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모스크바 결정 이후 조만식과의 합작 파탄

미국이 소련에 한반도의 분할점령안을 제시한 것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라는 기본 구상을 오래전부터 해왔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련에 의한 일방적인 장악을 저지해야 했다. 해방 후 국제파가 주류인 국무성과 현지에서 군사적 점령과 함께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했던 군부의 입장이 달랐다. 국무성은 애초의 계획대로 소련과 협조를 통한 신탁통치 실시였으나 현지점령군사령관 등 군부는 남한에 우익이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조직, 이를 북한지역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 또한 자신이 장악한 북한지역에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연립정권을 구축, 이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소련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반도 전체에 친소정부를 세운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미국의 국제파 견해와 소련의 즉시 독립 견해가 절충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은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이 주도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했으므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1946년 상반기 미소공위는 이러한 양측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1946년 3월에 시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 참가문제를 두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5월초 결렬되고 말았다.
1946년 3월에 시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 참가문제를 두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5월초 결렬되고 말았다.

북조선 주둔 소련군은 12월 말경에는 북조선에서 독자적인 정권기관의 창설과 토지개혁 시행을 위한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해방 후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북지역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 그 기반으로 삼는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12월 말 모스크바 회담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임시정부 수립에 합의한 뒤, 소련은 북조선지역에 통일적인 임시정부의 모델이 될 정권기관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북에서는 1945년 11월 19일 각 지역 인민위원회 사이의 연계를 위해 북조선행정10국을 창설했으나 정권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북지역을 통일적으로 통제, 장악할 행정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소련은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깨는 데는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주1)

이 문제는 딜레마였지만 소련은 미소공위를 통해 모스크바 합의에 따른 한반도 전체의 임시정부수립을 논의하는 한편, 북조선에서 임시인민위원회 수립, 토지개혁 등 제반의 민주개혁을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다. 소련은 이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구성할 임시정부의 형태와 임시정부가 추진해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 압박하고자 했다.

조만식(좌)과 김일성(우)이 1945년 9월 30일 평양의 요정 ‘화방(花房)’에서 소련군 장교 메크레르 중좌(가운데)의 주선으로 첫 대면을 했다. 이후 북조선에서는 좌우연합전선이 형성되었으나 모스크바 결정 이후 조만식의 완강한 거부로 1946년 초부터 좌우동거체제가 붕괴되었다.
조만식(좌)과 김일성(우)이 1945년 9월 30일 평양의 요정 ‘화방(花房)’에서 소련군 장교 메크레르 중좌(가운데)의 주선으로 첫 대면을 했다. 이후 북조선에서는 좌우연합전선이 형성되었으나 모스크바 결정 이후 조만식의 완강한 거부로 1946년 초부터 좌우동거체제가 붕괴되었다.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 전평북조선총국 위원장 현창형, 평남농민위원장 이관엽, 여성동맹위원장 박정애, 민주청년동맹위원장 방수영, 조선독립동맹 대표 김두봉의 연명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환영”하며 “제민주주의정당과 단체 또는 전 조선의 모든 진정한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을 망라한 민주주의적 통일전선을 결성”한 위에서“조선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월 3일에는 북조선행정10국장과 사법국 부국장 등 11명의 연명으로 같은 취지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당 위원장 조만식은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며 평남 인민위원장직을 사임한 뒤, 소련군에 의해 연금상태가 되었다. 이후 북조선공산당과 조선민당의 통일전선은 파탄이 났고, 조만식을 제외한 민주당지도부는 모두 남한으로 도피하였다.(주2)

소련군정지도부와 김일성·최용건 등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항일빨치산 핵심으로 오산학교 시절의 제자였던 최용건은 열아홉 차례나 만나 간곡하게 설득하였고, 소련군측은 연립정부가 세워질 경우 조만식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계획도 언급했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조선민주당(조만식)과의 합작이 물 건너가자 북조선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이남과 다른 독자적인 방향을 추진하였다. 1월 29일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조선민주당 부당수), 현창형, 박정애, 황갑영(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김욱진(민청위원장), 홍기주(평남 인민위원장), 강량욱(민주당 평양시 부위원장), 이관엽(북조선농민연맹 준비위원장) 등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명의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이북에서는 조만식의 과거 ‘친일경력’을 폭로하는 선전활동이 전개되었고, 남조선의 이승만, 김구와 함께 ‘민족반역자’로 취급되었다.(주3)

최초 정권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미소양군 대표 사이에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예비회담에서 논의된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는 쌀 문제였다. 논 경작지가 많지 않은 북한지역은 이즈음 심각한 식량위기를 겪고 있었다. 소련군측은 북조선의 전력·석탄이나 원자재 및 다른 상품과의 교환조건으로 남한에 미곡을 요구하였다. 1945년 가을 이남은 국내 소비량 외에 1백만 석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대풍작을 이뤘고, 미군정청은 일제 때의 가격통제를 풀고 곡물자유시장가격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지주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투기, 매점매석, 인플레로 인한 가격폭등 등으로 남한에서 쌀 부족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곡수확량의 4분의 1이 쌀값이 비싼 일본으로 밀수출되어 이를 부채질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군측은 북한에 식량을 제공할 수 없었고, 소련군측은 이후 남한에 식량문제를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주4)

한편, 미군정은 식량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미군정은 1945년 11월 일제시기의 강제미곡수집체제를 부활했고, 동양척식회사에서 이름만 바꾼 신한공사에 그 업무를 맡겼다. 1946년 1월에는 마을 유지와 시·군·면의 관리, 경찰로 구성된 지역미곡수집위원회에 미곡수집 권한을 맡겼고, 지역위원회는 농민들에게 할당을 통해 강제수집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남한 또한 엄청난 풍작에도 불구하고 쌀 부족과 쌀 가격 폭등을 불러왔고, 농민에 대한 경찰 등 미곡수집위원회의 물리적 강제를 동원한 미곡수집으로 민심이반을 촉진시켰다. 쌀 문제는 친일경찰 문제와 함께 1946년 10월 인민항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미소공위 예비회담을 통해 미군측과 소련측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군측은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을 개방시켜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경제·정치단위로 취급하려 했으나 소련군은 이러한 미군측 주장을 반대하였다. 미군측은 “가능한 최대로 영토를 개방시키고 교통이나 공공사업 같은 중요시설을 통합하여, 단일의 행정체계로 통합한다” 입장을 내세웠으나 소련측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군사적 책임지역 간의 교류와 조정의 문제”라고 대응하였다. 결국 예비회담에서 양측은 한정된 범위에서 교통, 일반인의 통행, 우편물을 교환 등에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처럼 북한 주둔 소련군의 북한 정책과 북한지도부의 다른 정세 하에서 이북지역에 강력한 민주적 역량을 확보한다(뒤에 ‘민주기지론’으로 정식화)는 입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이 추진되었다. 1946년 2월 초부터 각 민주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을 중심으로 발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2월 5일 각 정당사회단체 발기위원회가 모여 그동안의 활동성과를 검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결정하였다. 같은 날 북조선공산당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위해 당의 모든 부서와 당원을 동원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위원회를 수립하기 위해 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행정국 국장 등이 참석하는 예비회의를 개최한 후, 대표협의회를 소집해 선언서와 당면과업을 채택하고 인민위원들을 선거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소련군과 협의한 결과 임시인민위원회 결성을 환영의 의사를 표시했다고 말했다.(주5)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 정부이다’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사진=우남위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 정부이다’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사진=우남위키)

2월 7일 북조선의 정당·사회단체 간부, 인민위원회 간부, 행정국 간부 등 32명(북조선공산당 2명, 민주당 2명, 독립동맹 2명, 노동조합 2명, 농민조합 2명, 여성동맹 1명, 민주청년동맹 1명, 종교단체 1명, 조소문화협회 1명, 도인민위원장 6명, 행정국 국장 10명, 사법국 부국장, 산업국 기획부장)이 모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이날의 회의는 8일 회의에 대한 예비회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주6)

2월 8일 북조선 각지의 대표 138명이 참석한 가운데 본회의(‘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 행정국 및 각 도·시·군인민위원호 대표 확대협의회’)가 열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8일 회의에서 김두봉의 개회선언에 이어 김일성이 ‘목전 북조선 정치형세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김일성은 보고에서 “장차 세워질 민주주의조선임시정부 건설을 촉성하기 위하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회의에서는 “북조선의 일체 경제, 정치 및 문화생활의 향상과 민주주의적 지방행정기관의 지도사업을 개선할 목적으로 북조선 중앙행정기관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형성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 발표하였다.(주7)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당시 김일성의 연설 ‘목전의 정치형세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의 일부.(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에 포함)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당시 김일성의 연설 ‘목전의 정치형세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의 일부.(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에 포함)

2월 9일 둘째날 회의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 위원 23명이 선출되었다.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량육 등 3명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보안국장 최용건, 산업국장 리문환, 교통국장 한희진(후임 허남희), 농림국장 리순근, 상업국장 한동찬(후임 장시우), 체신국장 조영렬, 재정국장 리봉수, 교육국장 장종식, 보건국장 윤기녕, 사법국장 최용달, 기획부장 정진태(후임 박성규), 선전부장 오기섭(후임 리청원), 총무부장 리주연 등이었다. 그 외에 박정애, 무정, 강영근, 강진건, 방수영, 방우용, 김덕영, 리기영, 홍기황, 현창형 등 23명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날 강진건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연설을 하면서 “김일성장군을 전체 인민의 총의대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기에 앞서 최대의 영광이고, 행복이다”라고 말하였다.(주8)

2월 9일 임시인민위원회는 정치대강을 포함한 ‘11개조 당면과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 친일분자의 숙청, 2.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3. 생활필수품 생산, 4. 철도, 운수, 체신 복구, 5. 금융기관 정비, 무역과 상업 정책 수립, 6. 중소기업, 기업가와 상인 발전 도모, 7. 노동운동 방조, 8. 교육제도 개혁, 교원양성, 국문 교과서 편찬, 9. 일제 잔재 교육 청산, 민주주의 교양, 인민에 대한 문화계몽 사업, 10. 식량문제 대책 수립, 11.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정확힌 진의 인민에게 해설 등이었다. 이 11개조 당면과업은 미소공위에 대비한 북조선공산당의 민주기지노선을 구체화한 것이었고, 본질적으로 정권기능을 강조한 것이었다.(주9) 11개조 당면과업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개혁이었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는 가장 먼저 토지개혁 사업을 전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임시인위는 간부 구성들을 두고 볼 때 통일전선에 기초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김두봉, 강량욱의 상무위원회가 최고책임기관으로 되어 있었고, 공산당과 독립동맹의 연립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임시인위의 창설을 둘러싸고는 공산당 내에서도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오기섭, 정달헌 등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들이 처음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반대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이 중앙정부라고 주장하면서 북한만의 중앙정권기관 수립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과거 당(북조선분국) 창건을 둘러싼 대립의 연장선 위에 있는 문제였다.(주10) 박헌영의 서울 공산당 중앙이나 좌파통일전선으로 결성되고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반응도 흔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임시인위 결성을 환영하였고, 김일성 등은 임시인위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정권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굳혀갔다. 특히 토지개혁을 통해 임시인위의 위상이 확고해지고 공산당 내에서 김일성의 주도권이 확보되었다.(주11)

20개조 정강과 토지개혁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1개조 당면과업을 발전시켜 3월 23일 ‘20개조 정강’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1. 일제 잔재의 철저한 숙청, 2.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 전개 및 파쇼·반민주주의적 정당·단체·개인의 활동을 금지할 것, 3. 언론·출판·집회·신앙의 자유 보장, 4. 선거를 통한 인민위원회를 결성할 의무와 권리, 5. 공민의 동등한 권리보장, 6. 인격·주택·재산의 보호, 7. 일제의 법률과 재판기관의 폐지와 인민재판기관의 건설 및 공민의 법률상 동등권 보장, 8. 복리향상, 산업발전, 9. 중요 산업의 국유화, 10. 개인 수공업과 상업의 자유, 11.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 12. 투기업자 및 고리대금업자와의 투쟁, 13. 세제개혁, 14.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규정, 15. 노동자와 기업소의 보험 실시, 16. 인민의무교육제, 17. 민족문화·과학 및 기술의 발전, 18. 기술교육, 19. 학자·예술가의 대우 개선, 20. 보건사업의 확대 등이었다.

“김일성장군의 20개 정강을 바탕으로 그 기초로 하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북조선의 선전물(1946년)
“김일성장군의 20개 정강을 바탕으로 그 기초로 하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북조선의 선전물(1946년)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20개조 정강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활동 과정에서 조직한 ‘조국광복회’의 10대강령을 “새민주조선 건설의 현실에 맞게 계승 발전시킨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 강령”으로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강령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주12) 20개조 정강은 김일성이 직접 작성하였고, 그의 친필원고가 사료 보관되어 있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의 해방구인 유격 근거지 활동과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조국광복회 활동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주13)

북조선임시인위는 20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북한을 민주기지로 강화하기 위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북한이 반제반봉건혁명을 위해 가장 일차적으로 착수한 작업은 토지개혁이었다. 북조선임시인위는 3월 5일 「토지개혁법령」과 「토지개혁 실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3월 8일 「토지개혁법령에 관한 세칙」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토지개혁작업에 착수했다. 이것들은 기존의 토지소유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토지소유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소유지 및 5정보 이상을 가진 지주의 토지, 계속 소작을 주고 있던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농가의 수와 노력자 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며 분여된 토지의 매매와 저당, 일체 조작제도를 금지하며, 몰수한 산림, 관계시설, 과수원과 농민들이 경작하기에 불리한 일부 토지는 국유화하도록 규정하였다.(주14)

1946년 3월 토지개혁법령 발표를 지지하는 농민들(사진=통일뉴스)
1946년 3월 토지개혁법령 발표를 지지하는 농민들(사진=통일뉴스)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3월 5일 법령을 제정, 발표한 뒤 26일 만인 3월 31일 완료를 선언할 정도로 순식간에, 그야 말로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로 해치웠다. 북조선 토지개혁이 이처럼 빠르게 진행된 것은 임시인위 등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농민의 열광적인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숙원을 ‘세기적 열망’이라고 표현했는데,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토지개혁이 농민들에게 안겨준 놀라움과 기쁨은 ‘천지개벽’과도 같았다. 리기영은 소설 「개벽」에서 농민들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땅덩이가 떠나갈 줄은 몰랐다. 천지개혁을 하기 전에야 설마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었는데, 토지개혁이란, 정말 눈에 안 보이는 개벽을 해서 하룻밤 사이에 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다.”(주15)

북조선임시인위가 토지개혁을 가장 일차적인 과업으로 설정한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경제사정이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해방 당시 북조선주민의 74.1%가 농민이었는데, 이중 총농가호수의 4%에 불과한 지주가 총경지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고, 농민의 80%가 빈농과 고농이었다. 해방 후 소작농들은 3.7제 투쟁으로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농지개혁에 대한 요구를 높였다. 임시인위는 토지개혁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함과 동시에 민주개혁과 발전에 장애가 되는 지주계급을 제거하고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타파하고자 했다. 또한 북조선과 소련군측은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토지개혁을 실시, 북조선농민들뿐만 아니라 남한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확보,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주16)

“토지는 밭가리 하는 농민에게”-북한의 토지개혁 선전.
“토지는 밭가리 하는 농민에게”-북한의 토지개혁 선전.

북조선공산당은 서울에서 토지전문가 박문규와 법학자 최용달을 초청, 북조선의 사회경제학자 김광진과 김책, 안길, 주영하 등의 당내 인사들과 함께 토지개혁법령 작성위위원회를 조직했다. 북조선공산당 지도부는 1월 말부터 토론을 시작해 2월 20일 토지개혁안을 마련하고 3월 5일 북조선임시인위의 이름으로 법령을 공포했던 것이다. 북조선지도부는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김일성 등이 직접 농촌을 돌아보고 농민들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현장조사를 철저히 했다. 특히 김일성은 한달 이상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런 토지는 이렇게 처리하고 저런 토지는 저렇게 처리하면 될 것이고 땅은 어느 정도의 것을 몰수하면 될 것”이라는 등 구체적인 방침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일제시기를 통해, 또한 지주에게 억눌려 있었던 농민들은 막상 토지개혁을 실시한다고 할 때도 처음에는 별로 호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점차 적극적이 되었다. 지주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일부 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선동하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월남한 지주들과 반공청년단들이 38선을 넘어와 부근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전준비 과정에서 공산당원과 계몽요원들이 농촌에 파견되어 해설하고 참여를 독촉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농민들이 호응을 끌어냈다. 일부 지주들과 반공세력의 책동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지역마다 농민과 지주가 참가하는 농민대회를 열어 농민위원회가 작성한 토지대장에 따라 몰수와 분배 토지를 발표하고, 농민위원회 위원들이 현지 실사를 거친 후 도인민위원회가 발행한 토지소유증서를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주17)

이렇게 해서 북조선 토지개혁은 순식간에 완결되었다. 20여일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에 100만 325정보의 토지가 무상몰수되어 72만 4,522호의 농민들에게 98만 1,390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이를 통해 4만여명의 지주가 몰락했고, 지주는 더 이상 북조선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남지 못하게 되었다. 북조선의 혁명적인 토지개혁 실시 소식은 이남에도 큰 파장을 미쳤다. 남한 농민들은 북조선과 같은 토지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이는 북풍이 되어 미군정을 압박하는 효과를 미쳤다.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시작되어 남한 전역으로 파급된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 바탕에는 북조선의 토지개혁에 대한 선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한에서는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 개정법률안이 최종, 공포되어 실시되기 시작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 일시 중단되었다가 9.28 서울 수복 후 재시행되었다. 남한의 경우도 이른바 ‘자본주의적 농지개혁’으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내용으로 평가되지만, 북한과는 차이가 있었다. 전체 농지 가운데 토지개혁으로 분배된 비율은 남한이 23.7%인데 비해 북한은 53.5%였고, 1945년 당시 소작지 중 분배비율도 남한 37.5%, 북한 95.0%로 현격한 차이가 났다. 1945년 기준으로 소작지 가운데 농지개혁에 의해 몰수되거나 정부가 매입한 비율도 남한은 37.5%인데 반해 북한은 99.0%였다. 이는 남한에서 농지개혁이 지체되는 바람에 지주들이 상당량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면, 수혜농가 비율은 남한 70.1%, 북한 72.0%로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이는 분배받을 수 있는 농민, 즉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의 비율이 남북한 거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남한은 반봉건적 착취를 일소한 자유주의적 개혁이었고, 북한은 반봉건적 착취와 수탈을 동시에 일소한 혁명적 토지개혁”으로 평가할 수 있다.(주18)

무상으로 분배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북조선 농민들(사진=통일뉴스)
무상으로 분배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북조선 농민들(사진=통일뉴스)

노동법 등 민주법령 제정과 중요산업 국유화

북조선은 토지개혁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적 법령의 제정을 통해 개혁 작업을 진행시켜 갔다. 북조선은 8시간 노동제에 기초한 노동법령과 남녀평등법의 제정과 함께 주요 산업 국유화를 진행시켰다.

북조선임시인민위는 1946년 6월 24일 「북조선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을 발표하였다. 김일성은 노동법령이 “노동자와 사무원들의 노동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물질적 생활수단을 제고·향상시킴으로써 제국주의 식민지적 착취의 전여를 근멸하고 민주주의 노동건국과 노동규율의 실현을 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노동법령은 전문과 총 26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노동자와 사무원들에게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1조), 새로운 조건을 가진 생산부문과 지하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에게는 7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2조), 14세에서 16세까지의 소년들에게는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3조), 14세 이하의 유년노동은 금지하고(4조), 남녀노동자의 동일 임금제를 실시하며(7조), 유급휴가제와 보충휴가제를 시행하며(12조) 모든 근로자에 대해 사회보장제를 의무적으로 실시한다(18조)는 등이었다.(주19)

또한 북조선임시인위는 7월 30일 “일본 식민지정책의 잔재를 숙청하고 낡은 봉건적 남녀간의 관계를 개혁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문화적·사회·정치적 생활에 전면적으로 참여시킬 목적”으로 한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공표하였다. 9월 14일에는 이 법령의 시행세칙을 발표하였다. 법령은 전문과 9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여성들은 남자와 같은 평등권을 가진다.
2. 남자들과 동등으로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3. 남자와 동등한 노동권리, 동일한 임금, 사회보험·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4. 자유결혼의 권리가 있다.
5. 자유이혼의 권리가 있다.
6. 남자는 만 18세, 여자는 만 17세부터 결혼할 수 있다.
7. 일부다처제, 매매결혼, 공사창제, 기생제도를 폐지한다.
8. 여성은 재산상의 동등권과 결혼시의 재산·토지분배권을 가진다.
9. 여성에 관한 일제의 법령과 규칙은 무효로 된다.

북조선에서는 이 법령 실시로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여성의 지위가 법률 제정만으로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는 어려운 면도 있지만, 당시 남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1948년 3월 7일 현재 여성은 각급 인민위원회에 9,522명, 북조선 인민회의 대의원 34명(전체 대의원이 14%), 농민위원 6,101명, 판사 13명, 검사 4명, 참심원 532명, 의사 및 간호원 1,300명, 노동자 2만 5,686명, 기능자 2,128명, 교장 10명 등이 사회적으로 진출, 활동하였다고 한다.(주20)

북조선임시인위는 1946년 8월 10일 「산업·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은 간략한 선언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민을 노예화하며 대륙의 다른 나라 영토를 강점하고 그 나라 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군사적 기지와 경제적 토대를 닦을 목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36년 동안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일본강점자들은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한 첫날부터 조선의 경제를 자기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예속시켰고 조선인민의 고혈로 많은 기업소, 발전소, 철도 등을 건설하였다. 조선이 일제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조선인민에게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고 조선인민의 공사유재산을 보호하며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빨리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되였다. 조선인민을 착취하고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빼앗아갈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에 건설한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등은 반드시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발전과 조선인민의 생활향상에 이용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포한다.

일본국가와 일본인 사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의 소유로 되여 있는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모두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로 즉 국유화한다.

본 법령은 발포한 날부터 효력을 가진다.(주21)

이 법령에 따라 북조선지역의 90%에 달하는 공장과 기업소 1,034개가 전면 무상몰수해 국유화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일본인 소유나 법인, 국가소유였던 것들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개인소유 공장과 제조소, 기업소, 탄광, 창고, 회사, 상업기관 등은 특별한 경우에만 인민재판소 또는 인민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북조선의 개혁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레닌식으로 말하면 ‘부르주아혁명’ 단계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일반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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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139〜141쪽

2) 서동만, 위의 책, 142쪽

3) 서동만, 위의 책, 142〜143쪽

4) 서동만, 위의 책, 145〜147쪽

5)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Ⅰ』, 선인, 2003, 264쪽

6) 김광운, 위의 책, 264쪽; 서동만, 위의 책, 148〜149쪽

7) 서동만, 위의 책, 149〜150쪽

8) 김광운, 위의 책, 267〜268쪽

9) 김광운, 위의 책, 277쪽

10) 김광운, 위의 책, 275쪽

11) 서동만, 위의 책, 156〜159쪽

12)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86쪽

13)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170쪽

14) 김한길 위의 책, 188〜189쪽

15) 이기영, 「개벽」, 『한국소설문학대계 10』, 동아출판사, 1995

16) 김용복, “해방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해방전후사의 인식 5』, 한길사, 1989, 222쪽

17)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92〜93쪽

18)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130〜146쪽

19) 김용복, 위의 글, 227쪽

20) 김용복, 위의 글, 227〜228쪽

21) NK조선 2013.10.1.; 『원자료로 본 북한 1945-1988』, 동아일보사, 1989년 1월, 43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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