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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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만지고 우리를 찌르는 것은 그것들이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것들이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행위, 그것은 그것들의 멀어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 멀어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감각이 그들의 의미 자체이다.〔......〕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가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장 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에서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한 범인을 잡고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쯧쯧 혀를 찬다.

“배변하고 소변보는 게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한 걸까?

인간이 이성의 몸을 보려 하는 건 당연한 본능이다. 하지만 인간은 몸을 보는 동시에 몸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육체에 대한 관심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그(그녀)가 그녀(그)를 사랑하며 애무하는 순간, 그(그녀)의 깊은 무의식에서는 융이 말하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깨어난다.

아니마는 남성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여성’, 아니무스는 여성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남성’이다. 우리 마음속의 ‘영적 원천’이다.

따라서 이성간의 사랑은 한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성과 사랑이 자본주의에 의해 상품화되어가며 우리는 육체적 쾌락에만 탐닉하게 되었다.

우리의 영혼이 자본에 의해 갇히지 않았다면, 우리의 눈은 이성의 몸을 통해 몸을 보는 동시에 몸을 넘어선 불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몸을 보면서 아름다움은커녕 특정 부위만 본다. 우리의 눈은 변태가 되어버렸다. 누드화는 포르노가 되어버렸다.

부활한 예수의 몸을 막달라 마리아가 만지려 하자 예수는 거부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생전에는 몸을 만지게 했던 예수가 왜 부활한 몸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했을까?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말한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가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은 촉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서로의 몸을 만진다. 하지만 몸을 만지며 몸의 촉각만 느낀다면 제대로 만지는 게 아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만지지 않아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나 불상이 눈에 보이고 만져져야 신앙심을 갖는 종교인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는 눈에 보이는 재산(동산과 부동산)을 믿는 종교체제다. 다른 종교를 믿는 것 같아도 많은 종교인들이 깊은 내면에서는 자본주의 교를 숭배한다.

그래서 괴테는 부르짖었다. “아름다움이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리라!”

기존의 종교로 대변되던 진리가 그 역할을 상실해버린 시대,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 이 시대의 진리의 담지자가 되었다.

위대한 민중시인 네루다는 여자의 육체를 보며 ‘사랑의 시’를 노래한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이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 파블로 네루다, 《사랑의 시》 부분

 

우리가 여인의 육체에서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름다움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 때까지, 몰래 카메라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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