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하의 서슬 퍼런 중정 요원에서 통일운동가로 전환하며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준 사람. 평양에서 열린 85세 생일축하연에서 유창한 실력으로 ‘박연폭포’와 ‘오 나의 태양이여(쏠레미어)’를 연거푸 불러 남과 북, 해외동포 모두에게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 중정 요원 시절 자신의 사찰대상이던 리영희, 송건호, 임헌영 등의 언론인들을 오히려 친구로 삼아 평생 동지로 지낸 사람. 대북전문가 박한식 박사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손꼽는 사람. 그가 바로 92년을 야성적으로 살아온 박기식 선생이다. 

수많은 수식어로도 부족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박 선생은 현재 노구의 몸으로 미주 통일운동을 이끄는 원로로서 변함없이 후진들의 커다란 버팀목이 되고 있다. 조국의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 등 애국적 활동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초인적 근검절약으로 살아온 그는 이민자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는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다. 

현재 일주일에 세 번을 투석하면서도 앉으나 서나 오직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에 내외분이 거주하는 메사추세츠주 보스턴 외곽에 있는 자택을 방문, 밀착 취재를 통해 1962년부터 시작된 중앙정보부에서의 활동과 체험담 그리고 1972년 이민형식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라 지금까지 지내 온 50여년의 발자취를 회고해 보았으며 가족들의 이야기는 물론 최근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도 들어보았다. 

아무쪼록 박 선생의 투철한 조국애와 통일지향적 삶이 독자들에게 자주정신과 애국심으로 고취되어 조국통일을 이끄는 추동력이 되리라 생각한다. 인터뷰는 박 선생의 보스턴 자택에서 최재영 <프레스아리랑> 공동대표가 진행했다. 본 인터뷰는 3회에 걸쳐 <프레스아리랑>과 함께 공동 게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주.  

 

▲ 보스턴 <Lovejoy Rd> 자택 정원에서 필자와 정담을 나누는 박기식 선생 내외. 

□ 최재영: 미국 이민은 몇 년도에 오셨습니까?  

■ 박기식: 1972년 4월 19일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이민을 왔지요. 형식상은 이민이었지만 사실상 망명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박정희 5.16정권이 들어선 초창기에 세운 중앙정보부에서 입사해서 10년을 일하다가 사직을 하고 다시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온 날이지요. 

그날은 대한항공 여객기가 처음으로 태평양 횡단을 한 첫 비행기였는데 그동안은 화물비행기만 운항했고 여객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지. 

그날 초저녁 5시 20분쯤 B707 제트항공기로 김포공항을 출발했는데 감개가 무량했지요. 도쿄, 하와이를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총 비행시간이 17시간에 달했는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태평양 상공 횡단 취항이다 보니 그날 보니까 VIP들이 꽤나 많이 탔더군요. 

평소 대한항공 객실과장이 나와 친했는데 당시 대한공론사가 운영하는 Korean Republic이라는 영자신문 기자 한 명이 대한항공에 스카우트 돼서 객실과장이 됐는데 “이번에 저도 미국을 가니까 박 선생님 저하고 같이 갑시다” 해서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그러다보니 내 이민 보따리들은 내 이름으로도 부치고 그 사람 이름으로도 부쳤어요. 

논스톱이 아니고 동경에서 스탑, 호놀룰루에서도 스탑, 그리고 마지막에 엘에이에 착륙했는데 비행기가 경유하는 곳마다 온통 잔치판이었지. 마지막에 엘에이 공항에 도착하니까 꽃목걸이 들고 동포들이 환영을 나왔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고요. 

▲ 박기식 선생의 전용 서재가 있는 <Railroad st> 아파트 입구에서 투석을 위한 병원 셔틀 차량을 기다리는 모습.

□  어떤 인연으로 지금까지 보스턴에 정착하게 되셨나요?

■ 내가 미국에 이민을 오기 전에 벌써 어머니와 여동생 4명이 이민을 와 있었어요. 내가 한국에서 살 때 평소 내 여동생들 공부하는 것과 학비 지원에 무척 신경을 tM다보니 그 동생들이 날 초청한 것이지요. 

이화여대 의과대 나와서 가장 먼저 엘에이로 이민 와서 메디컬 닥터로 있던 여동생이 나를 초청했는데 또 한 동생은 유타 주에서 수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이화여대 3학년에 다니다가 아이오와 주 듀북에서 미국인 신랑을 만나서 살고 있었고 또 하나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대구 매일신문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가 이민을 와서 여기 보스턴 외곽에 살고 있었어요. 

그 여동생은 대구 문화공보부에서 영어강좌 하다가 김수환 추기경이 소개해서 매일신문에 취업을 했는데 당시 진보적인 신문을 손꼽으라하면 서울의 경향신문과 대구의 매일신문 이 두 곳 뿐이었지. 

내가 엘에이 공항에 도착해서 보름정도 캘리포니아에 살다가 보스턴에 사는 여동생한테 와보니 메사추세츠 주가 아주 수준 높은 지역이더라고.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살 때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을 상대로 했던 사람이다 보니 왜, 그거 한국인들은 뭔가 양반들이 사는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자나요. 

내가 사는 이 부근에 필립스 아카데미가 있고 조금만 가면 하버드 대학교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내가 보스턴에서 정착하기로 결심을 한 거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스턴을 떠난 적이 없고 72년 6월부터 살았으니 지금까지 한 50여년 가까이 여기서만 줄곧 살고 있는 거네요.

▲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모친을 김포공항에서 배웅하는 박기식 선생과 모친. 
▲ 한국에서 가톨릭 신앙인이었던 박기식 선생 내외가 미국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반갑게 조우한 장면.

□ 보스턴에 정착해 가장 먼저 어떤 직업을 가지셨나요? 

■ 취업광고지를 보니 Custodian Guard라는 관리직 자리가 하나 나왔더라고요. 영어가 별로 필요 없는 직책이라고 해서 지원했더니 합격해서 1년을 일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공장문도 열어주고 끝나면 청소도 하고 문단속도 하는 노동일인데 그걸 1년 정도하고 그만뒀지요. 

그리고 North endover에 가서 Western electric이라는 전화회사에서 십 몇 년을 일했는데 그 회사가 지금의 AT & T가 됐다고 들었어요.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컴퓨터와 관계된 일도 했는데 내 나이 62세 정도 무렵 어느 날 일하다가 갑자기 심장발작이 일어나서 병원에 가니 일을 그만 둬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어서 퇴직을 했습니다. 

그동안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으니 연금을 탈 수 있어서 퇴직을 했고 직장생활은 그때부터 일절 안했어요. 그 후 건강관리를 잘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 2남 2녀를 둔 박기식 선생의 가족사진.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소문이 났다. 앞줄 좌측은 이미 고인이 된 모친.

□ 박 선생님의 학창시절, 교편생활, 군대생활 이야기와 중앙정보부에 들어가게 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 나는 1929년 4월 12일 경북 안동 근처에 있는 군위군 우보면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했어요. 아버지가 본 부인이 있고 나는 모친을 통해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여동생 4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일제치하 6년제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착실하게 다녔고 그 다음에 일제 때 5년제에서 4년제로 바뀐 대구농림학교에 입학을 해서 졸업했고 이어서 경북중학교 사범과 1년제를 졸업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니 곧바로 초등학교 정교사 자격증을 줘서 일선 학교로 배정 받았지요. 해방되면서 일본교사들이 다 떠나고 나니 빈자리가 많다보니 졸업만 하면 학교에 다 배치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1947년부터 교편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부임지가 압량초등학교였고 거기서 1년 정도 근무를 한 후에 1948년 늦게 대구 남산국민학교에 부임해서 6.25전쟁 발발할 때까지 근무를 했지요. 이때 미국의 박한식 교수가 대구남산학교 내 제자였어요. 

그리고 50년 7월말에 전쟁을 맞아 육군포병에 입대를 했고 포병학교 정훈요원으로 전방에서 근무하며 일등 중사까지 올라가서 복무를 하다가 52년 말경에 제대를 했지. 그리고 다시 남산학교로 복귀해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에 부산 해군본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의 소개로 54년 말경에서 문관생활(군무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신흥대학교(지금의 경희대학교)로 올라가서 정치과 3학년에 편입해서 다녔지요. 대구남산학교 교사하면서 야간에는 피곤을 무릎 쓰고 대구 청구대학 법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그 학력으로 편입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경희대를 졸업 못하고 대구로 내려왔다가 대구에 잘 아는 신부님이 효성학교에 교사 한자리가 비어있으니 교사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 와서 대구효성학교에서 3년 정도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그 학교는 대구 가톨릭 교구 재단이고 여학교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친구가 대구시청에 일할 자리가 있다고 해서 대구시청 사회과에서 잠시 일을 하기도 했고요. 

대구시청에 들어갈 당시는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4.19혁명으로 시청을 그만두고 얼마 후 5.16이 있어났는데 마침 대구에서 포병동지들이 박정희 5.16에 가담을 했는데 그 중에 이낙선 소령(5.16 주체), 김계일(김계원 중정부장 동생) 등이 나와 친분이 있던 친구들인데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해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시험을 보라고 권유하는 거예요. 이낙선은 내가 남산학교 교사할 때 그 사람은 안동농림을 나오고 덕산학교 교사를 하던 사람이었지. 

동향(同鄕)이고 친구라는 이유로 추천을 해줘서 국가재건최고회의 행정부서에서 근무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지만 그게 본의 아니게 중앙정보부로 배정받는 바람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것이지요.

▲ Western electric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다정한 내외 모습. 이때 부인 정성구(안젤라 박) 여사는 자택 앞에 있는 IRS(국세청)을 다녔다.

□ 중정에 입사해서 주로 어떤 직책을 맡았나요?

■ 저는 1956년 10월 22일, 스물 여덟에 당시 교편생활을 하던 지금의 와이프 정성구(안젤라박)와 결혼해서 그 후 2남 2녀를 낳았습니다. 집사람은 경북여고를 나와 부산대를 다니던 중에 경산여중고 교사로 일하다가 중매로 백년해로를 약속하게 된 것이지요.

내가 6.25에 참전을 해서 포병을 갔는데 그때 같이 간 친구들 중에 이낙선 소령 등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침 박정희와 함께 5.16주체가 된 거에요. 그래서 그 친구들의 권유가 있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개시험을 통해 논문시험과 대질신문, 인터뷰를 보고 합격이 됐는데 새로 신설된 중앙정보부에 배치가 된 것입니다. 

정식 입사한 해가 62년이었는데 중정에서 국내정보국에서 일하면서 국내 정보수집분석 업무를 주로 했어요. 그때는 대북정보든 국내정보든 영역의 구분이나 제한이 없었으며 조정관이 수집한 정보를 내가 주로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중앙정보학교 첩보과정에 입소해서 수집교육과정을 수료했는데 이렇게 첩보과정 3개월을 마치고 나서 얼마 후 국민투표를 치르기 위해 대구지부로 파송이 됐는데 가서 보니까 겉으로 볼 땐 ‘공사’, ‘상사’라는 이름으로 마치 회사처럼 위장을 했더군. 

대구에 내려가서는 정보과에서 수집관으로 일했는데 달성군과 고령군 두 지역을 내가 맡았고 문화언론 파트를 담당했습니다.

5.16으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정 이양 형식으로 대선이 실시되기로 해서 1962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국민투표를 실시해 헌법을 개정하느라 정보부도 바빠진 것이지. 이듬해인 63년도 대선에서 박정희가 윤보선과 대결할 때 윤보선이 그만 실수로 박정희의 옛날 대구시절 좌파경력을 건드렸던 거야. 상당히 역풍이 심하겠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결과는 그게 아닌 정반대로 나왔다고.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할 때도 조봉암이 75%가 나왔어. 그러니 상대 후보한테 “저 후보가 빨갱이다” 라고 공격하면 대구 사람들은 빨갱이에 대한 말 못할 노스텔지어 비슷한 그런 기대감이 있는 거야. 저 후보가 좌익을 했다니까 오히려 유권자들이 “아,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표를 찍어준 거지. 

그러니까 윤보선의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참패를 당했고 박정희가 이긴 거지. 대구에 달성과 고령이 내 담당구역인데 거긴 공화당 실세 김성곤 구역이었다. 내가 서울로 올라와 있을 때 공화당 비주류를 족칠 때가 있었어. 김성곤도 정보부에 끌려와서 수염이 뽑힌 적도 있었거든. 

한때 윗선에서 나한테도 김성곤 비리를 캐오라면서 나를 푸쉬 한 적도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김성곤 비서실에서 1년에 한두 번 나한테 촌지를 줬다. 그런데 김 의원의 비리를 캐오라니 내가 무척 곤란했지.  

아무튼 5.16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권력 구조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선거 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았고 1963년 10월에 치른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당선되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행하는 선거를 치루고 나자 각 지부가 폐쇄가 되면서 나는 상경했지. 

당시 나는 최고회의 박정희와 중정 김종필 양인의 서명이 들어 있는 특별 신분증을 발급 받았는데 “이 사람은 국가를 위해 제한 없이 행동한다” 뭐 그런 내용인데 이를테면 암행어사 마패 같은 의미였지. 중정 내부에서는 고유 명칭을 안 쓰고 1국, 2국, 3국, 5국, 6국 그런 식으로 부르는데 ‘죽을 사(死)’라고 해서 4국은 아예 없었어. 난 5국에 배치를 받았는데 5국은 주로 대공관계를 했고 분석판단 업무에 종사를 했지. 

그리고 그 당시는 없었던 기구였는데 언론전담팀이 생긴다고 그래. 오히려 이건 나한테 맞는 거다 싶어서 수소문해서 알아봤더니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더라고요. 결국 65년에 언론담당관이 되었고 그만둘 때까지 그 일로 세월을 보냈지요. 나는 주로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아일보를 담당했고, 통신사는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이 세운 동양통신(UPI, AFP), 합동통신(AP) 양대 통신사와 동아통신 등을 맡았고요. 여러 언론사들 중에서도 난 주로 조선일보를 중점적으로 담당했는데 당시 박 정권은 조선, 동아 두 신문사의 논조를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요사이는 두 신문사가 우익이지만 옛날에는 논조가 그래도 꽤 괜찮았어요.

▲ 일제 강점기 대구에 있는 6년제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를 다닌 박기식의 졸업 사진. 맨 앞줄 좌측이 박기식 학생.
▲ 가톨릭 대구교구청 소속의 대구효성학교 교사 시절의 박기식 선생.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 

□ 박정희가 주로 어떤 식으로 언론공작을 폈습니까?

■ 박정희는 수시로 언론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는데 어떤 식으로 하느냐하면 전체 언론인 리스트를 보고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청와대로 불러서 식사를 하며 은근히 회유를 하는 것이지. 

어느 날 경향신문, 중앙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어느 작자가 청와대 접견 중에 “제가 가짜 김일성에 관한 책을 출판할 예정인데 좀 도와주세요” 하는 식으로 박 대통령에게 건의를 한 거다. 그가 바로 나중에 성균관대학 교수를 지낸 이명영 교수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박정희가 돈을 좀 보태줬는데 박 대통령도 큰 관심을 갖고 그런 논란에 말려든 것이지. 그날 남재희는 아무 말이 없었고, 송건호는 산업시찰 좀 하게 해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남재희 전기에도 자세히 나와 있어. 서대숙이라는 하와이대 교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서울대 와서 잠시 가르칠 때 학생들 질문을 받고 “가짜 김일성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시절에 이명영이란 작자 때문에 ‘김일성이 여러 명’이라는 뜻의 <진위 김일성 열전>이니 <김일성 열전>이니 하는 책을 연거푸 출판했고 반북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쓴 <북괴괴수 김일성의 정체>니 하는 엉터리 같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거지. 

당시에도 김일성 장군의 보천보 습격사건은 김성주(김일성 장군)가 했던 사실이 맞고 해방 후에 나타난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당시 학계에서는 유력한 주장인데도. 이명영의 요설에 넘어간 박정희가 “북한의 김일성이 진짜 항일투쟁을 한 장군이냐, 아니면 다른 항일투쟁 장군들의 이름을 사칭한 가짜냐”는 근거 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도록 허락을 한 것이지. 

그 결과 일본 동경 중심부에 가면 ‘삼성당(三省堂)’이라는 큰 서점이 있는데 일본발음으로 ‘산세이도’ 라고 해. “자신을 세 번 되돌아본다”는 뜻이지. 거기에 가보면 한국 책 코너에 이명영이 가 쓴 가짜 김일성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있었어. 아마 지금도 있을 거야. 

그뿐 아니라 1971년 대선에서는 중정에서 김대중에 대해서 흑색선전을 하느라 총력을 기울였지. 국내 각 언론사 논설위원들과 간부들을 서울 이문동 중정 청사로 불러서 영화 관람실로 들여보내 김대중에 대한 흑색선전을 했는데 그 이야기들은 모두 뻔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모호하다”, “집안 혈통이 상놈이라 몰래 호적을 샀다”는 등의 인신공격이나 요즘 말로 종북으로 매도를 한 거다, 언론인들을 모아 놓고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했는데 그 후로도 대선 때마다 그런 일들이 되풀이됐던 겁니다.

▲ 박기식 선생의 결혼식 사진. 처가에서는 전통혼례식으로, 성당에서는 혼배성사 예식으로 치렀다. 

□ 당시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과 어떤 방식으로 유착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 박정희 시절부터 조선일보가 친일적인 요소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박 정권을 찬양하는 친정부적으로 변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배경에는 코리아나 호텔과도 관련이 많아요. 

조선일보가 일본 정부와 이또쮸(이토추) 상사로부터 4천 만 불의 차관을 얻어서 조선일보 사옥인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지요. 박정희 정권과 가까웠던 조선일보는 1968년도 즈음에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와서 그 호텔을 지어서 조선일보 재산이 되었으니 자연이 친일적인 성향이 될 수밖에 없지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오히려 사설을 통해 ‘차관 망국론’을 떠들면서도 뒤로는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해서 자기들 사옥을 지었던 것이지. 그러면서 빨리 인가를 내달라고 경제기획원에 압력을 넣는 바람에 공무원들도 무척 황당해서 난처한 적도 많았지요.

그 당시 박 정권이 신문사에 상업차관을 해준 것은 조선일보가 처음이었는데 금리가  7-8%에 불과한 저렴한 차관을 허용한 것 자체가 박 정권의 엄청난 특혜였지. 이때 차관을 주선한 사람이 바로 방일영과 막역한 사이면서 공화당 돈줄로 통하는 김성곤이었고요. 

차관도입 자체가 엄청난 특혜였기 때문에 박 정권 측에 정치자금을 내놓아야 하는 등 비리가 많았지요. 코리아나 호텔을 지으려는 차관은 외자도입 허가서류에 실무 담당자의 서명도 없이 허가된 유일한 경우에 해당될 겁니다.

우리 집에 다녀간 이부영 의원의 말처럼 한일협정을 맺은 후에 코리아나 호텔을 조선일보가 은밀하게 일본 차관을 얻어서 지었으면서 이 호텔을 통해서 일본을 상대로 기생관광을 해서 별도로 돈을 벌었던 것이지요.

그와는 별도로 이또쮸 상사는 한국의 역대 군사정권들 하고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회사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 중에 세지마 류죠(瀬島 龍三)라는 간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2차 대전 당시 장교로 참전하고 나중에는 이또쮸 상사의 회장이 된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한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한일 간에 협작 역할을 했지요. 

특히 노태우 대통령 방일 때는 중간 역할을 하면서 일왕의 사죄 표현을 ‘통석지염(痛惜之念)’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하도록 합의를 한 것이에요. 그래서 일본에 사는 정경모 씨가 뿔이 나가지고 “그건 사과의 말이 아니라 애통하다는 거다. 그게 무슨 사죄의 말이냐?”라며 발끈한 적이 있었지요. 한국 측에서는 한림대 교수를 지낸 지명관이란 사람이 세지마 류죠의 말에 동조하면서 통석지염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지명관은 일본 외무성에서 국고 지출로 나가는 거금을 상으로 받은 사람인데 친일적인 사람이 아니면 그 상을 쉽게 받을 수가 없다고요. 

□ 초대 김종필 중정 부장부터 시작해서 2대 김용순, 3대 김재춘, 4대 김형욱, 5대 김계원, 6대 이후락 부장까지 10년에 걸쳐 역대 중정부장들 여섯 명을 모두 겪으셨는데 각 부장들 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고 보니 내가 1대부터 6대까지 모두 상사로 모시던 분들이군요. 초대 김종필 부장은 내가 중정 상황실에서 대선 국민투표 결과 상황을 놓고 각 도의 개표상황 결과가 올라오는 걸 분석하고 수집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 사람도 같이 머리를 맞대고 분석을 했는데 그때 마침 박정희 대통령도 상황실을 방문해서 보고를 받은 적도 있었지요. 

2대 김용순 부장은 아주 짧게 근무해서 추억이 없어요. 5.16세력이었으나 김종필 세력의 견제를 받다가 달포 정도 견디다가 그만 사퇴했지요. 3대 김재춘 부장도 겨우 다섯 달 정도만 재임하고 그만 둬서 특별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4대 김형욱은 이야기 거리가 많아요. 

특히 김형욱이 박 대통령한테 반기를 들고 73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 나하고 안 좋은 일로 공원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요. 내가 가족들을 데리고 게티스버그(Gettysburg)를 방문하려고 보스턴에서 와이프와 아이들을 태우고 뉴욕을 지나던 중에 김형욱과 통화가 연결됐어요. 

당시 김형욱은 박정희의 온갖 비리를 폭로해 박정희가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던 시기였고 뉴욕 동포사회에서 민주화운동 한다며 촌지를 건네고 술을 접대하며 허세를 부리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한민신보의 정기영이가 은근히 날 시험하려고 김형욱에 대한 기고문을 한 편 부탁하길래 비판적인 글을 써서 보냈더니 그게 한민신보 기사에 나갔는데 그걸 김형욱이가 읽고 화가 나서 결국 나하고 연결이 된 겁니다. 

김형욱과 만난 장소는 뉴욕의 부촌이라서 외부인은 일절 못 들어가는 거주민 전용의 공원이 있는데 거기서 만났지요. 김형욱은 나를 호칭할 때 자꾸만 “you”라고 했고, 유난히 영어문자를 많이 쓰더군. “you가 왜 나를 씹냐?”는 식으로 추궁 하길래 내가 그랬지.

“부장님이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신다기에 더 고무적으로 잘하시라고 그렇게 썼습니다. 저는 부장님이 미주에서 통일운동이나 민족문제를 위해 일을 하실 때 이왕이면 좀 더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고 올바른 관점에서 하자는 의미에서 그런 기사를 쓴 겁니다”라고 둘러댔다. 

아무튼 둘의 대화가 그런 방향으로 진행된 거야. 내 차안에서는 집사람과 아이들이 타고 있었고. 헤어지면서 김 부장도 우리 식구들과 인사도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형욱은 살해당했지요.

 77년엔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를 맹렬히 비난했고 후에 중정요원들이 파견돼 협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기고 박정희 치부를 드러낸 회고록까지 출판했으니 살려둘 리가 만무하지요.

5대 김계원 부장은 내가 퇴사할 무렵 사표를 쓰게 되자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김기완(주일정보공사)을 통해 나를 대연각으로 불렀길래 만났지. 중정 부장실로 이동해 만난 적이 있고 몇 차례 더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대화를 했는데 김기완을 쳐다보며 “그 일이  그렇게 급한 일인가?(박기식이 일본으로 부임하는 문제)”라고 하길래 머쓱해서 그만 없던 일이 되고 말았던 거지. 

알고 보니 김기완 공사가 부장한테 미리 언질을 안 한 것이다. 이때 김기완의 처남이 임근택 아나운서이고 김기완의 아들이 몇 년 전 주한미대사와 필리핀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성김(김성용)입니다. 알고 보니 차라리 일본으로 부임 안한 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며 훗날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김기완(본명 김재권) 공사가 박정희의 오더를 받고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김대중을 납치했던 주일공사 아들이 훗날 주한미대사를 지냈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공군정훈감 출신이었던 김기완은 일본어를 잘했고 나이는 나보다 2-4살이 더 많을 거예요. 나도 일본말은 잘했다. 소학교, 중학교를 근 18세까지 다니면서 해방 될 때까지 교육을 받았으니까 유창할 수밖에 없지. 

박정희와 김종필도 일본어가 유창했는데 내가 중정에 근무할 때 일본 육사출신의 유재흥 장군이 국방부장관에 취임했는데 한국말은 아주 서툴고 일본말만 유창하니까 장성 시절하고 국방장관 시절엔 한국어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고요. 한심하게 한 나라의 장관이 그 나라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장관노릇을 했던 거지.

6대 이후락은 언론인들끼리 모이면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나의 이모부가 이후락의  사촌이던 이지락이었기 때문에 이모부를 통하면 연줄이 됐지요. 중정 사무관이 당시는 경찰서장과 맘먹는 직급이라서 결코 소홀한 직급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동료들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공갈을 써서 무담보로 돈을 빼내서 그 돈을 상관들한테 상납을 하는 거다. 그래서 자기 직장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높은 자리를 올라가려고 아우성을 치는 복마전이 바로 중정이었지. 그래서 내가 그만둘 때 이런 썩은 공무원들을 규탄을 해야 된다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1960년대 말에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라고 있었는데 아주 떠들썩했어요. 그 배후에 중정 요원 김보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놈이 그 사건에 연줄이 되었지요. 박영복이라는 사기꾼 협잡패들을 앞세워 김보근이가 뒤에서 조정을 했는데 그 사람이 나하고 같이 일을 했던 동료였다. 난 조선일보를 관장했고 그 친구는 동아일보를 주로 관장했어. 결국 그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는 등 말로가 비참했지.

중정 조직 중에 감찰실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정보부내에 정보부’라고 할 수 있는 서슬 퍼런 곳이다. 당시 내가 봉천동 가난한 동네에 시멘트 블럭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보부 감찰실에서 나와서 우리 집사람한테 이래저래 묻길래 우리 집사람이 일부러 가난한 척 하며 넋두리를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런 비열한 정보부를 타도해야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이런 게 내 통일운동과 매치가 된 거라고 생각해요.

▲ 조선일보 구사옥이 헐리기 전인 69년 연말 조선일보 간부들 50여명이 단체사진을 찍은 장면. 이후 조선일보는 일본의 차관을 받아 그 자리에 코리아나호텔을 건축했다. 

□ 잘나가던 중정을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 사연이 궁금합니다.

■ 1971년 초에 경향신문 문화면에 어떤 기사가 났는데 그게 화근이었지요. 평소 육영수 여사가 관심을 갖고 있던 어린이회관이라고 있었는데 그 회관이 남산 케이블카 부근에 있었지. 그런데 어느 교육평론가가 거기에 대해 비판조의 글을 실었던 거야. 

그랬더니 청와대 육 여사가 노발대발했고. 그러다보니 육 여사 비서관들이 자체적으로 그 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아 봤더니 경향신문 문화부장이 하는 말이 “남산의 박기식 선생이 서명을 해서 무심코 게재했다”는 식으로 둘러댄 것이죠.

결국 “남산에 언론담당 박기식이를 내보내!”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청와대 어느 비서관이 “대체 그 사람이 누구야? 당장 내보내!” 하면서 내가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나는 문화면은 전혀 신경도 안 썼는데 문화부장이 자기가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 발뺌을 해야 하니 내 핑계를 댄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무척 뿔이 났죠. 경상도 말로 쎄(혀)가 빠지게 박 정권을 위해 종사했는데 결과적으로 돌아온 것이 이런 건가하고 생각을 하니 기가 차더라고요.

그래서 이럴수록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조선일보 최석채 주필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더니 “박 선생은 일본말을 잘하니 일본으로 가는 건 어떤가?”라고 해서 공감을 했지. 

그와 동시에 대구매일신문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 유선우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장가를 김기철(김기완 형님)의 딸하고 한 거야. 자기 처삼촌이 김기완이지. 그러니까 유 기자가 처삼촌한테 박기식이를 일본으로 가도록 청탁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때 정보부장이 김계원이었는데 그의 친동생이 김계일이다. 김계원은 내가 입대할 때 훈련소 소장이었고 그의 동생 김계일과 나는 같이 입대했다. 나는 포병학교 정훈과에 배치 받아서 얼마 후 새로 발족하는 중박격포대에 서무요원으로 근무했고 김계일은 후보생 요원으로 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김계일에게 “네 형님에게 말해줘라. 내가 해고됐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가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내가 여러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부탁을 했더니 금세 반응이 왔다. 

마침내 김기완 주일정보공사가 어느 날 “박기식 씨, 오늘 대연각 호텔로 오시오”라고 연락이 온 거다. 내가 일본말을 잘하니까 김기완이 날 데리고 일본 영사관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행동책이 김기완이었는데 내가 일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정보부장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한국에 남게 됐는데 만일 그때 따라 갔으면 납치사건에 연루되어 큰 곤혹을 치를 뻔했지요. 

아무튼 집에서 기다리라해서 며칠 더 기다리니 드디어 연락이 왔다. 중정 언론팀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인데 사방에서 여기저기 말들이 들어간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거지. 그러나 다시 복귀 명령을 받고나니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나 “일단 복귀를 하자”고 결심을 하고나서 다니다가 결국 그해 연말에 사표를 내고 중정을 나왔습니다. 

막상 복귀하라니까 이미 명예는 회복된 것이고, 언론 통제관의 일이라는 것이 언론기관들과 언론인들을 회유하거나 정부 정책에 협조하도록 살살 구슬리기도하고 때론 압력을 가하기도 하는 일이다 보니 소위 본성에서 출발한 생활이 아니었지요. 

내 인격을 팔아먹는 일이었어요. 때론 구걸하다시피 기자들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은근히 으름장을 놓기도 하거나 압박을 하기도해야 해요. 그러나 정보원으로 일하면서도 많은 양심적인 언론인들로부터 “박 교수”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로 언론인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다시 복직을 하고 보니 그런 과거사를 포함해 오히려 언론인들의 입장에 서서 일한 것들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의 명예와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정보부를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때가 71년 말이었지요. 훗날 내가 정보부를 그만 두고 사귀게 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민족문제와 씨름하는 양심적인 언론인들 이었다고. 

지성인으로 알려진 리영희 교수와 송건호 선생도 나와는 직업적으로는 서로 앙숙 관계였지만 지성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때때로 서로 의기투합한 시간들이 많았고 특히 언론계 반골로 소문난 리영희 교수는 운명할 때까지 나와 좋은 친구로 지내며 서로 왕래를 했고요.

어찌됐든 “이제 내 인격을 파는 짓은 그만하고 나도 이제 올바른 길을 찾아 살자”라는 생각으로 중정을 그만두고 그 후부터 양심의 길, 진실의 길, 민족을 위한 길, 통일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미국 이민을 서두른 것입니다. 

결심을 마치고 신진 자동차학원에서 운전면허증을 따고 미국에 이민 갈 준비를 본격적으로 했는데 그때 미국 가려면 노스웨스트 항공뿐이 없었는데 대한항공이 카고(화물기)는 운항을 했으나 일반여객기는 1972년 4.19에 첫 비행을 했는데 그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간 거다.

객실 내에 둘러보니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동경에 내려서 보니 양주동 박사도 탔더라고. 양 박사와는 구면이라 양주동과 홍 아무개 조선일보 주필도 보이길래 동경에 내려서 그들과 정종을 시켜서 한잔하고 한두 시간 경유라서 얼른 탑승하고 다시 호놀룰루에 도착하니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잔치가 요란했지요.

모든 승객들을 일일이 다 목걸이를 해줬다. 그날 비행기에는 대략 120명 정도 탔는데 논스톱은 고사하고 원스톱도 힘들어 세 번을 경유한 거다. 엘에이 도착하니 동포들이 거의 다 환영 나왔더군요.

▲ 조선일보 리영희 선생, 주유엔대사를 지낸 림창영 박사 내외가 보스턴에 있는 박기식 선생 자택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선생님은 혹시 종교를 갖고 계시거나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지요?

■ 어느 날 유럽여행 중에 이태리 베니스에 들려 화랑에 가니까 성화가 많더라구요.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바짝 다가가서 바라보니까 화랑에서 일하는 사람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선생님, 그림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셔야 합니다”라면서 은근히 훈계를 하더라고.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모든 사물을 볼 때 너무 가까이도 말고 너무 멀리도 말라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고사성어가 있는데 불가근하면서 동시에 불가원해야 한다는 뜻이거든. 

그런 차원에서 종교도 마찬가지야. 너무 몰입해서 종교에 빠지는 사람도 나는 싫고 너무 소홀하게 처신하는 사람도 싫어. 현재 우리 와이프가 교회에 너무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는 좀 경계하고 있지요. 난 내 주체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 한국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덕신, 류미영 내외가 월북하기 전 보스턴 박기식 선생 내외 자택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앙이 날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신앙을 가지고 서로 논쟁한다든지 하는 건 원래 흥미가 없어서. 과거 한국에 살 때나 이민 와서 초창기까지 오랫동안 가톨릭 성당에 다녔는데 현재는 어떻게 하다 보니 집 부근에 있는 한인 감리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평소 나의 멘토 같은 친구이자 사부 같은 림창영 박사는 늘 말하길 “진실한 기독교인은 진실한 사회주의자와도 충분히 교제할 수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종교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말해줬는데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불교신자나 이슬람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하고도 벽이 없이 가깝게 지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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