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국에 왔다가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하면서 파안대소를 하던 생전의 박기식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4년 한국에 왔다가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하면서 파안대소를 하던 생전의 박기식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미국에 거주하던 통일원로 박기식 선생이 10일 오후 2시 30분(현지시간) 보스턴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3세

재미 인터넷 언론 [민족통신]은 고인에 대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히 잠드셨다”며 “고인은 오랫동안 투석 치료를 받아왔으나 1주일 전에 투석을 거부하고 하직을 준비하였다”고 10일 부고를 알렸다.

고인은 1929년 4월 12일 경북 안동 근처에 있는 군위군 우보면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했다.

특히, 고인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10년가량 언론담당으로 근무하다가 1972년 돌연 미국행을 선택했다.

고인은 2014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부 일을 “바꿔치우고”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내 인격 파는 짓은 그만하자. 나도 살길을 찾자”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후 통일운동에 몸담은 이유에 대해서도 “건강에 좋고 애국자가 되고 천당에 갈 수 있는 것이 통일운동”이라고 낙천성을 보인 바 있다.

고인은 미국에 이민 온 후, 1973년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과 관련해 임창영 전 유엔대사를 만나 ‘김대중 구출운동’에 참여한 것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몸담게 된 계기로 되었다.

고인은 미국에서 남북해외 인사들과 소통과 교류를 했으며, 특히 그의 미국 자택은 민주화운동 시기 미국을 들른 숱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때 그는 자택을 들른 이들 인사들 미국 활동의 안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고인은 중정 요원 시절 자신의 사찰대상이던 리영희, 송건호, 임헌영 등의 언론인들을 오히려 친구로 삼아 평생 동지로 지냈으며, 특히 초등학교 제자인 대북전문가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가 고인을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은 것은 유명하다.

고인은 미국에서 재미동포연합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 등 애국적 활동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역사의 순리대로 되겠지만 통일은 불가피하게 틀림없이 실현은 된다”면서 “나는 그걸 위해서 진력을 다 하다가 그저 살다가 끝나면 그것으로서 만족하는 것”이라고 ‘무욕’의 경지를 보인 바 있다.

[민족통신]은 “장례는 고인의 유언대로 간소하게 조문객 없이 집에서 목사님 집례로 치러졌으며 화장은 절차를 마치면 곧바로 진행된다”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성구 여사와 아들 어스틴 박 등이 있다.

 

고인 약력

1929년 4월 12일 경북 안동 출생
1956년 10월 22일, 당시 동료 교사 정성구 여사와 결혼
1972년 4월 19일 미국 이민
1972년 6월 보스턴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주

대구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졸업
대구농림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사범과 1년제 졸업
1947년부터 50년까지 교편생활 압량초등학교, 남산국민학교 근무,
서울신흥대학교(지금의 경희대학교) 정치과 졸업
대구효성학교에서 3년 교편생활
중앙정보부 근무
재미동포연합 고문

[자료-민족통신 발췌 및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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