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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1> 국방부와 미국의 자기최면-북방한계선(105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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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7.0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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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사진작가)


1. 두 서해교전의 핵심 - 북방한계선

또다시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해교전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다. 국방부가 자기 최면을 풀지 않는 한.

이번 사건에서 국방부가 가장 신경 써서 홍보한 부분은 선제공격이었고, 이를 패스 받은 언론이 가장 민감하게 다룬 부분은 의도성이었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도 언론에 등장해서는 모두 의도성 논쟁에 한몫 거들었다. 내가 아는 한 단체와 전문가들이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을 리 없다. 나는 방송의 편집이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이번 사건에서도 `의도성`, `누가 먼저 쐈는가` 등은 전혀 본질이 아니다. 맥락일 뿐이다. 

북에서는 남이 영해를 침범했기 때문에 쏘는 것이고, 남에서는 북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했기 때문에 쏘는 것이다. 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각자에겐 있는 것이다. 과연 북방한계선 침범이 맞는가? 영해침범이 맞는가? 계속되는 서해교전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남과 북의 꽃다운 청춘들은 억울하게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역사가 인간에게 내주는 문제치고는 그래도 쉬운 문제에 속한다. 객관적인 진실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의도` 찾기 게임에 골몰하기보다 있는 현실만 정확히 알아도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96년까지는 심지어 국방부장관과 미국에서도 정답을 알고 있었다. 96년 당시 아직 이 사건이 서해교전이라고 불리지 않던 시절 이양호 국방장관은 국회에서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으로부터 지난 4·11총선 후 북한 함정의 서해상 도발에 대한 정부 대응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질문 받고, 정확히 다음과 같이 답했다.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은 어선 보호를 위해 우리가 그어놓은 것으로, (북한측이) 넘어와도 정전협정 위반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의원들간에 소란이 일자, 『해상의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상에 규정된 지상의 군사분계선과는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96.7.16)

이양호 국방장관이 북방한계선에 대해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80년대 공군대령으로 유엔사군사정전위 한국연락장교단장으로 상당기간 복무하며 군정위회의에 수없이 참가해온 정전협정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조차도 원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정전협정문서를 그는 날마다 협상의 기초자료로 암기하다시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근무한 유엔사 직원중 1983년 유엔군 사령관 정전담당특별고문이었고 현재 미 국무성 외교연구원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제임스 리(한국명 이문항-80년대 노조 파괴범으로 악명 높았던 제임스 리와는 다른 인물이다)라는 인물이 있다.

1980년 그는 유엔군 총사령관과 전 유엔사 작전참모장인 로버트 세네월드 소장, 그리고 유엔사와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들에게 미8군 지하벙커에서 북방한계선과 서해5도 영해문제에 관한 쟁점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으며 99년 서해교전 발생때 워싱턴의 미 정부에도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바 있다. 그가 말하는 북방한계선의 진실이다.

유엔사는 1953년 7월28일에 있었던 제 1차 본회의에서 정전위의 마지막 회의인 91년 2월 13일에 있었던459차 본회의까지 40여 년간 판문점에서 있었던 본회의, 비서장회의, 그리고 직통전화 메세지, 서한 등 그 어디에도 서해해상 침투사건, 도발사건 등 해상위반사건들을 다루면서 단 한번도 `북방한계선 침범`이니 `북방한계선 위반`이니 한 적이 없었다. (....)

저자는 1966년 4월 미국 워싱턴 국방성에서 분석관으로 근무하다가 서울 유엔사 군정위 분석관으로 부임한 뒤 군정위 작전과 지도중에 서해5개 도서군 3해리를 잉크로 표시한 선과, 이들 5개 도서군과 북한 연안이나 섬의 중간선을 잉크로 그리고, 북방한계선을 써놓은 지도를 보았는데 그 지도의 위와 아래에 3급 비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군정위의 모든 기록을 찾아보아도 북방한계선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주한 미 해군사령부로 찾아가 기록을 들여다보니 북방한계선은 1958년에 설정한 해군의 작전통제선(Operational Control Line)이라는 것을 알았고 북방한계선은 (한국)해군선박 뿐만 아니라 한국어선들도 통제하는 한계선이란 것을 알았다.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유엔사측은 북한측 함선이 우리의 서해5도 도서군의 3마일 수역 이내에 들어오면 `영해침범`이니 3해리 안으로 침입했느니 하지 않고 정전협정 제15항에 규정한 우리측 `인접해면(waters contiguous to)`을 침입한 협정위반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 이유는 (유엔사의 상부기관인) 미 합참본부의 지시는 어로저지선이나, 북방한계선이나, 영해가 3해리니 12해리니 논의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엔사는 항상 함선이나 사건의 위치가 이들 5개도서의 3해리 밖일 때는 공해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같은 정전협정 제 15항은 "...한국(조선)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봉쇄(naval blockade)도 하지 못한다"라고 합의했으니, 북방한계선이 해상분계선이라고 주장하면 해주항을 포함한 북한의 황해도 연안을 모두 봉쇄하는 것이 된다.(JSA-판문점 91쪽~92쪽 이문항. 소화출판사)    

이문항씨는 북방한계선에 대해 한국사회에 1차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의 말처럼 북방한계선은 남과 북 또는 미국과 북이 전혀 합의한 적이 없는 미군의 작전통제선이었고 그것도 군기밀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방한계선을 어긴 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월29일자 국방부의 성명을 보면 중대한 오류가 발견된다.
  
2002년 6월29일 오전 9시54분께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1)북방한계선을 침범, 퇴거를 요구하는 우리 해군 경비정에 대해 악랄하게도 선제 기습사격을 가해왔다. 이 과정에서 아측에 심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북한군의 이와 같은 행위는 명백한 2)정전협정 위반이며, 제1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남북군사당국자간 긴장완화를 위해 공동노력키로 합의한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러한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엄중 항의하며,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는 북한군의 북방한계선 침범 및 도발 행위의 중지를 거듭 촉구하며 이번 사태에 대한 3)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첫째,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는 남측의 판단으로부터 이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방한계선은 미국이 만들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일방적인 지침이지 북과 단 한번도 합의된 적이 없는 선이다. 남측이 침범이라고 하든 월선이라고 하든 그것은 남측의 입장일 뿐 북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둘째, 첫 번째 사실로부터 정전협정 위반이란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정전협정에서 북방한계선이란 단어는 등장한 적도 없고 합의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한쪽이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약속위반이 되는 경우도 있는가? 한국전쟁에서 제네바협정에도 없는 포로교환 원칙을 미국이 주장하면서 전쟁은 2년을 끌어야 했다. 합의되지 않은 사실을 상대방이 합의하도록 하는 최악의 방법이 전쟁이다. 과연 국방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정전협정 위반이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정전협정 위반이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이유는 두 가지다. 정전협정을 모르고 있든지, 북이 정전협정 위반이란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든지이다. 전자라면 무책임한 것이고, 후자라면 무모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 전쟁까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의도가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첫번째와 두번째 사실로부터 역설적으로 모든 책임은 북이 아니라 남에 있다는 사실이다. 북과 합의된 적도 없는 북방한계선 침범은 어떤 경우에도 그 혐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정전협정 위반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군사정전위가 소집되어야 하는데 94년 이후 군정위 기능은 마비된 상태이다. 정전상태를 관리할 어떤 기구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 정전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일방적인 책임을 묻기 시작하고, 그 결과 긴장이 확대된다면 폭력적 해결의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은 급속히 증가할 것이다.

99년 서해교전 직후부터 2000년 4월8일까지 북은 모든 방송과 언론을 통해 남측도발의 책임을 물으며 날마다 각계 각층에서 500여 회에 달하는 경고와 응징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4월8일 박지원 특사가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고서야 북의 성명전은 중단 됐다. 서해교전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남북정상회담 같은 최고위급의 정치적 결단 외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해 5도지역에서의 영해문제나 북이 제안한 조선서해해상 군사분계선에 대한 논의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의 낡은 논리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국방부는 자신들의 주장에 침묵하고 있으면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대세속에서도 국방부는 서해교전 이후의 대결적 논리를 포기하기는커녕 계속 정교화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화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99년 서해교전의 숙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의 본질이 오늘에도 그대로 본질인 것이다. 때문에 국방부나 일부 언론이 상황을 몰아가면 몰아갈수록 그 책임은 북이 아니라 남이 지게 될 것이다. 국방부와 일부언론이 무모한 질주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2. 국방부의 자기최면

국방부는 99년 서해교전 이후 북방한계선에 대한 입장을 바꿔 북도 이미 북방한계선을 인정해왔기 때문에 실효성의 원칙에 따라 북방한계선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이때 북이 역사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인정한 7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 하나 하나 살펴보자.

1) 59.11 북한발행 황해남도지도에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

1959.11.30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발행 조선중앙년감(국내편) 황해남도 지도(254쪽)에 NLL이 개략적으로 그려져 있고, 이를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였음(...) 북한이 `59.11.30. 발행한 정기간행물의 지도에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은 "59년에 이미 북방한계선을 인지,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북방한계선의 존재에 대해 모르며, 인정할 수 없다는 북한의 기존 주장은 허구임.(한반도군비통제 242쪽-국방부)

국방부의 주장은 북이 59년 조선중앙연감의 지도에 북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북이 이미 북방한계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고 지난 46년간 실질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준수해왔다는 것이다.

이문항씨의 말에 따르면 북방한계선은 58년 미군이 자체적으로 정한 군사기밀이고 60년에야 기밀해제가 되었는데 국방부 주장은 59년판 지도에 북이 이 선을 그대로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북도 이미 인정하고 준수해 왔다는 것이다. 59년 지도는 국방부의 표현대로 `개략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을 `NLL을 개략적으로 그렸다`고 확신하는 것은 NLL을 일단 옳다고 전제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선험적 인식오류이다. 설령 그 선이 북방한계선과 비슷할 수도 있고 아예 똑같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하고 준수해 왔다는 논리는 인식오류를 넘어 선험적 판단오류이다.

예를 들어 북의 김정일화가 베고니아 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이란 노래에 `베고니아 꽃 향기` 운운하는 가사가 김정일화를 의미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자유이고 상상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조용필의 노래를 인식 판단한다고 해서 조용필이 곧 베고니아 꽃을 통해 김정일화를 인정하고 찬양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60년 이전엔 남쪽에서도 북방한계선의 존재는 군사기밀이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59년 북이 북방한계선을 만들어서 남에 알려줬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2) 63.5 서해 북한 간첩선 격퇴 사건시 북측은 NLL월선 부인

1963년 5월 11일 NLL을 월선하여 연평도 서방으로 침투한 북한 간첩선을 남측 경비함정이 격퇴시킨 사건과 관련하여 개최된 군정위 제168차 본회의에서 북측은 그 선박이 NLL을 월선 남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NLL의 존재 사실을 인정했으며, 북측도 NLL을 준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군정위 회의록이다.

유엔사 : 이 지도에는 우리측이 초계하여 온 것을 표시하는 푸른줄이 있다. 이는 쌍방이 인정하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우리측 선박들은 이 선의 이북으로 이동해 가지는 않는다. 당신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지도를 보시오! 당해 선의 북쪽으로 있는 홍색 가위표로 표시된 것은 당신의 발언에 의해서 주장된 사건 발생위치이다. 그러나 당해 사건은 그 위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당해 선의 남쪽, 청색 가위표로 표시된 곳에서 발생했다. 당신측 선박이 얼마나 정확성을 가지고 그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떠한 방도를 가지고 있느냐, 대답해 보라

북측 : 당신이 이 지도를 보시오. 우리측 어선이 있었던 곳은 북위 37도42분, 동경125도28분 부근이다. 그래 이 지점이 당신 측 해역이란 말인가?

여기서 유엔사가 말하는 유엔사의 초계선인 푸른줄이 국방부의 설명으로는 현재의 NLL이다. 유엔사측은 초계선을 쌍방이 인정해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초반의 발언을 할애했다. 그러나 북은 유엔측 초계선에 대해 아무런 언급없이 `해역` 문제를 주장한다. 여기서 북이 주장한 `해역`은 관례상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영해로서의 `해역`이거나 정전협정상의 `인접해면`으로서의 `해역`이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유엔사는 초계선이란 기준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은 영해문제나 정전협정상의 인접해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이 NLL을 인정했다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가?

1978년 남측해군이 어로작업하던 북측어선을 간첩선으로 판단하여 격침시킨 사건을 다루기 위해 열린 군정위 390차 본회의를 보자. 이는 국방부가 주장한 사건과 거의 똑같은 성격의 사건이었다. 이 회의에서 회의실 안에 전시한  이 사건의 요도의 표제는 "1978년 6월27일 1척의 북한선박이 대한민국수역에 침입한 사건..."이라고 씌어 있고 북방한계선 침범이라는 말은 전혀 쓰지 않았고 제시한 챠트의 서해지도에는 NLL이 그려져 있지 않다. 단지 백령도 연해에서의 선박들의 항해, 추적로만 그려져 있다. 유엔사 군정위원들이 판문점 회의에서 사용한 모든 서해 도서군 부근의 지도나 약도 어디에도 북방한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국방부가 주장하는 방식을 따른다면 63년까지는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했고, 78년 이후엔 남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한 것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미 해군 작전통제선 설정의 목적은 `북방한계선`이란 말의 의미에서와 같이 남측이 북으로 올라가는 한계선을 말한 것이지 북측이 남으로 내려오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북의 남하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남방한계선`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때문에 국방부의 주장대로 유엔사의 초계선이 곧 NLL이었다면 군정위의 미군 대표는 미군이 임의로 정한 NLL설정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군정위 회의에 나와 자의적인 해석을 북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군정위는 정전협정 위반사건에 대해 회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과는 아무 연관이 없이 미군이 일방적으로 정한 선이므로 이것을 군정위의 안건으로 삼았거나 논쟁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스스로가 회담 규칙도 모르는 문외한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국방부의 이런 자의적 발췌 해석을 유엔사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 회의록에서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하고 준수까지 해왔다는 근거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지 나로선 의문이다. 이는 국방부의 분석관들이 결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억지로 증거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3) 77.8 북측의 [해상군사경계선] 선포에 대한 남측의 불인정 성명에도 특이행동 무

1977년 8월1일 조선인민군최고사령부는 보도를 통해 동해에 대해서는 영해기산선으로부터 50마일, 서해에 대해서는 경제수역의 경계선, 즉 인접국간 200해리가 되지 않는 수역에서의 바다 반분선, 또는 중간선을 해상군사 경계선으로 선포한다. 이는 남이 주장하는 NLL의 이남에 해당한다. 이에 남측 정부는 대변인의 반박성명을 통해 북측의 [해상군사분계선] 인정을 불가한다고 발표한 사실이 있다.

이 발표후 북이 특이 행동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국방부는 이를 곧 NLL을 인정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국방부식으로는 침묵은 곧 인정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침묵은 곧 무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실제 북은 남측 정부의 반박성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NLL을 무시하고 수없이 월선을 감행해왔고 몇 번의 총격전까지 이르면서까지 문제제기를 해왔다. 과연 이런 사례도 북이 NLL을 인정해왔다는 근거가 될만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4) 84.9 북한 수해물자 수송시, 수송선박을 NLL선상에서 상봉 호송

1984년 남쪽에 홍수피해 일어나자 그해 9월 북은 인도적 차원에서 쌀 등 수해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 남쪽 정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서 북의 수해물자가 남에 전달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간이 고위급 비밀회담이 진전되고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대화분위기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남북 적십자사가 북측 수송선박과 남측 호송선단의 상봉점을 NLL선상으로 합의한다. 그러나 북에서 곧 대남통지문을 통하여 상봉점을 NLL남방으로 수정제기 한다. 이에 남측해군에서는 NLL확보의지를 확고히 하며 NLL선상에서의 상봉을 끝까지 고집했고, 북은 인도적 이유 때문이었는지 더는 따지지 않고 남측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국방부는 이를 근거로 북이 NLL을 남북간의 실효적인 해상경계선임으로 간접 인정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암흑같던 시절 북이 인도적 지원을 실현하고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사업이었다. NLL선상의 상봉에 대해 북이 무조건 수용한 것도 아니고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다. 만약 NLL문제로 서로 트집잡기가 시작됐다면 북의 인도적 지원도 남북대화의 물꼬트기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과연 북이 NLL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한 것일까? 인도적 의도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양보한 것일까? 당시의 이 사건은 기성의 정치군사적 관례를 뛰어넘는 남북정부의 정치적 결단이 대 전제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이러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부분적인 사례를 파내어 왜곡과장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북이 이 사건을 두고 총 한방 쏘지 않고 남에 무혈 입성하여 굶주린 남의 인민들을 해방시킨 사건이라고 선전이라도 한다면 남에서는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뒷덜미치기는 남북간의 대화와 신뢰의 기반마저 무너뜨리는 옹졸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5) NLL기준으로 변경된 비행정보구역(FIR)에 대한 이의 불제기

남측 정부는 1963년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대구비행정보구역(FIR : Flight Information Region)을 설정한 바 있다. 그러나 남측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구역이 포함됨에 따라 오래전부터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FIR은 해당국가의 영토나 영해를 규정하는 의미는 없고 다만 조난 항공기에 대한 탐색 및 구조지원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남측은 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항공항행 계획에 군사분계선과 NLL기준의 대구/평양FIR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북이 이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국방부는 북이 NLL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다. FIR의 법적 성격이 조난항공기에 대한 탐색과 구조지원까지 포함하므로 이는 해당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의미한다는 것도 편파적인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93년 이후에 남북이 NLL을 기준으로 한 FIR을 인정했다면 그 이전 38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남북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가 38선이라는 결론이 된다.

정전협정에 의해 현재의 군사분계선이 확정된 것이 53년인데 40년간 남측은 38선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 주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38선 이북에 속하는 동부산악지역에서 일어난 제4땅굴이나 군사분계선상의 충돌에서 남측 정부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가? 한번만 뒤집어 보면 당장 모순에 부닥치는 사례이다.     

6) 북한 함정 NLL월선시 아함정의 퇴각 경고에 순응

1973년 10월 서해5도 사건이후 북방한계선 월선 행위를 대폭 증가시켰으나 99년 서해교전사태 전까지는 아측 함정이 접근하여 경고를 하면 즉각 퇴각하였다는 근거를 들어 북이 NLL을 인정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의 계속된 월선과 무력행사 자체가 NLL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이는 국방부가 고의적으로 한 측면만을 보려하는데서 생기는 필연적인 오류이다.  

7)남북 고위급회담시 NLL을 중심으로 양측 관할 수역 합의

1991년과 1992년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시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 11조에 의하면,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고 명시되었으며, 불가침부속합의서 10조에서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 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고 되어있다.

국방부는 여기서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이라 함은 곧 46년간 남측이 실효적으로 지배해온 NLL 이남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국방부의 근거는 피해갈 수 없는 덜미를 잡힌다.  
    
정전협정에 의하여 설치된 군사분계선은 고성과 장단까지의 육지에만 존재하며, 서해안의 해상에 "쌍방"이 설치하여 공동으로 관할하여 온 "구역"은 "한강하구 수역" 뿐이다.

따라서 국방부의 주관적 해석은 정전협정준수를 그토록 외치면서도 정전협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소치이다. 또한 국방부 분석관들이 찾아낸 앞서의 많은 사례에서 주장된 군색한 실효성의 논리는 지난 50여 년간 거듭된 북쪽 해군의 주기적 "침범"행위와 1999년 6월 15일과 올해 6월29일 연평도 근해에서 발생한 북쪽 해군의 실력행사를 통한 공개적 부인을 미루어보더라도 국제법적으로 "북방한계선"의 실효성이 "응고" 또는 "인정"됐다고 볼 수 없다.  

국방부가 96년까지 북방한계선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다가 갑자기 몇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근거를 찾아내며 당황스런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99년 서해교전 이후였다. 서해교전을 연평대첩이라고까지 칭하면서 승전가를 부른 뒤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 것처럼 왜곡하는 논리가 만들어 졌다. 이들 논리는 이미 국방부 일각에서 자기최면을 걸어놓고 찾아낸 논리들이기에 하나같이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게 된 것이다.

국방부는 자체 기록 중 `북방한계선-관련규정 및 공문`이란 제목의 문서를 다시 찾아 보라. 여기에는 "NLL은 유엔사/연합사 교전규칙 S항 `자` 세항 : 북방한계선은 유엔사/연합사 해군 및 항공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한정짓기 위해 유엔군 총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설정함"이라고 정확히 적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국방부의 집단적 자기 최면이 그저 인식오류에서 끝나는 문제라면 이렇게 심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곧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 결코 사소하게 취급될 수 없는 일이다. 북방한계선의 합법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불법이 된다는 사실을 국방부는 알아야 한다.

3. 언론의 자기최면

진실을 사회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임의로 해석하고 적용해온 고질적인 풍토는 일부 언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일보는 96년 국민회의 의원들의 이양호 국방장관 발언 파문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북방한계선에 대한 해설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선 논란이 된 해상의 북방한계선(NLL)은 지상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MDL)과 개념상으로나 법적으로나 의미가 다르다. 휴전선으로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27일 남­북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규정된 남북간의 지상경계선을 말한다. 때문에 서로간에 상대방 지역을 침범하면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다.

그러나 바다의 경우는 남­북간에 의견이 엇갈려 지금까지 정해진 경계선이 없다. 바다에 말뚝을 표시할 수도 없는 입장으로 각기 양측에서 관행적으로 인정해온 수역을 경계로 교통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은 휴전 한 달이 지난 1953년 8월30일 유엔사측이 최접경 수역인 백령도 연평도 등 6개 도서군과 이를 마주하는 북한측 지역과의 중간지점 해상에 임의로 설정한 것이다.

때문에 서로간의 수역을 침범했을 경우 정전협정 위반사항이나 국제법상으로 제소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무력충돌을 우려해 양측이 「힘의 균형」을 통해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이 국방장관이 『NLL침범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는 것이다.(조선일보 96.7.18 )

2002년 6월28일 연평교전사건이 있고 난 직후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99년 연평해전 이후에도 북한은 연간 평균 12~15회 정도 NLL을 침범했다. 올해 들어 발생한 11건의 북한 경비정 NLL 침범 때마다 우리 군이 단호하게 대응했더라면 오늘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조선일보 2002.6.29)

이 두 기사를 합쳐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NLL침범이 정전협정 위반도 아니고 국제법상으로 제소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데도 우리 군은 침범때 마다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전쟁광이 아니고서야 위반한 것도 제소할 것도 없는 일에, 그때마다 단호하게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비단 조선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월드컵의 열기를 전쟁의 광기로 바꿔버리고도 남을 언론의 여론몰이는 항상 기초적인 사실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는 불성실함에서 비롯된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매년 6월이면 연례행사처럼 크게 작게 반복되어 온 연평도 사건을 정치적 맥락에 슬쩍 끼워넣기 전에 언론은 국민에 대한 계몽의 임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4. 미국의 자기 최면

1989년 6월 3일 유엔군 총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정전협정에는 유엔군 사령부가 북측 선박들이 단순히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데 대해 항의할 권한이 없음." 이것이 99년 교전까지 미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미국정부는 99년 서해교전 직후 즉각적인 반응을 피하고 긴장을 몰고가는 분위기에 우려까지 표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발로 규정하고, 특사파견마저 취소했으며, 서해 해상에서의 교전수칙을 바꾸었다.

교전수칙은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주한미군의 합의 없이는 개정이 불가능한 사안이다. 이로서 미국은 서해5도 문제와 관련된 정전협정 당사자로서 서해교전의 전면에 나타났다. 99년 서해교전과 2002년 서해교전의 다른 점은 99년은 존 틸럴리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미국군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했다면 2002년은 미국정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99년 서해교전에서 미군은 북방한계선을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과정 역시 미군의 자기최면에서 비롯된다. 99년 서해교전에 미군이 개입하게된 과정을 알아보자.  

연평도 문제는 연례행사였다. 96년에 최다 월선사태가 있었다. 97년에는 이번처럼 북의 함포사격까지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구나 98년 판문점 무력시위와 동해안 잠수정사건때 국방부와 합참은 존 틸럴리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전쟁준비단계인 데프콘의 격상을 요청하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존 틸럴리 사령관은 서해5도를 비롯한 한반도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해왔다. 그런데 99년 서해교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입장이 변화하며 상황을 주도한다.
6월 10일전까지 국방부의 반응을 보면, 교전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

6월 9일 남북의 해군함정이 충돌하는 우발적인 접촉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남(한국)의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경비정의 영해침범은 무력시위보다는 수출용 꽃게를 잡는 어선을 보호하기 위한 `생계형 월선`으로 보인다. 무력사용을 자제하는 대신 경고방송 등을 통해 자진 귀환을 유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방부가 6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북한 경비정이 해마다 20-30차례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돌아가 심각한 상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그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하지 않았고 대결을 원하지도 않았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또 다른 대변인 해머가 "잘못은 북한에 있다"는 논평을 냈던 사실에 대해서도 국가안보회의 대변인 크롤리는 "북한이 잘못했다는 논평은 해머의 견해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6월 10일부터 갑자기 사태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6월 9일 틸럴리 사령관과 김진호 합참의장의 만남이 있고 난 뒤였다. 11일 첫 충돌이후 소집된 용산 한미연합사령부 위기조치반은 교전 직후 즉각 연합사 예하 군의 경계수위를 워치콘3에서 2로 격상시켰다. 워치콘은 통상 4단계로, 위기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높아져 정찰기 등 첩보수집 수단이 강화되고 정보분석요원도 늘어난다. 워치콘2는 국가이익에 현저한 위험이 초래될 징후가 보일 때 내려지며, 북의 도발이 명백할 때 발령되는 워치콘 1의 전 단계다.

한미연합사는 이와 함께 이날 오전 용산 사령부내 지하의 「CC벙커」에 수뇌부가 모여 교전확대 가능성과 남북한 해군 대치상황 등을 검토했다.

이 자리에는 미군 첩보위성과 U2 정찰기 등 첨단 장비로부터 수집된 북한군 동향자료가 전달됐다. 이와 함께 미군측은 전투기와 이지스함.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한반도쪽으로 긴급 배치키로 한다.

9일과 11일의 이 회의는 한미군사위원회상설회의로 쉽게 말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회의이다. 원래는 양국의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참여하는 회의를 해야하나 이를 대신하여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1년마다 열리고, 상설적으로는 합참의장과 주한미군사령관이 용산 벙커에서 하는 회의가 실제 전쟁결정기구가 된다. 따라서 긴급상황일 때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사후에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때문에 대통령들은 보고만을 듣고 전쟁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더구나 결정의 주도권은 모든 정보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군측에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작전계획은 대북 전투태세준비인 데프콘과 대북 정보감시태세준비인 워치콘이 평상시보다 한 단계씩 격상되면서 실행에 옮겨진다.

99년 서해교전사태 때에는 워치콘(평상시 3단계)은 2단계로 격상됐지만 데프콘은 평상시인 4단계를 그대로 유지했다. 데프콘4에서 데프콘3으로 격상되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CFC)로 넘어간다.

전권을 이양받은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군의 시차별 증원계획(TPFDD)에 따라 미 항모를 한반도로 이동하고, 병력·장비·물자 등도 본격적으로 동원된다.

그런데 미 행정부가 내린 결정과 한국에서의 결정이 약간 달랐다는데 문제가 있다. 미국에선 15일 국무-국방부가 브리핑에서 일제히 주한미군의 「평시 경계태세 유지」를 강조했다. 테프콘 4의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벌써 테프콘 3에 준하는 경계태세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차이가 서해교전의 최대 의혹이다.

94년 6월 15일의 전쟁위기 때는 계획을 페리 국방장관이 수립해서 클린턴 대통령의 사인을 받는 순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99년 6월 15일은 군부가 먼저 준테프콘3를 발령했고 백악관은 테프콘4를 유지하라고 하면서 신속억제전력에 해당하는 무기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백악관이 상황에 끌려가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에는 합참의장을 빼면 모두 민간인이다. 더구나 합참의장은 참관인자격으로 참가한다. 완벽한 문민통제 구성인 셈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를 위해선 당시 군부와 백악관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유고공습전인  3월 국방부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공습 전(3월20일) 휴 셸턴 합참의장 등 미군의 4성 장군들은 국방부 내 비밀회의실 「탱크」룸에서 난상토론 끝에 공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들이 내세운 반대 이유는 ▲코소보 개입이 미국의 이익에 직접 결부돼 있지 않은데다 ▲공습만으로는 유고를 굴복시킬 수 없고 지상군을 투입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국무부 관리들은 이에 반대, 공습 강행을 주장했다.

국무부측은 `코소보를 잃으면 발칸이 위험해지고 그러면 미국의 이익이 위협받는다`고 하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과 `나토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득에 마지못해 공습에 동의했다. 이는 월남전 이후 91년 걸프전까지 군부가 수립한 전쟁의 원칙 - `군대는 국가를 위해 싸우지 정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백악관의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의회를 통한 선전포고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전쟁을 한다는 - 일명 파웰 독트린의 수정이었다.

군 지휘부는 공습이 13일째 진행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공습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셸턴 합참의장과 조지프 랠스턴 차장만 매일 작전 지휘에 나서고 있고 데니스 라이머 육군총장 등 나머지 지휘관들은 정기적으로 자문만 하고 있었다.

99년 5월 18일 웨슬리 클라크 NATO군 총사령관이 알바니아에 파견된 아파치 헬기 사용을 허가해 주도록 미 국방부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클라크 장군과 미 국방부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후 군부는 클린턴의 올브라이트 독트린에서 다시 파웰 독트린으로 회귀한다.

가까스로 유고전이 끝나고 나서 곧장 이루어진 전쟁이 서해교전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은 군부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시점이었고 군부가 주도하는 서해교전에 밀려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서해교전은 두 개 지역에서의 전쟁에서 동시에 승리한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윈-윈전략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와 유고에 파견됐던 항공모함 키티호크를 다시 한반도로 귀환시킴으로서 클린턴 대통령이 두 개 지역이 아닌 세 개 지역에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클린턴의 서해교전 병력배치 결정은 이미 윈-윈 전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고, 결국 99년 말 군부는 윈-윈전략을 내부적으로 폐기했다.

99년 서해교전을 주도한 사람이 존 틸럴리 사령관이었다. 94년 6.15의 중심인물은 게리 럭 사령관보다, 레이니 주한미대사였다. 99년 6.15의 중심인물은 존 틸럴리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발령 받을 당시 야전과 기획에 뛰어난 장군으로 합참의장으로까지 거론되고 있었던 인물로 다른 야전사령관과는 지위가 달랐다.

틸럴리의 서해교전 이전의 행적을 보면 99년 1월 14일 한-미 군사위원회회의(MCM)에서 양국 합참의장이 「戰時(전시) 연합심리전사령부(CPOTF)」를 창설키로 한다.

코언 장관은 이날(99.2.3) 미 상원 군사위에서 `지난달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존 틸럴리 한미 연합사령관으로부터 화학무기 전쟁 환경에서 작전할 수 있는 전력을 조직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셀턴 의장은 `주한미군은 현재 탱크, 보병 전투용 차량, 대포, 공격용 헬기 및 전투기 등의 장비를 개선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했으며 정찰 능력을 제고시키고 한국군 전력 강화 작업을 지원해왔다. 한국에 배치된 미 해군력을 강화했고 병참 시설 및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미 본토에서 한국에 즉각 지상군을 증파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고시켰다`고 밝혔다. 

2월 존 틸럴리 주한미사령관이 미 합참 간부들과 가진 비공개 회의내용을 흘렸다. 그는 `올 봄 한국에서 일종의 긴급상황(emergency)을 예상한다`고 밝혔다. 조지 테닛 CIA국장도, 미 태평양지역 사령관 데니스 블레어 제독도 응수했다.

4월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이 참석한 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 보유현황을 보고하고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전역미사일방위체제(TMD)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미국 국방부는 곧 주한미군을 비롯한 야전군에 효과적인 요격미사일 체제를 공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유고전을 정점으로 미국군부와 백악관의 갈등이 증폭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서해교전은 다른 해에 일상적으로 처리되던 수준을 넘어 특수한 수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 틸럴리 사령관으로 하여금 `북방한계선`의 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게 했고, 상황은 전쟁의 수준으로 급진전된 것이다. 서해교전은 유고전 수행방식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중심이 되었고 틸럴리 사령관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서해교전을 기화로 틸럴리와 미 군부는 동아시아 전역미사일방어체계 TMD의 추진을 현실화했으며, 2001년에 와서 부시가 당선됐고 9.11사태로 국방예산은 레이건 시절보다 더 많은 최고액수인 38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다시 2002년 서해교전을 맞이했다.

당시에는 일부 군인이 주도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테러전쟁을 선포한 미 정부가 주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99년 국무부의 유보적인 논평대신 2002년 국무부는 북의 도발로 단정짓고 단호한 대처를 선포했다. 북미 특사교환을 취소함으로서 긴장을 해결할 의지를 포기했다. 한미연합군은 교전수칙을 수정했다.

2001년 6월의 북상선 영해침범 운운했던 사건때에도 교전수칙 개정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때는 교전수칙이 지나친 과잉대응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작년에는 미군이 교전수칙 개정에 응하지 않았는데 올해에는 즉각 응해서 교전수칙이 바뀌었다. 전쟁할 태세를 모두 갖춘 상태에서 북방한계선의 진실이 제대로 보일 리 만무하다.

서해교전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북방한계선을 설정한 미국이며, 실행자는 99년 이후 자기최면을 걸고 원래의 설정의도조차 왜곡하며 `북방한계선`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미국군부와 한국군부이다. 그런데도 미국정부와 군부는 전쟁의 원인을 없애기보다는 전쟁을 준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5. 맺음말

자기 최면의 원인은 자신의 신념과 경험이 일단 옳다는 선험주의를 반성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자기최면에 걸리면 모든 상황을 자신의 선험적 기준에 맞추어 편향적으로 해석한다. 북방한계선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 본격적으로 왜곡된 것은 99년 서해교전 이후이다. 국방부의 주장처럼 59년부터 북방한계선을 둘러 싼 지금과 같은 논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99년에 억지로 찾아낸 59년의 자료일 뿐이다.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 것처럼 왜곡하고 이것을 침범하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왜곡된 열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북방한계선의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국민여론에 의해 압박 통제되어야 한다. 국방부와 언론과 미국이 자기 최면을 풀 수 있도록 다시 민이 나서야 할 때다.


[이어지는 글]

<특별기고2> 서해교전을 통해본 영해문제(55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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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67년 충남예산 출생
88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제적
88년 한국문화운동연구소 사진강사
89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창작단장
90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단체협의회 풍물분과장
91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 창작단장
91~95년 8.15 범민족대회 문예기획단
91~94년 전태일열사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예술기획단
93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의장대행
93년 [사람과 사진]전 -서울 중구문화관
95년 민족문예일궈가는 신바람 창립 초대의장
95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구성 혐의로 구속
97년 이시우 5회 연속 사진이론발표회 - 서울 신바람소극장
98년 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문예부장
9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조디윌리암스 환영 만찬 초청 슬라이드 쇼  - 서울 힐튼호텔
98년 인천영상미술제 초대작가
99년 남북기본합의서실천개막행사 슬라이드쇼 - 세종문화회관
99년 사진전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예술의 전당
99년 사진집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인간사랑 출판
99년 사진전 [끝나지 않은 전쟁 대인지뢰] -서울 중구문화관
99년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대인지뢰]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출판
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초대사진전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네덜란드 헤이그 콩그레스 센타
99년 독일 한인회 초청 사진전 [비무장지대와 대인지뢰]-독일 루루대학
99년 기독교방송 사이버인간띠잇기 초대 사진전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99년 문학예술청년공동체(준) 부위원장
99년 DMZ 2000 참여작가
2000년 평화예술인국제연대 사무처장
2000년 한강에서 서해로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 사무국장
2000년 아셈 2000 민간포럼 초대전시회 [평화] -서울 건국대 새천년관
2000년 핀란드공영방송 이시우의 활동을 소재로 한 다큐멘타리 `철의 땅 Land of Iron`방영
2001년 노벨평화상단체 국제대인지뢰금지캠페인(ICBL)초청사진전-워싱턴 전미주기구(OAS)
           워싱턴 존스홉킨스대학 초청 사진전 및 강연회
2001년 일본 도쿄 일본대인지뢰금지캠페인 초청사진전-도쿄유엔대학
           일본 오사카 한인교회초청사진전-주쇼사회관
2001년 CBS 시사쟈키오늘과내일에서 `이시우의 통일기행` 진행중
2001년 인터넷 `통일뉴스` 홈페이지에 이시우갤러리 상설 전시중
2001년 행정자치부CD롬 `오천년의 향기` 중 고인돌 사진제작
2002년 일본 삼천리철도 초청 사진전 및 강연회 - 나고야 YWCA BIG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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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6)
김현태 () 2002-07-04 12:00:00
이 글을 읽고, 정말 중요한건 무엇일까... 하고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이시우님이 쓰신 기고문의 내용이 백번천번 옳다고 하더라도 먼저 발포를 한건 북한군이 아니었나요. NLL이 교전을 야기시킨 원인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같은 민족으로 언젠가는 하나로 뭉쳐야 할 대상으로써의 북한이 우리에게 먼저 총을 쏘았다는것입니다. 우리군은 물론이고 북한군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서로의 피를 흘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건 왜 통일을 이야기하고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늘 우리정부와 남한사람들에 대한 잘못만을 이야기 하느냐는 겁니다.

NLL에 관한 이시우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사뭇 공감하는 부분도 있구요. 하지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일고의 언급도, 먼저 방아쇠를 당긴 북한에 대한 그 어떤 의견도 유보한채 그 본질은 남측의 NLL 설정에 있다 는 식의 의견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가 없네요.

가장 중요한건 사람이요, 생명입니다. NLL같은 정치적 관념의 상징물이 아니구요. 정말 중요한 본질은 고귀한 생명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맥락일 뿐이라는 이시우님의 글을 보면서 섬&#52255;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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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2002-07-04 12:00:00
김현태 님의 글을 읽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언급도, 조의도 표함이 없이 논리의 문제로만 접근했던 점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무엇을 숨기려다 들키기라도 한 듯한 심정입니다. 혹시라도 글의 논지가 흐려질까 하는 옹졸함에서 생략했던 많은 내용들을 김현태님의 질타를 받고서야 생략해서는 안되는 내용임을 비로소 깨우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백령도와 연평도는 다 가본 곳이고 그곳에서 많은 해병대군인들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서해교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끝까지 총을 쏴서 상사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는 군인을 소개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집에서도 아주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또래의 젊은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조국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고립무원의 연평도에 근무하면서 그런 사명감이 없다면 이 섬에서 버틸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민 많고 순수한 해병대원들을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것은 남에서 승전가를 부르는 사이에 잊혀진 북의 사상자들에 대해 우리는 주적이상의 아무런 인간적 감정도, 동정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연평도 입구에 우뚝 세워진 연평대첩비는 저를 더욱 착잡하게 했습니다. 연평대첩비 앞에서 저는 서해교전에 대한 저의 탐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북이 먼저 쏘았다는 부분에 대해서 저의 추정글을 쓸까하다가 정확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어 그것은 나중으로 미루었습니다. 참고로 99년 서해교전의 경우 남쪽에서는 북의 선제공격으로 보도를 했지만, 제가 남북간 전력과 작전통제권, 교전수칙등 여러 상황을 고려하며 공부한 결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번잡한 듯 하지만 설명을 달겟습니다.
글에서 밝힌바대로 월선 자체는 유엔사에서 국방부에 내린 지침에도 있듯이 정전협정위반과 무관했지만 6월11일부터 남쪽은 충돌작전에 들어갔습니다. 합참은 "이런 선박 충돌작전은 사실상 발포 다음 가는 강력한 자위조치이다"라고 언론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6월 15일 아침 9시 7분쯤 해군의 고속정 참수리 325호와 참수리 338호는 "영해를 침범해 들어오는 북한 경비정들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충돌하라"는 공격명령을 받고 북의 경비정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때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대위)은 "적함의 측면을 향해 돌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 고속정 325호는 전속력으로 북 경비정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이전까지는 꼬리부분을 들이받는 충돌식 밀어내기 작전이었는데 이날은 옆구리를 들이받아 침몰시키므로서 공격의사가 뚜렸해졌습니다. 고속정 325호가 북경비정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순간, 조타실에 있었던 내연병 안태성(상병)은 "충돌 순간 갑판에 있던 북한군 몇 명이 바다로 나가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북측에서 허겁지겁 소총으로 응사하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바로 그 순간 고속정 325호 정장 안지영은 22mm, 40mm 함포로 응사하라고 명령했고, 남측 고속정에서는 22mm, 40mm 함포가 불을 뿜었고, 북측 경비정도 함포를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뒤에 배치되어 있던 초계함에서 76mm 함포를 발사하여 북측 어뢰정을 격침시켰습니다. 북은 선상에서 함포사격을 하게 되어있지만 남측 장비는 자동화되어 있어 한번 단추를 누르면 컴퓨터에 입력된 목표물이 사라질 때까지 분당 3백발의 포탄이 발사됩니다. 당연히 76mm 함포를 가동하는 컴퓨터에는 북측의 모든 경비정들과 어뢰정을 공격목표로 입력해놓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침범 이라는 판단으로부터 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발포 다음가는 조치로서의 충돌작전과 함포사격은 남측에서 먼저 이루어 졌습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도 99년과 유사했겠지만, 군사적 충돌상황이란 교전수칙대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고 무척 미묘한 부분이 많기에 좀더 자세한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입장을 유보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군사문제에 관한 한 50년간 정전상태를 유지하면서 벌어졌던 많은 사건들이 시간이 흐른 뒤 정보의 독점이 풀리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저는 언론의 발표를 그대로 믿기 보다는 여러측면에서 재확인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와 남한사람들의 잘못만을 이야기한다는 말씀에 대해 해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정부의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정부의 정책이나 의지와 달리 한 순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구조가 한미군사관계에 있습니다. 대통령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가 한미연합군체계에 있다라는 부분을 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정부와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의 의견과 무관하게 통일의 흐름을 역행시키려는 요소와 구조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장병들에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죽음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공평한가는 우리장병들의 죽음만큼이나 북측 장병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을 나눌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에서 슬퍼하고 있는 유족들이 남에 대해 원수의 심정으로 다가서고 남의 유족들이 북에 대해 원수의 심정으로 다가선다면 더 큰 죽음과 상처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김현태 님앞에 부끄럽습니다. 다시한번 님의 질타를 마음깊이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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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수 () 2002-07-09 12:00:00
이시우님의 정중한 사과의 말씀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어릴때의 경험과 느낌을 몇자 올립니다.

방학이되어 시골 집에 다니러 가서 였습니다.

맨날 앞집의 고약한 장닭이 와서는 우리 집 닭 먹으라고 뿌려 놓은

그 귀한(그때는 귀했음) 보리와 싸리기쌀을 우리집 닭을 쫓아내고 지가 주인 노릇 하며

마구 쪼아 먹는것을 보고 몇일 동안은 소리도 지르고,맨손을 휘휘 저으며

좇아 버리다가 끝내에는 돌맹이를 던지기도, 나무 막대를 던지기도 하다가 앞집

닭을 다치게 한적이 있습니다.

왜 이런 때 그때의 생각이 떠 오를까요?

북쪽 사람 입장에서는 그동안 속상한 일을 겪다 못하여 저처럼 너 그놈의

닭 잘 간수 않고 우리집에 자꾸 들어 와 깽판치게 할거냐고 경고를

하고 화도 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다 너무 크게 확대되고,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는 결과가 오지 않았나 합니다.

먼저 발포한 책임이 물론 크고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하여 응분의 책임을 져야지요.

어쨋거나 양쪽이 다 불행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비 인간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만 사는 사람들이고,

우리만 정의로울까?

정말 저족은 IQ 가 모자라는 정신병자들일까?

다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비정상인 걸 많이 보게됩니다.

우리는 원인 제공한것이 없는지?

내가 아직 무얼 제대로 몰라서 답답한 소리 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두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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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 2002-07-14 12:00:00
NLL이 지켜져야할 근거가 없다면...

북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쪽 바다에 대한 권리를 모두 북측에 넘겨주고

우리는 그쪽에서 지정한대로 제1수로 제2수로를 통해서만
연평도를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하면 우리와 북측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답답합니다.. 이런식의 사고가...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답하는식의 글들이 너무 많은것 같아요
이 홈피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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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 2002-07-19 12:00:00
그렇다면 님의 말씀에 숨은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기란 이렇게 힘이 드는군요.
제가 하는 얘기는 북을 이롭게 하기위한 목적으로 시작한게 아니지만 결과는 그렇게 비칠수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객관적인 진실로 인해 이로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객관적인 진실을 밝혀본다고 쓴 것입니다. 그러나 님의 말처럼 스스로 묻고 답하는 느낌이 든 것은 저의 좁은 능력 때문일 것입니다.

50년간 남북사이에는 가치관에 따라 시비를 가리기 힘든 문제들이 많앗습니다. 그러나 북방한계선 문제는 가치의 문제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진실의 문제를 규명만 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누구의 잘못인지 가리기 힘든 교통사고이기보다는 얼마에 합의 했는데 누가 지키고 누가 지키지 않았나하는 합의 사실이 확인되면 명백해지는 사건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이사실을 외면하고 문제를 풀려고하면 처음에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으나 서로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오히려 궁지에 몰릴수도 잇습니다. 우리에게 이롭건 해롭건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는것 부터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주장해 온 바이니 주저하지 말고 북방한계선을 지키자, 말자 하는 것은 합리적인 균형감각을 결여할 수 있습니다.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란 말인가하고 물으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미국이 정한 것이기에 미국이 풀어야하고, 정전협정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협정의 당사자 문제로 귀착됩니다. 남쪽 정부는 당시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공식적으로는 정전상의 제 권리에 대해 주장할 바가 없습니다. 통일의 기운이 높아져 미국이 반드시 책임자로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북이 남과 함께 하는 것을 양해하기 전 까지는요.
북방한계선문제는 정전협정당시 서해상에 해상분계선을 정하자는 북의 주장과 서해5도에 대한 관할권만을 논의하자는 미국의 주장이 맞서다가 미국의 주장대로 되면서 발생한 문제입니다. 불가침 해상분계선의 문제는 91년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에도 회담을 지체시킨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결국 기본합의서 제10조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 the areas that have been under the jurisdiction of each side until the present time.)으로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해의 해상 불가침은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과 확정될 때까지는 불가침선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區域’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남북한의 군사적 경계선이 되기 위한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이란 “쌍방이 합의하고 동의한 구역”이라야, 남북 양측에 경계선으로서 효력을 발휘 할 수가 있습니다. 북방한계선이 일방적인 것이기에 무효인 것처럼 북이 주장한 조선서해해상군사분계선도 일방적인 선언이기에 무효입니다. 중요한 것은 협상을 통해 합의하는 것입니다. 북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 나름의 합리적인 제안을 이미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미국은 몇차례의 회담을 거부함으로서 결렬시켰으며, 다시 대화가 아닌 힘의 대결로 나타난 것입니다. 대화가 막히면 반드시 주먹이 나서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서해상의 해상분계선을 합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북이 이미 제안한 것이 있으니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통일전문가조차도 이 금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동어로수역등 경협차원의 문제를 풀어가는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서해해상군사분계선 에 대한 답변이 나와야합니다. 이와함께 영해의 문제도 정면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사실 이번 서해교전에 대해 북이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했기에 선제 사격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국제법적인 차원에서 공정하게 다뤄지기 시작한다면 국제해양법은 당연히 북에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공정한 게임의 장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서해문제에 대해 최소한 우리는 3가지 문제를 정면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불가침 경계선이고 둘째는 영해이고 셋째는 공동어로등 남북협력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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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욱 () 2002-07-19 12:00:00
이시우님의 논리적 객관적 사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상대가 누구냐에달려있다
북은 안된다
강력한 무력만이 대처방안이다. 설사 전쟁이터질지라도 ....
어차피 역사는 전쟁의연속이요 투쟁의 드라마다
이시우님의글 끝까지 읽고 공감은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론과는 평행선입니다
당신의 글이 사회에미치는 영향이 득보다는 실도 존재하고 또한 이를 제일 반기는 사람은 북의 지도자가 아닐까요
제 주위에는 노동,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친구들이 있어 당신의
논리를 쉽게이해하지만 말과 실제현실행동은 다르게 생활하더라구요
이 시우님 우리 이대로 편히 삽시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쪽대로 ....
아쉬우면 구걸하겠지요 그때가서 인심씁시다
군의 사기도 생각하고 유가족도 위로합시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듯이 ...
강한 군비증강을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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