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제1차 미소공위 결렬과 좌우합작운동 시작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간 뒤 남한에는 세 가지 주요한 정치 현상이 나타났다. 

첫째 충칭임시정부 추대활동을 폈던 일부극우세력은 테러활동과 반소반공 선전을 강화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대표적인데 한민당과 이승만 측근 등 일부 우익세력을 제외하고는 매우 비판적이었기에 한동안 잠복하였으나 1946년 10월 재차 부활, 유엔 제의 등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띠고 다시 등장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초부터 1947년 4월까지 약 4개월간 미국을 방문해 소련과의 협조노선을 폐기하고 남한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동서냉전이 본격화하였고, 그해 8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국은 단독정부수립으로 방향을 확고히 결정, 추진하였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단정노선이 등장하는 등 분단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단정노선이 등장하는 등 분단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둘째, 미군정은 공산당 등 좌익세력에 대한 분열·탄압 정책을 강화하였다. 미군정은 중도좌파를 좌우합작에 끌어들여 좌익의 분열을 꾀함과 동시에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 약화시키고자 했다. 좌익 중심의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미군정의 탄압정책에 대응하여 신전술을 채택, 좌경화하였다. 미군정의 좌익탄압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정판사 사건과 국대안 파동 등이 발생하였고, 신전술 채택이라는 좌경노선과 미군정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결합하여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으로 폭발했다. 셋째 좌우연합을 통한 통일전선으로 통일국가수립을 지향했던 세력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와 단정수립운동을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을 가져올 심각한 민족적 위기로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주1) 

앞의 두 내용은 뒤에 따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세 번째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미소공위가 휴회된 뒤 본격화한 좌우합작 움직임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최초의 접촉은 1946년 5월 25일 김규식(민주의원), 원세훈(한민당), 여운형(인민당-민전), 황진남(인민당)의 4인 회동으로 볼 수 있다. 이 자리에는 미군정측의 버치 중위와 아펜젤러(구한말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다른 인물)가 함께 참석했다. 이 모임은 공식적 성격이 아닌 ‘개인적 사회견’으로 규정되었고, 형식적으로는 민주의원측과 민전측의 만남으로 알려졌다. 이 회동과 관련, 미군정은 민주의원 내의 중도우파와 민전 내의 중도좌파의 합작을 의도하고 있었다. 반면 당시 남한의 정치상황은 합작의 구도를 우익을 대표하는 민주의원과 좌익을 대표하는 민전의 합작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주2)  

첫 회동은 즉시독립과 탁치문제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무산되었고, 6월 14일 2차 회동이 있었다. 이때 여운형은 허헌을, 김규식은 원세훈을 동반했다. 2차 회동을 통해 좌우합작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핵심쟁점은 신탁통치 문제라는 것이 재차 확인되었다. 6월 22일 다시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의 4자회동이 열렸고, 회담 후 이들은 미소공위 미국측 수석대표 아놀드 소장과 버치중위를 만나 담화를 진행했다. 6월 26일 여운형이 김규식의 자택을 방문해 합작과 관련한 논의를 했으며 같은 날 이승만이 김규식을 방문했다. 김규식은 다음날(6월 27일) 김원봉을 만났는데 주한미군CIC(방첩대) 보고서는 김원봉이 그 몇 주 동안 김구를 여러 차례 만났다고 기록했다. 이즈음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물밑 접촉을 통해 좌우합작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주3)

좌우합작의 중심인물이었던 여운형, 김규식, 하지 미군사령관. 좌우합작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랐으나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바탕으로 남북합작, 남북연합을 이루겠다는 등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는 좌익 분열이 주목적이었다.
좌우합작의 중심인물이었던 여운형, 김규식, 하지 미군사령관. 좌우합작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랐으나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바탕으로 남북합작, 남북연합을 이루겠다는 등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는 좌익 분열이 주목적이었다.

6월 30일 미군사령관 하지가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노력에 대해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하면서 합작운동이 급진전되기 시작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해 단정으로 한발 더 나아가려던 이승만이 7월 1일 합작지지를 선언하였고, 같은 날 아놀드 군정장관도 합작지지를 선언했다. 7월 2일에는 한민당이 합작지지 선언을 한 데 이어 좌익도 미소공위를 재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찬성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재미한족회의 지지성명(7월 4일), 좌우합작 추진을 위한 7개정당 대표의 중앙정우연락협의회 구성(7월 8일), 배성룡·도진호 등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촉성회의 지지성명 발표(7월 14일) 등으로 이어지면서 미소공위 재개와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열망이 확산되었다.(주4)   

그러나 좌우합작에 대한 좌우의 목적이나 의도, 입장과 원칙이 달랐고, 좌우합작을 적극 지원한 미군정의 의도 또한 좌익과는 이해관계가 달랐기에 충돌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좌우합작을 주도한 중도우익은 온건좌파를 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켜 우익과 합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중도좌익은 운건우파를 극우파로부터 분리시켜(현실적으로는 한민당·국민당·임정 안의 ‘진보파’를 끌어들이는) 좌익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또한 우익은 미소공위 재개, 신탁통치 반대, 공산당 일당독재 반대, 상호배격·중상 금지 등을, 좌익은 미소공위 대개, 3상회담 총체적 지지, 친일파·민족반역자 배제, 테러중지·테러단체 해산 등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미소공위 재개와 테러행위 근절 외에는 접점이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좌우익이 자신의 정치적·계급적 입장을 유보한 상태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좌우합작을 주도한 여운형과 김규식이 탁치문제를 두고 유연한 입장을 견지하며 임시정부 수립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추진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 4당코뮤니케를 결정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민당의 원세훈·김병로와 국민당의 안재홍, 옵저버였던 김원봉·장건상 등이 좌우익 대표로 참여했던 것도 좌우합작이 시작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였다.(주5)

미국의 대한정책과 좌우합작 지원 목적

그럼 미국은 어떤 의도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을까? 이를 위해서는 1946년 전반기 미국의 대한정책을 둘러싼 논의와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무성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는 대한정책을 둘러싸고 1945년 9월 이후 내내 갈등을 빚었다. 미국무성은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맥아더 사령부와 한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38선을 반소반공장벽으로 만들고자 했다. 모스크바 3상회담 전후에 이같은 견해차와 갈등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3상회담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국무성의 주도 아래 미군정과의 연관성 속에서 대한정책이 조율되어 어느 정도 접점을 찾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유도하여 국공 사이에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도 일정하게 작용하여 미국무성은 2월 말 맥아더사령부에 대한정책에 대한 지침을 보냈다. 거기에는 “김구 일파와도 연결되지 않았으면서 소련의 조종을 받은 세력과도 연결되지 않은 그러한 지도자를 남한에서 물색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는 권고가 들어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국무성 입장에서 정치지도자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이 반영되어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물러나고 김규식이 의장대행으로 앉았다. 안재홍은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한 때부터 좌우합작의 정치적 배아가 싹튼 것으로 이해하였다.(주6) 미국이 좌우합작을 통해 중도파를 육성하고 정치중심으로 삼으려는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실제로 1946년 5월 초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워싱턴 당국은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였다. 5월 22일 번즈 미국무장관을 비롯해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정책담당 책임자들이 한국 상황을 논의하면서 반탁운동의 총수인 김구 등을 배제할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무성 점령지구담당차관보 힐드링(J. H. Hildring)은 “그동안 우리가 김구를 지도자로 선택했던 것은 적을 동지로 알고 지지해온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를 계속 지지할 경우 장차 미국의 입장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정책변화는 6월 6일 힐드링이 육군성 작전처에 보낸 대한정책 각서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은 모스크바 결의를 엄격히 준수할 것이며, 유명무실하게 된 민주의원을 해체하고 광범한 선거로 입법자문기구와 과도정부를 세워야 한다면서 ‘늙은 망명객들을 거세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미국이 유리한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국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적극적인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당면정책이며, “그러기 위해서 미군정은 부득이 해방 후 귀국한 정치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정계 은퇴를 유도하고, 가급적 일본통치기간 중 한국에 남아 있던 사람 가운데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간단히 말해 미군정에 대해 극우세력을 지지한 정책을 거두고 중간노선의 정치인을 중심으로 정치적 자문회의(입법기관)를 구성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조직하라고 충고한 것이었다.(주7) 

미국의 좌우합작 지원의 일관된 목표가 과도입법기구의 설치나 과도정부 수립이었던 것은 하지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인 1947년 7월 22일 주한미군사령부 군사실은 ‘여운형의 죽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정보부로 보냈는데, 좌우합작에 대한 미국의 목표를 첫째, 이승만과 김구 계열에 대한 의존의 점진적 철회, 둘째, 중도파 수립, 셋째, 과도입법기구 설치로 정리했다. 그런데 여기에 하지가 의미심장한 논평을 달았다. 그는 “6쪽은 사실과 다르네. 우리가 우파와 노는 것은 사실은 우파를 리버럴에게 접근하게 만들고, 좌파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이네”라고 연필로 휘갈겨 쓴 뒤 해당 부분의 ‘이승만과 김구 계열에 대한 의존의 점진적 철회’를 ‘한국인의 자체 합작 노력에 대한 의존의 포기’로, 또 ‘중도파 수립’을 ‘중도파 수립을 압박’으로 정정했다. 이 논평에서 말하는 리버럴은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를, 좌파는 조선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은 온건좌파, 특히 그 대표자인 여운형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하지는 그 편지에서 그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음을 솔직하게 토로하였는데, 하지가 한국인들에게 가져다주려고 했던 것은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적 통합의 성과가 아니라 과도입법기구의 설치나 과도정부 수립과 같은 미군정의 정책수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는 이승만의 반소캠페인을 자제시켜서 더 이상 미소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 단독정부 수립 발언 역시 자제시켜서 미군정이 추진하려는 입법기구 내지 과도정부 수립이 단정 수립 기도로 공격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미소공위가 휴회되긴 했지만 최종적으로 결렬된 것은 아니었고, 1차 미소공위 결렬 책임을 둘러싼 공방에서 미군정도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주8)

하지가 굿펠우에게 보낸 편지(1946.6.23.)의 일부. 하지는 이 편지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치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자료=국사편찬위원회간행 ‘대한민국사 자료집’ 28권/ 사진=한겨레 2019.8.17.)
하지가 굿펠우에게 보낸 편지(1946.6.23.)의 일부. 하지는 이 편지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치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자료=국사편찬위원회간행 ‘대한민국사 자료집’ 28권/ 사진=한겨레 2019.8.17.)
하지가 굿펠우에게 보낸 편지(1946.6.23.)의 일부(자료=국사편찬위원회간행 ‘대한민국사 자료집’ 28권/ 사진=한겨레 2019.8.17.)
하지가 굿펠우에게 보낸 편지(1946.6.23.)의 일부(자료=국사편찬위원회간행 ‘대한민국사 자료집’ 28권/ 사진=한겨레 2019.8.17.)

미군정의 중도세력 지원전략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대응

미군정을 중심으로 대한정책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 미군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와 그의 보좌관들은 김구의 충칭임시정부 세력이 다루기도 힘들고 정치력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1946년 5, 6월경 하지는 이승만에 대해서도 불신감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은 이승만이 과대망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는 이승만의 정치고문 노릇을 하다가 광산스캔들로 인해 5월 하순 미국으로 쫓겨났던 자신의 정치고문이기도 했던 굿펠로우에게 보낸 1946년 6월 2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남한에서는 정치적 무한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선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진행 중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후회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들은 남에서 50 대 50, 북에서 100 대 0, 전체적으로 66과 2/3 대 33과 1/3을 원한다. 여운형과 허헌이 김규식과 회의를 하며 조금씩 진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놀랄 만한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약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을 폐기한다면 이곳의 꼬마들에게 내가 생각하던 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민전은 약화되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고, 그들의 노선을 조금 바꾸고 있는 중이다. (중략)

나는 이승만의 반소 캠페인을 강하게 단속해왔다. 그 노인네는 불행하게도 즉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을 축출하기를 원한다고 너무 많이 발언해서 우익은 물론 좌익 계열의 신문들까지 모두 이를 보도하고 있다. 또 그가 미국에 무역회사를 차려서 한국과의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 보도에는 당신도 등장한다. 다른 모든 한국인들처럼 그는 말이 너무 많고, 반대로 생각이 별로 없다. 내가 제안하는 요점은 당신은 이곳에서의 어떠한 금전적 이해관계에 관해서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널드와 그의 동료들이 정치고문 활동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만나고 있는데, 그놈들을 믿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비소비에트 좌파를 끌어내어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선을 붕괴시키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지는 것을 우려한다. 번스가 경제 전문가들을 모집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간다. 데이어도 미소공위를 재개하려는 우리의 처방이 먹히지 않으면 워싱턴으로 갈 것이다.

스미스가 계속 이승만을 감시 중이다. 나는 그 늙은 악당을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와 두어 차례 격렬한 언쟁을 나누었다. 그와의 만남은 하느님이 보낸 천사들과 밤새도록 씨름하는 성경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하략)”(주9)

하지는 이후에도 이승만에 대한 지원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도 이 무렵 김구뿐만 아니라 이승만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고 있었고,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지도부는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려면 다른 대안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6월 6일 미국무성의 정책각서가 전달되기 전부터 미군정에서는 버치 중위를 중심으로 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의 정치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던 버치중위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박사학위 소지자로 잠시 개업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엘리트였다. 그는 1945년 12월 초 소위로 한국에 와서 하지의 연설담당으로 재능을 인정받아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주10) 

버치는 처음 여운형을 좌익에서 분리시키는 공작에 한정하여 활동했으나 성과가 없자 이후 좌우합작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온건좌익과 조선공산당 등 급진좌익을 분리시켜 좌익을 분열시키고 좌우익의 온건파들로써 좌우합작을 이뤄내고자 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의도는 좌우합작을 통해 여운형 등 운건좌익을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켜 내어 미군정이 설치할 자문기구인 입법기구(입법의원)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같은 공작의도를 간파한 좌익은 좌우합작과 입법기구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입법기구를 반대한다는 전제 위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고 여운형 또한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정판사 위폐사건 보도(동아일보 1946.5.16.). ‘정판사 위폐 사건’ 등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자 박헌영은 미군에 대한 강경대응 방침을 결정한 ‘신전술’을 들고 나왔다. 
정판사 위폐사건 보도(동아일보 1946.5.16.). ‘정판사 위폐 사건’ 등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자 박헌영은 미군에 대한 강경대응 방침을 결정한 ‘신전술’을 들고 나왔다. 

미국이 중도세력을 부상시키려 한 것은 중도세력을 친미세력으로 확보해 3상회의 결정을 미국의 주도 아래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측이 이승만과 김구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라도 소련측과 협의하여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좌우합작을 지원함으로써 좌우중도파 세력을 중심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하고, 나아가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미국이 주도하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주11)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걸림돌이 존재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혁명세력인 조선공산당의 입장과 태도였다.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면 좌우합작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1차 미소공위 이후 미군정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온건 좌익을 분리시켜 공산당을 고립화하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미군정과의 관계를 일면투쟁하면서도 일면적으로는 좌우합작을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유용한 전술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주12) 

좌우합작과 미소공위가 성공한다는 것은 친일파와 함께 이승만과 김구가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공산당으로서는 좌우합작을 성공시키기 위한 대응 전략이 필요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김남식은 조선공산당이 여운형과 허헌의 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뒷받침해주면서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통일전선 형성을 시도했더라면, 당시 3당합당으로 인한 좌익의 분열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량도 보호, 축적할 수 있었고, 김규식을 비롯한 임정세력 대부분과 한민당의 단정 반대파까지도 포섭함으로써 이승만·한민당의 극우세력만을 고립시킬 수 있는 전망도 있었다고 분석하였다.(주13)  

김규식과 여운형의 합작노선

좌우합작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주도한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대한 구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알았던 오래된 인연을 갖고 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할 때 그 일을 실질적으로 추진한 것은 신한청년당 대표였던 여운형이었다. 김규식은 상하이 시절 여운형과 교류하였고, 소련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도 여운형, 원세훈, 박헌영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체포, 국내로 압송되어 3년간 감옥살이 후에는 국내에서 활동해 계속해서 중국에서 활동했던 김규식과 연계될 수 없었으나 독립운동 시절의 신뢰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김규식의 좌우합작에 대한 입장이 체계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그의 독립운동 시기 활동과 그 후의 활동을 통해 그의 사고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규식은 해방 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1935년 좌우합작 정당이라 할 수 있는 민족혁명당, 1939년 좌우연합전선조직인 준국연합진선협회, 충칭임시정부 내부의 좌우합작(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민족혁명당의 임시의정원 참가, 1944년 좌우합작 정부 구성 등) 등을 몸소 경험하고 실천하였다. 또한 1941년 제정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삼균주의는 토지국유제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내포하고 있어서 이념적으로도 좌우합작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방 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때 민주의원 부의장으로서 반탁입장을 견지했지만, 삼상회의 결정과 관련해서는 탁치는 반대하되 임시정부 수립은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결국 김규식은 반탁이냐 찬탁이냐 보다는 미소공위를 재개, 우선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가 강대국과 교섭해 탁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주14)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규식(사진=국사편찬위원회). 김규식은 온건우파를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합작을 이룬다는 생각이었다.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규식(사진=국사편찬위원회). 김규식은 온건우파를 중심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합작을 이룬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김규식은 남한 내에서만 좌우합작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남북합작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1946년 3월 15일 김규식은 버치중위와의 인터뷰에서 남북 좌우익 사상을 모두 대표하는 단일한 조선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며 이를 돕기 위해 제정파를 대표하는 연락위원회 내지 협의위원회가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규식의 이 같은 정치구상은 미군정측의 전폭적인 지지와 권위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나아가 이승만의 권유(주15)도 작용한 결과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부주석 및 민족혁명당 주석(주16)으로 활동했지만 명망성에 비해 독자적 세력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는데, 좌우합작의 필요성과 함께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기반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주17)

여운형의 경우는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 발표되었다. 6월 11일 여운형은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국내외 정세로 미루어 볼 때 좌우익이 단독으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기 때문에 ‘좌우익을 망라한 연합정권’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먼저 통일정부를 수립해 국회를 구성한 후에 투표를 통해서 각 당의 정책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이 단순히 미소공위 재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좌우연합정부, 남북통합정부 성격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이를 위해 제1단계로 남한 각정당·단체 연석협의체 구성(개인자격) → 제2단계로 남한 각정당·단체 연석협의체로 발전 → 북한과의 협상 → 제3단계로 좌우·남북협의체로 발전 → 소련과 협상으로 공위재개 → 제4단계로 공위와 협의해 임시정부(좌우연립 과도정권) 수립이라는 발전과정을 구상하였다.(주18) 

1947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온 서재필과 함께한 김규식과 여운형. 서재필이 미국이 돌아간 뒤 얼마 후 여운형은 암살되고 말았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남한 내에서 합작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연합, 남북합작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1947년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온 서재필과 함께한 김규식과 여운형. 서재필이 미국이 돌아간 뒤 얼마 후 여운형은 암살되고 말았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남한 내에서 합작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연합, 남북합작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여운형은 1946년 7월 말 박헌영이 좌우합작 5원칙을 제출하여 합작운동에 제동을 걸 무렵 개인메모를 통해 ‘인민당의 전술계획’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우리는 남조선에서 합작추진 우익을 반대하는 반동적 요소를 좌우익 합작과정에서 평화적 전투를 통해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소극적인 반탁진영이 반동적 지도자와 미국의 영향을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켜야 한다.
2. 우리는 공위 휴회 전에 미국대표가 그들의 잘못된 관점을 수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3. 우리는 북조선과 남조선의 통일이라는 관점하에서 우익이 반북조선적 견해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북조선에서 수행한 모든 민주건설들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주19)

이를 통해 여운형은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통해서 온건좌파를 조선공산당과 분리시키려 했던 정책을 역으로 온건우파에 적용시켜 온건우파를 극우파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중도우파를 극우파와 미군정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조선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미소공위 재개를 전제조건으로 좌우합작 참여를 사전에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은 좌우합작 참여가 민전의 방침이었다고 밝혔으나 조공은 이를 부인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 회의 소식(동아일보, 1946.7.26일자)
좌우합작위원회 회의 소식(동아일보, 1946.7.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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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387쪽

2) 정병준, 1946〜1947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 한국사론29(1993), 252쪽

3) 정병준, 위의 글, 252〜253쪽

4) 정병준, 위의 글, 254쪽

5) 정병준, 위의 글, 255〜260쪽

6) 서중석, 위의 책, 393〜395쪽

7) 서중석, 위의 책, 395〜396쪽

8) 정용욱, “하지와 이승만 좌우합작 등 놓고 ’격렬히 언쟁‘하다”, 한겨레 2019.8.17. 

9) ‘하지가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6년 6월23일), 대한민국사자료집 28권(국사편찬위 간행), 115쪽; 정용욱, “하지와 이승만 좌우합작 등 놓고 ’격렬히 언쟁‘하다”, 한겨레 2019.8.17. 재인용

10) 임홍빈, 이승만·김구·하지(상), 신동아 1983년 11월호, 212쪽

11) 서중석, 위의 책, 397〜398쪽

12) 서중석, 위의 책, 398〜400쪽

13) 김남식, 박헌영·남로당의 통일전선론, 역사비평 1988년 봄, 108쪽

14) 정병준, 앞의 글, 260〜261쪽

15) 이승만은 좌우합작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정치적 기반이 강한 김구보다는 김규식이 나서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고, 50만원의 지원자금을 내놓기도 했다. 이승만은 6월 29일 결성된 민족통일총본부를 장악해, 좌우합작까지 통제하려 했으나 그의 조직은 이승만 측근과 한민당만 참여한 우익일부 조직에 불과했고, ‘민족분열총본부’라고 비난받았다.(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02〜103쪽)

16) 김규식은 1946년 2월 18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주석직을 사임하고 당을 탈퇴했다.

17) 정병준, 앞의 글, 261쪽

18) 정병준, 앞의 글, 261〜262쪽

19) 이 메모는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시 여운형의 손가방에서 발견된 서신’에 포함되어 있었다.(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263〜264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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