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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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수렵민의 사고는 꿈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뛰어난 사냥꾼으로서 현실 세계의 원칙에 따라 ‘분할하고 비균질화하는’ 사고를 예리하게 작동시키며(거기서는 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수렵의 대상이며, 틀림없는 그의 적입니다) 숲을 이동해가는 그의 마음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시간감각이나 공간 양식이 끼어듭니다. 그때는 인간과 곰 사이에 동질적이며 대칭적인 관계가 발생합니다. 사냥꾼은 꿈의 예고를 믿고 있습니다. 꿈이 보여준 미래의 광경, 그곳은 시간계열이나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없는 세계입니다. 이 사냥꾼은 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무의식이 미리 보여준 ‘사물의 전체성으로서의 의미’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과의 협동작용으로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대칭성 인류학』에서

 

어떤 원주민에게 축구를 가르쳐줬더니 동점이 나올 때까지 하더란다. 헉! 우리는 승부가 나올 때까지 하지 않는가?

이런 원시적인 사고를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적 사고’라고 했다. 자신을 다른 사물, 생명체, 사람들과 대등하게 보는 사고다.

문명인은 반드시 서열을 가려야 한다. 그리고 인간을 삼라만상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온갖 과학 이론으로 포장하여.

나카자와 신이치는 원시인은 대칭적 사고를 하기에 ‘나 중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물의 전체성으로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현실 세계를 살아가기에 지혜롭다고 한다. 모든 현대의 문제는 나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가?

현대문명인은 ‘나’ 아닌 것들에게는 무자비하다.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짓밟아버려야 한다. 세상은 생지옥이 된다. ‘나’가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칭적 사고가 우리 안의 ‘야만성’을 다스리게 해 준다.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해왔기에 내면 깊은 곳에는 동물의 야만성이 있다. 이 야만성은 얼마나 무서운 폭력성을 지녔는가? ‘아우슈비츠’는 문명사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

동물은 ‘본능’의 통제를 받기에 야만성이 폭력적이지 않다. 배가 부르면 사자는 옆으로 지나가는 초식동물들에게 무심하다. 삶을 만끽한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배가 불러도,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차고 넘치는 돈을 갖고 있어도, 항상 탐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우리는 야만성을 한 개인의 문제로 보지 말아야 한다. 한 사회의 사고 구조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형성한다.

원시인들은 대칭적 사고를 함으로써 다른 인간, 다른 생명체, 삼라만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서로 존중하였다.

문명인은 대칭적 사고를 잃어버림으로써 야만이 너무나 쉽게 터져 나온다. 야만성이 한번 터져 나오면 걷잡을 수 없다. ‘묻지마 범행’이 일어나고 홧김에 살인을 저지른다. ‘악의 축’은 끝까지 박멸해야 한다.

문명인으로 사는 우리는 내면의 야만성을 다스리지 못해 항상 불안하다. 우울하다. 더구나 남을 이기지 못하면 도태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야만은 언제라도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내면은 더욱 더 중요하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인류가 쌓아온 모든 마음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단 무의식에는 온갖 인간정신의 원형들과 영혼이 있다.

대칭적 사고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이 모든 마음의 보물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평생 살아간다. 언제나 사막이다. 항상 목이 마르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디엔가 오아시스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답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런 현대인에게 조언한다. “신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

정지용 시인은 슬픈 ‘말’을 본다.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 《말》 부분

 

시인은 이 시대의 ‘원시인’일 것이다. 그에게는 사람편인 말에게 콩을 주며 주문을 왼다.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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