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제2차 미소공위 재개와 우익진영의 균열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면서 이승만의 단정밀약설은 후퇴하고 우익진영 내에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이승만·김구는 여전히 반탁을 주장했지만, 한민당과 한독당 내 일부가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은 처음 한민당의 미소공위 참여를 백해무익한 것으로 비난했으나 6월 17일 우익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만나, 공위 참여 여부를 불문하고 “반탁의 신념은 동일한지라 서로 협력”하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우익단체들이 반탁진영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손으로 반탁의 케익을 먹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공위에 참여하는 양면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반면, 한독당은 미소공위 참여 문제로 안재홍계는 신한국민당으로, 권태석계는 민주한국독립당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1차 미소공위 시기에 통합되었던 한독당은 2차 미소공위가 열리면서 다시 세 개의 당으로 분리되었다.

1947년 6월 23일 덕수궁앞 반탁데모
1947년 6월 23일 덕수궁앞 반탁데모

2차 미소공위의 재개와 함께 중도파가 활성화되면서 3월 이후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나타났던 갈등은 일시 잠복되고 다시 공동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힘을 합쳤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마지막 합작품으로 6.23 반탁데모가 일어났다. 6월 23일은 단오절이자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가 귀국하는 날이었는데, 반탁진영은 ‘서윤복 선수 환영국민대회’의 들뜬 분위기를 이용해 대중동원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황은 1946년 반탁운동 때와 판이하게 달라서 대중동원의 거의 되지 않았다. 대신 이날 시위를 주도한 반탁청년학생들의 행동은 매우 과격했다. 6.23반탁데모를 주도하던 청년학생 시위대의 ‘돌격조’가 덕수궁 앞에서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가 탄 차량에 돌과 모래를 던지며 테러를 가하였던 것이다.(주1)

소련측은 6.23반탁데모와 폭력행위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그 배후조직으로 반탁투쟁위원회를 지목하고, 여기에 참여한 단체를 미소공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공위 참여단체로 등록된 것은 우익(55%)이 좌익(45%)보다 약간 우세했으나 우익은 좌익에 비해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반탁투쟁위원회 소속 우익 전체가 배제된다면 좌우가 역전될 상황이었으므로 미국으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6.23데모는 미소공위의 협의대상 문제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듦으로써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데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단독정부를 주장하고 있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일이었다.

1947년 7월 1일 귀국한 서재필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프란체스카, 사령관 하지 중장, 서재필, 딸 뮤리엘, 이승만.
1947년 7월 1일 귀국한 서재필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프란체스카, 사령관 하지 중장, 서재필, 딸 뮤리엘, 이승만.

미소공위의 재개(5월 21일)와 진전, 반탁진영의 분열과 한민당의 이탈, 좌우합작위원회의 개편 및 강화, 민주주의독립전선 등 중도우파의 결집, 서재필의 귀국(7월 1일) 등으로 총체적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과 김구 진영은 민족대표자회의와 국민의회를 통합해 우익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김구의 우익진영이 통합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려 할 때 미소공위는 사실상 정지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7월 중순 이후 미소공위 대표들은 결렬을 기정사실화하고 본국과의 협의에 들어갔다. 이에 이승만은 민족대표자회의와 국민의회의 통합을 추진하는 한편, 입법의원을 통과한 보통선거법에 의한 남한 총선거를 재차 추진하였다.(주2)

그러나 김구의 국민의회는 9월 1일부터 5일까지 진행된 임시대회에서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승만을 주석, 김구를 부주석에 재추대하며 임정법통론에 근거한 강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9월 3일 총선거를 반대하는 것은 “건국대업의 전도를 막는 공담”이며 지금은 “38선 이남은 고사하고 다만 한 도나 한 군으로 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9월 16일 주석 추대를 거부한다고 재차 밝혔다. 이승만이 분명하게 김구의 임정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주3)

이승만과 김구의 다른 복장과 신발, 그리고 다른 포즈. 두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진인 셈이다. 해방 후 두 사람은 애증관계를 갖고 오랫동안 경쟁과 협력을 했으나 단선을 두고 끝내 갈라섰다.
이승만과 김구의 다른 복장과 신발, 그리고 다른 포즈. 두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진인 셈이다. 해방 후 두 사람은 애증관계를 갖고 오랫동안 경쟁과 협력을 했으나 단선을 두고 끝내 갈라섰다.

이승만은 김구와의 통합이 지지부진해지자 다시 한민당과 손을 잡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민족대표회의와 국민의회의 통합이 무산되자 신익희는 한독당을 탈당해 20여명의 입법의원과 함께 민족대표자회의에 합류하였고, 임정원로 이시영은 9월1일의 국민회의의 남한 단정반대 결의가 부당하다며 임정 국무위원과 의정원 대의원을 사퇴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 관계 속에서 무게중심이 이승만으로 확실히 이동하고 있었다.(주4)

한편, 미국은 소련에 미·소·영·중 4개국의 워싱턴 회담을 제안했으나 예상대로 소련이 거부했다. 그러자 9월 17일 미국은 다시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제안했고, 이에 대해 소련은 미소 양군을 1948년 말까지 철수시키자는 양군 철병안을 제기했다. 미소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10월 17일 미국은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안 초안을 유엔에 제출했고, 결국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10월 23일 서울에서 철수함으로써 미소공위는 완전히 결렬되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고, 이승만과 한민당이 재결합하는 것을 보면서 한독당은 조소앙으로 대표되는 당내 진보파를 앞세워 정당협의회를 통한 중간파와의 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한독당의 이 같은 시도는 이승만과 한민당 등 단정진영의 집요한 공세로 중단되었고, 김구는 1947년 11월 말부터 다시 이승만 진영과의 합작에 나섰다. 11월 30일 김구는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단독정부 참여를 시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구는 “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더라도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하는 것을 조건으로 총선거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면서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한다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주5)

성명 발표 후 김구는 이승만과 나란히 서북청년회 1주년 기념식에 참석, 훈화하며 단결을 과시했다. 12월 1일 이승만과 김구가 같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제44차 국민의회 임시대회는 민족대표자회의와의 합동을 재차 결의했다. 대회 직후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회의는 각각 3인의 대표를 선정, 합동작업을 진행하여 12월 12일 합동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합동작업이 본격화되자마자 결정적인 장애물이 등장했다.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암살된 것이다.(주6)

장덕수 암살 사건과 우익진영의 분열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자택에서 암살범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압송되었으나 사망했다. 정치부장 장덕수는 수석총무였던 송진우의 암살 이후, 김성수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상태에서 실질적으로 한민당을 이끌었다. 사건 발생 3일 만인 12월 4일 경찰은 용의자로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의 주범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는 현직 경찰관이었는데, 한민당 김성수 집 식모의 아들로 김성수가 조병옥에게 추천해서 경찰이 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한민당 지도자 장덕수 암살범이 되었는지는 미스테리이다.(주7)

박광옥의 전세방을 수색한 경찰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전 모습을 흉내내어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독립을 위하야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를 서약함. 민국 29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OOO”란 혈서를 가슴에 붙인 채 6명이 찍은 단체사진을 찾아냈다. ‘문제의 사진’에 등장하는 6명은 박광옥(22세, 종로경찰서 경사, 대한학생총연맹 전무), 배희범(20세, 연희대 상과 3년, 대한학생총연맹 전무), 최중하(19세, 연희대 문과 2년, 대한학생총연맹 위원장), 조엽(21세, 서울대 문리대 2년, 대한학생총연맹 선전부장), 박정덕(22세, 연희대 이과 3년, 대한학생총연맹 총무부장), 김철(성균관대 철학과 3년, 대한학생총연맹 조직부장) 등이었다. 이 중 김철 외에 나머지는 모두 경찰에 검거되었다.(주8)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사건 보도(동아일보 1947.12.4.)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사건 보도(동아일보 1947.12.4.)

사건 용의자로 체포된 이들이 소속되어 있던 대한학생총연맹은 19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했으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총재로, 조소앙·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는 등 임정을 철저히 따르는 조직이었다. 강령은 ‘①임시정부의 법통을 살리고, ②임정을 보호 육성하며, ③이북의 적색마적을 분쇄하고, ④남한의 단독정부 음모를 분쇄한다’는 등이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면서 창립 4개월 만에 자연 해체되었다.(주9) 경찰 수사에 의하면 용의자 6명은 모두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으로 장덕수를 암살하기 위해 1947년 8월 ‘대한혁명단’이란 단체를 조직하였다.(주10)

이 사건은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총선거를 결정하고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이 한국에 오기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발생했다. 한국 내 우익 진영에서는 유엔한위 도착에 대비하여 통합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군정은 유엔한위의 활동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전례 없이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였고, 이승만과 김구의 통합에 비판적이었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결정적인 기회로 활용하였다.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다른 암살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은 ‘암살사건’ 자체보다도 ‘수사 및 재판 과정’이 더 큰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주11)

장덕수 암살 사건 관련 군사재판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1947년 3월 11일자 기사.
장덕수 암살 사건 관련 군사재판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1947년 3월 11일자 기사.

경찰은 처음부터 암살사건의 배후로 김구의 국민회의를 지목하고 배후 규명에 총력을 기울였다. 경찰은 12월 4〜5일 이틀 사이에 국민의회 간부 10여명을 연행하였으며, 이들 중 국민의회 정무위원회 재정·훈련부장 신일준, 대의원 김중목, 비서부장 조상항, 조직부장 손정수 등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신일준, 조상항 등은 민족대표자회의와의 합동작업을 담당하고 있던 국민의회의 실무대표들이라는 점에서 그 파장이 컸다. 경찰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었다. 경찰은 장택상을 위원장으로 하고 조병계, 이만종, 노덕술, 최운하 등을 위원으로 하는 수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임정요인들에 대한 수사에 대비하였다. 12월 10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암살사건의 배후는 ‘4단계’라고 언급해 사건의 파장이 김구에게까지 이를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이번 사건을 ‘특별재판’이나 ‘군정재판’으로 넘길 계획이라고 발표하며 강력처벌 의사를 표명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국민의회 간부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을 이유로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 간의 12월 12일 합동대회 집회 허가를 보류하였으며, 국민의회 의장 조소앙과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까지 소환·심문하며 임정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였다.(주12)

12월 말 이승만과 김구 진영의 통합 논의가 진전을 보이자 한민당의 김성수, 백남훈, 허정 등 3인은 하지 사령관, 딘 군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청장 등을 방문하고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규명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정치적 행보를 했다. 이에 호응하여 다음날 하지 사령관은 특별성명을 발표, 책임자에 대한 강력 처벌 의지를 밝혔다. 1948년 1월 16일 경찰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수배중이던 김석황을 체포하였다. 장택상은 신속한 중간발표를 통해 “해방 전후 좌우익 요인 살해 사건에 관해서도 우자의 취조에 따라 그 암운이 일소되고 그 ‘배후의 흑수(黑手)’도 법망에 걸려 조선 정계를 명랑케 할 것같이 보인다”라고 해 김구가 연루되어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였다.(주13)

장택상은 김석황이 김구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개하며, 배후의 정황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언론이 “‘대권을 잡으시오’ 모 정계요인에게 주는 괴이한 서한도 압수”란 제목으로 보도한 김석황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군을 배경으로 하고 임정법통을 무시하는 도배들이 무죄한 사람을 다수 체포하여 죄를 구성하려 하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소생이 숨어다님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임정을 타도하고 선생을 모함하려는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遊離丐乞)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 이박사와 한민당 도배가 음모를 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각별히 조심하십시오.”(주14)

경찰과 미군의 강압수사로 김석황을 비롯한 관련 피고인들의 진술서는 김구가 사건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작성되었다. 언론은 김석황의 진술서에 ‘김구가 장덕수를 살해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되어 있고, 조상황·신일준·손정수 등의 진술서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신일준·김정목의 진술서에는 김구의 명령을 계승하여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으며, 최중하 등의 진술서에는 문제의 혈서와 사진을 김구에게 전달하여 격려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 같은 피고인들의 진술서에 따르면, 김구는 암살 사건의 배후가 아니라 ‘우두머리범인(首犯人)’이었다.(주15)

그러나 이 같은 진술서 내용은 재판과정에서 강압에 의한 것으로 모두 부인되었다. 재판과정에서 경찰이 신일준, 최중하를 통해 김구와 관련시키려 했던 공작의 흔적도 드러났다. 신일준은 여운형 암살사건·장덕수 암살사건·진보당 사건 등에 관련된 ‘의혹의 인물’이다. 최중하는 재판에서, 신일준이 정치적 해결을 위하여 김구를 끌고 들어갈 것을 역설하여 그러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김석황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으며, 손정수는 “당시 미군 검사가 암살사건에 김구선생이 연루되어 있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신일준이 그렇게 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한국독립당 연락부장이었던 신창균은 손정수의 증언에 대해 처음 긴가민가했으나, 후에 진보당 사건 때 신일준이 치안부와 공동작전을 한 것이 확실히 드러나자 그때부터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손정수의 말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제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수류탄을 구해준 것도 신일준이었다.(주16)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은 신일준과 최중하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박광옥, 배희범, 김석황, 신일준, 김중목, 최중하, 조상황, 손정수 등은 10년형 이상을 받았는데(주17) 신일준과 최중하를 제외하고는 한국전쟁 시기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모두 죽었다. 미군과 경찰은 신일준을 이용하여 암살사건에 김구를 관련시키고자 하였고, 결국 김구는 1948년 3월 법정에 서서 미군정 검사의 심문을 받게 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구 임정주석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구 임정주석

우익진영의 분열과 김구·임정 진영의 방향 선회

경찰이 사건의 배후에 국민의회가 있다고 밝히면서 이승만의 민족대표자회의와의 통합은 보류되었다. 이제 통합의 열쇠는 이승만이 쥐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구와 임시정부 측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김구는 이승만을 ‘형님’(김구는 이승만보다 한 살 적었지만 깎듯이 ‘형님’ 대접을 했다)으로 모시며 갖은 정성을 다해왔지만 이승만은 김구의 곤경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한민당이 김구와 임정계를 백백교(주18)에 비유하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는 등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던 상황에서 이승만은 “김주석(김구)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진영의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며 곤경으로 내몰았다.(주19)

1947년 12월 13일 이승만측의 민족대표자대회는 단독회의를 개최한 뒤 유엔한위와 교섭할 민족대표단 구성을 일방적으로 진행했다. 12월 14일과 21일, 22일 김구가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연속 방문해 장덕수 암살 문제와 두 단체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으나 이승만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에 김구는 분노했다.(주20) 12월 22일자 성명에서 김구는 민족대표자대회가 발표한 대표단 명단은 전혀 알지도 못했고 통일에 방해가 될 뿐이라며 이승만을 강력히 비판한 뒤, “우리가 원하는 바도 자주통일정부요 그들(유엔한위)이 우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겠다는 정부도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다”라며 단정노선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주21)

이후에도 김구는 12월 23일부터 연달아 이승만을 방문하여 두 단체의 통합과 민족대표단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 결과 12월 27일 두 단체는 공동성명을 통해 1948년 1월 8일 합동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이승만과 김구는 통합단체의 간부 진영과 선거법 문제 등에 대해 12월 내내 협의를 하는 등 마지막까지 통합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6일 이승만은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화의 합동문제에 대해 “나로는 이 문제에 좌우간 간섭코자 아니”한다고 말해 통합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히며 김구의 뒤통수를 때렸다. 1월 8일의 합동대회 또한 경찰로부터 집회 허가를 얻지 못해 연기되었다. 이후에도 논의를 계속했지만 통합은 끝내 무산되었다. 이 무렵 미군정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으며 최대의 장애가 김구라고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주22)

장덕수 암살 사건은 김구·임정 진영과 미군정·한민당의 관계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만들었다. 장덕수 암살사건은 2차 미소공위 재개 때 장덕수가 한민당을 공동위원회 협의에 참가하도록 한 것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장덕수가 임정의 우익 헤게모니 장악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주의자였던 장덕수는 1947년 이후 임정의 법통론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고 임정의 행보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주23)

그러나 장덕수 암살 사건은 단정이냐 통일정부냐의 문제를 둘러싼 분열로 발생한 해방정국의 다른 테러 사건과 달리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테러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이승만이었고,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김구였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재판정에까지 서는 치욕을 겪어야 했고, 이승만측 민족대표자대회와의 합동 추진이 무산됨으로써 사실상 우익진영에서 배제되고 말았다.(주24) 당시 정황을 두고 볼 때 김구로서는 이 사건의 배후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이 사건을 놓고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한편, 한민당과 김구진영의 불화는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으로 활동하면서 확보한 공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어떠한 형태의 선거를 실시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현재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였다. 한민당은 장덕수 암살사건을 계기로 단독정부에서 이승만에 이은 2위의 권력지위를 다투게 될 임정계열을 제거하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고, 결국 성공하였다. 이처럼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김구·임정 진영은 이승만·한민당과 결별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주25)

장덕수 암살 사건 후 곤경에 처한 김구는 이승만을 연속 방문하여 우익진영의 통합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이승만은 김구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한민당과 손을 잡는 쪽을 선택했다.
장덕수 암살 사건 후 곤경에 처한 김구는 이승만을 연속 방문하여 우익진영의 통합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이승만은 김구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한민당과 손을 잡는 쪽을 선택했다.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월 22일 남한의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허헌, 박헌영과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조만식 등 정치지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월 23일 예상했던 대로 북한주재 소련군사령부는 유엔한위의 평양 방문을 거부했다. 1월 26일 이승만은 유엔한위가 북한에 들어갈 가망이 없으며 전국 총선거가 불가능하니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라고 주장했다. 반면, 같은 날 김구는 유엔한위와 협의한 후 양군을 철퇴한 다음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하고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구는 유엔한위와 면담하기 전 김규식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였고, 1월 28일 유엔한위에 6개항의 의견서를 보내 남한 단독선거 반대, 양군 철퇴, 남북지도자회담 등을 제안했다. 김구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과의 합작을 단념하고 김규식과 연대해 남한 단독정부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나서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김구의 의견서에 대해 우익은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김구의 주장이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화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이후 한민당은 김구에 대해 민족지도자가 아니라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라며 극렬히 비난했다.(주26)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 을밀대 앞 기념촬영. 1948년 초 김구는 이승만 등 우익과의 통합을 포기하고 김규식 등 중도파와 손잡고 남북회담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에 나서기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 을밀대 앞 기념촬영. 1948년 초 김구는 이승만 등 우익과의 통합을 포기하고 김규식 등 중도파와 손잡고 남북회담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에 나서기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승만·한민당과 완전히 결별한 김구·임정은 김규식 등 중도파와의 합작에 나서 분단을 막기 위한 통일운동, 남북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장덕수 암살 사건이 김구의 노선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을지라도 중요한 한 요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김구를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몰아감으로써 그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민족의 지도자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

[주]

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52〜154쪽

2)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역사비평사, 2005, 665〜666쪽

3) 정병준, 앞의 책, 6673〜674쪽

4) 도진순, 앞의 책, 156〜157쪽

5) 동아일보/조선일보 1947.12.2.

6) 도진순, 앞의 책, 158쪽

7) 박태균·정창현,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역사인, 2016, 150〜151쪽

8) 도진순, 앞의 책, 159쪽

9)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한국학생건국운동사』, 1986, 495〜496쪽

10) 도진순, 앞의 책, 159쪽

11) 도진순, 앞의 책, 158〜159쪽

12) 도진순, 앞의 책, 159〜160쪽

13)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 1948.1.17.

14)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 1948.1.17.; 김기협, 해방일기-1948년 1월 16일, 프레시안 2013.1.16.

15) 도진순, 앞의 책, 164쪽

16) 도진순, 앞의 책, 164〜165쪽

17) 장덕수 암살 사건의 최종판결은 1948년 4월 1일 있었고, 4월 22일 하지는 약간의 감형조치를 위하였다. 선고 및 감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광옥·배희범: 교수형 승인, 집행 유보. 김석황·신일준·김중목·최중하: 교수형 선고, 종신형으로 감형. 조상항·손정수:교수형 선고, 10년으로 감형. 조엽·박정덕: 10년형 선고, 5년으로 감형.

18) 일제시기의 악명이 높았던 사교집단으로, 민심을 현혹하고 재물을 편취하며 사형(私刑), 간음 등으로 민간의 폐해가 막심했다.

19) 도진순, 앞의 책, 163쪽

20) 정병준, 앞의 책, 688〜689쪽

21) 동아일보 1947.12.23.

22) 정병준, 앞의 책, 689〜690쪽

2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546쪽

24) 박태균·정창현, 『암살-왜곡된 현대사의 서막』, 141〜142쪽

25) 정병준, 앞의 책, 690쪽

26) 정병준, 앞의 책, 691〜692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