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박헌영파(간부파) 영향력 강했던 대구 총파업투쟁

박헌영의 간부파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대구에서도 전평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총파업이 진행되었다. 9월 23일 오후 3시경부터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1,000여명이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 쌀배급 증대, 해고 반대, 급식 부활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9월 25일 철도파업투쟁위원회가 파업에 관한 일체의 교섭권과 계약권을 전평에 일임하기로 결정했으며, 9월 27일 남조선철도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위원장 윤장혁)가 조직되었다. 대구시에서는 9월 25일 대구우편국의 파업을 시발로 경북도내의 많은 우편국이 파업에 들어갔고, 섬유공장과 조선중공업대구지부가 파업에 들어갔다. 출판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서 9월 29일부터 신문발행도 중지되었다.

파업이 확대되자 9월 27일 미군정의 경북지사 헤론(Gordon J. F. Heron)은 대구시투쟁위원장 윤장혁을 만나 협상을 시도했다. 이때 윤장혁은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시하였으며, 중앙의 지령없이 파업을 일방적으로 중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해론은 식량문제는 지방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수송문제에 애로가 있고, 절대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양측의 협상에 진척이 없자 윤장혁 등 노조간부들은 27일 오후 ‘남조선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이하 대구투위)로 명칭을 변경하고, 정식으로 파업투쟁 지도에 돌입하였다.(주1)

9월 27일 현재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철도노조원 1,200여 명, 섬유 및 직물업체 노동자 1,800여 명, 도내 우편국 직원 1,200여 명, 출판노조원 112명, 조선중공업 등 기타 직종의 노동자 660여 명 등 모두 5,000여 명에 달했다. 9월 28일과 29일, 그리고 30일에는 대구투위를 중심으로 파업이 더욱 조직적으로 진행되었고 파업노동자들의 위세 또한 한층 고조되었다. 권영석 제5관구경찰청장은 치안책임자로서 윤장혁 등 대구투위 간부들에게 “파업 이유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쟁의는 합법적으로 하고, 앞으로 각 단체 대표 3인 이내가 실내에 모여 쟁의에 대해 토의하는 것은 인정하되, 시위행동과 선동적 행동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해 윤장혁은 공안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쟁의를 벌이겠다고 말했다.(주2)

이처럼 대구의 파업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고, 중앙의 지령에 충실히 따랐다. 반면 다른 지역 상황은 대구와 많이 달랐다. 미군정의 정보(G-2)보고서에 따르면, 부산, 전주, 인천 등의 노동자들은 직장에 복귀할 의사가 있었고 서울의 파업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상태였다. 부산에서는 파업의 조기해결을 위해 5명의 대표를 선출, 서울의 파업자들이 직장에 복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9월 26일 서울로 파견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공산당 내의 분파 갈등, 특히 대회파 세력의 움직임과 연관이 있었다. 대회파는 9월 28일 당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한 상태였고, 이를 위해서는 파업을 조기에 끝내야 했다. 특히 부산은 대회파 윤일의 근거지였고, 전주는 대회파 김철수의 근거지였다. 인천에서는 일찍이 조봉암이 박헌영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따라서 9월 총파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곳은 서울과 대구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울은 9월 30일 무장경찰 2,000명과 김두한 등이 이끄는 대한노총, 건청·독촉 등의 우익청년단 수천 명이 철도파업단 본부가 있는 용산기관구를 습격해 파업을 강제진압함으로써 사실상 조직이 파괴되었다. 이렇게 되자 9월 총파업이 지속되어 10월 항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은 대구뿐인 상황이 되었다.(주3)

미군정 정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노동자들
미군정 정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노동자들

해방 후 대구지역에서는 비교적 경찰 등의 탄압을 덜 받으면서 노동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는데, 남전(南電)쟁의, 대구전매국쟁의 등을 통해 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가 조직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한편, 대구는 9월 총파업 당시 서울처럼 경찰과 우익에 의해 파업이 분쇄되지 않았고, 중앙의 갈등·분열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만큼 박헌영의 간부파(중앙파)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의 9월 총파업은 10월 인민항쟁을 촉발시키는 뇌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뇌관이 점화되자 대구와 경북은 화약고가 폭발하듯 10월 인민항쟁의 회오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1945년 9월 13일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동경의 맥아더에게 보낸 최초의 보고에서 “현재 남한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에 비유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했는데, 그의 말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화약고의 뇌관을 터지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되었다.(주4)

군중시위가 봉기, 항쟁으로 발전하다

대구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은 10월 1일과 2일 대구시민들이 동참한 가운데 대규모 군중시위로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시신을 들고 시내를 행진하면서 민중봉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경북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된 민중항쟁은 해방 이후 남한 전역에서 쌓이고 쌓인 미군정에 민중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대구·경북의 인민항쟁은 식량정책을 비롯한 미군정의 정책적 실패, 전재민의 증가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친일경찰에 대한 원한과 미군정에 대한 반감 등 누적되고 응축된 모순의 결과였다.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던 상황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했던 대구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탄압강도가 약했던 미군정과 경찰의 저지력을 뚫고 대규모 군중 시위를 조직하게 되면서 군중의 투쟁 의지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주5)

1946년 10월 초 대구역에 모여 시위중인 여성들
1946년 10월 초 대구역에 모여 시위중인 여성들

1946년 10월 1일 아침부터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 대구투위 본부 사무실 주위에 집결, 경찰 100여 명과 대치하였다. 이날 오전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천여 명도 대구부청 앞에서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였고, 오후에는 도청으로 장소를 옮겨 시위를 계속하였다. 시민들의 시위는 9월 총파업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들이 그동안 쌓인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써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 과정이었다.

오후 1시경 경찰당국이 3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여 대구파업투쟁위원회 간부들과 군중의 해산 문제를 협상하고 있던 중 약 1만 5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이 경찰을 포위하며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권영석 경북경찰청장은 무장경찰 60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직접 나타나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하며 시위를 계속 하였다. 오후 6시경 대구역 앞에서 운수경찰과 운수노동자들의 충돌이 일어나자 대구경찰서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출동해 군중들을 해산하려 하였다. 이때 군중들이 경찰들을 구타하여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중상을 입었고, 경찰과 군중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군중의 위세에 위기의식은 느낀 경찰은 오후 7시경 발포를 하며 해산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가 1명이 사망하였다.

10월 2일, 오전 8시부터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무장경찰이 대치하였다. 이때 최무학 등 대구의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노동자의 시신 한 구를 들것에 메고 “폭력경찰의 총격으로 숨졌다”고 외치며 대구경찰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전 10시경 대구경찰서 앞에 학생과 교수, 노동자, 시민 1만 여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권영석 제5관구 경찰청장과 미국인 경찰청장이 시위군중에게 해산을 요구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수명이 경찰들이 “학도들의 정열과 요구에 응하여 단연코 경찰복장을 버리고” 군중 속에 합류하였다.(주6)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는 미군정 경찰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는 미군정 경찰

이런 가운데 시위대가 무장경찰 100여 명을 무장해제 시키고, 일부군중이 대구경찰서로 난입해 유치장 문을 열고 수감자 100여 명을 석방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구경찰서가 점거된 다음 학생대표단은 미군정을 상대로 “구금자 석방, 경찰의 무장해제, 대중 발포와 폭력진압 중지”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고, 미군정 측 담당자가 이를 수용하기로 하자 학교로 돌아갔다. 경찰서가 점령당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군중들은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미군정 경찰부장 프레이저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강제해산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이성옥 서장은 경찰 병력을 대구경찰서 인근의 본정소학교(지금의 종로초등학교)로 철수시켜 유혈충돌을 피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 지도자 중 일부는 시민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으나 군중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구 시내의 치안이 무너지기 시작한 가운데 미군정의 명령으로 출동한 무장경찰 150여명이 수만명의 군중이 모여 있던 파업투쟁위원회 본부 단상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있던 여공을 사살하였다. 경찰의 발포에 격분한 군중이 경찰을 공격하였고 경찰 또한 총격으로 대응하면서 민간인 17명(또는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하였다. 이 무렵 대구 시내 도처에서 군중들이 봉기, 폭동을 일으켜 지서와 파출소를 점거하였다. 일부 군중은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ㆍ관리ㆍ부호의 집을 공격하였으며 한편에서는 관리ㆍ부호의 집에서 몰수한 식량과 재산을 빈민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10월 2일 오후 3시경 미전술군이 대구 시내에 투입되어 무력진압에 나섰다. 미군은 전차(M-7 mount) 4대와 기관총부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학생대표는 미군과 협상해 군중 해산에 동의하였다. 오후 5시경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 시위를 진압하면서 대구시내의 질서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불똥은 대구 주변의 군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풍선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중의 분노는 출구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구에서 밀려난 일부 군중은 화물자동차를 비롯하여 개인소유의 자동차를 탈취하여 대구 주변의 군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이와 함께 항쟁은 경북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주7)

대구항쟁에서는 학생들의 가세가 10월 2일 경찰과 파업단 사이의 팽팽한 대치관계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부터 동맹휴학 등을 통해 조직력을 확대해온 학생들은 부족한 경찰의 힘을 뚫고 경찰서를 접수함으로써 대구의 상황을 예상치도 못한 ‘폭동적’ 상황으로 급진전시켰다. 이에 미군정은 전술군 투입과 계엄령 선포를 통해 대구의 질서를 회복하였지만 이는 군중의 항쟁을 대구 주변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대구에서 항쟁이 전개되자 행정관리와 금융기관 직원, 회사원 등 중간계층도 호응하였다. 특히 대구시의사회와 의대교수들은 동포에게 발포하는 경관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파업기금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처럼 중간계층까지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점에서 대구항쟁은 전민봉기, 전민항쟁의 성격을 드러냈다.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일반시민, 다수의 군정관리, 의사,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참여하거나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군정 자체, 친일·친미세력, 일부 자산계급을 제외하고는 전민중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구항쟁은 ‘소수의 선동에 의한 폭동’과는 거리가 먼 ‘전체 민중이 참여한 민중봉기, 인민항쟁’이라 할 수 있었다.(주8)

또한 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태도와 요구를 통해서도 대구항쟁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요구는 계층에 따라 다양하고 중첩적이었다. 부녀자들은 쌀을 요구하며 대구부청에 난입하였고, 노동자는 파업과 조직 행동을 통해 임금과 수당의 인상, 쌀배급 증대, 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 등 일상적인 생활난을 호소하였으며,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 금지와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조직적인 행동으로 경찰서를 접수하였다. 일반시민들은 이런 주장에 동조하며 시위에 참여하였고, 다수의 행정관리들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으며, 의사들은 경찰 치료를 거부하였다.

대구항쟁은 친일파 처단, 미군정의 반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 경제적 불만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반감, 경찰탄압에 대한 저항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럼에도 대구항쟁에서는 경북 군 지역의 항쟁과 달리 인민정권 수립과 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치안 확보, 이를 위한 행정기관과 경찰서 접수 등의 시도는 없었다. 대구경찰서 접수 시도는 경찰의 무력탄압에 대한 항쟁, 일시적인 폭동의 성격을 넘어서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구에서 민중의 주된 공격이 경찰에 향한 것은 이유가 분명했다. 경찰은 탄압과 지배의 표상이었다. 일제시기의 일제의 앞잡이로, 미군정 아래서는 미군정의 앞잡이로 행동함으로써 민중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일제시기와 해방 후 미군정 아래서 중복된 ‘이중적인 원한’을 그러낸 것이었다.(주9) 민중이 볼 때 모든 지배와 탄압의 직접적인 수행자는 바로 경찰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공격 표적이 경찰을 향한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 점은 경북의 농촌지역 투쟁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미군정청이 대구지역 계엄령 선포와 함께 시내에 배치한 M4장갑차(사진=월간대구문화 캡쳐)
미군정청이 대구지역 계엄령 선포와 함께 시내에 배치한 M4장갑차(사진=월간대구문화 캡쳐)

조직적 봉기와 자발적 폭동이 혼재된 양상으로 전개

미전술군의 투입과 함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대구 시내는 치안이 확보되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밀려난 일부 군중은 대구시 주변의 군으로 향하였고, 그에 따라 항쟁은 경북의 군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와 인접한 몇몇 군에서는 10월 2일부터 이미 군중이 들고 일어나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출동하자 대구를 탈출한 군중 일부가 화물차량을 빼앗아 타고 대구 외곽지역으로 달려갔다. 경북의 군지역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민청 등 대중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와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치 활동의 중심이 중앙에서는 ‘당’ 중심으로, 대구에서는 ‘인민위원회’나 ‘민전’ 중심으로, 군에서는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일수록 ‘통합적인’ 조직형태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주10)

경북지역에서는 경찰과 마찰이 잦았던 곳, 하곡 수집 문제로 군 당국과 농민조합 간에 대립이 심한 곳, 지주나 친일토호의 뿌리가 깊어 반감이 쌓여 주민의 반발의식이 강한 곳에서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경북 도내에서 민중과 경찰 사이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은 영천군과 칠곡군이었다.

10월 민중항쟁 당시의 대구·경북지역 상황(출처: 정해구, 10월항쟁 연구, 79쪽)
10월 민중항쟁 당시의 대구·경북지역 상황(출처: 정해구, 10월항쟁 연구, 79쪽)

미군의 G-2(정보기관) 보고서에 따르면 영천군에서는 10월 3일 아침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서장과 경찰관 15명을 살해하였다. 이밖에도 경찰관 46명이 실종되었는데, 이 중 적어도 40명은 시위군중이 납치한 것이었다. 시위군중도 15명이 사살되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영천의 군중들은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과격하고 잔혹한 행동이 많이 벌어졌다. 그 어느 지역보다도 폭동적 성격이 강했다.(주11) 시위군중은 대구에서 지원경찰 100명이 내려오기까지 만 이틀 동안 영천 일원을 지배하였다. 그동안 경찰서와 우편국을 전소시키고 경찰무기고, 신한공사, 법원, 그리고 적어도 100여 채의 건물을 포함한 많은 공공기관과 가옥을 불태웠다. 이같은 난동 속에 영천군수과 면직원 등 관리 19명이 살해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특히 영천군수는 시위군중에 의해 생화장에 처해졌다.(주12) 대중의 분노가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다.

대구 10.1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다룬 부산지역의  1946년 9월 30일자 기사.
대구 10.1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다룬 부산지역의 1946년 9월 30일자 기사.

영천군과 함께 잔혹한 보복행위가 벌어진 곳은 칠곡군이었다. G-2 보고서에 따르면 10월 2일 오후 9시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이 집결하기 시작해 3일 새벽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경찰서를 점령한 군중은 왜관경찰서장과 수사주임을 낫과 도끼로 난자해 참살하였다. 약목에서는 군중이 약목지서를 습격해 3명의 경찰관을 지서 기둥에 결박해놓고 낫과 도끼로 살해하는 등 잔혹행위가 유독 심하였다. 지방 주민들이 주축인 시위대는 3일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에 칠곡, 안동, 석적, 약목, 북삼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경찰관, 관공리, 부유층 소유 가옥 50여 채를 파괴하였다. 시위대 7명도 사망하였다.(주13)

미군정청 미곡수집 포스터. 10월 항쟁의 경우 농촌지역 농민들의 거대한 봉기, 폭동으로 발전한 것은 미군정의 강압적인 미곡수집 등 식량정책 실패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시에 북한지역의 토지개혁 소식이 들려오면서 친일파의 발호와 지연된 농지개혁에 대한 반감이 증폭했다.
미군정청 미곡수집 포스터. 10월 항쟁의 경우 농촌지역 농민들의 거대한 봉기, 폭동으로 발전한 것은 미군정의 강압적인 미곡수집 등 식량정책 실패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시에 북한지역의 토지개혁 소식이 들려오면서 친일파의 발호와 지연된 농지개혁에 대한 반감이 증폭했다.

선산군은 대구에서 선동자가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조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산에서 군중을 이끈 것은 민전간부 김정수와 박상희였다. 박상희는 박정희의 셋째형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운동을 해온 선산의 애국지사였다. 그는 신간회에도 간여하였고, 조선일보 구미지국장,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10월 3일 오전 9시 당시 선산군민전사무국장 겸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었던 박상희가 이끄는 2,000여 명의 군중은 구미경찰서를 습격하여 “모든 기능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은 경찰서장 등 경찰관 16명을 유치장에 감금하였고, 구미 면사무소를 습격해 양곡 135가마를 탈취하였다. 이들은 서장과 서원의 가옥은 물론 선산군 내 요인의 집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무기를 탈취한 40여 명의 군중은 선산군청도 습격하였다. 6일 오전 지원경찰이 들이닥치자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사살되었다.(주14)

10월 인민항쟁의 선산지역 지도자로 미군경찰에 의해 피살된 박상희. 박정희가 존경했던 친형으로 경북지역의 중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10월 인민항쟁의 선산지역 지도자로 미군경찰에 의해 피살된 박상희. 박정희가 존경했던 친형으로 경북지역의 중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다.

경북에서는 오지의 산악지대인 영양군과 청송군, 그리고 안동군과 동해의 고도인 울릉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군에서 조직적인 봉기나 지역단위의 개별적인 저항, 폭동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는 경찰과 우익의 선제적 행동으로 용의자만 82명이 검거되었을 뿐 아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 후 좌익도 강하였지만 우익과 경찰도 강했던 안동군에서는 10월 인민항쟁 이전에 좌우 갈등 및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좌익들이 검거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10월 항쟁 와중에도 조용하게 넘어갔다. 경북지역을 통틀어 볼 때 대구부(시),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 등 9개 부·군은 시위 군중이 한때 경찰서를 점령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하였다. 평소 좌익세가 드셌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의 인사정책, 하곡수집 정책 등 당면한 실정으로 주민의 불만이 극에 달해 크고 작은 마찰이 잦았던 곳이었다. 또 대구와 교통이 원활하고 왕래가 활발해 대구의 유혈상쟁이 몇 시간 안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던 곳이기도 했다.(주15)

대구와 경북에서의 항쟁은 조직적인 민중항쟁의 성격과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폭동의 성격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10월 2일 대구경찰서 접수 이전까지의 대구 투쟁과 예천군 이북 지역의 항쟁은 비교적 ‘조직적’이었다. 반면, 10월 2일 대구경찰서 접수 이후의 대구와 그 주변 경북 남부지역에서는 ‘폭동의 성격’을 나타냈다. 북부에서는 좌익세력의 조직성에 영향을 받았으며 남부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불안정과 대구로부터 항쟁의 신속한 파급과 선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구에서는 양자의 영향이 함께 작용하였다.(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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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해구, 10월 인민항쟁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 -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 고려대 석사논문, 1987, 23〜24쪽

2)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2017, 42쪽

3) 임영태, 위의 책, 43쪽

4) 임영태, 위의 책, 43~44쪽

5) 정해구, 위의 논문, 28∼32쪽;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4』, 2010, 67∼68쪽

6) 임영태, 앞의 책, 45쪽

7) 김상숙, 『10월 항쟁』, 돌베개, 2016, 107쪽

8) 정해구, 위의 논문, 34〜35쪽

9) 정해구, 위의 논문, 36쪽

10) 정해구, 위의 논문, 38쪽

11) 정해구, 위의 논문, 51〜54쪽

12) 전현수,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10.1사건”, <신동아> 558호(2006년 3월), 320~333쪽

13) 정해구, 위의 논문, 43〜45쪽

14) 정해구, 위의 논문, 47〜50쪽

15) 정해구, 위의 논문, 66〜80쪽

16) 정해구, 위의 논문, 83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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