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여행에서 돌아와 밀린 신문을 훑어보는데, 지난 14일 관훈토론에서 한 패널리스트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해방당시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분열세력에 의해 분단됐다"는 노 후보의 과거발언을 거론하며, "남한이 UN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인데도 분열세력이었다고 말했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노 후보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고 약간 놀랐다.

한 공당의 대통령후보를 불러놓고 질문하는 패널리스트라면 필시 사회의 지도적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인사가 "남한이 UN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인데"라는 전제하에 남북문제에 관한 질문을 했다니 한심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한이 UN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인식은 1948년 12월 12일자 유엔 총회결의 195(III)호의 제2항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UN 총회결의 제2항은 세 가지 내용으로 된 선언이다. 그것을 본문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첫째는 한반도 내에서, UN 임시위원단이 관찰과 협의를 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전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효과적인 통제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적인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선언의 둘째는 이 정부의 수립은 한반도의 그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정당하게 표시되고 또한 UN 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된 선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선언은 이 정부가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라는 것이다. 
  
좀더 풀어서 설명한다면, UN은 (한반도의 전지역에서 선거를 감시하지는 못했으나) 한반도 전 인구의 절대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즉 남한)에서 선거를 감시할 수 있었는데, 이 선거를 통해 그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시되어, 그것을 근거로 이 지역(즉 남한)에서 효과적인 통치권과 관할권을 행사하는 대한민국이란 합법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한반도 내에 이렇게 수립된 정부는 이 정부 뿐 이라는 것이, UN결의의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UN감시하의 자유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이 남한의 합법정부이며, 한반도에서는 이 정부만이 그러한 정부라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지적해야 할 것은 UN총회 결의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권과 관할권 그리고 합법성의 범위를 UN 감시하의 선거가 실시된 지역 즉 남한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은 전혀 없다.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라는 표현이 자칫 그런 유추해석을 하고 싶은 유혹을 주기는 하지만, 엄격히 따져서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뜻이 아니라 "UN감시하의 자유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그러한 정부"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둘째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 결의가 채택될 때 북한에도 이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는데, 유엔총회 결의는 그 정부의 합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는 이 유엔결의를 "대한민국만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따라서 북한정권은 불법정권"이란 뜻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확대해석 하였으며 또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우선 영어해득 능력도 매우 부족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대의식에 깊이 젖어 있어서, 북한정권은 저희들끼리 제멋대로 세웠기 때문에 엉터리정권이지만, 대한민국은 유엔이 세워주고 인정해 준 정부라는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의 동족이 반대하는 선거를 남(유엔도 결국은 남이다)의 감시하에 실시하고, 그 결과로 분단정부를 세우고도,  그것을 유엔이 인정해 주었다 해서, 무척이나 기뻐하고 우쭐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사실인식과 그에 따른 자기도취는 그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남북간의 대결과 갈등을 증폭시킨 근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며 입은 손해가 또 얼마나 컸던가? 지금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간에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고 민족화해의 새 기운이 싹트고 있는 마당에 있어서도 이에 한사코 역행하려는 소위 보수세력의 항거가 얼마나 집요한가? 이 또한 남북관계의 그릇된 사실인식에 따른 망집의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금년에 머지않아 지방선거를 치르고 연말에는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돼 있다. 이에 따라 전에 없이 남북관계를 보는 시각차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진보적인 생각이나 보수적인 생각이나 다 애국하고 애족하는 마음의 발로이겠지만, 그릇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는 건설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 특히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남북이 분열된 과정과 그 배경, 남북 양 정부의 정통성문제, 앞으로의 민족화해와 교류협력문제, 그리고 궁극적인 통일의 조망 등, 모든 문제를 사실의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논의하는 풍토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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