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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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 하나의 선행을 기억해 내고는 하느님께 고했다. 할머니는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 양파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진다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수호천사가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죄수들이 할머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구!” ​그녀가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리고 할머니는 불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한평생을 나쁜 짓만 일삼으며 산 할머니가 지옥에서 단 한 번만 잘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기독교에서는 ‘설령 평생 선한 삶을 살지 않았어도 죽기 직전​에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선행이 구원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적선(積善)’을 한다. 선을 쌓는 것이다.

원효 선사는 평생 지니고 살아갈 좌우명을 말해달라는 설총에게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라고 일갈했다.

선악(善惡)은 선명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선은 인간에게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배심원들을 향해 ‘여러분은 집으로 가고 나는 죽으러 가지만 누가 더 좋을 지는 신만이 안다’고 담담히 말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어떤 살인범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살인을 한다고 말한다.

선과 악이 선명하게 나눠지지 않는데, 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힘을 가질수록 그만큼 위험하다.

수많은 전쟁들이 선을 행한다는 명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기에 항상 적에게는 더없이 잔혹했다.

한 사회가 선행을 권장하면 선행이 많아진 만큼 악행도 커진다. 선과 악은 원래 한 몸이기 때문이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내면에 악이 쌓인다. 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어두운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뛰쳐나와 마구 날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좋은 예다.

참다운 선행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예수)’이고. ‘자신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것(석가)’이다.

이런 선행을 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다. 이런 경지는 ‘삶에 대한 깨달음’이 와야 가능할 것이다.

양파를 부여잡고 위로 오르려는 할머니에게 죄수들이 매달렸을 때, 할머니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면 그녀는 죄수들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할머니가 한평생을 심술궂게 살아간 것은 그녀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어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 속에는 신성(神性)이 있어, 한순간에 그 빛이 쏟아져 나와 자신과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가 있다.

그래서 구원은 오랜 선행이 아니라 깨달음의 찰나, 신성이 빛을 뿜을 때 오는 것이다. 인간에겐 선악을 나누는 ‘자아(ego)’가 있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선악을 넘어선 ‘참나(self)’가 있다. 참나에서 진정한 선이 나온다.

자아는 자신의 몸만큼 크다. 자신만 챙긴다. 그가 하는 선은 위선이다. 이런 ‘작은 나’를 넘어서 ‘큰 나(참나)’가 되어야 구원이 온다. ‘큰 나’는 우주만큼 커 삼라만상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지옥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자아’에 갇힌 인간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시인 보들레르는 그만의 방식으로 적선(積善)을 한다.

 

내가 카바레에 들어서려고 할 때, 한 거지가 자신의 모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잊을 수 없이 특별한 것이었다. 만일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사의 눈이 포도들을 익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선은 왕권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바로 나는 거지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나는 그의 한 눈을 갈겼다. 눈은 순식간에 공처럼 커졌다. 그의 두 이를 부러뜨리는 데 나는 내 손톱 하나를 부러뜨렸다.〔......〕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멍들게 하고, 내 이빨 네 개를 부러뜨렸다.〔......〕만족을 느끼면서 일어나 그에게 말하였다. “여보시오, 당신은 나와 평등한 인간이오! 부디 나에게 내 돈지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시오.”

                                                                   - 샤를 보들레르, 《가난뱅이를 때려눕히자!》 부분

 

모자를 내미는 거지에게 동전 대신에 주먹을 날린 시인. 화가 치민 거지도 주먹을 날리고...... . 두 사람의 ‘자아’는 산산이 깨져나갔다. 비로소 ‘인간’으로 동등해진 두 사람.

그들은 이제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눌 수가 있게 되었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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