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성계의 반대는 최영과 우왕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영이 8도의 도통사를 맡아 전방과 후방 모두를 총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고, 좌우 2군으로 나누어진 공격군의 좌군도통사에 조민수가, 우군도통사에 이성계가 임명되었습니다.
 
1388년 5월, 고려의 요동 정벌군이 압록강을 건너려고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갑자기 진격을 중단하고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리면서 그가 앞에서 내세웠던 4불가론을 회군의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대가 진격을 멈춘 것만이 아니라 돌아서서 개경으로 쳐들어갔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단지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이성계의 회군에 참가하지 않은 부대들이 배로 다리를 놓고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의 군사 시설을 파괴한 것을 보면, 그가 내세운 명분이 회군을 하기 위한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애초부터 의도를 지닌 거사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군사 반란이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잘못을 가리자면 내란죄와 군사 반란죄, 근무지 이탈죄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언제나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명분이 옳은지 그른지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반란을 일으킬 충분한 이유가 그 사회에 존재했는지, 나아가 그 반란이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했는지 하는 점입니다.
 
위화도 회군이 있었던 때는 고려 사회가 부패와 무력감에 푹 절어 있던 때였습니다. 따라서 사회를 개혁할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는 신진 사대부였으므로 신진 사대부들이 소신과 권한을 갖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권력 구조를 뜯어 고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성계의 군사 반란이 단순한 권력욕 때문에 빚어졌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민중은 그 무렵 잦은 외침 때문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최영은 신진 사대부들과의 권력 투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요동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최영의 요동 정벌 주장이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만 볼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 이성계 일파의 요동 정벌 반대는 민생의 안정과 내정의 개혁이 시급했던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이 지니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계의 불가론 중 첫째가 무엇인지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성계가 주장한 불가론 중 첫째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무모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명나라에 무조건 굴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려의 신진 사대부들이 명나라와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듯이 명나라 역시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라서 고려와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서둘러서 철령위 설치를 취소하였고 관리들도 철수케 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와 그를 지지했던 신진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지나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태도가 조선을 세운 뒤에도 명나라에 대한 의존적인 자세로 일관하게 만드는 동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내정 개혁과 민생 안정에 이바지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외세에 대한 저자세와 의존을 불러일으킨 부정적인 측면도 컸습니다. 만약 위화도 회군 없이 전면적인 요동 정벌이 이루어졌다면 그 뒤 상황은 어떻게 펼쳐졌을까요?

고려 사회의 내정 개혁이 상당 기간 미루어지고 민생이 더욱 고통에 찌들었으리라는 하나의 가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가정은 명나라에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이 짙은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은 역사를 평가할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화도 회군이 이러한 모순이 있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진 사건이라는 평가를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첩된 모순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하기 위해 우리 민족은 이 뒤로도 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는 점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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