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 ‎
‎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사는 동안 이렇게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서 편안하게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성인 나를 그저 나로 존재하게끔 하고, 그럴 수 있도록 북돋아 주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세계에서 포근하게 보호받는 기분을 느낀다. 과장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거나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 순간에 나는 단 한 번도 의견을 묵살당한 적이 없었다.〔......〕모쒀 사회에서는 여성을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삶과 빛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여성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었다.

                                                                                        - 추 와이홍, 『어머니의 나라』에서

 

 나는 ‘그날’을 한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주말 농장에 다녀오던 날. 아내는 마트에 들르고 나는 몸이 안 좋아 마트 밖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다. 

 몸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아내한테 전화해야겠다.’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이 굳어있는 듯했다. 

 뭐라고 우물거리는 내 얼굴을 사람들은 빤히 쳐다보더니 내 몸 위아래를 흘깃 그렸다. 흙탕물이 여기저기 튀어 있는 허름한 옷. 아마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으리라. 

 다시 “몸이 안 좋아 그러니 핸드폰을 좀 빌려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공중전화를 해야겠다.’ 주머니의 500원짜리 동전을 확인하고서 오리걸음으로 간신히 걸어 공중전화기 아래까지 갔다. 한 아이가 막 전화를 끝내고 100원짜리 동전을 몇 개 갖고 가려했다. 

 “얘야, 100원짜리 동전으로 좀 바꿔줘.” 나는 앉은 자세로 손을 내밀어 500원짜리 동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흘깃 보고는 후닥닥 도망을 갔다. 

 ‘오! 이러다 죽겠구나!’ 나는 주위를 들러보았다. 그때 한 할머니가 하얀 100원짜리 동전들을 손에 쥐고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앉은 자세로 손을 쭉 뻗어 500원짜리 동전을 할머니에게 보여주며 우물거렸다.

 “할머니 100원짜리 동전 좀 바꿔주세요. 전화하게요.” 그러자 할머니는 내 손의 500원짜리 동전을 받고는 100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주셨다. 나는 그 와중에도 받지 않으려는 할머니에게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기어코 돌려드리며 울먹였다. “고맙습니다.” 간신히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는 다시 주저앉았다.

 몸이 좀 안정이 된 나는 너무나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전조였다. 며칠 뒤 잠을 자다 깊은 밤에 잠을 깼다. ‘헉! 내 몸이...... .’ 내가 죽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팔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배와 가슴 부위만 희미한 온기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일상이었다. 평온했다. ‘어떡해야 하지? 지금 아내를 깨우면 놀랄 거야. 그래 내일 새벽에 내 주검을 발견하는 게 덜 놀랄 거야.’   

 아침에 눈을 뜨고 아내와 모 대학병원으로 갔다. ‘죽을병에 걸렸나 보다. 공포가 온 몸으로 밀려왔다.’  

 나는 그날 밤에 ‘참나(Self)’를 체험한 것이다. 참나는 우주와 하나인 마음이다. 신성(神性)이다. 삶과 죽음, 나와 네가 하나인 세상이다. 영원한 우주의 춤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 공포를 느끼는 나는 ‘자아(Ego)’다. 자아는 ‘생각’을 할 때 생겨난다. 나와 네가 분리되고 삶과 죽음이 나눠지는 세상이다. ‘나’는 사실 허상이다. ‘생각’일 뿐이다. 

 인간만이 자아가 있다. 다른 동물은 없다. 그래서 동물들은 허상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실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고결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자아가 만드는 온갖 환상에 빠져 산다. 일생이 일장춘몽이다. 자아가 자신인 줄 알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간이 되고, 자아를 위해 한평생 탐욕에 빠져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은 자아를 끝없이 부추긴다. 자아를 위해 한평생 과소비를 하고 중노동을 하게 한다. 또한 우리 사회는 가부장 사회다. 남성위주의 세상이다. 

 이런 사회에 살며 질식할 듯한 고통을 받던 여성 변호사 추 와이홍은 모계사회 ‘모쒀족 마을’을 찾아간다. 그녀는 ‘오래된 미래’에서 깊은 안식처를 찾는다. 모계사회는 인류의 원초적 고향이다.        
 그 사회에서는 ‘여성을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고, 삶과 빛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여성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는다.’ 자아를 넘어 참나를 중심으로 사는 사회다.  

 지배와 착취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와는 정반대다. 생명성(참나)이 태양처럼 빛나는 사회다. 나는 그날 모계사회의 대모신(大母神)을 본 것이다. 

 모쒀족은 모두 어머니의 집에 산다. 그들은 대모신(大母神)의 아들딸로 한평생 살아간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한 평등의 세상이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사랑을 할 뿐이다. 남녀 사이에 돈이 끼어들지 않는다. 돈이 끼어들면 남녀 사이는 상품관계가 된다. 서로 상대방을 돈으로 환산한다. 언제라도 가치가 떨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래서 다들 외롭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도무지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인간관계는 우리를 항상 허기지게 한다. 우울과 권태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래서 항상 분주히 쾌락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쾌락은 일시적이다. 점점 몸과 마음은 피폐해진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나 죽지 못해 살아간다. 
 
 모쒀족 마을 사람들을 보라! 얼마나 품격 있게 사는가? 그들은 언제나 위풍당당하다. 고매한 기운이 항상 온 몸에서 풍겨 나온다. 문명사회의 왜소한 인간들과 비교해보라!  

 그래서 괴테는 말했다. “여성성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여성성은 태양이자 달이고 땅이다. 모든 생명을 낳고 주검을 가슴에 품는다. 주검을 생명으로 부활하게 한다. 
   
 타데우슈 루제비치 시인은 ‘늙은 여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한다. 


 늙은 여자들이 왔다가 간다
 인간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독재자들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에
 늙은 여자들은
 아침이면 일어나서
 고기와
 빵과
 과일을 판다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쳐다보고만 있다.

 늙은 여자들은
 죽지도 않는다.

                                    - 타데우슈 루제비치, 《노파에 대한 이야기》 부분 


 독재자들이, 남자들이 온갖 못된 짓을 해도 늙은 여자들은 자식들을 위해 고기와 빵을 팔고 청소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쳐다보고만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늙은 여자들은 죽지도 않는다.’ ‘어머니의 세상’은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