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무지개』, 책 제목만 보아서는 언뜻 떠올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책의 주제와 내용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을 펼쳐들기 전에 먼저 저자에 대해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 사건에서 내 자신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버겁고, 부담스럽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KAL기 사건은 내 존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박강성주,『눈 오는 날의 무지개』, 도서출판 선인, 2021. [자료사진 - 통일뉴스]
박강성주,『눈 오는 날의 무지개』, 도서출판 선인, 202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인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는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사라진 KAL858기 사건과 씨름하며 석박사 논문을 썼고 지금도 각국 정부를 상대로 비밀문서 정보공개청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저자가 이 사건과 맺어진 운명적 계기는 통일부 주최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문이 입선됐지만 ‘사건 재조사 필요’ 내용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입선이 취소되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고, “인생이 바뀌었다”.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선 저자가 정작 주목하게된 것은 ‘눈을 뜬 채로’ 운명한 가족의 사례처럼 이 사건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양성 이름을 사용하고 휴대전화조차 지니지 않은 저자의 ‘태도’도 자신의 고통과 가족들의 고통을 내면화시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눈 오는 날의 무지개』는 KAL858기 사건 연구자인 저자가 이 사건을 추적하며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축적한 비밀문서 내용들을 집약한 단행본으로 <통일뉴스>와 <오마이뉴스> 등에 기고한 글들을 토대로 했다.

제1부 ‘KAL858. 정보공개 청구 비밀문서’는 저자가 △한국 진실화해위원회 △미국 중앙정보국 △미국 국무부 △영국 외무성 △호주 외무부 △스웨덴 외무부를 상대로 오랜 시간 끈질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아낸 비밀문서들을 분석한 글들이다.

제2부 ‘KAL858, 그 밖의 비밀문서’는 △안기부 무지개 공작 문건 △외교부 공개 문서 △검찰 수사기록을 검토, 분석한 글들이다. 외교부와 검찰 기록은 사건 당시의 공문서라는 점에서 자료가치가 높지만 그 분량이 어마어마해 제대로 된 검토와 분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제3부 ‘KAL858, 비밀문서 너머’는 저자가 언론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최근 미얀마 안다만 해저에서 KAL858기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에 대한 수색을 촉구하는 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개인 연구자가 외국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해 비밀문서를 받아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2010년에 청구한 호주 정부의 비밀문서는 2011년 1차로 공개에 이어 2015년 행정심판 청구에 이르러서야 외무부와 ‘합의’로 2차 공개분을 받아보게 됐다.

1차분은 99건 251쪽 중 완전공개 28건, 부분공개 57건, 14건 비공개 14건, 2015년 2차분은 115건 중 완전공개 30건, 부분공개 69건, 비공개 16건이었다. 호주에 KAL858기 관련 비밀문서가 이처럼 많이 있고, 또한 이처럼 많은 부분이 비공개 처리된 것은 저자가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북쪽에도 대사관을 두고 있는 스웨덴 외무부의 비밀문서 경우 정작 정보공개를 받았지만 스웨덴어로 된 공문서도 많아 연구자가 개인적으로 번역을 의뢰해 가며 검토, 분석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어렵사리 얻어낸 비밀문서와 엄청난 문서더미 속을 헤집으며 건져낸 작은 진실들마저 언론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미국 중앙정보국 비밀문건이 밝혀졌다며 재탕인 줄도 모르고 써대는 것 또한 현실이다.

“거의 모든 언론은 2년도 훨씬 전에 다뤄진 내용을 처음인 것처럼 크게 보도했다”, “언론이 갑자기 부지런해졌다. 비밀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온 듯 떠들썩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부지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맙지만 안타까운 보도’에 대해 “평소에도 부지런한 언론을 기대한다”는 한 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책 내용은 여러 나라의 비밀문서와 엄청난 분량의 외교부 공개문서, 검찰 수사기록을 다루고 있어 이 사건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건의 동기부터 시점, 수사결과 발표와 의문점들, 김현희 압송과 사면, 무지개공작 등.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든 이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저자는 “다만, 충실히 준비하고, 꾸준히 가겠습니다. 끝까지, 끝까지”라고 다짐하고 있다. 아니 유일한 물증인 김현희의 증언이 이미 수많은 거짓과 모순으로 판명된지 오래인 지금, 진실은 ‘인양’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는 감히. 이 책을 차옥정 전 가족회장님께 바치려합니다.”
저자가 가족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진지한 태도로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 나설 수 있는 버팀목이 지금은 건강이 여의치 않게 된 차옥정 전 KAL858기 가족회 회장이었음을 고백한 것으로 읽힌다.

국회앞 1인시위를 준비하며 하얗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한이 서려 있는 분들의 뼛가루를 떠올리고 KAL858기 사건을 대선에 활용하는 ‘무지개’ 공작을 연상시켜 ‘눈 오는 날의 무지개’라는 중의적 제목을 내걸었지만 고통을 켜켜이 쌓아온 그의 가슴 속에는 더 많은 ‘눈 오는 날의 무지개’가 떠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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