적 행보를 통해 해방 전후 우월적 정치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남은 백범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임을 수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왼쪽부터 김구 주석, 지청천 장군, 이범석 장군, 도노반 OSS사령관. 1945.8.7. 중국 섬서성 서안. [사진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왼쪽부터 김구 주석, 지청천 장군, 이범석 장군, 도노반 OSS사령관. 1945.8.7. 중국 섬서성 서안. [사진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CIA의 전신인 미군 OSS부대를 미국통인 이승만 박사가 임정에 연계해 준 것이다. 『백범일지』에서는 물론 장준하의 『돌베개』나 김준엽의 『장정』에서도 확인되듯 백범은 미군 OSS부대 도노반(William.J.Donovan) 사령관과 합의 하에 한국광복군 청년들을 OSS 대원으로 훈련시켰다.

한미연합군(광복군 과 미군 OSS 요원 연합군) 시대를 연 백범

3개월여의 훈련을 마친 광복군 및 미군 OSS 부대원들로 조직된 ‘한반도 진공작전(1945.8.10.)’ 개시를 위한 ‘한·미 합동훈련’ 상황 최종점검차 중국 서안의 훈련장에 도착한 김구 주석이 도노반 사령관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임정과 미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함축하여 나타내준다.

‘한미연합군(광복군 OSS 대원들과 미군 OSS 요원 연합군)’은 한반도 출격 직전에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져 애석하게도 현실화 되지 못했다. 그러나 UN군을 이끌던 미국이 자국 교관들을 통해 광복군을 3개월여 기간 동안이나 훈련시켜 연합작전을 편 사실은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이 얼마든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승국이 될 수 있다는 논거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윤봉길 의거 이후부터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백범과 호형호제하며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 등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임정의 권익을 대변해 주었던 장개석이 2차 대전 말엽에 국내외적 위상이 실추되지 않았더라면 광복군은 연합군의 지위를 얻고 임정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은 전승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국제법 논리의 재편은 2차 대전 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연합군(승전국):전범국(패전국)’으로 근본적 재정립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전히 유효한 국제법상 민족 자산이다.

이처럼 향후 한일관계를 자연법과 국제법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국가적 자산은 대다수 임정 요인들이 우남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때 백범이 발휘한 우남에 대한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이 없었으면 형성될 수 없었다.

우남은 이러한 백범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한 노력을 해방 직후에도 한바 있다. 우남은 ‘맥아더 전용기’로 환국하기 직전, 일본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를 통해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을 미리 소개받았다.

백범이 27년 만에 환국하던 날(1945.11.23.), 우남은 미리 ‘경교장(임정 공관 및 백범의 숙소)’으로 가 있다가 백범을 맞았고, 다음 날 백범을 안내하여 하지 장군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 장군의 통역이 따로 있었지만 백범과 하지 장군 간 첫 대면 자리의 통역은 자연스럽게 우남이 맡았다. 이날 우남은 국내외 기자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주석 김구 씨는 우리 독립을 위해 영웅적 투쟁을 해왔습니다. 모두 믿고 지도자로 추대하여도 넉넉한 우리의 참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자신에게 국내외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백범에 대한 고마움을 피력하기도 했다.

후원금은 물론 장개석이 준 ‘건국자금’을 우남에게 양보한 백범

1945.12.3. 백범이 환국한 후 최초로 경교장(백범의 집무실)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도 우남은 주미외교위원장(주미임시정부대사) 직책으로 참석하였다. 이날 백범과 우남의 관계는 주석(국가대표)과 대사 관계였으나 무학(無學)의 한계를 뛰어넘는 통찰력으로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해 온 백범은 우남이 새로운 중심축이 되어 정부를 구성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해 줄 것을 기대했다. ‘미군정청’은 물론 미국 및 ‘UN’과의 역학관계를 역동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우남의 역량을 중시한 것이다.

해방 직후 백범이 ‘섬김의 리더십’에 기반해 우남을 대했음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의 인간본성을 간파하게 하는 돈 앞에서도 명료하게 확인된다. 환국 후 첫해인 1946.5.19. 상공회의소가 백범에게 정치자금으로 300만 원을 전하자 수령 자체를 거절하며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갖다 드리라”했던 것이다.

이에 강익하 상공회의소 부회장이 이승만 박사에게는 500만 원을 이미 전달하였음을 알리며, 상공회의소가 공식적으로 드리는 정치자금이니 수령해 줄 것을 재차 강권했으나 백범은 경교장 식솔들이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박사에게 드리라” 했고, 우남은 이를 수령했다(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74쪽).

남한 단독선거 찬반 여부로 결별하기 전까지 백범은 우남이 미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남북한 통일정부 건설의 중추적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범이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했음은 해방 후 환국을 하게 된 백범에게 환송연을 베풀며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백범에게 준 전별금의 반(10만 달러)을 우남에게 전달하게 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애초 장 총통이 백범에게 건넨 전별금은 20만 달러였으나 ‘주중 임정대표단’의 환국경비로 사용할 10만 달러만 남기고 10만 달러는 장 총통으로 하여금 미국은행에 예치토록 했었다.

이 10만 달러를 1947년에 주한 중국대사관 유어만(劉馭萬) 총영사가 미국은행에서 인출하여 백범에게 전달하고자 연락을 하자 이승만 박사에게 그 돈을 전달하라 한 뒤 우남에게도 전화를 해 받아쓰라고 했다. 이에 우남은 유어만 총영사를 찾아갔으나 “죄송하지만 이 돈은 우리 총통(장개석)께서 백범 선생에게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백범 선생에게 전달할 의무밖에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하며 거절하였다.

경교장의 난방비가 부족하여 겨울에는 혜화동 독지가(이길호)의 집에서 잠을 자고 낮에만 경교장에 머물러야 했던 백범의 실상을 애통하게 생각해 온 최측근 엄항섭(한독당 선전부장)과 상해 임정 때부터 백범에게 독립자금과 거마비를 제공해 온 신창균(한독당 재정부장) 등은 장개석 총통이 준 전별금을 우남에게 넘기지 말 것을 백범에게 간곡히 청했다. 우남에게는 다른 정치자금들이 몰리고 있음도 한 이유로 들었다.

광복 후 환국한 임정 요인들은 오랜 항일독립운동에 가산을 바쳤거나 국내 생활 근거지가 없게 되어 숙식이 해결되는 한미호텔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으나 숙식비가 태부족이었다. 측근들의 호소에 백범은 장개석 총통이 보내온 돈을 한미호텔에 임시로 기거하고 있던 임정요인들의 숙식비와 경교장 식대로 사용토록 하였다. 여분의 돈은 임정 주석 전용차량 구입비 및 『백범일지』 인쇄비, 김좌진 장군의 미망인과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미망인 등 생활고를 겪고 있던 항일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의 생활비로 일정 기간 나눠서 보내 주던 중에 소진 되었다.(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75〜77쪽).

해방 후에도 「존중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우남을 조력한 백범

이승만 박사 안내로 이뤄진 김구 주석과 하지 장군 요담(1945.11.24.).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이승만 박사 안내로 이뤄진 김구 주석과 하지 장군 요담(1945.11.24.).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1948.5.10. 남한단독정부(단정) 출범을 위한 ‘제헌의회선거’를 앞두고 우남과 백범이 정치적 견해차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기 전까지 백범의 우남에 대한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은 적극적으로 발휘되었다. ‘단정’ 출범을 막기 위해 백범은 경향 각지를 순방하며 “남북한 단독 선거는 민족분단을 고착화시킬 뿐만 아니라,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 대리전적 성격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라며 피를 토하듯 호소했다. 그러나 단정 세력의 수뇌였던 우남에 대한 인신공격은 하지 않았다.

백범은 자신만의 노력으로는 단정 출범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중심에 선 우남이 ‘국리민복’을 강구해 갈 수 있도록 ‘부작위적 차원의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조력했다. 임정 치하에서 ‘헌법의 적’으로 간주되어 탄핵 파면된 우남의 국내외적 실책들을 백범이 전국 순회 연설 중에 특유의 사자후로 포효하며 지적했다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생은 불가능했다.

‘백범식 리더십’은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도모할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망국적 진영논리를 앞세워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동원하면서까지 망가뜨리는 대한민국 정치권의 행태와 근원적으로 달랐다. ‘백범식 리더십’은 ‘살리는 리더십’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의 리더십’이다.

임정에 활력을 불어넣은 백범의 ‘좌우통합적 리더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현 경찰청장) 재직 당시부터 이동휘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결집에 대해 공개 경고를 한바 있던 백범은 사회주의 계열인 이운환의 저격(1938.5, 당시 63세)까지 당한 바 있다. 현장에서 함께 피격된 현익철은 절명하였고 백범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몸에 박힌 3개의 탄환을 제거 과정의 위험 때문에 빼내지 못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겨울이면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총알들이 박힌 채 백범은 여생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뼈아픈 애환을 갖게 된 백범 입장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을 임시정부나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용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항일전선에서 민족역량 강화라는 ‘공의’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내려놓고 ‘좌로도 우로도 치우침이 없는’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주석으로서 임시정부를 이끄는 과정에서 백범은 김두봉•김원봉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며 ‘임정’과 광복군 요직을 부여해 명실상부한 ‘통합정부’를 구성하였다.

백범의 이러한 ‘좌우통합적 리더십’은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중이던 중국의 양측 지도부 모두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백범과 장개석의 의기투합으로 국민당 측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의 주은래는 한국광복군 발대식에 자신의 이름으로 축하를 해 주는 등 백범을 성원했다.

백범은 김원봉이 골수 사회주의자임을 알면서도 광복군 1지대장으로 기용한 결과 김원봉은 자연스럽게 중국 공산당과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김원봉이 졸업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는 손문의 유지에 따라 설립되어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당시 명성을 날리던 주은래 교관이 김원봉을 총애했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김원봉을 위시한 ‘임정’내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백범의 ‘통합적 리더십’을 전해 들었던 주은래와 모택동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임정을 장개석 휘하로 보지 않고 백범과 함께 존대한 것이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자세는 해방 직후에도 여실히 확인된다. 환국을 앞둔 백범 일행을 위해 장개석 총통의 환송연이 예정(11.4.)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주은래 등 공산당 수뇌부도 별도의 환송연(9.2.)을 열어준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백범 일행 환송식’은 패망한 일본군들이 떠난 중국 대륙의 장래를 놓고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치열한 물밑협상 기간 중에 거행(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42쪽)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김일성 위원장 면전에서 소련군 정치고문을 면박한 백범

만약 백범이 편향된 리더십으로 임정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더라면 상해~중경에 이르는 임정 여정에서 ‘팔로군(중국 공산군)’으로부터 타격 대상이 되어 임정과 산하의 독립운동가들은 더 심각한 고초를 겪었을 수 있다. 백범이 지향한 ‘좌우 통합적 리더십’은 남북으로 분단 상황에서도 발현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48.4.에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이다. 이 행사는 남북한 단일 정부수립이 초읽기에 들어가던 시점에서 조국의 분단을 막아 보겠다며 백범이 김규식 박사와 함께 먼저 북측에 제의해서 이뤄졌다.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빼앗긴 자신들의 식민지 등을 되찾을 목적으로 2차대전 말엽 스탈린은 뒤늦게 일본에 선전포고(1945.8.8. 모스크바 시간/일본외무성, 일본외교백년소사, 238쪽)를 하고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었고 히로이토(裕仁) 일왕의 항복 선언 전에 북한 전역을 점령했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는 소련 점령군 군사고문들은 김일성을 조종하여 ‘남북연석회의’를 북한에 세워질 소련 위성정부 수립 선전용 군중집회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를 간파한 백범은 김일성의 안내를 받아 입장한 뒤 ‘남북한 분단 정부 수립은 민족적 불행’을 초래할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마친 뒤 바로 퇴장해 버렸다.

1948년 4월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맨 오른쪽 두 번째부터 김구, 김두봉, 김일성, 홍명희. [사진출처 - 청암사진연구소]
맨 오른쪽 두 번째부터 김구, 김두봉, 김일성, 홍명희. [사진출처 - 청암사진연구소]

남북연석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김일성을 놔두고 퇴장하는 백범의 모습에 박헌영·조소앙 등 모란봉극장 안을 가득 메웠던 남북한의 지도급 인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김두봉을 사이에 두고 백범과 나란히 주석단에 앉아 있던 김일성 또한 황망한 모습으로 백범을 바라보았다.

따라 나와 만류하던 김두봉에게 “나는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왔지 이런 정치행사에 참석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며 김일성과 요담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따로 마련할 것을 요구한 뒤 백범은 총총히 숙소로 돌아왔다. 이 실화는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가 김일성에게 굽신거리며 이용당했다”는 세간의 낭설은 백범을 음해하려는 중상모략에 불과함을 실증한다(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136쪽 및 백범을 수행한 신창균 한독당 상임위원 증언).

백범이 남북연석회의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김두봉의 권면에 응하여 자신의 집무실(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실)로 백범을 초청해 ‘양김 회담’을 갖기로 했다. 회담장에 도착한 백범은 평양의 소련 점령군들은 물론 모스크바에까지 알려지는 일화를 남긴다.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던 소련군 정치고문이 ‘양김회담’에 배석하려 하자 “민족문제를 논의하고자 하니 썩 나가라”고 호통을 쳐 내보낸 것이다. 당시 북한 통치의 전권을 쥐고 있던 소련군부의 결단에 따라서는 평양에 억류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보인 백범의 행보여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평양 억류를 막아 준 백범의 ‘존중과 통합의 리더십’

김일성과 둘만의 자리에서 백범은 다음의 내용을 제안했다. 평양에 도착해 있으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김규식과 북측의 김두봉을 포함한 ‘4김 회담’을 통해 당면한 민족적 현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열린 김구·김일성·김규식·김두봉 간의 ‘4김 회담(4.30.)’을 통해 당면한 민족문제에 대한 해법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반도 내에서 미·소 양군 철수, 전국 총선거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남한의 단정 반대’ 등이 공동성명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때 백범은 한반도 내에서 미·소 양군 철수 후 치안은 UN군을 통해 확보하자는 제안과 더불어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이 자신과 함께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도 했다. 백범에게는 일상화되어 있던 ‘존중과 섬김의 리더십’의 발현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고당(조만식의 호) 선생 건은 소련 군정의 허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며 난색을 표했다.

오히려 김일성과 소련 군부는 백범과 약혼까지 했었으나 혼인에 이르지는 못했던 안신호(안창호의 여동생)를 백범의 안내원으로 배치하여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북한에 남도록 넌지시 유도하였다(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162~163쪽 및 당시 백범을 수행한 신창균 한독당 상임위원 증언).

심지어 일단의 북한 인사들은 김일성에게 백범을 강제로 북한에 잔류시키도록 강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정 시절 백범의 아내(최준례) 묘비석 비문을 써줬을 정도로 각별했던 김두봉과 백범이 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중용한바 있는 김원봉 등이 김일성을 설득해 백범이 안전하게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특히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부통령 격)으로 북한헌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던 김두봉은 자기 집으로 백범과 김규식을 초대하여 만찬을 대접할 정도로 극진히 예우했다. 임정 시절 백범이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동포간의 화합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고 설파하며 전개한 ‘존중과 통합의 리더십’이 백범의 북한 억류를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임정 주석으로서 예우를 받으며 귀경하도록 한 것이다.

백범은 효자였다. 임종 직전의 아버지를 연명하게 해보겠다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생피를 마시게 해드렸다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엄청난 통증으로 고생을 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 했던가. 백범의 부친 또한 소천을 앞둔 노모를 위해 단지(斷指)를 해 생피를 드시게 하여 3일을 연명하였는데 그 3일째 되던 날 백범이 태어났다(1876.8.29.). 백범의 남다른 효심은 국가원수인 국무령으로 임정을 이끌던 50세가 넘은 무렵까지도 모친(곽낙원)이 드신 회초리를 순순히 맞음으로써 어머니 앞에 극진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모친의 마음과 뜻을 살펴드린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백범일지 원전 309쪽: 대한매일신보사, 백범김구전집1, 533쪽).

존중과 통합의 리더십의 뿌리가 ‘효행’에 있음을 실증한 백범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동서독으로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분열상이 극도에 달했던 독일이 반세기도 안 되어 통일강국이 될 수 있었던 최고의 비결은 스멘트(R.Smend)가 “우리 모두 ‘작은예수’가 되자”라며 주창한 ‘존중과 섬김운동’에 범국민적 호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열매인 국민통합이 독일의 통일강국 시대를 연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같은 103세의 연보를 가진 김형석 교수에 의하면 ‘작은 예수정신’은 ‘이웃을 향한 존중과 사랑’으로 응축된다. ‘이웃을 향한 존중과 사랑’, 그 첫 점이 ‘효행’에 있음을 백범은 삶으로 웅변하고 있다.

나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이 ‘이웃’의 포괄적 개념이라면, ‘부모’는 생애 최초의 이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부모에 대한 ‘효행’은 백범과 같은 ‘이타적 인성’ 함양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가족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이타적 인성’은 곧 나라와 민족성원은 물론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 차원의 ‘인간의 존엄성 및 행복 존중(헌법 제10조)’의 성품과 가치관을 발현시켜 ‘국민통합’의 원천이 된다.

이 국민통합은 국리민복을 불러 올 ‘통일의 절대적 선행조건’이다. 백범은 이러한 신념에서 자신의 인생역정에 기초한 ‘효행=존중과 섬김=소통=국민통합=국민행복=통일강국=인류행복·세계평화’라는 자연법원리를 ‘삼균주의 헌법철학’에 입각해 독립될 모국의 ‘건국청사진(건국강령)’ 속에 담았다.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인정전 앞 1947.7.15.). [사진출처 -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인정전 앞 1947.7.15.). [사진출처 -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

이상과 같은 ‘백범정신(존중과 섬김의 통합정신)’의 발전적 계승 여부에 국가흥망과 국민행복이 달려있다. 극한 분열로 붕괴 위기에 처해 있던 ‘임정’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존재로 소생시켰음은 물론, 한‧중, 한‧미 관계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어 대한민국을 2차 대전 연합국 및 전승국 위치에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백범의 ‘통합적 리더십’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형태를 달리해 위협 요인으로 잔존하고 있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푸틴의 전쟁범죄로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참상은 ‘국민통합’의 긴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망국적 진영논리’에 입각한 ‘묻지마식’ 지지와 반대로 국민분열이 가속화될 경우 자멸의 길로 치달을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할 때다. 백범의 인생역정에서 확증된 ‘존중과 섬김=소통=국민통합=국민행복=통일강국’ 이라는 ‘통합주의 원리’는 통일독일의 산역사이기도 하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 고국의 독립을 위해 백범이 정치적 경쟁자인 우남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 주목했듯, 새 정부는 물론 국민들도 ‘존중과 섬김의 정신’으로 거듭나도록 ‘통합적 인성교육’에 국력과 국민정신을 집약해야 한다. 다른 한편, 국가흥망이 달린 ‘국민통합’을 정치공학적 구호로 악용하는 것은 공소시효가 없는 자연법적 범죄임 또한 직시해야 한다.

국가흥망 달린 ‘국민통합’, 정치적 악용은 공소시효 없는 역사적 범죄

이러한 관점에 볼 때 정치권은 물론 윤석열 당선자도 ‘국민통합’ 이라는 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최고 헌법해석기관인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을 침훼한 헌법의 적’으로 간주해 탄핵 파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을 통해 중형을 선고 받은바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해서 행한 윤 당선자의 언행들은 국론분열을 일으키며 ‘국민분열’ 요인이 되고 있다. 윤 당선자의 박 전 대통령 예방은 ‘포용’ 차원 이라면 모를까 ‘국민통합’과 결부시킴은 자가당착적 논리모순이다. ‘포용’과 달리 ‘국민통합’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합력하여 더 큰 ‘선(善)’을 추구”하되 지배적 다수 국민의 동의와 지지에 기반 한 ‘헌법적합성’이라는 선행요건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헌법원리’에 입각 할 때,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유죄판결의 근거가 된 국민적 고통들에 대해 진정어린 대국민 사죄를 통해 ‘국민적 사랑’을 받게 된다면 ‘국민통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국민정서가 조성되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통합운동’에 동참하며 국민적 존경을 받는 ‘제3기 인생’을 구가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 개인에게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훨씬 유익될 것이다.

대선 시즌에 이어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민통합’이 정치적 야욕 하에 오용되고 있다. 전범국 독일이 유럽통합의 중심국이 되어 통일강국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 국민통합에 이어 외적으로는 전쟁 피해국 및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어린 참회와 배상에 기반하고 있음을 우리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백범의 삶을 통해서 실증되는 ‘국민통합=국민행복=통일강국’ 이라는 자연법 원리는 통일독일과 독일헌법 철학적 대부라 할 수 있는 루돌프 스멘트가 『통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논증한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다. 백범과 스멘트에 의할 때 국민통합은 ‘국민행복’의 원천임과 동시에 ‘통일강국’의 선행조건이다.

정치적 야욕에 눈이 멀어 ‘보편적 국민의사(국민행복)’와 상반된 자가당착식 국민통합 궤변을 정치권이 남발하는 것은 ‘통일의 선행조건’으로 국가흥망이 달린 국민통합의 위력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자연법적 범죄’인 것이다. ‘자연법적 범죄’는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범하고 있는 집단학살(genocide)과 마찬 가지로 실정법적 공소시효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한 국민통합’ 성취 여부에 ‘국가흥망’과 ‘국민행복’이 달려 있다. 백범은 ‘국민통합을 통한 통일강국’을 결사적으로 추구하는 자신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여러 경로로 전해 들었다. 그때마다 백범은 “내가 만일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오겠는 까닭이다”라고 미리 기고해 놓은 자신의 유언(활천 230호,1946)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국가흥망이 걸린 ‘진정한 국민통합’, ‘경천애민(敬天愛民)’의 각심으로 죽음을 불사하며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삶을 영위하다 간 ‘백범의 삶’에 답이 있다. <끝>

 

* 이 글은 필자의 국민대학교 ‘한반도미래연구원’ 특강(22.4.21.)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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