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이승만·한민당의 입법의원 장악과 단정 수립 계획

1946년 10월 12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치를 공포하면서 그에 따라 선거 일정을 진행하였다. 10월 항쟁이 이남 남쪽지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강행하였다. 입법의원 선거는 10월 18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였고,(주1) 관선의원 45명은 미군정의 버취 중위와 합작위원회 대표 5명 등 6명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10월 항쟁의 폭풍 속에서 치러진 입법의원 선거에 좌익은 전혀 참여할 수 없었고, 아무런 대응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입법의원은 11월 4일 개원 예정이었으나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선거 부정과 친일인사의 등장을 지적하면서 서울과 강원도의 입법의원 선거가 무효 처리되어 재선거를 실시해 한 달 뒤인 12월 12일에 개원하게 되었다. 재선거까지 치렀으나 민선의원의 선거 결과는 한민당·이승만의 우익세력이 압승을 거두었다. 한민당 12명,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17명, 김구의 한독당 4명, 인민위원회 2명, 무소속 10명 등으로 ‘우익세력의 산사태’가 연출되었다.(주2)

1946년 10월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포스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국민들 모습.
1946년 10월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포스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국민들 모습.

관선의원의 경우는 우익 7명, 중도우익 15명, 중도좌익 10명, 좌익 8명 등으로 분류되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이 조직기반이 없는 온건파였다. 좌익의 실세인 조선공산당은 완전히 배제되고 온건 좌익인 사회노동당과 근로대중당 계열로만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운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향이 불분명하고 조직적 기반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우익에서는 실세인 한민당이 배제되었으며 한민당 탈당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민중동맹의 인물들이 다수 기용되었다. 관선의원은 극좌와 극우를 배제한 중도를 지향했으나 조직적 배경이 없는 이들이 입법의원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관선의원에 대해서는 좌우로부터 모두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좌파가 조직적으로 불참을 결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노동당, 조선혁명당은 입법의원 불참 방침을 결정하였고, 인민위원회 출신의 제주도 대표 2명, 여운형 등 중도좌파, 일부 한독당 의원 등이 사임하였다. 이후 보궐 선거가 어느 정도 이뤄진 1947년 9월 입법의원 구성을 보면, 민선과 관선을 합쳐 우익이 55명, 중도파가 16명, 좌익이 14명으로 우익이 압도적이었다.(주3)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1946년 12월 12일)(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1946년 12월 12일)(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우익이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압승한데다가 미군정 경찰과 관리 등 행정요직을 한민당 계열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어떤 모자를 씌우더라도 이승만과 한민당이 실제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설령 중도파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민정장관에 안재홍을 임명하고, 나아가 김규식을 행정수반으로 앉히더라도 중도파가 권력을 쥘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처럼 입법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독촉과 한민당이 압승을 거두자 이승만은 6월 초에 제기했다가 반발이 너무 강해 잠시 접어두었던 단독정수 수립 문제를 다시 꺼냈다. 이승만은 1946년 10월 이후 남한 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해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노골적으로 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 결정과 미소공위를 폐기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서라고 촉구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에 있던 자신의 측근인 임영신, 임병직을 동원해 미국 정가와 유엔을 향한 외교를 지시하기도 했으나 이들로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대미 외교를 시도하였다.(주4)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가 워싱턴 정가에서 주장하고자 한 핵심 내용은 모스크바 결정의 폐기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두 가지였다. 이승만의 방미 활동을 권유한 사람은 바로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였고, 두 사람은 11월 초 사전 협의를 진행했다. 이승만은 하지로부터 도미 제안을 받자마자 바로 동의했으며, 미국에 건너가면 모스크바 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한국 정책, 즉 단정 수립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건너가자 바로 단정수립 주장과 모스크바협정 폐기를 주장했고, 1947년 초 이승만과의 사전계획에 따라 김구의 주도 아래 대규모 반탁시위 계획되었다.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자 하지는 이승만이 이런 주장을 펼줄 몰랐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도 이승만이 반탁, 모스크바 결정 폐기, 단정수립 주장을 펼 것을 알았으나 다만 이승만이 노골적인 반(反)하지, 반(反)군정 선전 활동을 전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주5)

이승만의 방미와 김구·이승만의 권력구상 시도

이승만은 1946년 11월 방미를 결정하고 난 뒤 우익진영의 ‘공동전략’을 짜기 위해 김구를 만났다. 이승만은 자신이 방미를 통해 미국 정부와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 노선을 제시했으나, 김구는 과거에도 그와 같은 방법이 성공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행동할 시기라며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논의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이승만이 방미를 통해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준비된 혁명적 계획을 통해 임시정부가 행정권을 장악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구는 주한미군 5만 명에 대항하는 폭동과 임정 법통을 근거로 한 정부 수립 노선을 주장했는데, 그걸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었다.(주6) 이승만은 방미외교 후 돌아올 때 장제스를 만나기 위해 대만에 들렀는데 이때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민필호(주7)를 만나, “이번에 귀국하면 나라를 세울 것이며, 자신은 대통령을 맡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백범이 총리가 되겠다고 하는 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하고 물었다고 한다.(주8) 이승만과 김구는 권력 장악 방법과 권력 배분 등 권력구상까지 논의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주9)

우익진영은 이승만 방미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세력 결집을 과시하였다. 우익계 정당·사회단체들은 1946년 11월 25〜26일 회합을 갖고 이승만에게 ‘민주의원 의장 및 대한민국 대표’의 자격을 부여하기로 결의하고, 조소앙·신익희 등 79명으로 구성된 ‘한국민족대표외교후원회’를 조직, 1〜3억원의 후원금을 모의기로 했다. 이승만의 방미를 앞두고 우익청년들이 혈서를 전달하고,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직후인 12월 7일 선전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우익단체들은 ‘외교사절파견국민대회’를 열고 유엔·맥아더 사령관·하지 중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발표하였다. 이같은 대대적인 행사에도 불구하고 우익진영 내부에는 갈등 요소들이 잠복해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임시정부, 한민당 사이의 최대공약수는 모스크바협정 파기, 미군정이 지지하고 있는 김규식·안재홍의 중간파 타도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을, 김구와 임시정부는 임정법통론에 의한 정부수립을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기금모금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12월 2일 100만원의 거금을 헌금했으나 김구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반면, 김구와 같은 한독당의 신익희는 기금모집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김구와 이승만의 협력관계는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다.(주10)

1946년 말〜1947년 초 이승만·한민당과 김구·한국독립당(한독당)은 협조와 함께 경쟁하는 관계였지만, 입법의원·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한 공격과 반탁운동에는 보조를 같이했다. 입법의원의 개원을 전후하여 한민당은 입법의원의 성립으로 좌우합작위원회의 존재 의의가 끝났다며 해산을 요구하였고, 한독당도 이에 가세하였다. 1947년 1월 11일 미소공위 재개를 위해 하지가 치스차코프에게 보낸 ‘서신’ 내용이 공개되자 입법의원·한독당·한민당·독촉 등 우익진영은 성명발표, 시위, 테러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반탁운동과 중간파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1월 16일 민주의원·한민당·한독당 등 우익 35개 단체는 ‘미소공동위원회 5호 성명에 대한 서명 취소, 좌우합작위원회 단호히 부인’ 등을 내용으로 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전국반탁학련의 반탁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중이던 이승만은 이 시위가 반미운동으로 발전할까 불안해하며 자제를 요청하였고 하지 사령관의 엄중 경고와 함께 미군정이 강력히 제지에 나서자 김구는 이 시위를 보류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 18일 천도교당에서 열린 대회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달라고 당부하였다.(주11)

1947년 1월 18일의 대규모 반탁시위 계획이 좌절한 것은 정보를 입수한 미군정의 강력한 대응 때문이었으나 우익 진영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용한 탓도 있었다.

한편, 12월 4일 이승만은 하지가 내어준 군용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도착, 바쁘다는 맥아더의 면담거절에도 하루를 더 묵어 ‘눈총을 받아가면서’ 맥아더를 몇 분간 만날 수 있었다. 12월 8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지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의 선전에 주력하였다. 그는 하지의 미군정 정책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서 아예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며 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분개한 하지는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 지원을 통한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지지자들은 하지가 이승만을 그 전부터 반대하고 압박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하지가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도미 중 하지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하고 난 뒤부터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등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운이 따랐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1947년 3월 12일 대소봉쇄 정책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고, 3월 20일에는 <뉴욕 타임즈>가 미국이 3년간 6억 달러의 대한원조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것들이 마치 이승만의 공인 것처럼 선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는데, 도쿄를 재차 방문하고 중국에 들러 상하이와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났다. 이승만은 4월 21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 장제스가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지도자 맥아더·장제스를 만났고,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대동했다.(주12)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의 계량기는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그는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했다. 경쟁자 김구는 이승만에게 또 다시 밀렸고 좌절했다.(주13)

방미 후 귀국 도중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하고 그의 전용기를 타고 항일투쟁의 영웅 이청천 장군을 대동하고 귀국한 이승만은 인기 절정에 올랐다.
방미 후 귀국 도중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하고 그의 전용기를 타고 항일투쟁의 영웅 이청천 장군을 대동하고 귀국한 이승만은 인기 절정에 올랐다.

한편, 이승만이 미국에서 하지를 공격하고 단독정부를 선전하고 있는 동안, 국내 우익세력은 1947년 1월 초부터 김구의 주도로 강력한 반탁운동을 준비하였다. 1월 초 민주의원이 38선 철폐와 얄타 밀약 취소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연합국에 발송했고, 1월 7일에는 전국학련이 탁치 절대 반대와 자주독립 완수를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는 설명을 발표했다. 1월 13일부터 김구는 죽첨장에서 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 등 우익단체들을 모아 연일 회의를 개최했고, 1월 14일에는 김구, 조소앙, 유림이 하지 사령관을 항의 방문했다. 1월 16일에는 민주의원, 비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한독당, 한민당 등 35개 우익단체가 강경한 반탁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이승만과 김구가 해외와 국내에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상황을 악화시켜 가자, 미군정은 이들이 반탁과 반군정을 위한 폭동과 대규모 시위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1월 10일경 이승만과 김구의 계획에 대한 제보가 입수되었다. 제보자들은 제2의 3.1운동으로 기획된 이 시위와 폭동이 한인중에 순교자를 발생시키고 혼란을 야기해 군정으로 하여금 김구나 여타 우익 지도자를 투옥하게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은밀하고 신뢰할 만한 제보자들”은 이승만이 이 폭동을 기획했으며, 1월 18일부터 20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다고 알렸다.(주14)

이 정보를 입수한 하지와 미군정은 이 폭동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이승만에게 영향력이 있는 굿펠로우에게 급전을 보내 이승만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굿펠로우의 조언에 따라 이승만은 대규모 시위를 중단하고 반외세·반미 행동을 자제하라는 언론 보도문을 발표하고, 1월 15일에는 김구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 소요와 폭력시위 계획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의 협조를 얻어낸 하지는 1월 16일 김구와 2시간 반 동안 회담하며 설득했다.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은 다른 우익 지도자들을 접촉했다. 같은 날 하지는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반탁 시위가 남한 단정운동과 긴밀히 연계된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또한 하지는 이승만과 김구를 지목해 “몇 사람의 국내적 혼란과 오도된 정치 행동” 때문에 미소공위가 연기되고 임시정부 수립이 지연되었다고 비난했다. 하지의 지시에 따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1월 17일 모든 선동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시위를 주도할 것으로 알려전 전국학생총연맹 본부를 1월 15일 3차례, 1월 16일 1차례 수색하며 관련자를 연행했다. 이처럼 미군정의 강력한 대응으로 1월 18일의 시위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주15)

김구의 과도정부 실패와 하지·이승만의 갈등

이승만은 미국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선전하고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는 등 강력한 반군정 활동을 폈지만, 대규모 시위·폭동이 실제로 진행되어 반미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김구와 법통론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정부가 주도권을 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굿펠로우의 조언을 받아들여 김구에게 폭동계획을 중지하라고 지시했으며, 김구는 이승만의 반대와 미군정의 강력한 저지를 거부하고 행동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1월 18일의 계획이 무산된 뒤에도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론에 근거한 과도정부 수립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1월 19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 3단체의 통합을 제안했고, 20일과 22일 통합을 위한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이에 대해 독촉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는 이승만의 회답을 기려야 한다고 했으나 김구는 반탁독립을 위한 통일기관 수립이 시급하다며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반탁투위)를 조직했다. 42개 우익단체를 망라한 반탁투위 위원장은 김구, 부위원장은 조소앙·김성수였다. 반탁투위은 3.1절 기간을 반탁주간으로 설정해 대대적인 반탁시위를 준비했다. 미군정은 반탁투위 결성이 이승만의 부재를 틈탄 김구의 권력장악 시도라고 판단했다.(주16)

2월 8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를 통합해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이승만의 두 단체를 흡수 통합해 비상국민회의를 확대,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비상국민회의가 임정의 독립운동 법통을 계승했으며 나머지 두 단체가 이에 참가해야 한다는 임정법통론이었다. 비상국민회의는 2월 14〜17일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세 단체를 통합해 국민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의회는 임시의정원을 계승·보강한 기관이며 입법의원에 맞서는 상설적인 입법기관을 자임했다. 김구는 국민의회가 임시기구가 아니라 ‘상설적 대의조직’이며 ‘독립운동의 피묻은 최고기관’으로서 ‘대한민국의 유일한 역사적 입법기관’이라고 규정하였다.(주17) 그러나 국민의회는 실제로는 임정법통론에 공명하는 임정지지세력의 재편일 뿐이었다. 2월 하순에는 김구, 조완구, 조경한의 주도 아래 한독당과 한민당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한독당 내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주18)

미국부부에서 파견한 윌버 장군과 대화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장 김구(1947년 3월 13일)
미국부부에서 파견한 윌버 장군과 대화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장 김구(1947년 3월 13일)

김구는 3.1절을 기해 재차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3월 1일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는 국민의회의 법통을 승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한다고 결의했다. 전국학련 또한 임정을 정식정부로 추대했다. 김구는 3월 3일 국민의회를 소집해 이승만을 주서, 자신을 부주석에 추대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 김구의 쿠데타에 제동을 걸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군정의 저지였다. 미군정은 3월 5일 엄항섭, 김석황을 체포하면서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 “반란행위로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브라운 소장은 김구, 조완구, 이시영, 유림을 소환, 면담하면서 임정이 행동을 개시하면 조소앙, 조성환, 조경한을 체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군CIC와 경찰은 한독당사와 김구의 죽첨장을 수색해 ‘대한민국특별행동대사령부포고령 제1호’ 등의 자료들을 압수했다.(주19)

좌익은 김구의 이같은 시도를 ‘아이들 장난(兒戱)’이라고 비난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도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김구는 김규식 등 중도파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이승만과 한민당, 경찰과 한국인 관리 등도 모두 등을 돌렸다. 결국 김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주20) 1947년 4월 28일 이승만은 그의 귀국 환영대회에서 김규식의 좌우합작과 김구의 임시정부 수립을 견제, 비판하면서 자신의 남한과도정권(단독정권) 수립을 내세웠다. 1947년 초반 김구·임시정부는 반탁운동의 주도함으로써 우익의 정치적 주도권 회복과 함께 국민의회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고 했으나 미군정과 경찰의 물리적 압박, 이승만과 한민당 진영의 견제로 체면만 손상한 채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1947년 초반의 임시정부 봉대운동은 1945년 말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주21) 반면, 이승만은 방미 활동의 성과, 김구에 대한 견제 등을 통해 우익내에서 주도권을 강화했다. 방미 중 하지에 대해 노골적인 악선전과 비방을 한 결과 사이가 최악으로 악화되었으나 우익 내 최고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 김구, 하지. 세 사람은 신탁통치, 과도정부, 남한 단선 등을 두고 협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때로는 갈등관계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와 김구는 민족주의 때문에 충돌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때로는 하지와 협력하고 때로는 비난하며 입지를 넓혔다. 하지는 이승만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자 격렬히 반발,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까지 했으나 결국은 이승만을 밀어주었다.
이승만, 김구, 하지. 세 사람은 신탁통치, 과도정부, 남한 단선 등을 두고 협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때로는 갈등관계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와 김구는 민족주의 때문에 충돌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때로는 하지와 협력하고 때로는 비난하며 입지를 넓혔다. 하지는 이승만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자 격렬히 반발,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까지 했으나 결국은 이승만을 밀어주었다.

한편, 이승만의 배신행위에 화가난 하지는 1947년 1월에 굿펠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을 두고 ‘그 늙은 개자식(the old s.o.b)이 나에게 한 배신 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라고 썼을 정도로 격분해 있었다. 하지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 이승만과 김구가 대규모 반탁시위를 계획했으며 자신에 대한 비방이 이승만의 방미의 목적 가운데 하나임을 알았다. 하지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1947년 1월 초의 반탁 시위를 저지한 뒤 대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하지는 입법의원과 중간파를 적극 활용해 미군정의 과도정부 수립 계획을 계속 추진하려 하였고, 다음으로는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자 했다. 하지는 1947년 2월 5일 입법의원의 반탁 결의안 통과를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는 한편,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이러한 계획에 미온적이었고, 미소공위 재재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이는 더 문제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의 하지 비난 활동에 대해 직접 해명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던 하지는 1947년 2월 27일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중 한명이었던 서재필(주22)을 ’미군정 최고의정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국내로 초청해 이승만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50년 동안이나 한국을 떠나 있었고 80세의 고령인 서재필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주23)

1948년 1월 군정청 관리 및 남조선과도입법의원들과 신년 기념촬영. 맨 왼쪽이 서재필, 가운데 모자 쓴 이가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사진= 위키백과). 하지는 서재필까지 끌어들여 이승만의 대안을 찾으려 했으나 너무 연로하고 너무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서재필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1948년 1월 군정청 관리 및 남조선과도입법의원들과 신년 기념촬영. 맨 왼쪽이 서재필, 가운데 모자 쓴 이가 입법의원 의장 김규식(사진= 위키백과). 하지는 서재필까지 끌어들여 이승만의 대안을 찾으려 했으나 너무 연로하고 너무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서재필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

[주]

1) 미국식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면 당연히 ‘보통선거’가 맞았다. 그러나 좌파를 배제하고 우파와 중도좌파를 선택적으로 선출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미군정은 선거방법을 변형시켰다. 선거는 각 도 대표의 선출을 목적으로 가장 작은 행정단위에서부터 큰 행정단위까지 후보자 2인씩을 선출하여 올라가는 4단계의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거를 진행했다. 미군정은 한국인의 높은 문맹률과 정치적 미숙을 이 같은 간접선거 실시 이유로 들었다. 또한 최하단위의 선거권자를 개인이 아니라 세대주로 한정함으로써 우익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김영미, 1946년 입법의원 선거, 국사관논총 제75집, 138〜140쪽)

2) 김영미, 1946년 입법의원 선거, 국사관논총 제75집, 148〜150쪽; 정병준, 1946〜1947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 한국사론29(1993), 293〜294쪽

3) 김영미, 위의 글, 152〜156쪽

4)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역사비평사, 2005, 630쪽

5) 정병준, 위의 책, 632쪽

6) 정병준, 위의 책, 633쪽

7) 민필호는 장준하와 함께 학병을 탈출해 광복군이 된 김준엽(후에 고대 총장 역임)의 장인으로, 충칭임시정부 판공실장으로 있으면서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광복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부단장으로서 한인 교포의 귀국 등 후속업무를 담당하며 중국에 머물렀고, 1948년 국공내전 중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갔다가 1956년 귀국했다.

8) 김준엽, 『석린 민필호전』, 나남출판, 1995, 137〜138쪽

9)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43쪽

10) 도진순, 위의 책, 144〜145쪽

11) 도진순, 위의 책, 145〜147쪽

12) 정병준, 앞의 책, 636〜641쪽

13) 리차드 로빈슨/ 정미옥 옮김, 『미국의 배반』, 과학과사상, 1988, 183쪽

14) 정병준, 앞의 책, 642〜644쪽

15) 정병준, 앞의 책, 644〜645쪽

16) 정병준, 앞의 책, 646〜647쪽

17) 도진순, 앞의 책, 148쪽

18) 정병준, 앞의 책, 647〜648쪽

19) 정병준, 앞의 책, 648〜649쪽

20) 도진순, 앞의 책, 149쪽

21) 도진순, 앞의 책, 151쪽

22)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890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미국명 ‘필립 제이슨’)가 되었고, 1893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초빙으로 일시 귀국, 1896년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협회 설립에 관여했으나 대한제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7년 2월 하지 사령관이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추대하였고, 하지의 요청에 따라 서재필은 7월 1일 귀국하였으나, 80세의 고령인데다가 미소공위가 결렬된 상태여서 남한 정치상황이 정리된 상태여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한국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8년 9월 11일 서재필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23) 정병준, 앞의 책, 649〜651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