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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명동의 얼은 민족사랑`-문동환늦봄 문익환 고향을 찾아(3)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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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6.12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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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문익환 목사의 흔적이 담긴 명동과 용정 일대를 둘러본
늦봄의 동생 문동환 박사를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지난 2-6일, (사)통일맞이(이사장 이재정)가 마련한 `늦봄 문익환 목사 생가 방문`은 늦봄의 가족들과 통일맞이 관계자 등이 함께 한 뜻깊은 자리였다.

그 중에서도 팔순을 넘긴 늦봄의 동생 문동환(81) 박사의 동행은 이 행사 자체의 성립 필수조건이었다. 늦봄의 명동시절과 용정시절을 유일하게 자세히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인터뷰를 예정해 두었지만 건강이 허락치 않아 9일 밤에서야 그의 딸 문영미씨의 집에서 문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늦봄에 비해 문동환 박사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늦봄에 관계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의 지나온 삶에 대해서도 경청할 기회를 가졌다.

문 박사는 가장 시련을 혹심하게 겪은 이 땅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를 넘어선 `새 내일`이 열릴 것이라는 꿈을 그리고 있었다.


신앙에 회의 품기도

□ 통일뉴스 : 건강은 어떠십니까?

■ 문동환 : 많이 나아졌어요. 돌아오는 길로 병원에 들렸는데 쉬는 날이라 다음날에 다녀왔어요. 내가 심장 수술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감기에 걸리지 말라 해서 특별히 마음을 써왔는데......

□ 미국에 계신다고 하는데 근황은 어떠십니까?

■ 미국 뉴저지 블룸필드에 있는데 뉴욕에 인접한 곳이예요. 막내딸이 얼마전 결혼을 앞두고 독립해 나가 (부인과) 둘이 살고 있어요.

하는 일이 글쓰고 책읽는 일인데 한 교회에 목사가 갑자기 떠나게 되어 강단을 맡아달라고 해서 주말마다 설교하고 있어요. 강단은 도전인 동시에 삶의 보람이죠. 장로교에선 70이 넘으면 목회를 못하는데 강단은 맡을 수 있어요.

□ 문익환 목사님과 구별하기 위해 목사님이라 부르지 않고 박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문 목사님에 비해 걸어오신 길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명동과 용정을 다녀오셨는데요, 당시 문 목사님과 거의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문 박사는 당시 북간도로 부리우던 연변지역에서 늦봄과 함께 해방
직후까지 살았던 시절을 회고했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해방후 46년 봄까지 있었지요.
은진여중과 명신여중이 기독학교인데 일제 말기에 모두 뺐겼어요. 해방후 기독청년들이 은진과 명신을 회복하자 해서 나는 명신여중 교사가 됐어요. 그러나 지역 공산당의 압력으로 기독교 선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나만 남았어요. 나는 아버지가 붙잡혀간 뒤 소식이 불명이어서 마지막까지 붙어 있었어요.

46년 4월에 아버지가 석방돼 나오셨는데 `내 교인, 양들이 있는데 어떻게 떠나냐`며 떠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밤에 몰래 나갔어요. 대문에다가는 면회사절이라고 써붙여 놓고 나는 태연히 학교를 나가다가 일주일 후에 빠져나갔죠. 이후 학교는 폐교나 다름없게 되었어요.

□ 일제시절 일본 유학을 다녀오시지 않으셨나요?

■ 형님은 프린스톤으로 유학하고 나는 일본신학교 예과에 입학에 39-42년 3년간 있었는데 공부할 것도 없고 학병 때문에 도망가 봉천신학교로 갔어요. 이후 장단에서 국민학교에서 가르치다가 45년 2월에 용정으로 돌아왔어요.

□ 그 이후는 계속 서울에서 생활하셨겠군요?

■ 김재준 목사가 새로 만든 한국신학교 전신인 조선신학원에 형님과 같이 입학해서 1년후 졸업했어요. 그때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품어서 목회는 안하고 장단중, 신일중고교 등에서  2년간 가르치고 49년에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 대사관이 없어지는 바람에 여기서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어요.

결국 51년에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61년에 돌아와 한신대 교수로 일했어요.

박 정권 해직 교수 1호

□ 이후에 기억에 남는 활동을 하나 소개해 주신다면?

■ 69년에 신학교에 사표를 내고 70년 뉴욕에 가서 1년동안 유니온 신학대에서 강의하고 공부하고 돌아와서 수도교회에서 강단을 맡고 `삶의질 공동체`를 시도했어요.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주의외 물질주의인데 교회는 서로 나누고 아끼고 참 삶을 보여주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런데 현실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다. 꿀단지는 집에 두고 교회는 천당가려고 오는 것이란 말예요.

청년들이 공동체를 하자고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먼저 연구를 해보자고 해서 1년동안 같이 공부하고 사례를 모으고 준비를 해서 71년 이 집과 건물을 얻어 5가정 15명이 한솥밥을 먹는 공동체를 시작해 7년동안 계속했습니다.
 
내가 계속 감옥에 들랑날랑하고 총무를 맡았던 분이 뇌암이고, 민주화 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동시에 하기에는 벅찼어요. 결국 민주화 운동에 전력하기 위해 공동체를 중단했지요.

□ 본격적인 사회운동은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요?

■ 한신대는 60년대 말부터 데모로 유명했는데 내가 학생과장이었어요. 박 정권은 나를 아주 미워해서 교수 추방 1호로 75년 나와 안병무 교수를 쫒아냈어요. 다음해 봄 교수 재신임 제도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쫒아내고 그랬어요. 당시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줬어요.

쫒겨나고 나서 우리집에 지인들을 청해서 뒷산에서 불고기를 구워먹으며 숯불도 한데 모아야 타오르는데 우리도 모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성서 읽고 껴안아 주는 교회, 갈릴리 교회를 만들었는데 형님과 해직교수들이 모여 한빛 교회당에 오후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자식을 감옥에 보낸 부모들을 도와주고 위로하기도 했어요.

교회가 알려지면서 방방곡곡에서 찾아오고 76년 3.1 구국선언도 갈릴리 교회 중요인물들이 거의 주도했어요. 여기에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씨 등이 참여했지요.

□ 감옥생활을 겪으셨겠군요.

▶문 박사는 소년범들을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감옥이
제일 좋은 신학교가 된 셈`이라고 했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다 잡혀가서 77년에 나왔어요. 감옥 안에서 애매하게 고생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특히 소년범들은 거의 고아들인데 걔들이 내 신앙을 확 뒤집어 놨어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자기 전이 가장 자유로운 시간인데 서쪽 끝에서 어린 소년이 외치는 소리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어요` 그러면 동쪽 끝에서 똑 같이 화답해요. 구약에서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한 욥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아. 창자를 끊어 놓은 것 같아.

한번 전과자가 되면 또 전과자가 되고 사형수로 사라지는 것이 이들의 운명인데 생각해 보니 한반도가 자유가 없는 감옥이야. 역사적으로 쭉. 소년들의 아우성이 나의 아우성이고.

감옥에서 깨달은 민중신학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애굽 동족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 건져내라는 계시를 하셨듯이 한 맺힌 아우성 소리는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해방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다시 성서를 읽었더니 하나님은 늘 억눌린 자 편에 서서 마음에 맞는 자를 불러 그들을 건져내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것이 민중신학인데 안병무 교수, 서남동 목사 이런 분들과 같이 했어요. 설교하고 같이 일하고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어요.

감옥이 제일 좋은 신학교가 된 셈이죠.

□ 그 이후는 계속 민중신학을 실천해 오셨는지요?

■ 1980년 전두환이 복직을 허락했는데 곧바로 세계교회협의회 구라파 회합이 있어 구라파에 있는 동안 광주가 터져 다 감옥에 갔어요. 들어오려고 동경까지 와서 전화를 했는데 다 (감옥에) 들어갔는데 차라리 미국 가서 이 소식을 전하고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어요.

80년부터 미국, 캐나다, 구라파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국 민주화를 호소했고, 워싱턴에서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데리고 교회를 해달라고 해. 철학적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자고 해서 85년까지 교회를 했어요.

전두환이 쫒겨난 교수들을 복직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86년 한신대에 다시 돌아와 1년반 가르치고 은퇴했는데 명예교수로 가르칠 수는 있었어요.

□ 이후 정계에 참여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의외입니다.

■ 88년에 평민당 부총재로 갔어요.
당시 민통련을 형님이 지도하셨는데 청년들이 정당에 들어가서 나라 위한 정당이 되게 하자고 결정했는데 김대중 김영삼으로 갈라져서 어느 정당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투표를 통해 한 군데로 다같이 들어가자 해서 95프로가 평민당으로 들어갔어요. 5프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두 분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들어가면서 어른 한 분 모시고 들어가자 이러는데 형님은 정쟁법에 걸려 있었고 DJ가 워싱턴 왔을 때 가까이서 도와드려 친분이 있었는데 `문동환 박사 모시고 들어와라` 그랬던 거예요.

많이 주저하다가 접목제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평민당에 들어가 부총재를 맡고 외무통일위원회에서 4년간 일하다 나왔어요. 마치고 나서는 부인과 은퇴후 미국으로 들어가자는 약속대로 미국으로 갔어요.

□ 사모님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는지요?

■ 미국 유학중에 학교에서 만나 2년간 사귀고 61년에 경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사귈 때 미리 나는 한국에 돌아갈 사람이라고 알렸는데 부인이 결심하기가 힘들었어요.

한국은 험악하고 모든 것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연탄불을 갈면서......
한 번은 연탄 가스로 죽을 뻔 했는데 다행히 꼬마가 우는 바람에 깨어나기도 했어요.

□ 슬하에 자녀분들은 어떻게 되십니까?

■ 2남 2녀인데 막내는 고아를 데려다 키웠어요. 그때 고아 데려다 키우기 운동하자고 했는데 부인들이 자신이 없어해 여제자 딱 한 사람만 실천하고 있어요.

늦봄은 국민들의 통일의식 불러 일으켜

□ 이번에 명동과 용정을 다녀오셨습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명동의 얼`은 한마디로 민족사랑이라고 말한 문동환
박사.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명동의 얼`이 대단히 중요해요. 명동 정신이 우리 삶을 좌우하는 터전을 마련해 일생을 갔어요. 자손들에게도 그 정신이 전달됐으면 하는데 조카들과 딸이 같은 느낌을 가지고 찾아갔어요. 느낌들이 훨씬 깊어진 것 같아요. 또 뜻 있는 젊은 동지들도 함께 해서 같은 생각들이었을 거예요.

□ 명동의 얼이란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 민족사랑이지요. 외세에 세기를 두고 시달린 한이 백성에게 맺혀있어요. 기독교의 사랑, 정의, 평등 개념과 민족의 한이 얽혀 민족운동을 한 거예요. 해마다 은진중학교에서 모세의 해방드라마와 애스더를 연극화해 애국심을 고취했어요.

□ 늦봄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자리매김을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 형님은 사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민족 문제를 깊이 생각했지요.
성서번역과 민주화 인권운동에 앞장섰는데 중앙정보부는 3.1구국선언을 내가 한 것으로 알았어요.

사실은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3.1절이 다가오는데 형님이 장준하 선생 사진과 대화를 하는데, 시인이니까, 왜 문 목사가 못 나서느냐고 그래서 단숨에 구국선언문을 쓴 거예요. 내가 코멘트를 하고 경제부분은 이문영 교수를 추천해 드렸죠.

당시 형님은 구약번역을 다 마치지 못해 형님 이름은 뺐는데 조사 과정에서 아무래도 말이 안맞아 너무 고통들을 당하자 내가 형님 이름을 댔어요. 그때부터 형님이 가속도를 내 일선의 지도자가 됐어요.

선언에는 통일조국의 앞길을 내다보면서 통일을 위해 경제민주주의를 하자는 취지였어요. 형님은 더 각광 받고 더 앞장섰어요.

특히 통일문제에서 국민들이 통일을 중요하게 의식해야 하는데 형님의 방북이 그런 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분위기가 들끓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6.15까지 왔죠. 국민들을 불러일으킨 역할을 했던거예요.

□ 국민들의 통일 의식을 불러일으킨 역할을 강조하셨는데요. 문 목사님이 89년엔 방북하지 않으셨습니까?

■ 김 주석을 만날 때 격정적으로 꽉 껴안았는데 놀라운 일이죠.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주석과 만남에서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있어요. 하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부르라는 거예요. 대화하려면 상대를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김 주석이) 그말이 맞다고.

또 하나는 미군철수 안하면 대화 안하겠다는 것은 대화 안하겠다는 말과 같다. 미군 철수는 안되게 돼있다. 남쪽에서 도저히 받을 수 없다. 조건 없이 대화해라. 평화협정 해라. 그러면 미군 나간다. 만약 그래도 안나간다면 국민운동을 일으켜서라도 미군 쫒아낼 것이다. 김 주석이 옳다 그랬어. 얼마후 미군 있어도 대화는 한다고 선언했어요.

북한의 이 두 가지 중요한 정책 변화에 대해 형님이 감옥에서 이야기했고 노태우에게도 편지를 썼어요.

□ 늦봄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개인적 평가나 느낌이 있으시다면?

■ 동생들에게 잘 했어요. 맏아들 역할을 다했고. 우리 둘 사이는 특히 가까웠어요.

언어에 능했어요. 나는 수리 쪽인데. 시 많이 쓰고 구약학자로서 착실한 실력과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정 사정 때문에 박사를 못했어요. 성서 번역을 하면서 연구할 과제를 많이 찾았는데 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 늦봄의 아들 문성근씨는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성격이셨다고 하던데요?

■ 시인의 특징이예요. 몹씨 날카롭고 가장 이상적인 것을 그리는데 고은이나 윤동주가 다 그래요.

인류의 새로운 표본 기대

□ 현재 우리의 민족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남다른 시련을 겪은 우리민족에게 세계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문 박사.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 한국이 남다른 시련을 받고 있는데 역사에 그만큼 공헌할 수 있는 경험을 갖는다는 얘기예요. 영국 식민지의 간디나 노예로 미국에 끌려온 마틴 루터 킹, 그리고히브리 민족의 공헌이 굉장했어요. 연단되고 깊이 생각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사상, 문명이 시작되는 거예요.

우리 백성이 자본주의 공산주의 밑에서 동시에 고생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반성과 깨달음을 얻고 차자 열매로 나타날 거예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가 말려도 계속 싸움만 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화해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런 정신적인 흐름이 계속되고 발전해 서로 이해하고 화합할 역사적 샘플을 만들어 낼 거예요. 한국은 인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표본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디제이(DJ)의 햇볕정책도 일종의 이런 표현이고 김정일 위원장을 디제이가 껴안게 되게된 심정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이번에 연변 식당에서 남북이 하나가 되듯이 국민적 감정을 조성하면 고생고생 힘들지만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 없을 거예요. 결국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같이 살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국민의식이 변화되게 될 거예요.

□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 앞으로도 험산준령을 넘을 겁니다. 거기에 불평하지 말고 껴안고 의미를 물으며 대결해 나가면 이 민족이 인류사에 기여할 수 있을 거예요. 큰 꿈을 갖고 도전을 성실하게 겪어나가면 새날이 올 겁니다.

태어나는 새날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종합으로 남쪽은 개인이 피어나면서 동시에 공동체가 되고 북쪽은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개인이 묵살되지 않고, 그런 새 내일을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 미국에 돌아가셔서 이후의 활동 계획은 어떠신지요?

■ 교회에 봉사하고 죄진 것 반성하면서 자서전을 쓰려고 해요. 살면서 여러 가지 국면을 거쳤고, 역사의 여러 고비를 내 삶의 경험을 통해 풀이 해 보고 싶어요. 사실 형님도 자서전을 남겼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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