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우리는 빠른 것을 좋아한다. 자장면 배달도 번개처럼 해야 좋아하고, 빠른 컴퓨터 게임을 위해 램이나 기종을 높이는 일은 다반사다. 동남아시아 관광지의 장사치들은 다른 한국말은 몰라도 `빨리 빨리`는 정확히 안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정서는 핸드폰과 초고속 인터넷, 퀵 서비스 따위의 속도감 있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제법 예술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들이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참패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속도감과 무관하지 않다. 예술영화의 특징이 바로 `느림`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초고속 성장을 했고, 종교의 성장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팽창을 했다. 사회의 발전도 식민지에서 분단, 전쟁,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 광주항쟁, 6월 항쟁, 문민정부, 남북정상의 평양회담 따위로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빨리 빨리`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빨리 빨리`만 추구한 결과로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붕괴 따위의 부실공사를 불렀다고 말한다. 또한 빠른 현대의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은 `느림의 미학`을 설교한다. 나는 이런 진단에 나름대로 동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빨리 빨리`는 `대충 대충`과는 다른 말이다.

건물과 다리가 무너진 것은 `빨리 빨리`가 원인이 아니라 부패한 공무원과 뇌물과 건설업계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뇌물을 빨리 주는 것과 천천히 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사실 우리가 빠른 시간 안에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너무 많이 먹은 것을 걱정할 만큼 경제성장을 이룬 것도 `빨리 빨리`의 힘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격 탓이라고 우기는 것은 무능한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국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민주주의나 인권, 혹은 통일, 노동운동 따위를 빨리 빨리 발전시켰으면 어떻게 됐을까? 오히려 이런 문제는 느려 터져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우리가 `빨리 빨리`라는 말로 경제나 사회를 빠르게 발전시켰듯이 북한에도 `속도전`이란 구호로 사회를 발전시켰다. 북한에서 속도전은 `집단의 전 성원들이 혁명적 열정을 높이고 일을 짜고 들어 자기의 모든 예비와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동원하며 일단 시작한 일은 전격전·섬멸전으로 전개, 속도를 높이는 가장 우월한 혁명적 전투원칙`(74.2.18 로동신문 사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낡은 사상을 배격하고 속도와 질을 동시에 향상하며 기술혁신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속도전은 전후 복구를 빠르게 진행하고 70년대 말까지 남한보다 경제적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우리의 `빨리 빨리`와 북한의 `속도전`은 여러 의미로 닮아있다. 아마 민족성이 같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경제문제의 `빨리 빨리`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제 더 많이 먹고 가지려는 `빨리 빨리`는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빨리 빨리`는 조국의 통일을 이루고 여럿이 함께 오순도순 잘 살 수 있는 민주화된 사회이다.

이런 희망을 이루기 위해 `빨리 빨리`, `속도전`으로!


보천보의 횃불


▶보천보의 횃불/정관철/유화/1948

이번에는 북한화가 정관철이 유화로 그린 <보천보의 횃불>이란 작품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 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보천보를 공격하고 일본군을 무력화시킨 다음 백성들에게 일장연설을 하는 청년 김일성과 유격대원을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배경에는 일본관공서가 불타고 있으며, 백성들은 포고문을 읽거나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청년 김일성 뒤에 있는 유격대원이 들고 있는 붉은 깃발은 유격대의 정치적 노선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북한에서 명작 중에 명작에 속하는 그림이다. 1948년 <8.15해방 경축 제 2회 북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방법의 성과작품으로 꼽힌 작품이다. 이 당시는 조선화가 아직 등장하지 않아 유화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정관철은 제3회 북조선미술전람회에도 같은 전투를 다룬 3부작 <해방된 보천보>라는 대작을 출품한다.

창작연도가 1948년이면 해방되고 남한에 이어 북한에도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해이다. 이 작품은 앞으로 북한사회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상징이자 현실을 보여 준다. 

북한에서 보천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우리에게 `휘파람`이란 노래로 알려진 북한가수 전혜영도 `보천보전자악단` 출신이고,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보천보혁명박물관` 같이 북한을 상징하는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보천보는 북한 혁명의 뿌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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