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미국의 중도파 활용 구상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

1946년 5월 초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국과 소련은 한동안 접촉을 하지 않았다. 양측은 모두 내부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 장래의 임시정부 수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먼저 한국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확보하고, 한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점령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은 미소공위 결렬 전부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토지개혁과 민주법령제정, 중요산업 국유화, 교육제도 정비, 공산-신민 양당 통합과 북조선노동당 출범 등을 이북에서 친소적인 인민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미국은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통해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중간파의 좌우합작을 지원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 구상을 추진하였다. 미국의 과도정부 수립 구상의 핵심은 미군정 행정기구에 한국인의 참여를 확대하여 통치기반을 강화하고 새로이 입법자문기구를 구성하며, 이를 위해 중도좌우파 온건 정치인을 활용한다는 것이었다.(주1)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이를 주도한 여운형·김규식의 생각이 미군정의 구상과 달랐고, 좌익측의 박헌영과 우익측의 김구·이승만도 반대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의 심한 반대와 견제, 좌익3당합당 과정에서의 소외, 미군정의 일방적인 입법자문기구 추진 등으로 1946년 말에는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어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상황까지 갔다. 1946년 12월 12일 미군정 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되었으나 이승만·한민당 등 극우세력이 장악한 상태에서 1947년 1월 20일 한민당 의원들의 주도로 반탁결의안이 통과되자 김규식 의장은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1946년 10월 항쟁 이후 재차 중간파를 활용한 정책구상을 추진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10월 항쟁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자의 사주와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발표했지만 자신들의 남한 점령통치를 돌아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미군정은 10월 항쟁에서 주요 공격 목표가 된 친일경찰과 친일관리의 숙청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남한의 경제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등 미소의 협력을 거부하고 우익주도의 친미권력 수립을 주장했던 미군정 고위관리들이 재차 중간파를 활용해 극우와 극좌를 견제하는 방안에 동의한 것은 남한의 이런 정치상황 때문이었다.(주2)

미군정의 브라운 소장(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은 시골에 물러나 있던 김규식에게 상경과 함께 입법의원 의장직을 계속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입법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과 입법의원에 불참한 장건상 등에게 좌우합작을 재추진하고 합작의 조건을 완화해 우익세력을 보다 광범위하게 합작에 끌어들여 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1947년 1월 이래 입법의원 중간파 지도자들에게 토지개혁안의 내용을 완화시켜 입법의원에서 통과시킬 것을 종용했다. 미군정은 중도파가 지방에서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토지개혁과 같은 획기적인 조치를 중간파의 이름으로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평년작의 30할(300%)를 토지가격으로 하여 15년 균분으로 지주보상, 농민상환 방식의 초안에 대해 농민들은 긍정적이었으나 우익(특히 한민당)의 사보타지와 보이콧으로 진전될 수 없었다.(주3)

미군정은 온건우파의 주도 아래 입법의원을 통해 토지개혁 등 개혁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과도행정기구의 수장으로 김규식을 적극 검토하였다. 미군정의 이러한 방안 구상은 좌익세력에 대한 견제뿐만 아니라 김구·이승만의 극우세력, 특히 김구의 충칭임시정부가 끊임없이 쿠데타를 기도하며 권력수립에 나서는 것에 대한 견제 의도도 컸다. 미군정은 1947년 2월 5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는데, 천도교청우당은 “행정권 이양이란 이름뿐이오. 그 실은 행정사무를 집행하는 한 사무원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을 행정 수반에 임명함으로써 군정이 모두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것으로 과시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극히 기만적인 것이었다. 미군정의 이같은 시도는 이북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응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으나 양쪽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1947년 3월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과 만나 환담하는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사진=국사편찬위)
1947년 3월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과 만나 환담하는 김규식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사진=국사편찬위)

사실 미군정이 김규식을 행정수반으로 한 과도정부를 완성하려 했던 계획은 지극히 모순적인 것이었다. 우선 미군정 점령통치를 뒷받침해주는 실질적인 물리력은 대부분 극우 성향의 경찰, 관리, 청년단체들에게 있었는데 미군정은 이같은 자신들의 통치기반이 훼손되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중도파를 통해 입법의원과 군정 내에서 한국인의 지도력을 구축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친일세력의 정화와 극우세력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가 전제되어야 했으나 미군정은 중도파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중도파는 미군정을 통한 정치 사회적 개혁과 조직 역량 강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소공위 성사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으로 기울었다. 김규식은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중도파의 미군정에 대한 의존을 철회하고 중간파 내부의 통합과 세력 결집을 모색, 좌우합작위원회와 민주주의독립전선 등 중간파 여러 단체의 통합을 통한 자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주4)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에 임명된 안재홍의 취임연설 모습.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에 임명된 안재홍의 취임연설 모습.

미군사령관 하지는 온건중도파를 활용한 과도정부 수립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고 미소공위 재개가 임박하자 남한과도정부 설립을 기정사실화해 선포했다. 하지는 5월 17일 군정청 법령 141호로 군정청 조선인기관의 명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명명하였고, 군정청 수립 이후 추진된 군정의 한국인화가 완료되었다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2차 미소공위에서 남조선과도정부의 실체를 인정받기를 원했으나 소련은 이에 대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도파도 한국인의 정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한 과도정부 선포 이후 하지는 입법의원을 통한 보통선거법 제정과 과도정부 수립을 계속 추진했으나 김규식은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김규식은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선거법을 통해 입법의원을 재선출한다면, 그 결과는 친일파 정상배와 민족반역자가 지배하는 입법의원이 될 것이고, 국민들은 그런 입법의원을 결코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피력하였다. 나아가 그는 만약 사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한국 총선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되면, 극우세력이 선거를 지배하게 되고 역시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주5)

미군정과 김규식 사이에는 이처럼 매우 큰 생각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군정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한 남한단독정부를 검토하다가, 다시 김규식을 수반으로 한 중도파 주도의 과도정부를 계획하는 등 갈지자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미국은 마지막 단계에서 결국은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의 상식을 벗어난 극단적인 행태와 권력욕, 민심과 괴리된 정치적 행보, 하지와 미국 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도전 등 근본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인물로 이승만을 선택한 것은 김규식 등 중도파는 자주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세계적인 차원의 냉전체제 등장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독일의 추축동맹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중심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독일과 베를린 분할, 동유럽 장악 등을 놓고 분열, 갈등 관계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얄타협정에서 합의한 것과 달리 소련이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체코 나아가 터키와 이란, 그리스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미국에서도 소련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고, 협력 관계가 아닌 대결 관계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경우, 1946년 전반까지 미국무성을 중심으로 여전히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해결을 선호하는 국제파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맥아더-하지로 이어지는 현지점령군 사령관들과 펜타곤(군부)는 소련과의 대결구도를 기본으로 한 정책을 주장했다. 1947년 초반 세계 곳곳에서 미소 대결과 함께 냉전 체제가 구속되기 시작하면서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공산세력이 확장하고 있는 접점에 해당하는 그리스와 터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1947년 3월 12일 그리스에 2억5천만 달러, 터키에 1억5천만 달러를 지원하고 양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미국은 무장한 소수파 또는 외세 압력에 대한 굴종을 반대하며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미국이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해 세계 어디서든 단호하게 행동하겠다는 이야기였다.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은 소련과의 협력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것이고 소련과의 적대적 관계를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주6)

동서 냉전체제의 형성-유럽 상황
동서 냉전체제의 형성-유럽 상황

미국은 3월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에 이어 6월에는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재건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미국무성 관리로 가장 먼저 냉전논리를 전개한 조지 캐넌(George F. Kennan)이 설파한 소련 봉쇄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캐넌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46년 2월 22일 쓴 ‘긴 전문’과 그 뒤 X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 “소련의 비타협적이고 팽창적인 태도는 외부의 대응과 관계없이 독재정치에 기반한 소련의 정치체제 및 그 운영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소련을 악으로 치부, 봉쇄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냉전논리였다. 마셜플랜으로 불리는 유럽재건계획은 캐넌식의 상황판단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2차 대전 후 유럽은 경제위기에 직면했는데 미국은 이러한 경제 위기가 공산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유럽을 경제적으로 부흥시켜 공산화의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계획을 마련, 유럽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시행하였다. 미국의 대유럽 원조정책인 마셜플랜에 대응하여 소련은 1947년 9월 공산권을 통일적으로 묶은 코민포름을 창설(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 9개국 공산당이 회원으로 가입), 동구권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유럽 집단안보체제인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1949년 4월 창설(1949년 회원국: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미국) 하였고, 소련은 1949년 5월 베를린 봉쇄해 강경대응하였다. 또한 1949년 8월 29일 핵실험에 성공, 미국 등 서방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함으로써 동서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주7)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28일부터 충칭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마오쩌둥, 장제스, 미국특사 패트릭 헐리.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28일부터 충칭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마오쩌둥, 장제스, 미국특사 패트릭 헐리.

동유럽과 터키, 그리스, 이란 등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대중국정책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일본과 싸우던 시기 중국 전구 사령관으로 장제스와 함께 일했던 스틸웰은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와 매우 사이가 나빴다. 그는 참모총장 조지 마셜에게 자신이 장제스와 나눈 대화를 “한 시간 반에 걸친 헛소리와 개소리”라고 했는가 하면,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장제스를 “완고하고 무식하고 편견에 차 있고 젠체하는 폭군”이라고 격하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대중국 전문가들 또한 국민당 정부의 소극적인 대일 항전에 불만을 나타냈고, 정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미국의 원조가 헛되게 사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다수 중국 관련 분석가와 실무자들이 중국 국민당정부에 비판적이었는데 이는 결국 루스벨트의 대 중국 정책에 투영되어서 일제 패망 후 초기에는 장제스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기보다 국공협상을 통한 연립정부수립을 압박하였다.(주8)

그러나 전후 소련과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장제스를 압박해 국공협상을 성사시키려던 미국의 입장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팽창을 보면서 미국은 최소한 중국대륙의 공산화는 막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고, 이와 함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소련의 위협을 받는 국가에 대해 원조를 제공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이 소련의 팽창에 대한 봉쇄정책에 맞추어지면서 미국정부는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전 장제스 정부의 차관요청을 두 차례나 거절했었는데, 워드마이어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에 4.63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미국이 적극적인 원조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는 가운데 국공내전이 본격화되었고, 1947년 2월 린뱌오(林彪)가 이끄는 동북민주연군이 쏭허강을 건너 대공세를 전개, 6월 초에는 창춘 일대를 점령하면서 공산군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이어 1948년 9월 쉬저우(徐州) 전투에서 공산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장제스 정부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주9)

중국 상황의 변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전선의 악화는 미국이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하고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장제스가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 대만으로 쫓겨 가자 미국은 중국 대신 과거 적국이었던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략을 새롭게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남한에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남한을 일본을 지키고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할 반공보루로 삼고자 했다.

미소 냉전과 2차 미소공위 재개

1947년 들어 전 세계 곳곳에서 미소 대결과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1947년 초반까지 미소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결별한 상태는 아니었다. 북조선의 경우 소련군의 지원 아래 반제반봉건혁명을 진행, 인민정권을 확고히 함으로써 우익세력이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남한의 경우 미군정의 지원 아래 극우와 친일세력이 보호, 육성되고 좌익에 대한 탄압과 분열공작이 강화되어 좌익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과 소련 어느 쪽도 미소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통일정부 수립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946년 가을부터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미소간의 접촉이 진행되었다. 1946년 11월 26일 소련측이 미소공위 재개와 관련한 서한을 보냈고, 12월 24일 미국측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냈다. 1947년 1월 11일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소 양측이 주고받은 서한 내용을 공개하였는데, 미국측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한 것은 모스크바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이며, 초청받은 개인, 정당과 사회단체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한 후에는 공동위원회의 임무나 연합국 또는 모스크바 결정의 실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를 교사, 선동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해석, 발표하였다. 이는 과거 하지의 주장을 다소 완화한 것으로써 5호 성명에 지지한 뒤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반대하거나 선동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의 발표에 대해 우익세력은 강하게 반발, 반탁투쟁을 전개했는데, 하지는 1947년 1월 23일 일부 오도된 정당의 경솔한 행동은 독립을 지연시키고 한국의 앞길에 유해할 것이라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미군정은 2월 10일, 15일, 18일, 25일, 3월 4일 등 5차례에 걸쳐 반탁세력을 설득하기 위한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주10)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해 움직이고 있던 상황에서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소련·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응하여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자 한국의 극우세력들은 열렬히 지지했으나 표면적으로는 한국문제에 바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 후에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4월 미국무장관 마샬과 소련외상 몰로토프가 서한을 주고받았고, 마샬의 5월 2일 서한에 대해 몰로토프가 5월 7일자 서한에서 ‘1946년 12월 24일자 미국측 수정안을 승인할 용의가 있다’고 양보하여 휴회 1년만에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주11)

1947년 3월 12일 의회 연설을 통해 동서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1947년 3월 12일 의회 연설을 통해 동서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재개되었다. 2차 미소공위는 1차 때와 달리 큰 대립 없이 속도를 내어 6월 6일 가장 큰 난관이었던 협의대상 문제에도 합의하는 등 일사천리로 나아갔다. 6월 11일에는 공동성명 11호에 합의했는데, 11호에는 공동위원회가 협의방법과 협의대상에 대한 원칙에 합의했다고 명시되었다. 그것은 1946년 12월 24일자 미국측 수정제의와 1947년 5월 7일자 소련외상 몰로토프의 서한내용을 반영한 것이었다. 공동위원회의 구두협의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청원서 제출마감일이 6월 23일로 결정되었다. 미군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반탁세력은 전국 몇 곳에서 소규모 반탁시위를 벌였고, 서울에서는 반탁청년학생 시위대가 소련측 대표단에게 폭력 행위을 자행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의 진전을 방해했다. 전국학련(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 이철승)이 주축이 된 1,500여명의 시위대는 덕수궁에 돌입,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 차량에 투석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의 보호 아래 대표자를 보내 미국측 대표 브라운 소장과 회담까지 했다. 이 사건은 민족통일총본부의 배은희가 이승만에게 알선한 78만원의 자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미군정은 이 반탁시위의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으며 이승만이 막후 인물임을 알았으나 내버려두었다.(주12) 이에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가 강하게 항의하였고 미국측 수석대표가 재발방지를 약속, 표면상으로는 잘 마무리되었으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고가 아닐 수 없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들의 공식 기념촬영(1947년 6월 1일). 왼쪽부터 존 웨커링(준장) 미국대표, 코르쿨렌코(대좌) 소련대표, 둔킨 소련대표, 아더 번스 미국대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스티코프(중장) 소련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미국 수석대표, 레베데프(소장) 소련 표, 캘빈 조이너 미국대표, 발라사노프 소련대표, 윌리엄 랭던 미국대표, 로렌스 링컨 미국대표(사진=뉴시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들의 공식 기념촬영(1947년 6월 1일). 왼쪽부터 존 웨커링(준장) 미국대표, 코르쿨렌코(대좌) 소련대표, 둔킨 소련대표, 아더 번스 미국대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스티코프(중장) 소련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미국 수석대표, 레베데프(소장) 소련 표, 캘빈 조이너 미국대표, 발라사노프 소련대표, 윌리엄 랭던 미국대표, 로렌스 링컨 미국대표(사진=뉴시스)

6월 25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양측 대표단과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미군정청 입법의원 대회의실에서 미소 양측 대표단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등 46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합동회의가 열렸다. 한성일보(1947년 6월 26일자)는 “이것으로서 임시정부 수립은 본격적으로 태동을 보이고 조선독립은 또 다시금 굳게 약속되는 듯 싶었다”고 보도했고, 6월 26일 소련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평양회의를 위해 출발하는 등 낙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6월 29일 브라운 소장 등 미국측 대표단이 다음날 평양에서 개최될 회의를 위해 서울을 출발, 평양으로 갔으며, 미군정 정보(G-2)보고는 좌우가 다가올 선거에 쓸 돈을 마련하느라 바쁘다며 앞날을 낙관하는 정보보고를 냈다. 그러나 7월에 들어서면서 미소공동위원회는 다시 난관에 부닥쳤다.

미국의 정책 전환과 미소공위 결렬

7월 1일(애초 6월 30일 개최 예정이었으나 하루 연기됨) 평양에서 북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미소공위 대표들이 합동회의를 가졌다. 이어 7월 2일과 3일 미소공위 본회의를 개최한 다음 미국측 대표들이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 뒤부터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7월 초 소련은 즉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구두협의를 개시하자고 제의했으나 미국측은 어느 단체와 협조할 것인지 먼저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7월 8일부터 미국측과 소련측은 협의대상 선정에 대해 다시 심각한 이견을 드러내며 대립했다. 소련측은 정당, 사회단체 중 친일파, 민족반역자 혹은 유령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했고, 미국측은 협의를 청원한 단체 전부를 협의대상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소련측은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했던 단체들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며 강경하게 나왔다. 7월 중순 언론들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난관에 봉착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는데(주13) 이때부터 미소공위는 사실상 결렬 상태가 되었다.

1947년 6월23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인 서울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서 열린 대규모 반탁 시위 모습.
1947년 6월23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인 서울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서 열린 대규모 반탁 시위 모습.

7월에 들어와서 미국측은 반탁단체를 협의대상에 올리는 것에 대해 소련의 협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측은 유령단체를 포함해 협의를 청원한 단체 전부를 협의대상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등 억지 주장을 펴며 미소공위 활동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등 사실상 결렬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 미국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소련과의 협조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에서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미국 대표단의 평양 방문은 새로운 방침 결정에서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분명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미소의 냉전이었다.

미국은 평양 방문 기간 중 우익 지도자들과 기독교계 지도자들 광범위하게 면담하고 소비에트식 정권에 저항하는 반대세력이 광범위하다는 점을 폭로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조만식을 만나 보니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조만식은 미소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면 그걸 받아들이겠다면서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미국 대표단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큰 유감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탁통치 이전이라도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미군정 점령정책의 취약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평양 귀환 대표단원들에게 보고 들은 것과 방문 소감을 빠짐없이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지시했는데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이북에는 이미 인민위원회 정권이 확립되었고, 전반적으로 정치적 통제가 완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지적했다.(주14) 미국은 이북에서 우익 또는 반소·반공세력이 영향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난관에 봉착한 미소공동위원회 보도 기사(조선일보 1947년 7월 17일자)
난관에 봉착한 미소공동위원회 보도 기사(조선일보 1947년 7월 17일자)

미국측은 평양 방문 이후 ‘광범위한 협의’ 원칙에 따라 반탁단체를 참여시킬 것을 완강하게 고집했다. 그러면서도 회담장 바깥에서는 반탁단체를 혐의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반탁진영을 자신의 계획 아래 통일시키거나 회담에서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하지는 미소공위 동안 정치적 집회를 금지함으로써 반탁진영의 노골적인 대규모 반탁운동은 적절히 통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단정안을 노골적으로 선전했고, 김구는 반탁학생들을 동원해 소련측 대표를 공격하는 등 반탁운동을 계속했다. 중도파 또한 미국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중간파는 좌우 모두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했는데, 미국이 볼 때 중도파는 공산당 쪽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미국은 보고서 분석 후 내용 공개를 금지했다. 보고서 내용들이 미국 구상과는 전적으로 달랐고, 공개되면 미국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 미국대표단 간사 웨커링 준장은 답신서들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거의 전적인 이해 부족을 나타내었고, 이것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가르치려 했던 것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다.(주15)

미소간에 협의대상을 놓고 실랑이가 계속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소련측은 미군정이 남한 우익진영으로부터 전적인 협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완강하게 반탁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소련측의 공세에 강하게 반발, 저항하는 한편, 새로운 대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주16) 미군정은 소련으로부터 공격받고, 남한 내 우익의 협조도 받지 못하는 등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더 이상 미소공위를 통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7월 9일부로 작성, 맥아더를 거쳐서 미 국무장관에게 전달된 전문에서 하지는 “한국인의 전망을 얻지 못함으로써 미소공위는 난항에 부닥치게 되었다”고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활동에 대해 ‘악당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말을 강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지만 신탁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 말에게 그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라고 썼다.(주17)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이관과 남한 단독 총선거 결정

7월부터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과의 협력 정책을 포기하고 남한 지역만이라도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미국무성의 소련과의 협조를 통한 문제 해결 정책이 파탄난 상태에서 대소강경론자들이 주도하는 38선을 미국의 극동방위전선으로 굳히려는 정책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나 한민당의 단선노선과 상관없이 미국의 정책은 한국의 분단으로 결정되고 있었고, 미국은 미소공위 결렬 뒤의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7,8월 미국의 일부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소련의 팽창을 저지해야 하며 중국에서 장제스군이 공산군에 밀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중국의 국공내전 상황을 직접 파악하고 1947년 7월 그에 대한 보고서를 낸 바 있는 워드마이어 중장은 1947년 8월 26일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내한해 각계 인사들과 만난 뒤 9월 19일 장문의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미소공위는 실패했다고 보면, 한반도 문제를 4대국 회의에서 풀도록 하고, 그것도 실패할 경우 유엔총회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에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주18)

소련은 마지막까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임시정부 조직과 구성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동분서주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8월이 되면서 미소공위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상태로 공전만 거듭했다. 이때부터는 소련측도 회담자체보다는 가급적 서울에 오래 머물러 좌익에 대한 테러를 막아줌으로써 좌익의 세력 약화를 방지하는 데 더 신경을 썼다. 미소공위는 공식적으로 10월 18일에 결렬되었는데 그 사이 양측은 책임회피를 위해 공식제안을 하지 않으려 했고, 소련측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막기 위해 가능한 시간을 끌려했다. 미국은 9월 16일 소련에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알리는 서한을 발송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추진이었다. 이에 대응해 소련은 9월 26일 미소 양군의 철수를 제안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이전에도 검토한 바 있었으나 양군의 철수는 곧 한반도 전체의 소비에트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국은 소련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내부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준비하였다.(주19)

<표> 제2차 미소공위 회담의 경과(주20)

회의차수

개최일자

토론 및 결정사항

미국측 주장

소련측 주장

25차: 5월22일

의사일정과 의제 논의

26차: 5월23일

미소공위 활동 상황을 언론에 발표하는 문제

27차: 5월29일

임정 조직의 구조와 원칙에 대한 질의서 작성

자문단체 문제 논의

28차: 5월31일

자문단체의 숫자와 협의 방법에 대한 소련측 입장 청취.

29차: 6월2일

미국측 정강 질의서 2,3항 친일잔재 청산과 반동 숙청 제외 주장

30차: 6월4일

협의규칙에 관한 전체 회의, 합의 불발

31차: 6월6일

미소공위 5호성명서 서명단체 모두 구두자문 위해 초청대상 사실에 합의

32차: 6월7일

공동결의문 12호 합의. 정강 질의서 관련 친일파, 반동 조항 삭제 문제 실랑이

33차: 6월11일

공동성명 11호 발표

34차: 6월18일

이남의 협의신청 단체와의 첫 회합에 초청할 단체대표와 방청객 숫자 확정

35차: 6월25일

이남의 협의신청 단체들에게 자문 목적과 절차 소개

36차: 7월1일

이북의 협의신청 단체들에게 자문 목적과 절차 소개

37차: 7월2일

협의대상 단체명부 작성문제 토의. 양측 1차 회담 결렬 때와 같은 주장 되풀이

공동성명5호 서명단체 모두 참여

공개적 조직적으로 모스크바결정 반대하는 단체 제외(반탁투위 산하 15개 단체) 등

38차: 7월3일

이후 협의대상 단체명부 작성문제를 둘러싸고 논란 계속됨

회원수 1만명 이상 단체를 먼저 자문하고, 작은 단체는 후에 할 것 제안

반탁투위 산하 단체가 반탁투위 관계 공개적으로 부인할 것 주장

39차: 7월8일

자문단 선정에 관한 소련측 입장 11개항과 이에 대한 미국측 논평 5개항 교환

40〜49차: 7월9일

〜7월31일

협의대상 단체 명부, 6월23일의 반탁시위와 그 참여단체 놓고 논란 계속

양자 모두 동의하지 않는 단체를 제외하고, 모두 협의에 참여시킬 것 제안

양측 모두 동의하는 단체들만 협의에 참여시킬 것 주장

50차: 8월1일

양자 모두 동의하는 단체와 공동으로 협의하고, 소측이 동의하지 않는 단체들은 미국이 협의할 것 제안

미국측 제안 거절

51차: 8월12일

소측, 반탁투위 산하 단체들 불러 신문 요구, 미국측 거절

소측은 임정의 헌장, 정강 작성 진행하고, 협의대상 단체명부 작성은 양측 수석대표와 제1분과위원회에 맡길 것 제안

53차: 8월12일

미국측, 구두협의 생략하고 전국 총선거에 의한 입법기구 설치 제안. 일정관리는 임명직과 선출직으로 나누고, 임명직이 남과 북의 정부 합칠 방안 강구하자 제의

54차: 8월20일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 미군정의 좌익 검거 비난

55차: 8월25일

공동보고서 제출 문제 논의

*8월12일, 미국무장관 마샬이 소련외상 몰로토프에 미소공위에 공동보고서 제출하게 할 것 제안

56〜59차:

8월26일

〜9월5일

공동보고서 작성 끝내 실패

53차 회의의 미국측 제안 둘러싸고 의견절출 실패

61차: 9월24일

소련측 양군 동시 철수 제안

62차: 10월18일

미국측 미소공위 정회 요청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으로 한국 문제를 넘겼다. 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했다.

한편,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끝난 1947년 10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가능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 11월 중순 국무부는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에게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도록 군정 당국이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은 논란이 많았다. 한국문제에 대해 유엔이 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은 소련의 보이콧을 가져올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분단을 야기하는 것이 될텐데, 유엔이 한 국가를 분단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주21) 하지만 유엔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문제가 처리되었다.

1947년 11월 13일 유엔총회는 한국문제를 토의한 끝에 소련의 ‘양군 철수안’은 부결하고, 미국이 제안한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안을 다수로 결의하였으며,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한국위원단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해 정치지도자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유엔위원단은 북조선에는 들어가지도 못하였고, 이남에서도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 우익인사들만 접촉했을 뿐이었다. 하지와 유엔위원단은 남한지역만의 총선거를 1948년 5월 9일(뒤에 5월 10일로 변경)에 실시하기로 결정했다.(주22) 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미국과 이승만·한민당의 주도 아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한반도의 분단을 향한 질주가 시작되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통일정부 수립 노력도 또한 진행되었다. 단정 노선과 통일 노선의 격돌은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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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서울대 박사논문, 1996, 120〜124쪽

2)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174〜175쪽

3) 정용욱, 위의 책, 175〜178쪽

4) 정용욱, 위의 책, 182〜186쪽

5) 정용욱, 위의 책, 186〜187쪽

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514쪽

7) 지상현,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기원과 등장, 연세대 석사논문, 2010, 43〜45쪽

8) 오수열·김광수·류영구, 종전 후 중국 대륙의 형세와 미국의 전후 아시아 구상에 관한 연구, 한국동북아논총 81(2016년 12월), 37쪽; 지상현, 위의 글, 45〜48쪽

9) 오수열·김광수·류영구, 위의 글, 37〜38쪽

10) 서중석, 위의 책, 513〜514쪽

11) 서중석, 위의 책, 514쪽

12)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662쪽

13) 서중석, 위의 책, 516〜517쪽

14)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217〜219쪽

15) 정용욱, 위의 책, 219〜221쪽

16) 정용욱, 위의 책, 222쪽

17) 서중석, 위의 책, 517쪽

18) 서중석, 위의 책, 519쪽

19) 정용욱, 위의 책, 223〜234쪽

20) 정용욱, 1942〜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태 구상, 224〜226쪽

21) 서중석, 위의 책, 521쪽

22) 차상철, 미국의 대한정책, 1945〜1948, 한국사 시민강좌 38, 2006년 2월, 14〜15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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