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좌우합작위원회의 성립과 박헌영의 제동

1946년 7월 좌우합작운동은 여운형과 김규식의 개인적 차원을 넘어 점차 좌우를 대표하는 기관으로부터 승인된 대표들의 회담으로 발전하였다. 7월 초 좌익대표 5명, 우익대표 5명으로 합작위원이 선정되었다. 우익은 7월 7일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연석회의에서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작 지지를 결정하고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 안재홍(이상 민주의원 대표), 최동오(비상국민회의 대표) 등 5명을 선발하였다. 민전측은 7월 12일 여운형, 허헌, 김원봉, 정노식, 이강국 등 5명을 ‘비공식 대표’로 선출했다. 실제 회의에는 김원봉 대신 성주식이, 백남운 대신 정노식이 대리로 참가했으며, 허헌은 원세훈과 심하게 충돌한 뒤 거의 불참했다. 민전은 공식성명이나 입장표명을 하지는 않았으나 좌익의 대표로 이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좌우합작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인지 불리할 것인지 판단하지 못해 공식성명 등은 내지 않고 있었다.(주1)

좌우합작 제1차 정식예비회담은 1946년 7월 22일 버치의 집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회담 장소로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단의 본부인 덕수궁 사용이 요청되었고, 주 2회 회의, 의장은 김규식과 여운형이 번갈아 담당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7월 25일 2차 정식예비회담이 덕수궁에서 열려 14개항의 의사진행 규정이 통과되고 대변인과 비서가 선임되었다. 2차 예비회담 직후 제1차 정식회담이 열려 2차 회담을 7월 29일에 열기로 결정하였고, 7월 26일 제1호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고 의사일정과 규정이 발표되면서 좌우합작은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앞길에는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이 막 발걸음을 시작할 무렵 박헌영은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46년 4월 27일부터 7월 12일까지(4차 방북), 7월 16일부터 7월말까지 7월 22일(5차 방북)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다.(주2)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박헌영은 세 가지 중요한 전술 변화를 주장하였다. 첫째는 좌우합작을 사실상 거부하는 내용을 담은 합작 5원칙의 제기이고, 둘째는 좌익의 단결강화를 목표로 한 좌익3당 합동 추진이었다. 세 번째는 1946년 7월 27일자로 ‘신전술’의 채택이었다. 이 세 가지 전술 변화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른 방침전환은 이후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으로 표출되었고, 우익과의 합작거부는 민전5원칙과 8.15기념행사 준비에서 우익 배제와 민전의 독자적인 기념행사 개최로 나타났다.

박헌영은 이같은 노선변화는 방북기간 북한 공산주의자와 소련당국과의 논의를 통해 마련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 시기 북한을 방문했던 여운형은 다른 주장을 폈다. 여운형은 박헌영처럼 1946년 모두 5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주3) 중요한 현안들을 북한 지도자들과 논의하였다. 여운형은 남한정국이 결정적인 고비를 맞는 시점이나 미군정이 여운형을 이용하려던 시점마다 북한을 방문, 정세 등을 논의했다. 그는 남과 북을 넘나들며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파악한 상태에서 민족통일을 모색했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문제, 좌익3당합동 문제, 신전술에 대한 평가 등을 두고 박헌영과 다른 입장을 나타냈으며, 김일성 등 북한의 지도부는 여운형과 유사하게 판단하였다.(주4)

극좌와 극우의 좌우합작 방해를 비판한 시사만평([제3특보] 1946.10.28.). 중앙의 왼편은 여운형, 오른편은 김규식이다.
극좌와 극우의 좌우합작 방해를 비판한 시사만평([제3특보] 1946.10.28.). 중앙의 왼편은 여운형, 오른편은 김규식이다.

북한은 1946년 11월 16일 성명을 통해 박헌영측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이는 박헌영의 입장을 고려,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북한 고위관리 출신의 박병엽은 박헌영이 북한에서 좌우합작문제는 여운형의 입장을 지지·강화할 것, 3당합당 문제는 좌익3당 지도자들 간에 의견 일치를 본 후 추진할 것, 신전술 문제에서는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추진할 것 등을 합의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주5) 북한도 처음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성시백 등 김일성이 직접 관리하던 권위있는 선 등을 통해서 남한의 실정을 파악한 뒤 긍정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주6)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기 위해 7월 말 박헌영은 민전의장단을 소집, 우익과 합작회담에서 철수할 것과 미군정이 추진하는 입법기관에 대한 어떠한 협력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전 의장단 내에서 이주하, 홍남표, 허헌은 박헌영의 주장을 인정했지만, 여운형과 김원봉은 격렬히 반대했으며 백남운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운형은 자신이 김규식과의 합작운동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중단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박헌영의 주장대로 우익과 미국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면 우익층과 온건파를 끌어들일 수 없고, 우익의 반소운동에 대한 반대 명분도 사라지며, 결국 반소반미운동의 대결로 공위재개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전의장단이 박헌영의 제안을 거부하자 박헌영은 ‘타협책’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면지지, 모든 정치범 석방, 북조선과 동일한 토지개혁법 제정, 공공활동에서 반동요소의 배제, 인민위원회로 정부기능 이양 등 다섯 가지 조건이 수락되면 합작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주7)

그러나 이는 박헌영이 방북 전 제시한 3원칙(친일파 파시스트 분자 제거할 것, 테러 중지하고 민주주의자 석방할 것, 3상 결의 총체적 지지)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써 결국 이는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우익과의 합작을 견제,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초기 좌우합작운동의 구도는 통일전선의 측면에서 볼 때 조공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았다. 김남식의 말처럼 조공이 여운형의 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뒷받침해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통일전선 형성을 시도했다면, 좌익의 결속, 이승만·한민당의 극우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의 연합전선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주8) 미군정의 의도는 조공을 배제하는 것이었지만 조공이 유연한 태도를 보여 일정부분 양보하고 미소공위 재개투쟁을 통해 좌우합작을 북한과 연계시켜 진행할 수 있었다면, 그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주9)

조선공산당의 5원칙과 우익의 8원칙 충돌

박헌영의 두 번째 제안 역시 민전의장단에 의해 잠정적으로 거부되었고, 좌우합작의 좌측대표인 민전대표들은 7월 25일 제1차 정식 좌우합작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재차 민전의장단 회의를 개최, 자신의 합작원칙을 관철시키려 했다. 여운형과 김원봉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표결까지 하며 3대 2로 합작5원칙을 통과시켰다. 나아가 박헌영은 ‘일방적으로 좌우익의 합의된 신뢰를 파기하지 않는다’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의사규정에 반하여 1946년 7월 26일 신문을 통해 일방적으로 좌우합작 5원칙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첫째,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촉진운동을 전개, 남북통일의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을 매진하되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할 것
둘째, 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여), 중요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제기본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셋째,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팟쇼 반동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각 석방을 실현할 것
넷째, 남조선에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로 즉시 이양하도록 할 것
다섯째, 군정자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주10)

이에 대해 우익은 5원칙이 “불합작을 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런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며 “남부조선도 북부조선과 꼭 동일하게 하여서 공산혁명을 실시하자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8원칙을 발표하였다.

1.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2. 2.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할 것
3. 3. 소위 신탁문제는 임시정부수립 후 이 정부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자주적으로 독립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4. 임시정부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통선거에 의한 전국민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
5. 국민대표회의 수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 정부를 수립할 것
6. 보통선거를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7. 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 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할 것
8.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할 것
(주11)

이는 민전의 5원칙에 대항하기 위한 성격으로 우익의 정리된 입장이라기보다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8원칙에 대해 민전은 ‘우익의 반동성 고백에 불과’하며 ‘이승만노선을 반복한 원칙’으로 ‘합작공작에 적응한 민주적 원칙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김규식·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에 대해 좌우의 극단세력이 노골적으로 견제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1946년 5월 초부터 개인적인 접촉과 단체대표들의 예비회담, 정식회담을 통해 좌우합작위원회가 성립되었으나 조선공산당의 태도 변화와 좌익내부의 분열로 좌우합작 회의는 8월말까지 연기되었다. 여기에 좌우합작을 입법기구 수립으로 귀결시키려는 미군정의 의도와 공산당의 전술 변화가 맞물리면서 타협 가능성이 없는 주장을 내놓으며 대립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결국 이렇게 되면서 1946년 8월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좌익측의 중도좌파와 합당반대파, 중도우익세력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즈음 중도파가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신익희는 1946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 대규모 데모와 함께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신익희는 이 계획을 이승만·김구 및 한민당의 주요인사들과 논의하였는데 8월 21일 한민당의 장덕수가 이를 CIC에 제보함으로써 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임정 봉대로 포장한 남한단독정부 수립이었다. 신익희는 비상국민회의와 입법기구를 끌어다 붙였지만 내용의 핵심은 독촉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 수립이었다. 이 계획이 실패한 후 이승만의 민족통일총본부는 ‘무책임한 사람들’의 행위로, 김구는 ‘아이들 작난’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이승만과 김구는 쿠테타와 관계가 있었고, 특히 그 배후는 이승만과 독촉이었다. ‘김구사람’ ‘독불장군’으로 불렸던 신익희는 이미 이 시기에는 이승만의 사람이었다. 신익희의 쿠데타 시도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맞서 우익 주도의 정부수립에 대한 대중동원력과 미군정 당국의 태도를 점검해 본, 일종의 시험과도 같은 것이었다.(주12)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식(1946.2.14)에서의 김규식, 이승만, 김구.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통해 김구, 이승만 등 극우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김규식의 중도온건우익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수립, 소련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우익내의 세 사람의 생각이 다 달랐다.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식(1946.2.14)에서의 김규식, 이승만, 김구.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통해 김구, 이승만 등 극우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김규식의 중도온건우익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수립, 소련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우익내의 세 사람의 생각이 다 달랐다.
좌우합작을 입법의원에 초점 맞춰 보도한 경향신문 1946.10.9.자 기사.
좌우합작을 입법의원에 초점 맞춰 보도한 경향신문 1946.10.9.자 기사.
1946년 8월 해방 1주년 기념호로 발간된 에 소개된 좌우합작위원회 대표들. 김규식 당시 민주의원 부의장, 여운형 민전 공동의장, 최동오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김원봉 민전 공동의장(사진=뉴시스 2020.4.5)
1946년 8월 해방 1주년 기념호로 발간된 에 소개된 좌우합작위원회 대표들. 김규식 당시 민주의원 부의장, 여운형 민전 공동의장, 최동오 비상국민회의 부의장, 김원봉 민전 공동의장(사진=뉴시스 2020.4.5)

좌익의 분열과 좌우합작 7원칙 합의 도출

좌익의 분열은 미군정이 의도했던 바 온건좌파를 공산당과 분리하기 위한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공격과 함께 좌우합작 지지라는 양면전술을 구사하였다. 8월 21일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을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처벌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좌익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좌우합작 지지파인 여운형과 백남운이 소외된 채 9월 5일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3당합당이 결정되자 조선인민보 등 3개 일간지를 무기정간하고, 9월 7일에는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주13)

한편, 하지는 8월 26일 김규식과 여운형에 합작 격려 친서를 보내 좌우합작 지지를 분명히 하였고, 9월 17일 재차 합작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온건좌익 지지가 이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는 않았다. 미군정의 공산당 공격과 좌우합작 지지의 양면전술은 박헌영에게 합작의 목적이 좌우분열과 조공 탄압, 미군정 입법기구의 수립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공과의 연대 속에서 좌우합작을 구상하고 있던 좌익내의 좌우합작파는 3당합당을 둘러싼 좌익분열, 합작운동에 대한 조공의 반대, 좌익분열을 목적으로 한 미군정의 합작지지 등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미군정은 온건좌익을 박헌영의 조공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했지만, 온건좌익으로서는 박헌영세력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절연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주14)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익내의 합작파는 조공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조공의 참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좌익의 분열이 확실해질 때를 기다려온 민주의원은 8월 22일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익대표단 명의로 반민족적·비애국적 분자를 제외하고 진정한 좌익측 지도자와 제휴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 박헌영일파를 제외한 온건좌파와 합작하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8월 26일 우익대표로 김규식, 원세훈, 안재홍, 최동오, 김붕준이, 좌익측에서는 여운형, 정노식, 장건상, 박건웅, 이지택, 강순택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좌익의 대표였던 민전이 좌우합작운동을 부정한 상태에서는 여운형 등은 좌익의 공식 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좌익내부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남한좌익 3당합동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 발표되었고, 9월 4일 박헌영계열과 인민당의 47인파, 신민당의 합당지지파들이 모여 3당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합당을 전격 결정, 남조선노동당 결성을 공포하였다. 여운형과 백남운은 즉각 합당결정을 반대하였는데 조공내의 합당에 반대하는 대회파를 중심으로 사회노동당 구성이 논의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주15)

9월 9일 김규식은 우선 남한에서만이라도 좌우합작이 필요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후 수차에 걸쳐 합작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조공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좌우합작 추진은 여운형의 의도와 배치되었다. 민전은 9월 14일, 16일, 18일, 19일, 20일 등 5차례나 의장단회의를 열고 합작문제, 합당문제, 좌익지도자 검거령 문제 등을 토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여운형, 장건상, 백남운은 합작지지를 주장했으나 홍남표, 허헌은 박헌영과 이강국의 체포령 취소, 정간된 좌익신문 관계자의 석방과 정간 해제, 자유언론 보장 등 세 가지가 관철되지 않으면 합작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9월 20일 하지를 방문해 세 가지 요구를 했으나 하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맞서 좌익은 9월 21일 좌우합작 5원칙과 입법기구 창설 절대반대를 천명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감행함으로써 미군정과 전면적으로 대결 상태로 들어갔다.(주16)

좌익의 분열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들어갔다고 판단한 미군정은 9월 23일 좌우합작위원회 회의에 과도입법기구안을 최초로 제출했다. 입법기구 수립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은 이미 일찍부터 결정되어 있었지만 민주의원의 실패 경험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하지는 60명으로 구성될 입법기구 수립을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안해준다면 1/2의 추천권을 줄 것이라고 제안했다.(주17) 김규식은 즉각 동의했고, 여운형은 고민 끝에 동의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9월 23일 회의에서 입법기구문제를 토의해 의원총수는 90명, 1/3은 선거로, 2/3는 임명으로 선출한다는 데 합의하였으며, 9월 27일 과도입법의원 수립 요구 조항을 포함한 7가지 기본원칙에 합의하였다.(주18) 10월 7일 김규식과 여운형의 공동명의로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는데 그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며 민주주의 전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의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 방법 운영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고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주19)

좌우합작 7원칙에는 김규식, 여운형, 박건웅, 장권, 원세훈, 안재홍, 김붕준, 최동오 등이 서명했는데는 문제는 서명자의 대표성이었다. 우익의 경우는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의 대표였지만, 좌익의 여운형, 박건웅, 장건상은 개인자격 내지는 인민당 31인파 대표에 지나지 않았다. 좌우합작 7원칙은 우익이 동의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입법의원 수립이라는 미군정의 요구와 민전 5원칙에서 조공이 주장한 토지개혁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려 한 절충안이었다.(주20) 내용적으로 보면 7원칙은 중간파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상급의 원칙들을 담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혁명적 방식이 아닌 개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주21)

7원칙이 발표되면서 그동안 좌익이 참여하지 않아서 난관에 빠졌던 좌우합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군정이 계획하고 있던, 그러나 좌익이 단독정부수립안이라고 반대하고 있던 입법기구 문제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주22)

좌우합작 7원칙 발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46.10.8.자 기사
좌우합작 7원칙 발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46.10.8.자 기사
좌우합작운동의 한 주축이었던 여운형(한겨레 1991.12.29)
좌우합작운동의 한 주축이었던 여운형(한겨레 1991.12.29)

좌우합작운동의 좌초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의 합작7원칙은 남한 정계를 양분하고 있던 공산당과 한민당 모두에 의해 거부되었다. 조공의 박헌영은 7원칙이 단정을 향산 입법기구 수립이라고 비판했고, 한민당은 유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국가의 재정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보수적이고 지주적인’ 한민당의 유상분여안에 반발한 원세훈, 송남헌, 이순택, 김약수 등의 탈당이 10월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토지문제를 중심으로 한 한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의원은 합작7원칙을 통과시켰고, 한독당과 김구 또한 이를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며 “민주국가 완성에 타당한 조건”으로 전면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비상국민회의는 조소앙·유림 등의 반대로 합작7원칙을 거부하였다. 이승만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작운동의 효력이 의문시 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주23)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하지는 10월 8일 성명을 통해 즉각 지지를 표명했고, 10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공포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 7원칙 가운데 오직 입법의원 구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안을 검토한 뒤 90명으로 대의원수를 조정했고, 합작위원회에 의한 관선의원 추천, 친일파 규정 등을 삽입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입법기구 수립의 전제조건으로 정치범 석방, 현 경찰행정기구의 전면적 개혁, 친일파 숙청 등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고 미군정은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가 정한 친일파 규정을 크게 완화하였고, 교묘한 방식으로 합작위원회의 활동을 입법의원 창출을 위한 것으로만 몰아갔다. 여운형은 이러한 미군정의 행위에 반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발을 뺐다.(주24)

1946년 10월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영남지역 인민항쟁이 터지자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 대표들과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를 구성, 수습책을 모색하였다. 조미위원회에서 합작위원회 대표들은 정치범 석방, 경찰기구의 개혁, 친일파 숙청 등을 요구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찰개혁이 핵심이었다. 당시 군정관리 버치는 조병옥과 장택상을 몇 번이라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언급했으며,(주25) 조미위원회에서는 두 사람에 대해 해임건의가 발의되어 장택상은 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하지는 이를 거부하였고 경찰력을 강화하기 위해 3억원의 추가예산을 승인하는 등(주26) 노골적인 좌익탄압과 인민에 대한 억압정책을 폈다.

그럼에도 미군정은 중도우익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를 활용, 입법기구 수립을 공식화하였고,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 남반부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강행하였다. ‘10월 항쟁’의 폭풍 속에서 선거가 치러지면 좌익은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노린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선의원 선거 결과는 한민당·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세력의 산사태’로 귀결되었다. 한민당 12명,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17명, 김구의 한독당 4명, 인민위원회 2명, 무소속 15명이 당선되었다. 김규식, 원세훈, 최동오, 안재홍, 김붕준 등 합작위원회 우익측 대표와 버치 등 6인에 의해 선출된 관선의원은 좌익 10명, 중도좌익 7명, 중도우익 19명, 우익 9명으로 분류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온건한 인물들로 평가되었다. 결국 “하지가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만 선출된 것이었다.(주27)

미군정은 1946년 12월 12일 입법의원을 개원함으로써 형식적으로 1946년 4월 이후 계속 추진한 정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중도파를 기반으로 한 지지기반의 창출과 함께 개혁을 성공시켜 소련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선거 과정에서 극우파인 한민당과 이승만의 독촉국민회가 득세한 반면, 10월 인민항쟁 와중에서 좌익은 철저히 배제되고 중도파도 고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김규식을 비롯한 온건중도우파세력은 선거에서는 실패했지만 좌우합작위원회와 관선의원을 매개로 일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주28)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은 7원칙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미소공위 재개투쟁을 벌임으로써 조공을 좌우합작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미군정의 조공 배제 공작과 입법의원 수립 전술, 조공의 신전술 선택과 좌우합작 불참 등으로 현실적인 입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입지가 없어진 여운형은 입법의원을 전면 부정하였고,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애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1946년 10월 중순 이후 여운형과 백남운을 중심으로 한 온건좌파 세력은 입법기구 문제, 좌익내부 분열과 그에 따른 사로당 문제 등으로 좌익대표성을 상실, 좌우합작에서 멀어졌으며, 여운형은 12월 4일에, 백남운은 12월 7일에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와도 완전히 결별했다. 여운형과 백남운의 이탈로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은 사실상 끝났고, 좌우합작운동 또한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주29)

1947년 이후 좌우합작운동, 좌우를 포함한 중도세력이 새로운 정치적 방향을 찾아야 할 상황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좌우합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김구 관련 기사 등이 실린 조선일보 1946.10.16.자 보도.
좌우합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김구 관련 기사 등이 실린 조선일보 1946.10.16.자 보도.
좌우합작운동에서 여운형과 더불어 좌익측의 중요인물이었던 백남운(한겨레 1991.10.18)
좌우합작운동에서 여운형과 더불어 좌익측의 중요인물이었던 백남운(한겨레 1991.10.18)
1947년 12월 좌우합작 운동을 이끌었던 좌우합작위원회의 공식 해산을 기념해 주요 인사들의 기념촬영. 첫째줄 왼쪽부터 강순, 신숙, 여운홍, 안재홍, 김붕준, 김규식, 김성규, 원세훈, 오하영, 최동오, 이극로. 둘째줄 왼쪽부터 최석창, 김학배, 김시현, 이명하, 강원룡, 박명환, 신기언, 장자일, 정이형, 박건웅, 박승환, 송남헌. 셋째줄 왼쪽부터 권태양, 정종철, 김동석. 그리고 1947년 7월 17일 암살당한 여운형의 사진이 오른쪽 끝에 별도로 추가되어 있다.
1947년 12월 좌우합작 운동을 이끌었던 좌우합작위원회의 공식 해산을 기념해 주요 인사들의 기념촬영. 첫째줄 왼쪽부터 강순, 신숙, 여운홍, 안재홍, 김붕준, 김규식, 김성규, 원세훈, 오하영, 최동오, 이극로. 둘째줄 왼쪽부터 최석창, 김학배, 김시현, 이명하, 강원룡, 박명환, 신기언, 장자일, 정이형, 박건웅, 박승환, 송남헌. 셋째줄 왼쪽부터 권태양, 정종철, 김동석. 그리고 1947년 7월 17일 암살당한 여운형의 사진이 오른쪽 끝에 별도로 추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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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병준, 앞의 글, 264〜265쪽

2) 박헌영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는 1946년 10월 11일 전에 5차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1차: 1945년 10월 8〜9일, 2차: 1945년 12월 29일〜1946년 1월 1일, 3차: 1946년 4월 3〜6일, 4차: 1945년 6월 27일〜7월 12일, 5차: 1946년 7월 16〜22일 등이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박병엽/유영구·정창현,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15〜104쪽 참조

3) 1차: 1946년 2월 11일 전후, 2차: 1946년 4월 19〜25일, 3차: 1946년 7월 29일 전후, 4차: 1946년 9월 23〜30일, 5차: 1946년 12월 28일 전후 등. 자세한 내용은 박병엽/유영구·정창현,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107〜241쪽 참조

4) 박병엽/유영구·정창현, 위의 책, 137〜201쪽 참조

5)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120〜184쪽

6)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269〜276쪽

7) 정병준, 위의 글, 270〜271쪽

8) 김남식, 박헌영·남로당의 통일전선론, 역사비평 1988년 봄, 108쪽

9) 정병준, 앞의 글, 272쪽

10) 송남헌, 『해방3년사 Ⅱ』, 까치, 1985, 373〜374쪽

11) 송남헌, 위의 책, 374쪽

12)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06〜109쪽

13) 김남식, 『남로당 연구1』, 돌베개, 1984, 237쪽

14) 정병준, 앞의 글, 277쪽

15) 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국내정치(1943〜1948), 연세대 석사논문, 1986, 101〜102쪽

16) 정병준, 앞의 글, 279〜280쪽

17)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11쪽

18) 정병준, 앞의 글, 280〜283쪽

19) 송남헌, 위의 책, 379쪽

20) 이완범, 위의 논문, 102〜103쪽

21) 정병준, 앞의 글, 285〜288쪽

22) 도진순, 위의 책, 111〜112쪽

23) 정병준, 앞의 글, 289〜290쪽

24) 정병준, 앞의 글, 290〜292쪽

25) 리차드 로빈슨/ 정미옥 옮김, 『미국의 배반』, 과학과사상, 1988, 35쪽

26) 리차드 로빈슨, 위의 책, 135쪽;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93〜94쪽

27) 정병준, 앞의 글, 293〜294쪽

28) 도진순, 앞의 책, 117쪽

29) 정병준, 앞의 글, 295〜296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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