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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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두 원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 존 롤스, 『정의론』에서  


 나는 학비가 무료이고 졸업하면 9급 철도공무원으로 취업이 보장되는 모 국립고등학교에 다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지금 그런 고등학교가 있다면 ‘꿈의 학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학교에 다녔던 많은 학생들이 행복해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대학에 보내달라고 자살을 시도하던 학생도 있었다.

 나도 대학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나는 좌절의 고교 시절을 보내고 취직을 했다. 그러다 2년 뒤 운 좋게 대학에 가게 되어 졸업 후 공립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내 안에서 꿈이 꿈틀거렸다. ‘내 인생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나는 꼼지락거리는 ‘애벌레’가 되어 몸이 가는 대로 기어 다녔다.

 그러다 나는 내 안의 ‘나비’를 보았다. 인간은 애벌레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나비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랜 방황 끝에 나는 날갯짓을 시도하는 나비가 되었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 나는 내 인생을 만족한다. 애벌레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꿈을 찾아 꼼지락 거리며 살았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비록 세상에 내 놓을 게 별로 없어도, 나는 내 삶이 좋다. 꿈이 있는 소박한 삶. 나는 별로 부족한 게 없는 삶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를 요즘 젊은이들은 뭐라 그럴까? ‘배부른 소리’한다고 할지 모른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꿀 빠는 세대’였으니까. 그때는 택시 기사가 교사보다 수입이 많았으니까. 정기예금이자도 10여%가 되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알 것이다.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인간은 꿈을 꾸고 살아야 하는 고귀한 존재라는 걸.

 꿈을 꾸지 않고 살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울과 권태가 온다. 고뇌보다 힘든 게 권태다. 복지국가의 노인 자살률이 높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면 과감히 말한다. “꿈이 가라는 곳으로 가! 그러면 먹고 사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게 되어있어! 진정한 행복이 네게 올 거야!” 

 미국의 정치철학자 롤스의 ‘정의론’을 접하며 마음이 착잡하다. 그는 이 시대의 정의를 분배에서 찾는다. 그는 묻는다. “모든 인간이 자신을 모르는 상태라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상상할까?” 

 그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태어날 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물고 나오니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운이 나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도 절차적 정의를 통해 공정한 기회를 주고, 그들에 대한 최우선 배려의 원칙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일찍이 ‘분배의 정의’를 말했다. 아테네는 그 당시 어떤 사회였나? 시민이 ‘정치적 존재’로서 도시국가를 이끌어가는 직접민주주의 사회였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자본 독재’라는 말이 나오듯이, 실질적으로 자본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지 않는가? 이런 사회에서 분배의 정의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사회도 민주 개혁세력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배의 정의를 내세웠다. 하지만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민주정부보다 힘이 센 자본가를 위시한 기득권 세력이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있는 한, 분배의 정의는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서울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버리면 분배의 정의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집값이 솟구쳐 오르는 건 전체 사회의 문제다. 집값 안정은 전국을 균형 있게 발전하면 간단히 해결되지만 민주정부 힘만으로 가능할까? 

 서울의 명문사립대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지방의 거점국립대들보다 많다고 한다. 민주정부의 힘만으로 거대한 명문사립대의 인맥을 누를 수 없나 보다. 하물며 대기업의 본사나 국가의 주요 기관, 서울의 명문대들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가능할까?  

 지금의 선거제도만 봐도 진보세력이 정치 세력화하기는 힘들다. 진보 세력이 우리 사회에 꽤 많은데, 진보 국회의원은 몇 명인가? 진보 세력이 세력만큼 정치권력을 갖게 되면 분배를 위시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될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취약한 공공 의료로 인해 코로나 19로 사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롤스의 정의론은 이 난국을 타개하는데 어떤 지혜를 주고 있는가?

 미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세력은 자본가, 백인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이다. 진보, 소수 인종이 정치권력을 갖지 못한 현 상황에서 분배의 정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의로운 사회는 적어도 아테네 정도의 민주주의 사회가 될 때 가능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인류의 스승도 나오고, 디오게네스 같은 무소유의 철인도 나온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일반 시민들도 고민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돈이 최고인 사회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정의로운 사회를 말한다는 건, 결국 자본가의 지배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에 공정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흙수저들에게 필요한 건 정치적 발언이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主)가 되는 사회다. 흙수저들이 정치세력화를 꿈꿀 때 분배의 정의는 자연스레 이루어질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불티나게 팔리면서도 흜수저들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바람이 불지 않는 건, 슬픈 일이다.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모든 사람이 위대한 꿈을 꾸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인간은 ‘보리떡 하나로도 제우스와 행복을 겨룰 수 있는 존재(에피쿠로스)’인 것이다.

 다가오는 대선, 총선에서는 기본소득제만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대통령, 국회의원을 뽑았으면 좋겠다. 어느 다른 동물도 고민하지 않는 먹고 사는 문제만을 일생동안 고민하며 사는 ‘헬조선’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는가?  

 시인 이백은 달빛 아래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최고의 행복에 이른다. 


 저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도 내 뒤만 따라다니나,
 잠시 그대들을 벗 삼아,
 봄밤을 즐기지 않을 수 없으리.

 내가 노래를 하면, 달은 서성거리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 추네.
 이렇게 함께 놀다가, 취하면 흩어지네.
 덧없이 논 우리 영원히 친구 맺었다가,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세. 

                                                                             - 이백, 《월하독작(月下獨酌)》부분 


 술 몇 잔에 행복의 극치에 이르는 사람이 시인뿐일까?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에게나 ‘시인’이 살 것이다. 물질의 풍요에 짓눌려 한평생 고뇌와 우울과 권태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들 안의 ‘시인’을 깨우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 시인이었던 원시시대가 있었는데, 시원의 고향을 잃어버린 이 시대. 모두 애벌레가 되어 서로 탑을 쌓으며 꼼지락꼼지락 아웅다웅 올라가다 대다수는 떨어지고 마는 생지옥이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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