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 이념                                                      (6) 예외적 정전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 자연지배이념으로서의 철조망          (7) 예외적 점령이념으로서의 철조망
  (2) 소유이념으로서의 철조망                 (8) 분단규율이념으로서의 철조망
  (3) 계급이념으로서의 철조
  (4) 주권이념으로서의 철조망             2. 한강하구철조망의 현황과 적법성
  (5) 패권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 현황
    가. 베트남비무장지대 철조망                (1) 유엔사규정
    나. 한국비무장지대 철조망                    (2) 9.19남북군사합의서
      ㄱ. 과정                                              2) 적법성
      ㄴ. 저항
      ㄷ. 군산복합체                                  3. 결론

1. 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 이념

‘경관은 국가를 그려낸다.’1)

다니엘스(S. Danielsl)의 말이다. 경관은 특정한 집단의 정치적 상상력이 표현된 실체라는 것이다.2) 이 말에 따르면 철책경관은 분단을 추구한 집단의 정치적 상상력이 표현된 실체인 셈이다.

철조망은 한국분단의 상징으로 통한다. 또는 분단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실재는 개념과 통일될 때 이념이 된다.

‘실재성이란 본질적으로 이것이 오직 개념 속에 있는 한, 그리고 바로 이 개념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는 한 이념을 뜻한다.’3)

개념은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검증되며 전개되어온 자기규정이다. 개념정립없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징은 외면적실재성일 뿐 몰개념적인 것이기에 이념이 아니다. 개념 역시 그 자체로서는 아직도 완전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바로 이 개념과 실재성의 통일을 의미하는 이념으로까지 고양돼야만 한다.4) 그런 점에서 개념의 진리는 이념이다. 분단개념은 반드시 그 물질적 옷을 입고 드러날 때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조망이 어떻게 분단개념의 실현인 이념체5)가 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철조망이 사회관계와 국제관계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모순에 빠지며 그 모순을 해소·전가시키며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 왔는지, 즉 개념의 현실화·구체화 과정을 밝혀야 한다. 분단체계의 이념인 철조망은 보편적 분단체계의 특수규정이자 그 자체가 분단체계를 구성하는 기관이다. 헤겔이 의식을 토대로 의식과 물질의 통일을 말한다면 맑스는 물질을 토대로 물질과 의식의 통일을 말한다. 현실에 기반하여 발전한 개념없이 현실자체만을 절대시할 때 그것은 물신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른다.’6)

철조망이 원래 분단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분단체계가 철조망에 그런 속성을 부여한 것이다. 마치 왕이 원래부터 왕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섬기기에 왕인 것이다. 따라서 철조망의 한두 가지 속성에 의존하여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식은 전형적인 물신주의이다. 안보든, 환경보존이든, 개발이든 철조망에 의해 해결되거나 방해받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해 해결되거나 방해받는 것이다.

헤겔의 이념에 해당하는 것이 푸코에겐 안전장치이다. 헤겔 법철학이 추상법-도덕-윤리로 전개되듯 푸코의 권력이론은 법-규율-안전장치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그 구조는 같다.

‘법이 상상 속에서 작용하고, 규율이 실재의 보충 속에서 작동한다면, 안전장치는 실재 그 자체 속에서 작동한다.’7)

‘법은 언제나 그것의 실행에 앞서 허용과 금지라는 이중분할의 코드를 먼저 머릿속에 그리는 상상 속에 있다면, 규율은 코드의 이중적 체계 속에서 제3의 인물을 등장시켜 감시, 진단 등을 통해 개인의 잠재적인 변화를 유도해내는 부수적이며 경찰적인, 의학적이며 심리적인 기술, 일종의 지침과 의무들을 작동시킴으로써 실재의 보충으로 작동한다.…안전장치는 법, 규율과는 달리 실재 그 자체, 자연성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이 아니라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새로운 자연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바로 이 안전장치이다.’8)

법은 상상, 규율은 보충, 안전장치는 실재이다. 그러나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자연적 대상이 안전장치라는 점에서 그것은 개념과 실재의 통일을 이념으로 하는 헤겔의 규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안전장치와 권력이 헤겔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권력의 물리학 혹은 자연의 요소들 안에서 이뤄지는 물리적 활동으로 간주된 권력…이것은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아니다.’9)

헤겔의 법철학이 자유이념의 자기구분과정으로 전개되는데 비해 푸코는 자유가 통치의 전제라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 안전장치 혹은 권력은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권력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이다.

이글에서는 철조망을 이념체로 보고 우연적·지역적 차원의 이념체에서 필연적·세계적 차원의 이념체로 자기발전·자기전개하는 과정을 보이고자 한다. 이는 곧 추상적 이념에서 구체적 이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이자, 느슨한 대립모순에서 치명적인 대립모순으로의 발전과정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역사적으로는 길게 보기를, 체계적으로는 넓게 보기를 적용한다.

(1) 자연지배이념으로서의 철조망

철조망의 아버지라 불리는 글리든(Joseph Glidden)의 특허소송장에는 ‘소가 철조망을 뚫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10)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바셀라(George Basalla) 역시 철조망을 가리켜 “가축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생명체를 본뜨고자 하는 시도의 산물”11)이라고 주장한다. 가축통제장치로서의 철조망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축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이 상처를 입으면 가축주와의 분쟁에서 농장주는 책임을 질 소지가 많았다. 가축을 막으려다 자신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농장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달려드는 가축을 막는 것이 목적이지 굳이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이에 따라 1880년대에는 가축의 눈에 좀 더 잘 띄면서 덜 위험한 가시가 달린 철조망이 만들어져 철조망의 폐해를 완화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동물이 촉각으로 느끼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시각으로 접근을 막는 것이 이 개량의 핵심이었다.12) 헨리와 프랜시스 매캘럼은 이러한 철조망을 ‘사악한’ 철조망의 반대개념으로 ‘눈에 잘 띄는’ 철조망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13) 결국 가축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도 가축을 통제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었다.

가축통제의 이념은 나의 권리보호라는 추상적 법의 구현이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의지는 주관의지 안에서 구현한다. 도덕과 양심이다.14) 의지와 권리가 자기 자신에 대립해선 안되기에15) 통제의 수단이었던 상처입히기를 통제의 목적과 구분한 것이다. 이로서 상처를 입혀야 통제할 수 있고 상처와 통제는 분리할 수 없으며, 상처없는 통제는 모순이라는 생각은 새로운 형식 즉 ‘눈에 잘 띄는 철조망’이란 형식을 통해 극복된다.

매사추세츠 우스트의 워시번·모언 제조회사(Washburn & Moen Manufacturing Company)는 1880년 이른바 철조망성경이라고 할 만한 책자를 펴냈다.

‘사람들은 자신의 땅에서 자신만의 커다란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운다. 오로지 자신만의 소유지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며 여유롭게 자기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어슬렁대는 야만인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문명사회로 접어든 곳일수록 주민들이 가정을 이루어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는 순간 울타리의 혜택은 곧바로 나타난다.’16)

자신의 기쁨은 가축의 고통이나 타인의 고통이 되지 않고 모두의 기쁨이 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이 문구는 철조망이 통제와 상처, 기쁨과 고통의 대립과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형식과 그에 맞는 새로운 내용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소유권이다.

가축통제가 표면적 목적이라면, 소유권보호와 향유가 본질적 목적인 것이다. 울타리는 분명 안과 밖을 구분하는 장치로 기능하지만 울타리의 존재는 목가적인 풍경의 일부일 뿐 공격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울타리가 궁극적으로 소유권을 의미한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17)

가축통제는 가축소유주의 소유권에 대한 제한이었고, 가축주는 철조망울타리에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가축과 인간의 대립이란 곧 인간과 인간, 가축소유자와 농지소유자의 대립을 본질로 하였다. 통제와 상처, 기쁨과 고통의 모순은 새로운 형식에서 해소된 듯 보였고 소유권의 추구는 문명사회의 징표로 보였다. 그러나 모순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전가된 것이다. 이제 소유권의 차원에서는 더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 동물을 제지하는 수단으로 발명된 철조망은 곧 인간을 제지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었다.18)

(2) 소유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농가법령에 의해 160에이커의 공공토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백인정착민들은 인디언 원주민들의 땅을 청소하고 남은 땅을 소유했다.19) 철조망은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사냥터를 폐쇄해 야간의 기습사냥을 방해하고 강화조약을 맺는데 일조했다.20) 또한 그들은 철조망에 갇혀서 굶주림이나 목마름으로 죽거나 가시상처가 곪는 감염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21)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가시철망은 ‘악마의 밧줄’이었다.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고 중요하게 보는 재산권은 토지소유권이다. 이같은 소유권은 인디언들을 가혹하게 수탈·약탈한 위에서만 가능했다. 초기 미국에서의 생존은 비옥한 토지에 의해 좌우되었고, 연방헌법해석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토지소유는 정치권력행사와 연계되었다.

아울러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열정적으로 토지취득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명백한 운명’논리는 1840년대 미국의 영토확장주의를 정당화한 주장이다. 1845년 텍사스병합 당시 저널리스트인 오설리번(O’Sullivan)은 민주주의 리뷰(Democratic Review)에 미국의 영토확장을 신이 베풀어 준 명백한 운명이라고 처음 주장했다.22) 이러한 선민의식과 과도한 열정이 서부개척시대를 낳았다.

1862년 농가법이 제정되면서 수천 명의 정착민이 새로운 캔자스 주로 이주했다. 정착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소와 들소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땅에 울타리를 치기시작하면서 가축이 농작물을 손상시킬 경우 책임을 규정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매일 수 마일의 울타리가 건설되면서 합법적인 울타리를 규정할 필요가 생겼다.

캔자스에서 의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적절한 울타리에 대한 법적구속력 있는 정의를 작성했다. 경작지가 방목에 사용되는 토지와 인접했을 때 캔자스법령은 처음에 토지소유주에게 소를 합법적으로 보호해야하는 부담을 가했다. 이 결정은 가축이 제한없이 방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목방법에 근거했다.23) 그러나 결국 이 분쟁은 최종적으로 농장주들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즉 목장주가 가축울타리를 책임지도록 법령이 개정된 것이다.

그러자 가축의 상처를 염려하며 철조망울타리를 꺼려하던 목장주들에게 게이츠는(John Warne Gates)는 1876년 텍사스 샌 안토니오의 밀리터리 플라자에서 철조망울타리에 의해 잘 통제되는 소를 보여주는 시연에 성공함으로서 이제는 목장주들에게서 까지 주문이 쇄도하게 되었다.

철조망은 처음에는 농장주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목장주들은 철조망울타리로 더 큰 땅을 막았다.24) 회사 또는 신디케이트가 대규모 목축운영에 투자하기 시작했고,25) 소 왕(Cow King)들이 목장과 물에 대한 접근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의 땅만이 아니라 공공토지까지 울타리로 막기 시작했다. 실제 철조망은 서부로의 팽창, 그에 따른 백인들의 정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철조망이 이주민들의 동업자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그런 만큼 초기의 옹호자들에게 철조망은 지배와 소유를 위한 도구로 비쳐졌다.26)

1883년 와이오밍주 법원은 큰 목축회사에 공공토지에 친 울타리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27) 그러나 1885년까지 철조망은 기본적으로 와이오밍 영토의 동부지역을 덮쳤고, 이는 서부의 울타리치기를 막기 위한 법적 노력의 패배를 의미했다.28) 수잔 벤틀리(Susanne Bentley)가 말했듯이 철조망은 “땅을 막고, 사람들을 폐쇄했으며, 일부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토지를 획득할 수 있게 했다.”29)

이는 18세기 초 영국의 울타리치기 법(enclosure law)으로 인한 분쟁의 복사판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30)고 했다. 농장주들이 소를 바라보는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번엔 목장주들의 울타리치기에 대해 농장주들이 분노했다.31)

법령의 변경은 소유자계급 내 투쟁의 결과였지만 울타리치기는 더욱 과열되었다. 넓은 초원은 곧 분열되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탄생했다. 서부는 철조망울타리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대가없이 오지 않았다. 전투는 법정과 목장에서 모두 치러졌다. 승자는 적고 패자는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목숨을 바쳤다.32) 가축통제장치로서의 철조망이 가축에게 입히는 상처는 소독제의 발명으로 치유할 수 있지만 소유권투쟁으로 인해 인간 간에 발생한 상처는 소독제로 치유될 수 없었다.

철조망은 소유권과 결합되면서 권리투쟁의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같은 가능성은 대량생산, 대량유통이라는 자본화와 만나기 전까진 우연적·지역적인 것에 불과했다. 미국의 생활풍경을 바꿔놓은 철조망의 역할은 산업자본과의 결합을 통해 필연적· 세계적인 것으로 전화될 수 있었다.

1863년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는 꼬인 전선가닥에 못이 부착된 울타리유형을 개발했다. 그의 발명품이 적절하게 홍보되었더라면 그는 ‘철조망의 아버지’로 불렸을 것이다. 더구나 Atlas Obscura에 따르면 미국특허청은 1867년과 1874년 사이에 다양한 유형의 “가시울타리”에 대해 200개 이상의 다른 특허를 처리했다. 문제는 이 모든 제품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874년 등장한 글리든이 ‘철조망의 아버지’가 된 것은 철조망을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기계적방식으로 특허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자료1] 글리든의 철조망 특허 삽도. [출처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자료1] 글리든의 철조망 특허 삽도. [출처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짧은 시간에 그의 발명품은 수백만 달러의 산업으로 번성했다. “흙보다 싸고 강철보다 강하다”는 문구는 철조망회사의 슬로건이었다. 공급이 수요를 이끌면서 철조망의 대량생산은 서부를 더욱 철조망울타리경쟁으로 내몰았다.33)

텍사스주립역사협회(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에 따르면 1885년까지 텍사스 팬핸들 개인소유지 전체가 이미 철조망으로 누빈 패치워크처럼 보였다고 한다. 소유이념은 철조망이란 장치를 통해 구현되었고 그것은 일상의 경관을 바꾸었다. 어느새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된 철조망울타리는 소유권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을 은폐하고 있는 휴전상태의 표식일 뿐이었다. 농장주와 목장주의 소유권투쟁이 휴전에 접어들자 철조망의 소비는 줄기는커녕 더 폭증했다. 이 소유권싸움의 진정한 승자가 양측 누구도 아닌 철조망제조사였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데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 계급이념으로서의 철조망

서부농민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그들의 철조망소비는 철조망제조업체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1873년에서 1899년 사이에 철조망을 제조하는 회사가 150개가 넘었다. 1899년 발빠른 경영전략과 영업수완으로 게이츠(John Warne Gates)는 워시번·모언사와 합병한 뉴저지의 아메리칸스틸·와이어컴퍼니(American Steel & Wire Company)의 이사장에 취임했다.34) 2년 뒤인 1901년 아메리칸스틸·와이어사는 미국철강회사(U.S. Steel)에 합병되었다. 이 거대조직의 자금줄은 막강한 금융가인 모건(J. Pierpont Morgan)이 쥐고 있었다.35)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의 계급내대립은 산업자본가의 저항없이 아주 쉽게 금융자본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게이츠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모건은 이사회에서 그를 몰아냈다. 자기 집의 울타리를 치기위해 이렇게 저렇게 만들던 소박한 물건은 이제 판매를 목적으로만 만들어지는 상품으로 등극했고 대량생산체계가 갖추어지자 곧 세계상품이 되었다.

이념체로서의 물건은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상품으로 구체화되고, 상품은 화폐로, 화폐는 자본으로, 생산자본은 금융자본으로 더 구체화되며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게 된다. 가치가 화폐로 발전되면 이제부터 가치는 화폐의 양으로서만 자신을 구별하고, 화폐의 발전인 자본 역시 양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대립과 모순에 직면한다. 즉 평등한 가치교환에서 불평등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하는 모순과 직면한다. 이 모순의 본질이 잉여노동의 착취임은 맑스에 의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념체로서의 물건은 권리의 측면에서 보면, 권리는 권한으로, 권한은 법으로, 법은 권력으로 구체화된다. 잉여가치의 착취는 외형적으로 평등한 권리의 법적 형태인 교환관계에서도 적극과 소극, 능동과 수동의 지위차이를 발생시키며 이같은 권리의 차이가 모순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 모순은 권력형식에 전가된다. 이제 권력은 법을 매개하지도 않고 권력 자신의 변화, 즉 권력의 양의 차이만을 추구한다. 자본의 차별적 축적은 곧 권력의 차별적 축적과 통일된다. 권력을 탐하는 자는 돈을 탐하며, 돈을 탐하는 자는 권력을 탐한다.

철조망은 변한 적이 없지만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는 급격하게 변화했다. 가축의 피를 묻히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철조망은 금융가 신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다. 소유와 권리의 수호자였던 철조망은 권력의 지배자로 어느새 변화되게 된다. 권리투쟁은 권력투쟁으로 발전한다.

농민지주와 산업자본가의 대립은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의 대립으로 전환되었고 지주계급 내 갈등의 근원적 배후를 인식하자마자 철조망독점자본에 대항하는 소박한 농민들의 라다이트운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자료2] 1885년 브라이턴 농장의 울타리를 자르는 주민들. S.D부처 작.
[자료2] 1885년 브라이턴 농장의 울타리를 자르는 주민들. S.D부처 작.

그것은 곧 철조망절단전쟁(Barbed Wire Cutting War)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국내 시민전쟁, 즉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간의 전쟁이란 명칭이 부여된 것만 봐도 철조망을 둘러싼 계급대립의 적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83년 여름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인 운동형태로 시작된 철조망절단전쟁은 곧이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36) 찰스 굿나이트(Charles Goodnight)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철조망절단이 목축업자, 즉 본인은 물론 타인의 토지임차나 구입을 못마땅하게 여긴 임자들 사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목축은 가축을 마음대로 풀어놓을 수 있는 열린 목장(open range)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37) 울타리절단자들은 일반적으로 열린 목장을 사용하다가 대규모 목장주가 이들 공유지를 울타리치고 전용하는데 분개한 소규모 축사 또는 농부였다.38)

하지만 그 당시 신문기사에 인용된 홀트의 지적에 따르면 사람들이 울타리를 파괴한 결정적인 계기는 1883년 발생한 극심한 가뭄이었다. 그 때문에 소규모 토지소유자들은 한 때 모두에게 개방되었던 개울과 물웅덩이가 이제는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축은 가축대로 철조망 울타리 때문에 샘과 연못, 웅덩이를 코앞에 둔 채 수천마리씩 떼죽음을 당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고통을 받았다.39)

‘올빼미’, ‘푸른 악마’, ‘토지동맹’과 같은 이름아래 비밀리에 활동했던 울타리절단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주민들이 철조망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이었는가는 카운티 대부분을 차지했던 브라이턴 목장의 철조망을 자르는데 500명이나 모였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40) 이러한 충돌은 울타리를 절단하고 총격을 가하고 농장을 태우는 등 폭력적으로 전개됐다.

1883년 10월 14일자 「도지시티타임스」(Dodge City Times)는 “10월 14일 클레이카운티의 남부지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철조망절단전쟁의 지도자로 알려진 버틀리라는 남자가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몇몇 나왔다”41)고 전했다.

마침내 1884년 1월 8일 텍사스 주의회는 특별회의를 열었다.42) 입법부는 울타리를 자르고 목초지를 태우는 중범죄를 최대 5년 징역형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공공토지의 울타리치기는 경범죄로 삼았다.43) 이는 대규모목장주들의 불법적울타리치기에 너무 관대한 판결이었다. 이러한 판결 이후 철조망은 열린 목장을 점점 더 많이 침범했다. 결국 불법울타리설치가 울타리절단보다 더 흔해졌다.44) 울타리절단전쟁의 갈등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저항을 보여 주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서부 전역에 걸친 목장전쟁에 반영될 불안감이었다. 서부영화의 무법자들은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다.

울타리절단자들은 상당한 지역차원의 지원을 받았으며 때로는 강력한 외부동맹을 찾았다. 예를 들어, 뉴욕과 텍사스의 토지회사는 그들의 토지를 농가에 팔아 이익을 냈고, 따라서 가축주들에 대한 울타리절단전쟁을 지원했다.45) 울타리절단자들에 대한 찬반여부에 따라 지역신문은 줄을 섰다.

헨리와 프랜시스 매캘럼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텍사스 주민들은 철조망을 농업지역인 남부를 희생시켜 산업지역인 북부의 배를 채우려는 양키의 또 다른 계략으로 보고 있었다.46) 농업내부계급간의 대립이 아닌 농업과 산업계급간 대립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는 남부와 북부의 지역대립으로도 치환되었다.

울타리절단전쟁의 배경에는 정치이념도 개입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토지 균분론, 그린백운동47)등 아주 다양했다. 1884년 11월 7일자 「포트 워스 데일리 가제트(The Fort Worth Daily Gazetta)」지는 철조망절단이 만연했던 콜먼카운티에서 발견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모를 게재했다.48)

‘독점이 해제되면 철조망은 텍사스와 특히 콜먼카운티에서 사라질 것이다. 외지의 자본가들을 몰아내자. 텍사스의 목장과 땅은 남부 영웅들의 것이다. 독점은 무조건 반대다. 우리에게 검둥이를 교육할 부담까지 지우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느님이 우리 몫으로 인정한 집을 돌려 달라. 교회와 마을과 학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축에게 먹일 물에 빗장을 지르지 말라.’49)

이 기사는 반독점을 주장하는 점에서 지주와 노동자의 연대가능성을 보여준다. 영국 곡물법투쟁 당시 지주에 대항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것과 반대로 미국에서는 자본가에 대항한 지주와 노동자의 일시적 제휴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런 점에서 진보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것 같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로 가득 차 있으며 결론에 가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닌 생존권의 문제가 핵심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정서의 반대편에는 울타리파괴가 원시공산주의와 그린백당의 영향을 받았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50)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울타리절단에는 유럽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고 울타리를 둘러싼 갈등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이데올로기 충돌이 빚은 결과였다. 다른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중의 정서와 맞물리지 않았다면 울타리절단은 지금처럼 파괴적인 양상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울타리절단은 각 가정에 파고들었고 그런 가운데 법과는 거리가 먼 공산주의에 물든 철조망절단자들의 불만은 힘을 얻었다.’51)

그러나 철조망절단운동이 공산주의를 상징했다 해도 직관적인 표식이나 상징만으로 이념이 구현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더 구체적인 실체를 포섭하며 개념을 풍부화하여 하나의 체계를 이룰 때 본격적으로 구현된다. 헤겔에 의하면

‘규정적인 개념이 인간, 국가 또는 동물 등과 같이 제아무리 구체적인 내용을 지닌다할지라도 그의 규정성이 결코 그가 설정한 구별의 원리가 아닌 한 모름지기 그것은 공허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52)

개념과 실재의 통일이 이념이지만 내재적 원리에 의한 통일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진 결합은 공허한 개념일 뿐이다. 가장 이념적으로 보이는 이같은 이데올로기 뒤집어씌우기는 가장 이념적이지 않다. 철조망이란 물건이 이념자체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구체성이 담보될 때 가능하다. 그 같은 구체적 관계의 발전은 계급적 대립과 모순을 전가할 새로운 형식을 찾게 된다. 그것은 국가주권 이념이다.

주권적 권력은 일상적 사회관계에선 숨겨져 있거나 일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로 드러난다. 억압적 장치가 애국적 장치로 돌변하는 전형적인 상황은 전쟁이다. 전쟁속에서 철조망은 계급간 대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이념의 옷을 입게 된다.

(4) 주권이념으로서의 철조망

철조망이 농촌경제에서 현대전쟁의 체계 속으로 편입되면서 국내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국제적 대립과 적대이념이 그 속에 구체화된다. 적군이 대부분의 동물보다 피부가 더 얇고, 철조망이 소와 마찬가지로 보병과 기병대에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군인들은 신속히 체득했다. 가축상해를 합법화한 철조망특허권은 이제 인간살상을 합법화한 주권에 의해 새로운 이념의 옷을 입게 되었다.

철조망은 1895년 마굴전투(Combat of Magul)에서 아프리카부족을 방어하는 포르투갈군대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53) 1880년대의 영국육군매뉴얼은 경계선에 철조망을 묶는 방법을 적시하고 있으며, 20세기 초 스페인-미국전쟁, 보어전쟁, 러일전쟁에서 이 사악한 물건이 사용되었다. The Hardware Trade Journal의 1918년 호에 실린 기사는 「이 잔인한 전쟁의 오랜 친구인 ‘가시철조망’에 대한 남용」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과 짐승에 대한 이러한 상처와, 모든 생명체를 정지시키는 글리든 가시철조망의 돌발성은 군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오늘날 전쟁뉴스에서 거의 매일 읽는 가시철조망 얽힘 상해사건기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돌격하는 동안 철조망 얽힘에 의해 정지된 병사들은 악마도 이보다 더 나쁜 것을 발명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54)

1898년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선을 보인 철조망은55) 1880년~1902년 사이에 발생한 트란스발공화국의 아프리카너와 오렌지자유국의 보어인 연합군과 대치하던 영국인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1901년 초 앵글로-보어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키치너(H. H. Kitchner)장군은 철조망과 방책을 함께 엮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키치너의 계획은 두가지였다. 먼저 철조망과 방책을 그물처럼 연결해 기병대를 몰아낸 다음, ‘방책망의 일부를 활용해 남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게릴라소탕 망을 짜는 것이었다.’56)

다시 말해 철조망을 공격무기로 사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1902년 중반까지 약 3700마일에 걸쳐 8000개 이상의 철책이 세워졌다. 리비얼 네츠(Riviel Netz)의 표현에 따르면 이로써 “미국 서부의 경우처럼 광활한 구역이 통제권 아래 들어왔다.”57)

남아프리카 전쟁이래 철조망이 어떻게 방어무기인 동시에 공격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인식되었다. 따라서 1904년에 발생한 러일전쟁에서 철조망을 참호와 요새, 제방, 지뢰와 연계해 사용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58) 러일전쟁은 화력은 물론이고 이에 대응하는 참호시설의 중요성도 제기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미국 남북전쟁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투대형이 밀집 및 선형에서 산개대형으로 바뀌었고, 병사들도 가능한 한 자세를 낮추고 몸을 숨겨야만 했다.

러일전쟁이 보여준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깊숙한 참호와 교묘하게 위장된 기관총이야말로 조만간 전장의 일상적 모습이 될 터였다.59) 기관총 및 대포가 직접살상용무기라면 철조망 및 참호는 간접무기로 생각되었다.60) 게다가 철조망에 전기를 흘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참호가 엄폐를 가능케 하고, 지뢰가 숨겨진 위협이라면, 철조망은 시야확보의 역할을 했다.

전투초반부터 러시아 군의 화력을 정신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자신했던61) 일본군의 정면돌파작전은 철조망과 지뢰로 보강된 진지에서 저항하는 러시아 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엄청난 인명손실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간신히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62) 이처럼 군사기술발전이 초래할 대량살상가능성은 러일전쟁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철조망의 이러한 활용은 1차 대전에서 완성되었다. 1차대전 당시 참호의 규모와 복잡성은 사상 유래가 없었다. 거의 1300마일에 달하는 참호는 난공불락의 장벽을 형성하며 참전국들을 구분하는 새로운 국경선으로 떠올랐다.63) 이 전선에서 철조망은 처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기간에 발간된 영국의 한 군사교본에는 이 철책의 축조방법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전방 참호는 효과적인 장애물로 보호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이며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장애물로 철조망을 꼽을 수 있다.’64)

우연찮게도 이 내용은 철조망의 장점을 수록한 워시번·모언사의 책자(1880년)와 일치했다. 평시에 전개된 철조망이념의 모순들은 해소된 게 아니라 전쟁이념에 전가되어 더욱 예리하고 극단적인 모순으로 발전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파견된 미국원정군참모본부에서 1918년 2월에 펴낸 군사교본에는 이보다 훨씬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교본의 목적은 미국원정군의 장애물설치와 사용방침을 표준화하는데 있다. 철조망은 참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해서는 안 된다. 철조망의 감독과 관리에 항시 만전을 기해야하며 야간에는 특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철조망 설치 시에는 말뚝과 기둥을 이용해 땅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한다. 철조망설치 시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65)

방어진지를 구축할 때에는 잘 보이고 화력집중이 쉬운 지점에 철조망을 대놓고 설치할 수도 있다. 앞에는 철조망과 지뢰, 뒤에는 모래주머니와 기관총으로 구성된 진지는 1차 대전에서 정형화되었다. 기관총·대포와 같은 화기66) 및 철조망 등은 전쟁양상을 참호전화하면서 방어측에 유리한 전장을 형성했다.

향상된 방어화력과 원래 농장주를 위한 발명품이었던 철조망의 결합은 어떠한 군대의 돌파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20세기 영국의 대표적 군사전략가중 한 명으로 꼽히는 풀러(J. F. C. Fuller)장군의 평가처럼, ‘총탄, 야전삽, 철조망’이라는 일명 ‘방어의 삼위일체(defensive trinity)’가 대규모 기동의 가능성을 아예 그 싹부터 제거했던 것이다.67) 대량살상의 가능성이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현실로 성큼 다가온 셈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당시 군 수뇌부의 현실인식이었다. 이들은 빠르게 전개되고 있던 전쟁성격과 전장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정면공격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명손실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68) 당시 군 고위층의 뇌리에는 이른바 ‘공격지상주의(cult of offensive)’신조가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이들은 무기발달보다는 군대의 엄정한 군기 및 열띤 사기를 바탕으로 한 정면돌격을 승패의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19세기적 전투방식에 얽매여 있었다. 전쟁 초반 서부전선에서 시도된 수차례의 돌파공격실패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로 변모된 전장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19세기적인 전쟁패러다임 안에서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수행했다. 그 결과는 1916년 7월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전투개시 첫날 6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국의 인적 및 물적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69)

여기에 더해 독일에서 철조망의 파괴력은 새로운 진화를 이루게 된다. 1930년대에 독일 호르스트 다네르트(Horst Dannert)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개발된 오일-강화철조망을 발전시켜 일반철조망보다 자르기가 훨씬 어려운 콘서티나철조망을 개발했다.70) 콘서티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통 아코디언인데 접었다 폈다하는 모습의 유사성 때문에 이후 콘서티나철망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되었다.

이는 수직기둥이 필요하지 않았다. 콘서티나철망은 한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휴대용코일로 압축된 다음 축을 따라 펴서 길이50​​피트(15m)의 장벽을 만들고 각 코일은 단3개의 스테이플을 두드려 제자리에 고정할 수 있다.71)

콘서티나철조망은 윤형철조망이라고도 하는데 두꺼운 본체에 큰 면도날이 붙어있고 가시철조망보다 탄성이 좋아서 손으로 밀어내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데다, 말린 형상으로 주조된 게 아니라 탄성을 가지고 말려있는 형태라서 절단하면 부분적으로 말린 게 펴지며 순간적으로 매우 빠르게 휘둘러진다. 그리고 이 휘둘러지는 철망에 붙은 면도날에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이 같은 면도날철조망(Razor Wire)유형은 심각한 부상을 유발하고 도구 없이는 사람이 극복하기가 어려워 보호대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토록 한다. 이 철조망은 일반적인 긁힘과 손상된 옷 외에도 혈액손실이 큰 경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72) 전쟁에서 철조망의 목적은 주로 방어였지만 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73)

콘서티나철망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에서 영국으로 수출되었다.74) 1940~1941년의 침략위기 동안 콘서티나철망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서 일부는 절단하기 쉬운 저망간강철망으로 생산되어야했다.75)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얽힌 철조망을 무력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개발되었다. 방갈로르 어뢰는 폭발물로 가득 찬 5피트 길이의 파이프로 얽힌 철조망을 폭파시켜 폭 3-4미터의 통로를 만든다.76) 또 다양한 종류의 매트를 철조망위로 던져 군대가 그 위로 걸을 수 있게 했으며, 심지어 용감한 군인들이 철조망위로 자기 몸을 날려 동료들이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하기도 했다.77)

따라서 이러한 대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콘서티나철망을 펜스 위로 더 높이 올리는 것이 요구되었다. 1967년 베트남전쟁에서 이루어진 개량이다.

한편 1899년에 철조망은 보어전쟁에서 공간을 통제하고 강제수용소에 체포된 보어인을 수용하는 전략적 역할도 수행했다. 세계 최초의 난민수용소와 강제수용소 중 일부가 19세기 후반에 대영제국에 나타났다. 기근수용소는 쇠약해진 난민을 구금했고 구호지원자들을 공공사업 숙사에 지정했다. 전염병수용소는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인원을 분리하고 비위생적인 곳에서 대피한 사람들을 수용했다. 앵글로-보어 전쟁 중 강제수용소는 전쟁의 맥락에서 식민지복지기술을 채택했다. 남아프리카의 전시수용소는 동시에 군사폭력과 인도주의적 보호의 도구였다. 빈곤한 난민에게 식량과 쉼터를 제공하고 징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남아공의 영국관리들은 비문명적이고 비위생적으로 방치된 난민들을 개조‧훈련시키기 위해 인도의 전염병 및 기근수용소개발을 지배했던 제국적 태도와 접근방식을 적용했다. 철조망은 제국의 든든한(Stout)한 버팀목이 되었다.78) 포스(Aidan Forth)는 이를 철조망제국주의라고 칭했다. 이제 철조망에 제국주의이념이 다시 입힌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이념으로서의 철조망은 계급투쟁이념에 의해 균열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는 한국전쟁시기 철조망생산으로 유명했던 영스타운철판철강회사(Youngstown Sheet & Tube)의 파업이다.79)

[자료3] 영스타운철판철강회사의 철조망생산 장면. [출처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자료3] 영스타운철판철강회사의 철조망생산 장면. [출처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1년 영스타운철판철강회사와 노동자 간에 고용조건에 관한 분쟁이 발생하여 해결을 보지 못하고 1952년 4월 9일 오전 0시를 기하여 동맹파업에 들어갈 태세가 확립되자 트루먼대통령은 상공장관에게 동 회사를 접수하도록 행정명령을 발표하였다. 정부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군대와 타 유엔가맹국의 군대가 한국에서 침략군과 사투하고 있는 차제에 철강생산의 정지는 국방을 위태롭게 한다. 철강의 계속적 생산과 이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의 행정명령이 필요하다. 이 중대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대통령은 행정수반 및 미군 총사령관자격으로 헌법상 권한의 총화(aggregate) 내에서 행동한다. 대통령은 과거에 행한 바를 행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inherent power)을 가지고 있으며 이 권력은 ‘역사적 선례와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조와 회사측은 앞의 행정명령이 입법기능에 해당하며 이 기능은 헌법상 국회에 속하고 대통령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는 한편 이 명령의 실시를 억제하는 영구적 내지 임시적 차지명령(injunction)을 발표하도록 요구했다. 이 소청을 받은 지방법원은 4월 30일 공장접수와 행정명령10340호의 조치를 금지하는 예비적 차지명령을 발표했으며 다시 고등법원에서도 이 명령이 지지되었으므로 연방대법원은 5월 3일 이 사건의 이송명령을 발했다. 이 사건은 결국 노조와 회사측의 승소로 낙착되었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주목할 판결이유의 내용은 프랭크퍼더(Frankfuther)판사의 찬성의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판사는 공장접수권한은 언제나 제한된 시기 또는 특정된 비상사태하에서만 부여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철회되는 것이며, 그 권한의 행사는 특별한 환경, 예컨대 ‘전시’(time of war) 또는 ‘전쟁이 급박한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같은 미 최고법원의 판결논지를 통하여 볼진대 그 철강회사의 접수는 한국사변이 전쟁이 아니며 ‘전쟁의 급박한 경우도 아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단정한 것이었다.80) 이로서 전쟁물자인 철조망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유엔 밖에서 유엔을 움직여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패권정책에 균열을 낸 셈이었다.

이 단계까지 이르러서도 철조망이념은 완전한 개념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철조망은 내부로부터의 대립과 모순이 아닌 외적대상일 뿐이었고 이러한 규정은 여전히 우연적이고 외면적이었다. 다음의 두 사례가 그렇다.

1958년 아메리칸 스틸·와이어사의 후신인 미국철강회사는 뉴프런티어스(New Frontiers)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책자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철조망은 민주주의의 최초의 수호자이다. 지난 전쟁에서 철조망은 군 초소와 연구소, 우리나라의 식량을 생산하는 농장에 사용되었다.’

소련과의 대립이 한창이던 시기에 출간된 뉴프런티어스는 철조망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담론 속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서 철조망은 체제대결과 체제‘수호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6년 후 「덴버 포스트」(Denver Post)지에 실린 한 광고는 철조망에 이와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한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시민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그 광고에서 철조망은 바야흐로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정권과 동의어가 된다.81)

어떤 때는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어떤 때는 사회주의의 동의어로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좌지우지 된다. 이는 아직도 철조망개념이 자기이념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또는 도달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5) 패권이념으로서의 철조망

웹(Walter Prescott Webb)은 미국 서부를 다룬 자신의 저서에서 철조망을 대초원과 평원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82) 철조망의 조국은 미국이다. 미국서부에서 배양된 철조망은 미국의 패권과 함께 전 세계에 미국패권의 이념을 구현하는 이념체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의 집단안보체계는 영국이 주도한 세력균형체계를 대체하려는 미국패권의 기획이었다. 패권경쟁기를 거쳐 패권안정기에 들어서자 폭력의 강제보다 국제법에 의한 통제가 전면에 나섰다. 폭력의 동원보다 법에 의한 통제가 통치비용을 절약시킨다는 점과 더불어 힘과 질서, 공포와 존중, 권력과 권위의 결합이라는 패권공식이 등장한 것이다. 국제법은 이전부터 국가관계의 수단으로 작동해 왔으나 패권국에 있어 법은 이중적 모순을 허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다. 법 밖에서 법을 규정하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겐 법의 준수가 강제되지만 패권국은 예외상태에 있게 된다. 세계를 힘이 아닌 법으로 통치한다는 기획의 완성이 유엔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이 미국에게도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까지 유지되던 소련과의 연대를 깨고 대결에 돌입하면서 미국은 유엔헌장 밖에서 유엔헌장을 규정할 수 있는 지위를 만들어낸다. 이제 미국은 유엔헌장체계의 예외상태에 자신을 위치지울 수 있게 된다. 유엔의 권위와 미국을 권력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건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에서 철조망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누적된 모든 이념을 구현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정전협정에서 철조망은 제거대상으로 합의되었다. 철조망제거가 명문화된 것은 철조망의 공격적 성격에 대한 쌍방의 충분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가 아닌 정전을 위해서라도 철조망은 설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철조망설치는 정전협정위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7년 한국에서 미국 스스로 강조해온 정전협정준수를 어기고 대대적인 철조망건설을 시작하면서 미국패권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국전쟁에서 유엔의 권위와 미국의 권력이 이용됐다면 베트남전쟁은 유엔을 통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미국권력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베트남전쟁에서의 철조망설치과정을 살펴보자.

가. 베트남비무장지대 철조망

미국은 베트남개입초기부터 남베트남의 라오스 및 북베트남국경에 구멍이 많으며 그로인해 남쪽으로 북베트남의 사람과 보급품이 침투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인공장벽에 대한 아이디어는 1958년 미국인들에 의해 처음 고려되었다. 1961년 미국군사자문단의 수장인 라이오넬 맥가르(Lionel McGarr)중장은 맥나마라(R.S. McNamara)국방장관에게 북베트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라오스-남베트남국경에 안전지대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83) 1966년 중반, 미국은 이러한 정책 중 어느 것도 효과적이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1966년 무기통제에 관심이 있는 하버드 로스쿨의 피셔(Roger Fisher)교수는 라오스의 호치민루트와 DMZ를 가로지르는 침투에 대해 고민하던 맥노튼(John McNaughton)국방차관보에게 제안서를 제출했다. 피셔의 제안은 “첨단기술장벽으로”이러한 통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84) 장벽개념에 대한 핵심주장은 하노이폭격의 영향에 대한 부정적인 분석에서 시작되었다.85) 무차별폭격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희생은 세계는 물론 미국내 반전여론에 불을 붙였다.

피셔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맥노튼과 맥나마라는 북베트남군의 침투를 줄이는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4월, 맥나마라는 1959년 국방분석연구소가 설립한 미국학자 45명으로 구성된 제이슨그룹(Jason Division)에 제안을 넘겼다. 1966년 6월 미군, CIA, 백악관, 국무부의 대표들은 제이슨그룹을 만났다. 제이슨그룹은 여름의 대부분을 할당된 임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8월 30일 맥나마라장관에게 직접 전달했다.

1966년 10월 14일 제이슨그룹은 대통령에게 비망록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제안했다.86) 롤링썬더작전(Operation Rolling Thubder)을 통한 북폭이 하노이의 남베트남 침투를 감소시켰거나 사기를 떨어트리지 않았으며, 남베트남인들이 스스로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능력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나마라는 병력증강을 총 47만 명 수준으로 제한하는 동시에 침투로에 울타리나 철조망, 센서 등을 조합한 장벽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맥나마라가 더 이상의 전쟁확대를 반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87)

미군 고위지도자들은 이 개념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태평양주둔미군사령관인 그랜트 샤프 제독은 지상군이 이를 지원하지 않으면 공중장벽이 비효율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남미군사령부(MACV) 웨스트모어랜드(W.C. Westmoreland)장군도 이 견해에 동의했다. 베트남의 선임해병대사령부인 III 해병상륙군은 전체 장벽개념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 이동작전에 자산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88)

10월 말 마닐라에서 열린 대통령주최회의에서 웨스트모어랜드는 맥나마라가 롤링썬더작전을 대체할 것으로 제시했던 음성센서로 된 장벽에 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89)

결국 베트남미군사령부는 대침투장벽에 대한 원래의 제이슨그룹제안을 수정했다. 최종형태의 이 계획은 일련의 유인 핵심포인트(Strong Point)에 의해 뒷받침되는 가시철망, 지뢰밭, 센서 및 감시탑을 포괄하는 600~1,000m폭의 치워진 땅으로 구성된 모리스 선90)과 같은 선형장벽을 요구했다. 거점형에서 선형으로, 즉 참호전 이전으로 회귀한 셈이다. 이들 핵심지점 뒤에는 포병사격을 제공하는 일련의 화력지원기지가 있어야 했다. 침투를 위한 최적의 경로는 지뢰밭과 철조망장애물로 표식되고 차단되었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포병기지는 적의 침입자를 찾아 파괴하기 위한 신속한 반격을 할 수 있는 화력지원기지를 제공한다. 해병대와 해군건설부대는 맥나마라가 장벽개념을 공개하기 전인 1967년 여름에 장벽건설을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의 완료는 1967년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완료날짜는 1968년 7월이었다. 맥나마라 벽이 가동되어야하는 68년 1월이 되자 북베트남군이 I 군단의 북서쪽 케산의 해병대기지 주변에 모여들었다. 구정공세의 예고였다. DMZ를 따라 설치될 예정인 모든 센서와 관련 장비는 케산의 수비대에게 대신 제공되었다.

센서기술은 케산의 해병대를 구했을 수 있지만 맥나마라 벽의 추가건설을 효과적으로 중단시켰다. 케산의 수비대들은 넓고 직선적인 전선에서 적과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거의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의 싸움은 센서기술이 360도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맥나마라 계획에서 구상한 것처럼 장벽기술이 선형에서 작동할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었다. 초목이 드문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인도차이나의 지리는 국경을 전자장벽으로 봉인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91)

스콧(George C. Scott)장군은 “고정된 요새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기념비이다.”라고 말했다. 그 벽에 많은 돈이 낭비되었다. 북베트남인들은 ‘벽’을 무시하고 ‘호치민루트’가 될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그 벽을 돌아갔다. ‘맥나마라 Wall’은 미군들에게 ‘맥나마라 Folly’92)로 불리며 조롱거리가 되었다.93)

1968년 10월 29일, 남베트남 쪽의 비무장지대를 따라 물리적 장벽에 대한 모든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것은 전략으로서의 맥나마라 벽의 종말을 의미했다.94) 전투체계로서 맥나마라 벽은 무능했던 것이다.

65년부터 시작된 무차별융단폭격작전인 롤링썬더는 존슨이 추구한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가 세계를 향한 ‘거대한 폭력’(the Great Violence)임을 증명했다. 권위와 권력 중 미국은 권력만을 택한 제국으로 인식되었다. 미국패권의 자기근거인 법과 힘, 유엔권위와 미국권력의 통일성은 무시되었고 미국권력의 자기증식과정만을 보여주었다. 세력균형을 의식하는 패권경쟁기(balance)에 적용되는 원리와 일극지배가 달성된 패권안정기(Stability)에 적용되는 원리가 다름을 보여주었다. 국제법의 외적강제가 아닌 자신들의 도덕적 결정으로 북폭 대신 택한 것이 맥나마라 벽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패권후퇴기를 알리는 경종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스템이 베트남비무장지대에서 폐기되고 있는 동안 한국비무장지대에선 강화되었다.

나. 한국비무장지대 철조망

1967년 4월 27일, 존슨 대통령과 맥노튼, 그리고 휠러가 함께한 회의에서 휠러장군은 현 시점에서 공세를 강화하지 않으면 남한과 베를린 등지에서 소련과 북한, 그리고 중국이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95)

미국은 북한의 비무장지대에서의 정전협정위반의도가 한반도의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전 추가파병방해에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비무장지대에서의 북한의 군사적 괴롭힘이 계속될 것이지만, 그것은 소련이나 중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했다.96)

미국은 베트남이외에 또 다른 나라와 전쟁의 늪에 빠지길 원치 않았고 두 개의 전장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전 세계 대치선을 따라 형성된 비전장의 지정학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패권국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에서의 지위가 흔들리는 시기에 미국으로서는 유엔의 권위와 미국의 권력 중 오직 후자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힘에 의한 균형, 지정전략적 관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한국정전협정체계의 분수령이 되는 철책건설이 이루어진다.

ㄱ. 과정

한국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에는 1965년까지도 뚜렷한 장애물이 없었다.97) 정승화,98) 이재전,99) 신인호100)등은 이점에서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 신인호에 의하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목책이 처음 건설된 것은 1964년 한신이 지휘하는 6군단이었다.101) 비무장지대에서 자란 큰 잡목을 베어 목책을 세워뒀으나, 그나마도 밑둥이 썩어 누워있는 경우가 많았다. 1967년경 제1군단 지역에는 목책선이나마 설치된 곳은 군단지역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그것조차 없었다.

[자료4] 육군21사단이 1966년 경계지역의 남방한계선에 연해 목책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출처 - 국방일보 2010.3.5.]
[자료4] 육군21사단이 1966년 경계지역의 남방한계선에 연해 목책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출처 - 국방일보 2010.3.5.]

그리고 철조망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경으로 보인다. 유엔사령부에 의해서이다.

‘드와이트 E. 비치 유엔사령관은 적의 전술가운데 유일한 중요변수는 한국에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 보다나은 무장과 장비를 갖춘 공산간첩들이 범한 보다 큰 규모의 폭력이었다고 말했다.…유엔사령부는 최근 비무장지대 바로 남쪽에 1백미터의 활주로를 만들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조망 울타리를 세웠다.’102)

그러나 이때의 철조망은 아직 현재의 모양을 갖춘 철조망이 아니고 낮고 둥글게 깔아놓은 콘서티나철조망(Concertina wire)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월 13일 백악관은 새로운 철책건설에 대한 계획을 승인한다.103) 그리고 9월 7일 국방장관은 베트남비무장지대에 철조망이 건설되었음을 발표한다.104) 이같은 사실은 한국신문에도 보도된다.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방장관은 7일 미국은 비무장지대를 통한 월맹군 및 보급물자의 침투를 감소시키기 위해 DMZ 남쪽에 철조망과 전자탐지장치로 된 대침투방책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장관은 대침투방책문제에 언급, 국방성은 과거 2년여 지상장애물의 사용가능성을 검토해왔으며 미군은 이미 내륙 약 24km 지점의 DMZ 남쪽 밀림의 제거작전에 착수했다고 말하고 빠르면 금년 말부터 이 지점에서 월남을 가로질러 약 64km 일대에 방책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 방책에는 적외선야간투시장치를 포함해서 9km의 DMZ일대에서 준동하는 2·3명의 적활동조차도 탐지할 수 있는 고도의 정밀탐지장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05)

1967년 1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도 훈령 제18호 「간첩봉쇄지침」을 하달했는데, 특히 비무장지대의 방벽구축, 경계시설강화, 감시초소, 관측초소의 방어력강화를 지시했다.106) 8일 뒤인 12월 23일 유엔사는 한국비무장지대에 설치한 새로운 철책선을 공개한다.

‘서부전선을 지키는 미제2보병사단이 지난 8일 이후 임진강북쪽 비무장지대남방에 세운 방책이 23일 하오 국내외기자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DMZ안전장치의 일부로 마련된 이 방책은 전장 24km로 DMZ 남방한계선을 따라 뻗쳐있다. 방책의 높이는 10피트정도인데 쇠고리 철망, 쇠기둥 및 둥근 철조망으로 이뤄졌다. 방책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철문이 마련되어 있다. 미군은 철망울타리 모양의 이 방책 말고도 대인레이다, 적외선탐지기, 고성능망원경을 동원 북괴군침투에 대비하고 있다. 한편 미제2보병사단 제3여단장 헤니온대령은 이 방책에다 고성능전기장치를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평을 거부했다. 이 방책은 DMZ를 넘어오는 북괴무장침투자들의 공세가 극심해지자 이에 대비, 기존방위장치였던 낮은 둥근 철조망을 제거하고 미8군의 시험계획으로 이룩되었다. 방책주변에 있는 일체의 잡목림은 제거됐다. 방책의 효능에 대해 미군은 지난 8월28일 판문점지원사령부가 피습당한 이후 뚜렷한 침공사건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방책은 DMZ방위를 위한 커다란 개선”이라고 보고 있다.’107)

[자료5] 1967년 처음으로 구축된 철책의 모습. 좌 중간부분에 콘서티나철망도 함께 설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 국방일보 2010.3.5.]
[자료5] 1967년 처음으로 구축된 철책의 모습. 좌 중간부분에 콘서티나철망도 함께 설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 국방일보 2010.3.5.]

이 기사에 따르면 기존엔 콘서티나철조망을 사용했으나 이를 제거하고 새로운 철조망을 건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미8군의 시험계획, 파일럿 프로그램이었기에 본격적인 건설, 즉 비무장지대 전체에 달하는 건설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사후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푸코가 사용한 ‘안전장치’란 개념과 일치하는 ‘DMZ안전장치’란 단어도 등장했다.

68년 비무장지대전역에 대한 철조망건설은 이재전중령등이 자신이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해왔으나 이미 미국방부-미태평양사령부를 거쳐 추진되어 왔다.108) 미국유엔사가 결과적으로 한국측 계획수립과정부터 개입한 것도 이재전의 증언에서 오히려 확인된다.

9월 7일 맥나라마 국방장관의 발표이후 베트남주둔미해병대사령부는 남베트남 최전방기지인 콘티엔기지에 대한 철책선설치발표를 새로이 한다. 여기서 새로운 철책의 실체가 상세히 보고된다. 콘티엔기지에 대한 철책설치는 주한미군보다 늦은 12월 29일에 이루어졌다.

‘주월 미해병대는 DMZ바로 남쪽의 콘티엔기지주변 방어선에 수천개의 면도날 같은 철침이 달린 새로운 철조망을 가설했다고 29일 알려졌다. 해병대당국은 독일제 강철테이프라는 이 새로운 철조망은 월남에서 사용되는 표준형의 콘서티나철조망보다 훨씬 강해서 보통 철조망절단기로는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109)

이 기사는 새로운 철책선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기존의 가시철조망이 아니라 면도날철조망으로 대체된 모습과 보통철조망절단기로는 끊을 수 없는 재질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기존에 사용했던 콘서티나철조망을 대체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다른 회사의 콘서티나철망이 다네르트사 콘서티나철망으로 바퀴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철조망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비무장지대 철조망의 표준형이다. 즉 Y자형 쇠기둥을 세우고 그 아랫부분에는 강력한 재질의 펜스를 대고 윗부분에는 원형 면도날철조망을 얹어놓은 모습이다.110) 1968년 1월 7일 연초의 치안안보회의 때 전방에 설치한 철책과 똑같은 모양의 철책모형을 박정희대통령에게 선보였다.111) 1월 16일 김성은 국방장관은 휴전선의 진지강화와 방책설치를 서두르겠다고 밝혔다.112) 이재전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미군을 설득하여 물자를 조달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의 물자지원은 이재전등의 제안보다는 이미 한미간에 체결된 계약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베트남전쟁과 ‘브라운각서’가 기반이 되어 대침투장비 지원이 1967년 하반기에 82% 수준이었고, 1968년 95%, 1969년 92%에 이르렀다.’113)

그러나 다른 분석도 있다.

‘한국정부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결과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장비현대화와 대간첩장비의 충당에 대해서도, 1966, 1967회계연도의 정상군사원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 ‘브라운각서’에 의해 지원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114)

미국의 물자지원은 획기적인 것은 아니었고 이미 예정된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철책선이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해보면 철책선 구축은 1967년 8월 미 제2사단 구역의 설치를 시작으로 남방한계선 전역으로 확장되었다.115) 철책공사는 1․21사태를 계기로 급진전되어 중부전선에서는 1968년 1월 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116) 지세가 험한 동부전선은 6월에도 진행되고 있었다.117) 철조망 첫째줄 공사는 1970년에 완공되었다. 이로써 군사분계선방어는 거점방어에서 선방어로 개념이 바뀌었다.118)

1970년부터는 김포고촌면에서 인천시계까지 54km에 걸쳐 설치되었다. 이중 고양·김포시의 강안구간은 23km이다.119) 강화군은 1974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강화철책은 해병2사단 예하부대가 주도했는데 송해면 당산리에 관리막사를 지어놓고 건설병력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대체로 계획·관리는 군부대가, 현장작업은 지역주민을 고용하는 도급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1978년 강화전역에 철책선 첫줄이 완공되었다. 이중철책은 1983년, 일부구간의 삼중철책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설치되고 있다.120) 교동은 1997년 해안가에 25.5km의 철책이 설치되었다. 1955년 교동남쪽으로 어로한계선이 설정되었다.121) 동해안에도 목책에 이어 철책이 설치되었다. 서해5도는 1974년과 1975년 사이에 북한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해안선에 용치와 단애가 설치되고, 1975년과 1976년에는 4,291m에 이르는 군사용동굴을 굴설하였다. 이로서 백령도 두무진의 해층기암 절벽과 연평도의 빠삐용 절벽안에는 미로 같은 갱도가 건설되어 고립상태에서도 수십 일을 버틸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졌다. 1976년에는 90mm 해안포 30문을 증강하고, 1977년에서 1979년 사이에 해안가에는 6,200여 발의 지뢰를 매설하고,122) 근해에서 육상조종기뢰 약150개를 부설하였다.123) 주요 산악지대에는 군부대와 군시설이 위치하게 되었다.124) 이는 진먼다오(金門島)를 시찰하고 와서 그 모델을 따른 결과였다. 용치[軌條砦]125)는 상륙저지시설로 진먼다오에서 1954년부터 미군 고문의 제안으로 설치되었다. 1955년 당시 거리 3m, 깊이 3~6m, 3열 배치가 이루어졌다.126)

ㄴ. 저항

철책설치에 대해 남북모두에서 저항이 발생했다.

이병형 육본작전참모부장은 철책설치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정규군이 은신·잠복근무를 하다가 적이 침투하면 사살하거나 생포해야지 어떻게 울타리를 쳐 놓고 침투를 막으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훈련된 부대는 야간에 적이 오면 지근거리까지 유인, 포획하거나 사살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127) 이같은 견해는 베트남전쟁에서 맥나마라 벽을 둘러싼 미국내의 논쟁과 궤를 같이 했다. 거점형전술과 선형전술, 미군부와 민간정부의 기본대립구도가 한국에서도 재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관할구역의 철책설치가 끝났고 한국정부도 철책공사를 서두르는 상황에서 1968년 1월 21일 사태가 발생했다. 김신조부대는 파주문산 미1사단 관할의 철조망설치지역의 끝단을 통해 잠입했다. 침투지점인 고랑포리는 연천이고 연천고랑포리 앞, 임진강은 개울이 낮아 물이 발목밖에 잠기지 않으므로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가장 유력한 도하지점이었다. 그러나 철책이 아직 설치되지도 않았던 연천지역을 놔두고 굳이 한 달 전에 새로이 철책이 설치된 파주지역을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도하한 장파리지점의 임진강은 배 없이는 못 건너는 깊은 수심이었다. 그래서 김신조부대의 행동은 철책설치에 대한 일종의 군사시위처럼 보였다. 미군의 새로운 철조망으로도 인민군의 침투를 막을 수 없다는 시위 말이다. 따라서 철조망의 효력은 설치 한 달 만에 즉시 부정된 셈이다. 다음은 이재전의 평가이다.

‘철책은 뚫렸다. 나중에 어느 사단이 경계하는 구역의 철책이 뚫렸는지를 점검했으나 한결같이 자기들 사단은 이상이 없다는 보고만 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침투한 124군부대원 중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를 앞세워 현장검증을 했다. 김신조는 거리낌없이 미2사단이 관리하는 구역의 철책 앞으로 다가갔다. 외관으로는 전혀 뚫린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신조가 한군데를 발로 차니 뻥 하고 뚫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L자형으로 철조망을 끊고 들어와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 묶어놓고 갔던 것이다. 그러니 미군도 철책을 점검했지만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미군은 할 말이 없게 됐다.’128)

작전상의 이유가 아니라 이념상의 이유로 철책건설에 반발하여 월북한 한국군 중위마저 있었다.

‘당시 12사단에 근무하며 철책선 설치작업을 하던 모 육군 중위가 “누가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비무장지대(DMZ)로 나라가 분단된 것이 가슴 아픈 데 나는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 1통을 써놓고 월북한 사건이 그것이다.’129)

대인지뢰금지조약은 순수군사논리로 보더라도 지뢰는 효과보다 역효과가 많다는 이유로 발효되었다. 철조망은 지뢰와 비교하면 더욱 그 효용이 의심되는 무기였다. 또한 일반인만이 아니라 군대내에서도 분단고착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철조망은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유지되고 있다.

심지어 유엔사는 북측을 비난했다. 1981년 12월 28일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유엔사측은 북측비무장지대가 지뢰밭, 전기철조망, 중무장한 벙커로 요새화되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130) 1990년 국방부에서도 북측이 비무장지대 안에 1∼4km 길이의 대전차장애물 10여개를 설치하고 전기철조망을 포함한 3∼5중 철책을 설치했다고 반박했다.131) 이런 비난과 함께 1990년대 초에는 남측비무장지대에 이중철조망을 설치했다.132)

1978년 한국군은 북한의 T54탱크가 길이 12m의 특수장비인 탑재교를 이용하면 높이 4m의 방어벽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이유로 5m 높이의 방벽을 세웠다. 북한의 전차공격이 가능한 중·서부전선의 넓은 개활지 10군데에 구축돼 있으며 총연장이 23km로 군사분계선의 약10%지역에 구축되었다. 이에 대해 1979년 6월 26일 제393차 회의에서 북측은 유엔사측이 비무장지대 내에 불법적인 장애물과 철근콘크리트장벽을 구축하여 요새화했다고 비난했다.133) 8월 31일 제395차 회의에서도 재차 항의하면서 불법장애물과 3km 이상이나 연장되어 있는 장벽을 언제 제거할 것인지를 다그쳤다. 1980년 3월 13일 제399차 회의에서도 장애물구축 사진을 제출하여 항의했다.134) 1990년 신년사와, 제453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도 “남측은 250km 전 전선에 콘크리트장벽을 설치, 자유왕래를 가로막고 있다”135)고 항의했다. 철조망과 장벽은 정전체계를 안정시키기는커녕 긴장으로 몰아가는 중심소재였다.

ㄷ. 군산복합체

1967년 한국비무장지대 철책건설을 승인하고 작전통제권을 발동하여 실행한 사람은 유엔사령관 찰스 본스틸(C.H. Bonesteel)이다. 그는 1945년 딘 러스크(Dean Rusk)와 함께 38선을 그은 인물이었다. 딘 러스크는 1961년부터 69년까지 미국무장관이었고 베트남비무장지대와 한국비무장지대 철책설치 전 밀림제거작전에 사용된 고엽제사용136)을 승인한 인물이었다. 러스크는 국무장관부임 직전까지 록펠러재단의 이사장이었고, 양대 고엽제제조회사 중 하나인 몬산토는 록펠러의 자회사였다.137) 9월 7일 맥나마라는 철조망건설과 함께 베트남의 밀림을 제거했다고 했는데 철조망주위의 경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제거수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엽제였고 이는 한국비무장지대 철책주변에도 그대로 살포되었다.

미국철강회사(U.S. Steel)의 철조망사업체인 American Steel & Wire는 그가 국무장관재직기간 중이던 64년까지 클리블랜드 록펠러빌딩에 속해 있었다. 록펠러가 사회주의의 적색혁명에 맞서 실시한 녹색혁명의 농장들에는 모건의 미국철강회사가 만든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철조망은 군산복합체라 불리는 자본-권력융합체의 옷을 입게 되었고 미국패권외교의 수단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6) 예외적 정전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957년 미국이 정전협정 13항 ㄹ목의 폐기를 선언하며 핵무기를 들여올 때와는 달리 1967년 철책설치는 정전협정 13항ㄱ목의 무효나 폐기선언 없이 이루어졌다. 또한 정전협정 5조 61항에 의해 수정할 수도 있었지만 수정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정전협정의 명백한 위반인 것이다.

정전협정은 비무장지대에 대한 출입허가권을 유엔사령관에게 부여했을 뿐 소유와 이용에 대해서는 그 관할권을 인정한 바 없다. 비무장지대는 지금의 민통선정도의 출입통제제도를 상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철조망이란 물리적 장치에 의해, 출입통제가 아닌 출입금지를 제도화했고 당연히 소유, 이용, 통치의 국가주권행사를 침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전협정이 합법적으로 성립되었고 그에 따라 법적효력을 가질 때만 적용된다. 그러나 정전협정의 법적지위와 효력은 부존재 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첫째, 한국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전협정의 법적지위는 한국헌법체계하에서는 불성립한다. 실제로 정전협정이 법적 구속력을 가지려면 조약처럼 비준·발효되고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질 때래야 가능하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한국헌법체계 하 어디에도 법률 등의 국내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둘째, 정전협정의 효력이 소멸했다. 설령 정전협정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94년 5월 29일 인민군은 군사정전위폐쇄를 통보했고 그로서 정전협정핵심조항의 효력이 상실되었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유엔사군정위는 군정위의 잔여부분이 아니다. 원심력이 없으면 구심력도 없듯이 정전협정에서 군정위는 쌍방에 의해서만 성립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유엔사군정위는 군정위와 무관한 효력무효의 기구인 것이다. 한국으로서도 북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사군정위를 통하는 것이 아무런 실익이 없다.138)

철조망설치의 근거로 오인되어온 정전협정의 법적지위와 효력이 부존재하는 데도, 정전협정위반의 결과로 탄생한 철조망이 정전협정을 유지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67년 철조망건설은 정전협정을 뛰어넘어 협정 밖에서 물리적 장치가 가동되고 그 장치가 협정을 규정하는 상태, 즉 ‘예외상태’139)를 만들어냈다. 실제 정전협정을 대신하여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는 「유엔사규정551-4」는 정전협정상 금지되는 무장화를 현실로 인정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정전협정이 유엔과 유엔의 지원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고, 정전협정에 기반한 정전체제란 오히려 예외적 정전체제이며 철조망에는 미국집단안보패권의 민낯이 드러나 있다.

(7) 예외적 점령이념으로서의 철조망

1954년 유엔사와 한국정부간 38선 이북지역 행정권이양논의의 시작은 군사분계선과 38선 사이의 영토에 대한 것이었다.140)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양된 지역은 비무장지대와 38선 사이였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남방한계선 사이, 즉 남측비무장지대가 제외된 것이다. 유엔사는 스스로의 공문에서 38선이북 지역은 ‘유엔사의 군사점령지(under military occupation by the UNC)’라고 주장하였다.141) 그렇다면 유엔사는 여전히 남측비무장지대를 점령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이는 10여년 뒤 다시 유엔사의 공문에 의해 확인되었다.

박정희대통령도 집권초기 이승만과 유사하게 행정권이양 문제에 부딪친다. 이번엔 남측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었다. 1963년 7월 1일자 주한미대사관이 미8군에 보낸 전문에는 6월 22일 유엔사령부가 대성동의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위임하는 문제에 반대하면서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 남측비무장지대가 유엔사의 군사점령하에 있다는 주장을 다시 확인하였다.142)

대성동민사행정에 대한 「유엔사규정 525-2」에는 이같은 입장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성동은 정전협정 추후합의서에 의거 허가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와 지원 하에 유엔사가 설립하였다.’143)

대성동마을은 1953년 8월 3일에 설립되었다. 군사분계선과 38선사이 영토의 행정권이양논의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따라서 유엔사주장대로라면 대성동은 유엔사점령하에서 민정통치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이다. 한국헌법에 반하여 한국영토일부지역을 유엔사가 점령통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정부의 동의와 지원이 있었다고 표현해도 유엔사가 대성동의 점령지적 성격을 포기한 흔적은 없다. 대성동주민들에게 국방의무와 납세의무가 없다는 것은 여전히 한국주권이 미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38선이북지역에 대한 유엔사점령통치권주장은 그들이 법적근거로 제시한 문서에 의해 틀린 주장임이 바로 확인된다.

미군이 38선을 넘은 직후인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는 언커크라 불리게 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창설결의가 통과되었다. 그리고 10월 12일 언커크 준비위원회는 언커크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임시로 38선이북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유엔사령부에 위임하는 내부결정을 하였다.144) 이 결정은 유엔총회의 결정과도 무관한 것이었으며 설령 그 효력을 인정한다 해도 언커크가 한국에 도착하여 자기임무를 고려할 때까지(pending consideration)이므로 서울에 도착한 11월 26일에는 그 효력이 다한 것이 명백했다.

이처럼 유엔사의 남측비무장지대에 대한 점령권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임에도 철조망은 이를 물리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미국서부에서 소유이념의 옷을 입은 철조망은 소유자간의 갈등과 대립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때와 똑같은 형상으로 울타리 쳐진 영토에 대한민국 국민은 출입조차 못한다. 거친 서부개척시대의 갈등조차 한국비무장지대에서는 사치다.

이런 상상실험을 해보자. 1954년 38선에 철조망이 쳐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다.

38선이북 행정권이양은 한국정부의 요구보다는 유엔사 자체의 결심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유엔사는 정전과 함께 이 지역으로 민간인들이 이주해올 것이고 그와 함께 농지개혁, 호적정리등 행정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계산 하에 행정권이양을 결심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철조망이란 장치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38이북지역으로의 주민접근을 금지시킬 수 있었다면 유엔사로서는 굳이 행정권이양을 서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정전협정에서 철조망의 제거를 합의한 상태였기에 67년 같은 규모의 철조망건설을 계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현재 비무장지대에 철조망이 제거되고 사람들의 행정수요가 폭발한다면 유엔사는 그런 행정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비무장지대에 대한 관할권이양을 먼저 제안해올지 모른다.

주권의 찬탈을 목적으로 한 정복과 달리 점령은 주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철조망은 출입을 봉쇄하고 거의 무주지(no mans land)로 만들어 주권행사마저 봉쇄한다. 유엔사가 주장하는 점령지는 철조망에 봉쇄되면 실질적인 정복지가 된다. 철조망은 법적 점령상태를 초과하는 예외적 점령상태를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유엔사의 점령지주장은 우리 헌법으로서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며 이 경우 유엔사는 반국가단체가 된다.

(8) 분단규율이념으로서의 철조망

정전체제는 잘못된 말이다. 정전체제가 성립하려면 정전협정이 법적 지위를 갖고 그에 수반한 제도가 법률적 형식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외적정전체제는 정전협정밖에서 정전협정을 규정한다. 이런 관행의 축적결과 우리는 입으로 ‘비무장지대’란 단어를 말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중무장지대’를 떠올리게 되었다. 사과라고 말하며 바나나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한다. 정신분열증이다. 한국에서 공간구분의 기준이 되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철조망으로 대체되면서 우리는 그러한 공간구분의 합법성·합리성을 묻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예를들면 철조망을 기준으로 형성된 ‘전방’과 ‘후방’개념은 지리적 구분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서 후방의 일상적 생활세계는 위험하고 예외적이며 국가와 군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전방과의 상상적 구분을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1972년 군사시설보호법으로 제정된 ‘군사시설보호구역’, 1981년 개정된 군사시설보호법에 의해 법률화된 ‘민간인통제선’, 2000년대 법률화된 ‘접경지역’과 같은 규정된 지역이 있지만, ‘전방’과 ‘후방’이라는 지역은 법이나 명확한 합의에 의해 규정된 개념이 아니다. 법을 적용하면 너무나 많은 모순에 걸리기에 내면화된 규정, 분단규율로 유지되는 상상적 경계선의 공간이다.145)

캐서린 채풋(Catherine Chaput)은 반복되는 정치적 레토릭의 힘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유지 및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고 한다.146) 벤담의 원형감옥이 죄수들로 하여금 감시를 내면화시키듯 철조망장치는 불법에 순응토록 하는 분단규율을 내면화시키는데 성공한다. 김하기의 글을 보자.

‘분단은 반드시 휴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휴전선의 철책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길러온 가시일 뿐이다. 동포를 적으로 생각하는 가시…한번 미워하면 화해할 줄 모르는 가시, 약한 것을 짓밟으려고 하는 가시, 우리 생활 속에 돋아난 모든 가시들이 모여 휴전선의 철책을 이루고 있다.’147)

철조망이 분단규율을 만들고 분단규율이 철조망을 갈망한다. 김하기가 통찰하듯이 철책은 동포를 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철조망너머의 적이 아닌 철조망안의, 내부의 적을 만드는 이념이기도 한 것이다. 철조망이 굳건할수록 내부의 적을 분리할 명분도 굳건해진다. 이 경우 ‘적’은 법률용어가 아닌 심리적 용어이다. 분단은 내면 깊은 곳에서 원한을 만드는 체제이다. 이런 점에서 분단체제는 원한체제이다.

내면화된 분단규율은 철조망물신주의를 알게 된 뒤에도 작용한다. 지배자도 철조망이 만드는 상징적 허구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just because)를 보탠다. 철조망이 허구인 것을 알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뭉쳐야하고 철조망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148)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하자면서도 그 평화지대가 철조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을 상상한다.

지금까지 철조망은 외적개념들과의 통일로서 이념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주관적 자유의지를 규율한다. 베르그송은 말한다.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다.’ 구속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가 반발하지만 관성은 외부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심지어 합리화한다. 외적 구속에 대항하는 자유의 무기는 총과 칼이 될 수 있지만 관성과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반성과 성찰밖에 없다.

철조망을 걷어내는 운동이 사회관계의 변화를 무시하면 서부판 라다이트운동이었던 철조망절단운동으로 전락할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철조망을 놔두고 사회관계의 변화만을 추구한다면 이 역시 철조망이 그 자체로서 이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2. 한강하구철조망의 현황과 적법성

1) 현황

(1) 유엔사규정

현재 한국에서의 정전체계는 정전협정-정전협정부속합의서-유엔사규정(UNC Reg)149)으로 이어지는 3층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중 정전협정과 그 부속합의서는 인민군과 유엔사 쌍방이 합의한 문서지만 유엔사규정은 유엔사가 단독으로 작성한 내부규정일 뿐이다.

유엔사규정의 제정자는 유엔사령관이지만 실질적운영자는 유엔사군정위다. 유엔사군정위는 그저 유엔사의 임의기구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내부기구가 한국합참을 지휘·통제한다는 것이다.

유엔사규정은 정전협정이나 그 부속합의서에는 없는 한국 합참의장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한강하구 내 민간항행 관련 규칙을 이행 및 집행한다.’150) 유엔사군정위가 규정하고 감독하며 합참은 집행한다. 이로서 유엔사규정에서는 한강하구항행규칙의 준수를 위한 위계체계가 만들어졌다. 「정전관리책임에 대한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간의 기록각서」(2011.10.24.)가 체결되기 이전의 유엔사규정에는 ‘유엔사지상구성군사령부’라고만 명기했지만 이후로 ‘한국 합참’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유엔사령관은 합참의장에 대해 지시권한 혹은 지휘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유엔사규정은 사문화된 정전협정부속합의서의 한강하구항행규칙을 유엔사규정에 흡수하여 한편으로는 정전협정이 유지되도록, 즉 폐기되지 않도록 하며 한편으로는 한국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재수립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정전협정도 유엔사규정도 한국헌법체계 내에 그 법적지위가 부존재 한다.

(2) 9.19남북군사합의서

정전협정과 그 부속합의서와 유엔사규정 모두 한국헌법하에 법적지위가 없음에도 다른 대안이 없어 한국정부 역시 이를 거부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9.19남북군사합의서가 서명, 비준, 공포로 발효됨으로서 국내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151)

이 지역에 주권이 수립된 것이다. 이에 따른 한강하구기본법과 분야별이행법률이 마련되면 이 지역의 주권은 그 행사를 통해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더 이상 정전협정이나 유엔사규정에 신세를 질 필요가 없으며 유엔사의 관할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배제하거나, 관할권주장을 배려하여 이양받으면 된다.

9.19남북군사합의서 4조 4항은 한강하구의 공동이용을 약속하고 있다. 9.19평양공동선언은 상대방의 관할권을 침해하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비무장지대는 남측과 북측지역의 관할권이 유지되지만 한강하구는 어떤 정치적·행정적 중간선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동영유(Condiminium)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용은 소유보다 발전된 개념이므로 공동이용은 곧 공동통치(Coimperium)를 의미한다. 문제는 공동통치의 수준일 뿐이다. 이명박정부 때 한강하구에 나들섬을 만들어 남북특별자치시로 하자는 구상이 있었는데 이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동통치구상인 셈이다. 나들섬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보수진영조차 한강하구에 높은 수준의 공동통치를 기획했다는 것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강하구철조망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출입이다. 9.19군사합의서 붙임5는 한강하구에서의 항행을 전제로 통행검사소를 두기로 하였다. 이는 정전협정부속합의서에 나와 있는 유엔사령관의 민간항행선박에 대한 등록절차와는 현격히 다른 것이다. 통행검사소는 항행에 방점을 둔 것으로 갯벌에서의 채취, 평화적 이용, 보존 활동등 다양한 형태의 출입을 통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또한 긴급상황 발생시 소방청의 구제활동을 위한 통로가 한정되어 있다면 위기관리에 문제가 생김으로 통행검사소와 통로는 다르게 운영해야 할 것이다. 통행검사소 규정은 포지티브규정이지 네가티브규정은 아니므로 통행검사소규정이 곧 철조망의 유지를 전제한다고 해석될만한 근거는 없고 또 그러한 규정도 따로 없다. 9.19남북군사합의서가 채택한 평화이념의 가장 훌륭한 적용은 철조망의 제거일 것이다.

2) 적법성

정전협정 13항, 철조망제거 규정에 의해 철조망설치는 정전협정위반을 구성하며 미국이 유엔사해체의 전제조건으로 지금도 주장하고 있는 정전협정준수를 위해서라면 철조망을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보호법상의 적법성여부를 살펴보자.

(1) 철조망이 “군사시설”규정에 열거한 ‘군사목적을 위한 장애물’에 포함되는지 여부이다.

철책은 경계철책이라고 부를 만큼 군사목적 중 경계를 주목적으로 한다. 밤새워 철책 앞에서 경계를 서고, 아침에는 침투흔적을 찾기 위해 철조망과 철조망 사이에 끼워둔 돌멩이나 깡통을 살펴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오감’에 의지한 경계에서 영상·음향감지 센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시스템에 의지한 경계체계는 2005년부터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육군은 최전방경계근무를 병력중심에서 첨단장비위주로 개편하는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마련하고 2015년에 시험적으로 철책 위에는 침입을 감지하는 그물망을 촘촘하게 깔고 근·원거리용 CCTV를 설치했다. 2016년 12월 전방철책 약240km에 ‘광망(光網)’이라 불리는 스마트 철책장비를 설치했다. 감시·감지·통제시스템으로 철책에 광그물을 씌우고, 감시카메라와 열영상 감시장비 등으로 낮엔 1~2㎞, 야간엔 200~400m 경계가 가능하다. 광그물망에 침입움직임이 감지되면 신호가 울리고 카메라가 촬영해 영상을 지휘통제실과 소초로 보내는 방식으로, 이를 스마트 경계시스템이라고 부른다. GOP과학화경계시스템이 본격 도입되면서 24시간 주간-전반야-후반야 3교대로 이뤄지던 경계근무가 사라졌다.152) 이제 철책은 광망을 설치하기 위한 거치대의 의미만 남았다. 굳이 철책이 아니어도 경계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국립공원내 밀렵꾼을 감시하기 위한 인공지능 알고리듬등 소프트웨어의 발전이 더 효율적 감시목적을 달성함이 증명되었고 이는 이미 군내부에서도 운용되고 있다. 따라서 ‘군사목적을 위한 장애물’목록에서 철조망을 삭제할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2) 한강하구가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구역 중 고도의 군사활동보장이 요구되는 군사분계선의 인접지역인 ‘통제보호구역’에 해당하는지 여부이다.

우선 이 법은 군사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구역을 설정하도록 하고 있다. 한강하구철조망보호를 위해통제보호구역을 설정하는 식이다. 통제보호구역이 해제되면 철조망은 보호받지 않는다. 물론 철조망이외에 다른 군사시설이나 군사기지가 있는 경우는 예외이다.

통제보호구역은 이 법에서 ‘군사분계선 인접지역’으로 특정하고 있다. 군사분계선은 육지비무장지대에만 있고 한강하구와 서해5도에는 없으므로 한강하구전체와 서해5도는 이 조항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통제보호구역 중 “민간인통제선”을 설정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군사분계선의 인접지역’으로 특정되어 있다. 특히 제5조 2항에는 ‘민간인통제선은 군사분계선이남 10킬로미터 범위이내’로만 지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강하구와 서해5도에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민통선설정은 불법을 구성한다.

추가로 1954년 유엔사가 귀농선을 설정하여 관할하던 것을, 1958년 국군이 이양받아, 1959년 민통선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1981년 군사시설보호법에서 최초로 민통선조항이 신설됨으로서 비로소 법률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민통선은 1981년까지는 법적근거가 없어 위법을 구성하며 81년 입법은 소급입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법률 역시 법을 오인하여 한강하구와 서해5도까지 민통선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3) 철조망이 이법의 최소필요원칙에 부합하는 가의 여부이다.

이법 제3조(보호구역등의 지정 원칙)에서 “보호구역, 민간인통제선, 비행안전구역 및 대공방어협조구역은…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지정”하도록 정하고 있다. 최소필요의 원칙이다. 고양시와 김포시의 철조망제거 민원은 ‘주민과 관광객의 접근을 가로막고 국토경관만 훼손’한다는 것이었다. 서부개척시대 철조망절단전쟁의 원인은 생존권이지만 접근권과 경관권만으로도 철책은 제거되고 있다. 이법이 정하고 있는 최소필요원칙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보호구역해제사유와의 인과성여부이다.

‘국방부장관은 군사기지의 용도 해제, 군사시설의 철거, 작전환경의 변화, 그 밖의 사유로 보호구역등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 때에는 지체 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이 조항에 의하면 철조망 철거와 같은 군사시설철거는 보호구역해제사유가 된다. 거꾸로 보호구역이 해제되면 군사시설유지의 명분도 없어진다. 앞서 보았듯이 한강하구와 서해5도는 군사분계선인접지역이 아니므로 최소한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보호구역해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또한 이 조항에서 열거한 ‘작전환경의 변화’는 9.19남북군사합의에 의해 이미 법적으로 실현되었으므로 보호구역해제사유가 된다. 그렇다면 ‘군사시설의 철거’는 원인이 아닌 결과가 될 것이다.

3. 결론

철조망을 이념으로, 또는 이념체로 보고 그 역사적 전개를 살피는 것은 철조망을 어느 한 측면에만 주목하여 집착하는 모든 태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한다. 또한 철조망이념에 축적된 수많은 모순은 철조망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수많은 측면과 계기들로 다시 재연될 때, 문제를 구분하고, 구분된 문제의 순서를 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농장주의 무기였던 철조망은 목장주의 반대에 직면했지만 결국은 목장주와 농장주 모두 철조망을 쓰게 되었다. 목장주와 농장주간 싸움의 유일한 승자는 철조망회사가 되었다. 철조망절단운동가들이 이를 뒤늦게 깨닫고 북부지역과 독점산업자본가를 공동의 적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철조망 내전은 외부의 적, 자본주의미국의 적인 사회주의국가들과의 대립, 전쟁의 무대에서 화해되었다. 적색혁명에 맞선 녹색혁명의 대지마다 철조망이 쳐지고, 자본주의수호전쟁으로 규정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전장에서 미국패권의 이념체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국내를 넘어 국제적 전쟁무기가 되자 전쟁영웅과 마찬가지로 철조망의 조국 미국에서는 철조망수집애호가클럽과 철조망박물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파주시에서 안보관광기념품이란 명목으로 개발한 철조망상품이 미 제국이념의 모방이 되지 않으려면 철책제거운동의 기념품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유엔사는 57년 핵무기배치 시 정전협정폐기를 공개적으로 예고했던 것과 달리 67년 철책건설시에는 폐기에 대한 어떤 예고도 없이 실행했다. 미국 스스로 정전협정을 위반했지만 미국은 정전협정준수를 기득권처럼 주장해왔다. 철조망설치 주체인 유엔사의 해체가 유엔총회에서 결의될 때 미국은 유엔사해체의 조건으로 정전협정준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철조망이 정전협정위반이란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철조망은 정전협정위반인데도 정전의 수호자로 둔갑되었다. 범죄자가 법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철조망이 정전을 유지시킨다는 전도몽상이 발생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전세계를 향해 유엔헌장과 국제법을 지키도록 강제하지만 자신들에게 불리할 때는 이를 위반해도 어떤 처벌을 받지 않는 예외적 상태, 즉 패권체계를 만들었다. 그 점에서 베트남비무장지대의 철조망보다 한국비무장지대의 철조망에서 미국의 패권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베트남에서는 폐기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예외적 정전, 예외적 점령이라는 독특한 이념이 철조망에 투영된 것이다. 이는 철조망 역시 예외적 권력을 구성하는 장치이자 이념임을 의미한다. 철조망물신숭배가 발생한다.

위법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자연을 보존해준다고 것도 물신주의이다. 철조망은 자연보호를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연적 결과이기에 언제든 철책운영주체의 변심에 의해 자연파괴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보전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더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를 실현할 장치를 개발함으로서 이념이 된다.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실체와 통일되어야만 새로운 이념이 된다.

따라서 우선 미국패권이념이 아닌 한국주권이념으로 철조망에 대한 처분권을 옮겨와야 한다. 비준발효된 남북합의서에 의해 유엔사관할권을 배제할 경우 이제 그 책임은 한국에게 돌아온다. 고엽제와 지뢰와 감시장비와 철조망은 하나의 통합장벽체계였다. 이중 고엽제는 사용이 금지되었고 지뢰제거도 진행되고 있다. 지뢰제거의 가장 큰 이유는 지뢰가 무기로서의 효용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엽제나 지뢰보다도 무기로서의 효용성이 훨씬 미약한 철조망은 여전히 버티고 있다.

자유이념의 실현으로서 출현한 철조망은 추상적·우연적 이념을 구체적·필연적이념으로 발전시켜왔다. 그 과정은 대립과 모순의 발전과정이기도 했다. 모순의 해소를 통해서만 다음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이는 사실 해소가 아니라 전가였다. 다음단계의 이념으로 전가된 모순은 한층 더 치명적인 모순으로 심화되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철조망이념의 모순은 더 이상 전가할 단계가 없음을 의미하며 철조망자신을 해소함으로서만 완전한 자유의 이념에 이를 수 있다.

 

주)

1) S. Daniels, Fields of Vision: landscape imagery and national identity in England and the United States, (Cambridge: Polity Press, 1993), p.5

2) 지상현, 이진수, 조현진, 류제원, 장한별, 「냉전의 진열과 쇼핑-DMZ전망대를 통해 살펴본 냉전경관의 구성」, 『대한지리학회지』Vol.53 No.5, (대한지리학회 2018), p.606

3)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Ⅲ』, (서울: 지학사, 1989 3판), p.72.

4)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Ⅲ』, (서울: 지학사, 1989 3판), p.36

5) 이념은 이미 개념과 실재의 통일이어서 물질적 존재 속에 있지만 우리의 상식은 이념을 관념적인 것으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글에서는 이념과 이념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6)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자본론』1(상), (서울, 비봉, 1999 개역11쇄), p.92

7) Le jeu de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é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Gallimard, 2004), pp.48-49/오트르망 역,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p.85

8) Le jeu de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é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Gallimard, 2004), p.50/오트르망 역,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p.87

9) Le jeu de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é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Gallimard, 2004), p.50/오트르망 역,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p.88

10) The Barbed Wire Patent,  143 U.S. 275 (1892)

11) George Basalla, The Evolution of Technology (Cambridge, 1998), pp.52, 55

12) 철조망은 소의 개울과 강으로의 접근을 제한했다. 야생동물에 미치는 영향은 빠르고 재앙적이었다. The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의 리뷰 기사에서 웨인 가드(Wayne Gard)는 “가죽만 남은 긴 뿔의 소들은…갈증에 미쳐갔다.”라고 설명했다.

13) Henry D. and Frances T. McCallum, The Wire that Fenced the West, (OK: Norman, 1965), p.138

14) 헤겔은 기도企圖와 의도를 구분한다. 예를들면 권총으로 살인을 기도하고 살인으로 절도를 의도하면, 권총은 기도의 수단, 기도는 의도의 수단이 된다. 권총을 들었기 때문에 권총으로 살인하고 살인을 하고나니 절도의 방해물이 없어 절도한다. 그러나 살인의 수단이 반드시 권총일 필요는 없으며 절도의 수단이 살인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처럼 도덕차원의 행위는 상대성, 외면성에 의존한다. 철망으로 소의 상해를 기도하고 소의 상처로 농부의 소유권을 보호할 의도라면 철망은 소 통제라는 기도의 수단, 소 통제는 소유권보호라는 의도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소유권보호가 반드시 소 통제를 통해 소 통제가 철망을 통해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이는 철조망을 통해 사람의 접근을 막고, 사람의 접근을 막아 자연을 보호하자는 논리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자연보호를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만, 사람의 접근을 철조망으로만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는 우리가 도덕차원의 기도와 의도의 상대성, 외면성의 함정에 빠진 결과이다. 대통령의 경호는 선글라스를 끼고 정복을 입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전거나 인라인을 타는 관광객처럼 주위를 맴도는 게 경호에는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현장의 경호가 유연할 수 있고 수단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경호법이 있고 그에 따라 국가행정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권력과 최첨단장비를 제약없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조망에 대한 이념이 도덕차원을 넘어 국가차원의 주권이념체로 변신할 때 이러한 상대성, 외면성이 탈각된다.

15) 헤겔, 이동춘 역, 『법의 철학』(전편), (서울: 박영사, 1983 중판), p.239참조

16) Washburn & Moen Manufacturing Company, Steel Barb Fencing. The World’s Fence. Everywhere adapted to all the uses of husbandry. In all climates and under all exposures. ‘The Perfect Fence’ (Worcester, MA. 1880), p.8; Baker Library, Harvard Business School. Box#320

17)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p.18-19, 50

18) “The Invention That Tamed the West”,
ttps://www.rushcounty.org/BarbedWireMuseum/BWabout.html(2021년 6월 1일 검색)

19) Elenor Cummins, “A brief history of barbed wire”, April 11, 2019;
ttps://www.popsci.com/barbed-wire-invention-history/ (2021.6.7.검색)

20) Anon, ‘Indians & Barbed Wire’, American Barbed Wire Journal Ⅱ/4(1968), p.2;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53

21) Elenor Cummins, “A brief history of barbed wire”, April 11, 2019;
https://www.popsci.com/barbed-wire-invention-history/ (2021.6.7.검색) 

22) 김용창, 「건국초기와 19세기 미국에서 재산권사상과 사적이익을 위한 공용수용」, 『공간과 사회』22권3호, (2012), p.74

23) “The Early Years: A Brief History of Barbed Wire”,
ttps://www.rushcounty.org/BarbedWireMuseum/BWhistory.html(2021.6.9.검색) 

24) Walter Prescott Webb, The Great Plains,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59), p.311

25) Marilynn S. Johnson, Violence in the West: The Johnson County Range War and the Ludlow Massacre—A Brief History with Documents, (Waveland Press, 2014), pp.11–12

26)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13

27)  "Range Wars and Feuds", The Spell of the West.

28) Joanne S. Liu, Barbed Wire: The Fence that Changed the West, (Mountain Press Publishing Company, 2009), p.86

29) Joanne S. Liu, Barbed Wire: The Fence that Changed the West, (Mountain Press Publishing Company, 2009), p.61

30) Edward Surtz, S.J., Utopia,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64)/노재봉 역, 『유토피아』, (서울: 삼성출판사,1982), p.34참조

31) Marilynn S. Johnson, Violence in the West: The Johnson County Range War and the Ludlow Massacre—A Brief History with Documents, (Waveland Press, 2014), p.12

32) “The Invention That Tamed the West”,
ttps://www.rushcounty.org/BarbedWireMuseum/BWabout.html(2021년 6월 1일 검색)

33) “The Invention That Tamed the West”,
https://www.rushcounty.org/BarbedWireMuseum/BWabout.html

34) Joseph M. McFadden, “Monopoly in Barbed Wire: The Formation of the American Steel and Wire Company.” The Business History Review, 52, 4, (1978), p.2

35) American Steel & Wire Company는 경쟁을 제한하고 가격을 높이기 위해 여러 경쟁 철조망회사를 인수한 Elbert Henry Gary에 의해 1899년경에 설립되었다. 1901년 American Steel and Wire는 U.S. Steel Company에 합병되어 그 자회사가 되었다. 그들의 주요 클리블랜드 시설은 American Works, Central Furnaces 및 Dock 및 Newburgh Works였다. 1924년에 부서의 본사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록펠러 빌딩으로 이전했다. 1940년대부터는 클리블랜드 남쪽 교외에 있는 뉴버그 타운십에 Jones & Company가 설립된 18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물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U.S. Steel의 American Steel & Wire사업부는 1964년에 해산되었고 클리블랜드 사무소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로 이전했다. 1986년 American Steel & Wire Corporation은 Cuyahoga Works (동일한 위치이지만 앞서 언급한 시설의 통합 버전)를 매입했다.
https://ohiomemory.org/digital/collection/p267401coll34/id/7902/

36) R. D. Holt, ‘The Introduction of Barbed Wire into Texas and the Fence Cutting War’, West Texas Historical Association Year Book, VI, (1930), p.75

37) J. Evetts Haley, Charles Goodnight: Cowman and Plainsman, (Norman, OK, and London, 1949), p.71;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56

38) Walter Prescott Webb, The Great Plains,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59), p.315

39) Mollie E. Moore Davis, The Wire-Cutters (Boston, 1889. repr. College Station, TX, 1997), p.94; 1886년 11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계속 눈이 내렸고 새해에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비가 내린 뒤엔 얼어붙어 두터이 쌓인 눈과 뚫을 수없는 얼음 아래에 작은 풀이 사실상 갇히게 되었다. 가축은 노출과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얼어붙은 시체는 평원을 덮었다. 다음해 봄이 왔을 때 썩은 가축시체의 악취가 평원에 진동했다. 이를 “Big die up”이라 부른다.
https://www.americancowboy.com/lifestyle/big-dieup-30155 참조

40)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p.59-60

41) Dodge City Times, Cited in David Dary, Cowboy Culture: a Saga of Five Centuries (Kansas, 1989), p.321

42) Kathleen Rice Adams, “The Devil’s Rope Comes to Texas”, Petticoats and Pistols, Retrieved January 21, 2018, September 12, 2016

43) Andrew Graybill, “Rural Police and the Defense of the Cattleman’s Empire in Texas and Alberta, 1875-1900”, Agricultural Historical Society,79 (3), (Summer 2005), p.260

44) Robert J. Rosenbaum,  Mexicano Resistance in the Southwest,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Press, 1981), p.130

45) Wayne Gard, “The Fence-Cutters”, The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51 (1)(1947–1948), p.7

46) Henry D. and Frances T. McCallum, The Wire that Fenced the West, (Norman, OK, 1965), p.66

47) 미국 역사에서 주로 농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유통되는 지폐의 양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해 1868~1888년경에 벌인 운동

48) R. D. Holt, “The Introduction of Barbed Wire into Texas and the Fence Cutting War”, West Texas Historical Association Year Book, VI, (1930);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61

49) Fort Worth Daily Gazette, cited in R. D. Holt, “The Introduction of Barbed Wire into Texas and the Fence Cutting War”, West Texas Historical Association Year Book, VI, (1930), p.72

50) R. D. Holt, “The Introduction of Barbed Wire into Texas and the Fence Cutting War”, West Texas Historical Association Year Book, VI, (1930), pp.73-74; Charles W. Calhoun, ed., The Gilded Age: Essays on the Origins of Modern America, (Wilmington, 1996), p.242

51) Galveston Daily News, 13 December 1885, cited Earl W. Hayter, “Barbed Wire Fencing a Prairie Invention”, Agricultural History Society, XⅢ, (1939), p.204

52)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Ⅲ』, (서울: 지학사, 1989 3판), p.70

53) Timothy J. Stapleton, A Military History of Africa, (ANC-Clio, 2013), p.107

54) Sam Moore, “Barbed wire’s history entangled in war”, April 12, 2018;
https://www.farmanddairy.com/columns/barbed-wires-history-entangled-in-war/480937.html(2021.6.9검색)

55) Erich Maria Remarque,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29), trans. and afterword Brian Murdoch (London, 1996), p.27

56) Thomas Pakenham, The Boer War, (London, 1992), p.537

57) Reviel Netz, “Barbed Wire”, London Review of Books, XXⅡ/14, (2000), p.31;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p.69-70

58)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Committee of Imperial Defence”, Official History(Naval and Milit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vols, (London, 1910-1912) I. p.164; Ⅱ, pp.84,552

59) 이내주,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군사기술 발전과 군대문화」, 『學林』Vol.38, (연세사학연구회, 2016), p.106

60) M. Howard, “Chapter 6. Men against Fire:The Doctrine of the Offensive in 1914,” The Lessons of History, (Oxford:Oxford Univ. Press, 1992), p.107

61) 일본군의 정신력만능주의의 폐해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1902년 1월 핫코다(八甲田)산 참사를 들 수 있다. 러일전쟁을 준비하며 보급루트확보를 위해 답사에 들어간 일본 육군 1개 중대 210명중 199명이 얼어죽은 사건이다. 아오모리의 기후지형과 지역주민들의 협조를 무시하고 군인정신만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휘부의 오판의 결과였다.

62) 이내주,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군사기술 발전과 군대문화」, 『學林』Vol.38, (연세사학연구회, 2016), p.97

63) John Keegan, The First World War, (London, 1999), p.191

64) Reviel Netz, “Barbed Wire”, London Review of Books, XXⅡ/14, (2000), p.33

65) War Department, Document no. 792, Wire Entanglements: Addenda no.1 to Engineer Manual (Washington. DC, 1918), pp.5-6;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80 

66) 미니에 탄환이나 후장식 강선총으로 대변되는 개인화기의 성능향상은 전투방식의 패러다임 변화를 요구하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엄청난 발사속도를 지닌 맥심기관총과 강력한 화력을 자랑한 신형대포가 그 뒤를 이어서 위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합으로 형성된 화망(火網)을 뚫고서 전진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됐다.

67) 찰스 톤젠드 외 지음, 강창부 역, 『근현대 전쟁사』, (한울아카데미, 2016), p.27

68) 제1차 세계대전이 대규모 살육전으로 전개된 제반 요인에 대해서는 이내주, 「제1차세계대전은 왜 대량살육전이 되었는가?」, 『서양사연구』36집, (2007. 5), pp.59~84을 참고할 것.

69) 1916년 솜 전투 이후 영국군은 이전 전투의 실책을 교훈삼아 보다 적합한 전술을 개발하고 전투력을 신장시켜서 궁극적으로 승전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무수한 인명피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남아있다.(P. Griffith, ed., British Fighting Methods in the Great War, (London:Frank Cass, 1996)을 참조할 것

70) Damien Lewis, Churchill’s Secret Warriors: The Explosive True Story of the Special Forces, (Quercus, 2014), p.93

71) Horst Dannert, Improvements in Barricades, British Patent No 480,082. 1937.

72) “Razor Wire History”;
https://www.razorwiresupplier.com/technology/razor-wire-history.html

73)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22

74) Construction of Dannert Concertina Wire Obstacles, Military Training Manual No 21A. (War Office, September 1939)

75) Robert W. Metcalfe, Jan Buchanan-Redden, No time for dreams: a soldier’s six-year journey through World War II, (General Store Pub House, 1997), p.4

76) U.S. Army FM 5-250, sec 1-14, pp.1-12

77) 그러나 최종 해결책은 탱크였다. 기관총과 소형무기의 발사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넓은 궤도가 콘서티나 위로 올라가 철조망을 눌러버렸다. 프랑스에서 대대사령관으로 잠깐 복무했으며 당시 영국정부의 일원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1914년 연설에서 “플랑드르에서 철조망을 씹는 것”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한다고 말했고 그는 탱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왔다. 1916년에 철조망은 탱크에 패배했다. Sam Moore, “Barbed wire’s history entangled in war” April 12, 2018, https://www.farmanddairy.com/columns/barbed-wires-history-entangled-in-war/480937.html; Reviel Netz, Barbed wire. An ecology of modernity, (Wesleyan University Press, 2004), pp.124-127 그러나 3중으로 설치된 콘서티나철망은 전차 등 중장갑 궤도 차량도 궤도에 심하게 엉키기 때문에 헤치고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해선 철조망 절단기로 제거해야 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공병용 폭약을 사용한다. 여기에 지뢰까지 철저하게 매설된 철조망지대를 돌파하려면 대형폭발물을 쓰거나 포병, 공군의 도움을 받아 일대의 땅을 싹 엎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철조망 단독이 아닌 복합장벽은 전차로 신속히 무력화하는데도 한계가 있어 시간지연을 감수해야 한다.

78) Aidan Forth, Barbed-Wire Imperialism: Britain’s Empire of Camps, 1876-1903, (University California Press, 2017), p.39 참조

79) 1900년 11월 23일 영스타운 철판·강관회사로 설립되었다. 처음엔 철판과 강관제조로 시작되었지만 다양한 제품라인을 갖춘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철강생산업체 중 하나가 되었다. 철조망은 중요생산품목이었다. 1916년 이스트영스타운공장에서 노동조건에 대한 파업으로 폭동을 일으켜 마을과 공장 대부분이 불탔다. 파업은 국가경비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937년에 영스타운철판·강관 노조는 Republic Steel, Inland Steel, Bethlehem Steel, Weirton Steel과 함께 ‘소규모 철강 파업’(Little Steel Strike)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서 소규모란 ‘Big Steel’로 불리던 미국철강회사(U.S. Steel)와 비교해서일 뿐이다. Frederick J. Blue, William D.Jenkins, William H. Lawson, Joan M. Reedy, Mahoning Memories: A History of Youngstown and Mahoning County, (Virginia Beach: The Donning Company, 1995)참조

80) Professors of Havard Law School, ed., Constitutional Law Cases and Other Problems, Vol.Ⅱ (Boston: Little, Brown, 1953), pp.1629-1651 참조; 이시우, 『유엔군사령부』, (파주: 들녁 2013), p.463재인용

81)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p.62, 63, 65

82) Webbm, The Great Plains, p.296; Alan Krell, The Devil’s Rope: A Cultural History of Barbed Wire, (London: Reaktion Books, 2002)/강미경 역, 『악마의 끈』, (파주: 사계절, 2005), p.28

83) John Prados and Ray W. Stubbe, Valley of Decision (Boston, MA: Houghton Mifflin, 1991), pp.10-11

84) Ann Finkbeiner, “Jason: Can a Cold Warrior Find Work?” Science, 29 November 1991, p.1285

85) “Vol IV, Chapter I, The Air War in North Vietnam, 1965-1968,” The Pentagon Papers, (Boston: Beacon Press, 1971), p.112

86) 김원섭, 「베트남전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치 및 전략적 오류의 패턴에 관한 연구; 존슨 행정부의 실패원인과 닉슨 행정부의 변화」, (고려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2), p.168

87) Pentagon Paper, IV-C-6a, pp.92-93.

88) Major Gary L. Telfer, Lieutenant Colonel Lane Rogers, and V. Keith Fleming, Jr., U.S. Marines in Vietnam, 1967 (Washington, D.C.: Headquarters and Museums Division, U.S. Marine Corps, 1984), pp.86-87.

89) Pentagon Paper, IV-C-6a, (Boston: Beacon Press, 1971), p.97.; 김원섭, 「베트남전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치 및 전략적 오류의 패턴에 관한 연구; 존슨 행정부의 실패원인과 닉슨 행정부의 변화」, (고려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2), p.170

90) 프랑스령 알제리의 모리스 선은 1957년에 완공되어 알제리-튀니지 국경을 따라 460km, 알제리-모로코 국경을 따라 지중해에서 불모의 사하라사막까지 750km를 달렸다. 이 장벽의 핵심에는 5천 볼트로 충전된 8피트 높이의 전기울타리가 있었다. 울타리양쪽에는 대인지뢰가 대량 매설된 50야드지역이 있었다. 알제리 쪽의 철조망너머에는 알자스 추적견이 장착된 빈번한 무장지상순찰대를 통과하여 전선을 위반하려는 침입자를 탐지하고 파괴하는 도로가 건설되었다. 공격헬리콥터는 공중순찰을 실시했다. 강력한 탐조등이 밤에 장벽을 비췄다. 전자센서는 적의 공격대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레이더는 105mm 곡사포를 자동으로 조준하고 발사하도록 배치되었다. 이 장벽은 제2차 세계대전이전의 마지노선과 마찬가지로 건설당시 프랑스국방부장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알제리 국민해방전선(FLN)병사들은 모리스 선을 돌파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고전압 전선절단기는 독일에서 구입했다. 전선을 들어올리기 위해 후크를 사용하여 군대가 아래를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군인들은 전선아래를 파고 그 위에 절연물질을 던지려고 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프랑스군은 엄청난 화력을 동원하여 민족주의병사들을 파괴할 수 있었다. 프랑스공수부대의 압도적인 우월성과 수송헬리콥터의 아낌없는 사용은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전술적성공과 민족주의자들의 실패를 결과했다. John Talbott and Alistar Horne, A Savage War of Peace (New York: Viking Press, 1977), pp.264-266

91) Peter Brush, “The Story Behind The McNamara Line”, Vietnam magazine, (February, 1996), pp.18-24.
http://www.shss.montclair.edu/english/furr/pbmcnamara.html 

92) Folly는 어리석음이란 의미와 큰돈 처들인 쓸모없는 대건축이란 의미가 있다.

93) John Mayo, ‘“McNamara’s Wall” Shows That Building a Wall isn’t a Good Idea’,(2019.9.1.)
https://www.pressregister.com/opinion-letters/mcnamaras-wall-shows-building-wall-isnt-good-idea#sthash.cXCklhzI.3ZuuhN8c.dpbs

94) ‘McNamara Line’, Wikipedia

95) Pentagon Paper, IV-C-6b, pp. 83-84; 김원섭, 「베트남전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치 및 전략적 오류의 패턴에 관한 연구; 존슨 행정부의 실패원인과 닉슨 행정부의 변화」, (고려대학교대학원박사논문, 2012), p.177

96) “130. Special 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 SNIE 14.2-67, Washington, September 21, 1967, FRUS 1964-68 KOREA.

97) 조성훈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유엔사 측은 비무장지대의 남방경계선을 표식하기 위해 “두 줄기로 된 철조망으로 말뚝과 말뚝 사이를 연결하여 높이 약 2미터의 말뚝을 약 300미터 간격으로 설치하겠다”고 통보했고 설치 시 공동감시소조의 감시를 받았다. 전쟁직후에 남방한계선의 철조망은 대개 한 줄이었고, 취약지점에는 3중이었다. 당시 전방은 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거점방어였던 까닭에 방어정면이 넓어서 경계밀도가 희박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휴전선 일대도 약 1km 정도 사이를 둔 높은 봉우리에만 있는 아군 전방 감시초소(OP)에서 감지되지 않는 낮은 계곡 사이로 야간에 3,4명씩 침투하는 공비를 색출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테일러 유엔군사령관은 GOP지역에 집중적 병력배치가 필요하다고 제기했다. 그는 독일과 체코 사이의 국경선과 유사하게 국경선(aborderarrangement)을 시각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조성훈,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p.144. 위글 중 유엔사관련해서는 다음에서 인용하였다. 「準備對付可能\在鎭南浦登陸之敵」1951.8.26., 『모택동군사문집』6, p.302; 『중국의 한국전쟁사』3, pp.165-166,524

98) 정승화,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휴먼북스, 2002), p.336

99) 이재전, 「제1話 溫故知新(18) 생도대장 한 달 만에 1군 작전」, 『국방일보』, (2003.4.9.)

100) 신인호, 「DMZ의 어제와 오늘: 목책과 철책」, 『국방일보』, (2010.3.5.)

101) 신인호, 「DMZ의 어제와 오늘: 목책과 철책」, 『국방일보』, (2010.3.5.)

102) 「서울 1일 뉴욕타임즈 에머슨 채핀 記 재게재」, 『동아일보』, (1966.03.03.) 

103) “Assignment of Highest National Priority to the Mk84, Mod 1 2000 lb Bomb and to Project PRACTICE NINE”, NSAM No.358, January 13, 1967. ‘맥나마라 장벽’의 원래 계획명이 PRACTICE NINE이다. 이는 내부통신코드명이었다.

104) History Branch, Office of the Secretary, Joint Staff, MACV, United States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Command History 1967 Vol.3, p.1086

105) 『동아일보』 (1967.09.08.) 워싱톤 7일 발; 다른 자료에서도 67년 여름 베트남비무장지대의 철조망건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에반스(Evans)하원의원의 편지도 발견했다. 그리고 1968년 1/32교대백서도 발견했다. 이 교대정책은 1967년 여름 우리가 철조망을 건설한 뒤 시작했다. 제17연대는 10월에 그리로 갔다. 그들은 7사단 2여단과 함께 있었다. 리븐워쓰(Leavenworth)문서#19에서 당신은 더 많은 정보를 발견할 것이다.’Letter Wilson to Department of the Army, 3 Feb 2005

106) 이창호, 「간첩침투 분쇄를 위한 전략촌 설립」, (국방대학원학위논문, 1968)

107) 『경향신문』, (1967.12.25.)

108)  이재전, 『이재전칼럼』, (국군홍보관리소), p.30; 김성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pp.769-770; Major Daniel P. Bolger, Scenes from an unfinished war: Low-intensity conflict in Korea, 1966-1969, p.128

109) 『경향신문』, (1967.12.29.); 독일제 강철테이프란 표현은 미군들이 사용하는 인용이었다. U.S. Marine Corps, History and Museums Division, U.S. Marines in Vietnam: The War That Would not End. 1971-1973, (1991), p.57

110) 이후 잦은 간첩침투에 대한 대비로 철책선 밑에 2미터 가량의 철주를 박는 경우도 있었다. 조성훈,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p.143

111) 이재전구술, 김당정리, 「溫故知新(20)철책선설치 비화下」, 『국방일보』, (2003.04.16.)

112) 「대간첩장비 등 강화」, 『경향신문』, (1968.1.16.)

113) 오홍국, 「한국군의 베트남전쟁참전과 국방현대화과정 분석」, 『군사논단』67호, (2011), pp.119-121

114) 『연합뉴스』, (2005.8.26.) 「‘베트남전’ 브라운각서와 사이밍턴 청문회」 

115)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삼십년사』, (1978), p.317

116) 중부전선의 철책가설공사에 동원된 병사들은 120㎏이나 되는 철책기둥을 고지까지 옮겨 공사를 했고, 1968년 1월 말 거의 완료단계에 이르렀다. 「1.21北傀侵入후의 前線(상)」,『경향신문』, (1968.1.29)

117) 「철통防備」 『동아일보』, (1968. 6. 25)

118) 「철통防備」 『동아일보』, (1968. 6. 25); 한모니까, 「1960년대 비무장지대(DMZ)의 무장화 과정과 배경」, 『사학연구』 제135호, (2019. 9), p.193

119) 김영식기자, 『시계일보』, (2008.5.7.); 우경, 모성은, 「한강하구의 현안과 발전과제」,『한국지역경제연구』 통권제14집 (2009년 12월), p.159

120) 박흥열, 「강화군 철책과 검문소, 달라져야 한다」, 『강화뉴스』, (2021.2.25.)

121) 김일한, 「평화의 섬 교동도를 가다」, 『통일과 평화』Vol.9 No.1,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2017), p.376 

122) 필자가 행한 1999년 백령도 조사에 따르면 1974년 이래 해안선을 따라 매설된 지뢰에 의한 피해로 당시 6명의 사망자와 1명의 부상자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피해자가 총 20여명이 된다고 했다.(이시우사진집, 『대인지뢰』, (서울: 한국교회여성연합회, 1999), p.56) 2012년에는 백령도 해병대원 2명이 발목지뢰에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한 때 삶의 기본 터전이었던 해안가가 1974년 이후에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123) 해병대제6여단, 『백령도 군사』, (2005), p.91-93; 전원근, 「동아시아 최전방 낙도에서의 냉전경관 형성-1970년대 서해5도의 요새화와 개발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104권, (2014), p.89재인용

124) 북한이 서부 해상으로 남침을 감행할 경우 서해5도에 있는 남한의 군사력이 침략을 억제할 수 있으며 백령도에 설치된 레이더는 북한에서나 중국에서의 군사움직임을 사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Narushige Michishita, “Calculated Adventurism: North Korea's Military-diplomatic Campaigns.” PhD diss., (John Hopkins University, 2003), p.355; 로버트 라울러, 「1970년대 중반 미국의 대한정책과 서해5도 문제」, (서울대학교국제대학원석사논문, 2012), p.41

125) 용치(Dragon’s Tooth)는 독일어 Drachenzähne의 번역어이다. 1938년 독일제국군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접한 독일서부장벽, 일명 지그프리트선에서 처음 사용한 콘크리트 대전차 장애물이다.

126) 정근식, 「냉전·분단경관과 평화-군사분계선 표지판과 철책을 중심으로」, 『황해문화』Vol.100, (새얼문화재단, 2018), p.179

127) 이재전구술, 김당정리, 「溫故知新(20)철책선설치 비화下」, 『국방일보』, (2003.04.16.)

128) 이재전구술, 김당정리, 「溫故知新(20)철책선설치 비화下」, 『국방일보』, (2003.04.16.)

129) 이재전구술, 김당정리, 「溫故知新(20)철책선설치 비화下」, 『국방일보』, (2003.04.16.)

130) 『군사정전위원회편람』4, p.371

131) 「실리없는 ‘콘크리트 장벽’ 논쟁」, 『한겨레』, 1990.3.1.

132) 조성훈,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p.142

133) 그들은 가시철조망 사이로는 북한 땅을 바라 볼 수 있었는데,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고 선전했다(「군사분계선 탐방기」, 『천리마』, 1979,12, p.94).

134) 『군사정전위원회편람』4, pp.357-358, 360, 427.

135) 「북한, 비무장 지대에 3∼5중 철책/국방부,내외기자에 DMZ공개」, 『한국일보』1990.1.20.

136) 고엽제는 1968년 4월15일~5월30일 비무장지대철조망을 따라 사용했으며, 1968년 4~8월 블루와 오렌지제가 살포되었고, 1969년 5월19일~7월31일 남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재분배된 제초제가 살포되었다. 이시우, 「68년 초목통제계획 최종보고서」, 『통일뉴스』, (2011.7.27)

137) 이시우, 「고엽제와 군산복합체(모건-록펠러 연합)」, 『통일뉴스』, (2011.8.8.)

138) 이시우, 「유엔사와 정전협정의 법적지위 부존재2」, 『통일뉴스』, (2021.1.21.)참조

139) 예외상태는 칼 슈미트의 개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권자는 법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법안에 있는 자로서, 즉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 시킬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Entscheiden)하는 자리에 있는 자이다.” 헌법 밖에 있는 ‘예외상태’는 법으로 규정할 수 없다. 오직 국가권력의 담당자, 즉 주권자만이 예외상태를 결정함으로써 법의 경계를 규정한다. 슈미트의 이론에 따르면 유엔사령관은 제헌권력으로서의 주권인민이나 입헌권력으로서의 주권자의 지위를 누리는 자이다. 한국이 정상상태라면 유엔사령관의 이러한 지위를 배제·무효화 해야한다.

140) “Secretary’s Memoranda of Conversation, lot 64D 199, United States Summary Minutes of the Second Meeting of United States Republic of Korea Talks, July 28, 1954”, FRUS 1952-1954, Korea, Volume XV, Part 2 

141) Text of my letter to President Rhee. From Tokyo CINCUNC To Secretary of State No:C-69271, Aug 10, 1954 (Army Message). 행정권 이양의 기초가 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결의문(1954.8.9)은 이 지역을 유엔통제(United Nations control)하에 있다고 했으나 미국은 하루만에 ‘유엔사의 군사점령’아래 있다고 수정하였다.

142) To Colonel James Taylor, Jr. Assistant Chief of Staff, G-5 Eighth United States Army From American Embassy, Seoul (July 1, 1963) SUBJECT: TAE SONG DONG: Proposed Letter to ROK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REF: Your Memorandum of 22 June 1963

143) 「유엔사규정 525-2」, 군사작전 대성동민사행정, 2012년 3월 23일, p.7

144) A/1881. REPORT OF THE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1951.1.1.), p.13

145) 전원근, 「1970년대 국가프로젝트로서 ‘땅굴’과 전방의 냉전경관화」, 『문화와 사회』Vol.27 No.2, (한국문화사회학회 2019), p.31

146) Catherine Chaput, “Rhetorical circulation in late capitalism: Neoliberalism and the overdetermination of effective energy”, Philosophy & rhetoric,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2010), p.11

147) 김하기,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 김하기 분단기행 산문집』, (문학동네, 1995), p.21

148) 양운덕, 「사회적 환상이여,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실재계에 대한 재해석을 중심으로(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 p.9

149) 현재 비무장지대 관리 및 통제와 직접 관련된 『유엔사규정』은 대략 네 종류가 있는데, 551-4, 551-5, 551-6, 525-2등의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551-5와 551-6은 비무장지대 안보견학 관련 규정이며, 525-2는 대성동 민사행정에 관한 규정이다. 이외에 중요한 것이 525-4로 이는 정전교전규칙규정인데 2급 비밀로 비공개규정이다.  

150) 「UNC Reg 551-4」(한국 정전협정 준수) (2019.5.13.), p.10

151)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다음을 참조. 이시우, 「비무장지대법에 대하여」, 『통일뉴스』, (2021.5.26.)

152) 정근식, 「냉전·분단경관과 평화-군사분계선 표지판과 철책을 중심으로」, 『황해문화』Vol.100, (새얼문화재단, 2018),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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