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부가 몽고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왕실과 문벌 귀족, 무신들은 한결같이 더이상 몽고와 싸운다는 생각을 못하고 철저하게 몽고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또 그에 앞서 대몽 항쟁을 거의 떠맡다시피 했던 농민과 천민의 항쟁도 상당히 수그러 들었습니다.

그런데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대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대몽 항쟁을 계속 벌였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진도로 옮겨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마지막까지 싸웠습니다. 이 부대를 삼별초라고 합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부대였을까요? 삼별초란 이름만 보아도 이 부대는 뭔가 특수한 임무를 갖는 부대인 것 같은데, 무신 정권 밑에서 특수 부대는 당연히 특권을 누렸을 만합니다. 그런데 왜 삼별초는 개경 정부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을까요?
 
삼별초는 야별초의 좌, 우별초와 신의군을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야별초는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가 수도의 치안을 맡기려고 특별히 편성한 군대이었습니다. 그 무렵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 정권으로서도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군은 대몽 항쟁의 과정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군은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유달리 컸습니다.
 
조선 시대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야별초가 조선 시대의 포도군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경찰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수도 치안을 맡는, 오늘날의 경찰과 같은 기구로서 금오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방위를 맡는 군대로서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와 같은 3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별초는 수도의 치안을 맡되 반란이나 봉기를 진압하는 일을 전담하는 특수 부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학생들의 시위나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 임무를 전담하면서 악명을 떨쳤던 백골단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야별초는 정변 때마다 동원되는 병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공수 부대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야별초는 강화도에서 정변에 동원되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습니다. 최씨 정권이 스스로 키운 야별초 때문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틀어박힌 기간이 길어지면서 최씨 정권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다른 무신들이 슬슬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신 정권에 눌려 꼼짝도 못하던 왕실이나 무신들도 몽고 침략으로 최씨 정권이 궁지에 몰리자 몽고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권을 되찾겠다는 계략을 꾸미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258년 3월 무신 김준이 문신 유경 일파와 손을 잡고 최씨 정권의 4대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에 동원한 군대가 바로 야별초였습니다. 이때쯤에는 최씨 정권이 너무 무능하고 몽고에 대한 투쟁 의지는 없는 채 강화도에 눌러 앉아서 방탕과 사치로 세월을 보내자 야별초도 최씨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준 정권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또다른 무신인 임연이 김준을 제거했고, 임연이 곧바로 죽자 그의 아들 임유무가 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임유무는 무신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신들끼리 치고받으며 겨우 10여 년 사이에 세번씩이나 정권이 바뀌는 동안 친몽고파들이 왕실을 등에 업고 몽고의 힘을 빌려 개경으로 돌아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마침내 송송례, 홍문계 들이 임유무를 죽이고,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돌아가 몽고와 화평 교섭을 맺고는 사실상 그 지배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무신 정권은 무너지고 몽고의 손아귀에 있는 왕실이 문신들과 함께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270년, 몽고의 첫 침략이 있고난 지 38년, 무신 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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