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께 보내는 공개질의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누구보다도 걱정하시는 대통령이라면 저희가 제기하는 이 질문에 진지하고 책임있는 답변을 해주리라고 믿고 몇가지 공개질의를 드리려고 합니다.
KAL 858 사건은 김현희의 자백에만 의존한 아무런 물증없는 사건이며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는 너무나도 많은 의혹이 제기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115명의 죽음을 가져온 사건으로, 국민들에게 준 충격은 너무나도 엄청났습니다. 또한 이 사건의 수사발표 결과로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규정되어 지금 정세에서도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 통일에 많은 장애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이 사건을 다시 공정하게 재수사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이 무엇이며 당시 애매모호하게 발표된 측면이 무엇인지를 온 국민과 세계 앞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야만 할 절박한 의무가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다음의 질문을 들으시고 이에 대한 국정차원에서의 진지한 대책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Ⅰ. 북이 관련되어있다는 증언과 관련한 의문에 대하여

Ⅰ-1 무릇 말못하는 증거는 속일수 없으나 말하는 증인은 속일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의 증언이 앞 뒤 말이 맞지 않고 증언과 다른 내용이 속속들이 제기된다면 증인의 증언내용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재수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여부인데 이는 다른 물증이 전혀 없는 김현희의 자백뿐입니다. 그런데도 역대정부와 언론은 마치 친필지령의 물증이 있는 것처럼 속였습니다. 이 결과 아무런 증거없이 이 사건은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이 친필지령여부에 대한 현정부의 명확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Ⅰ-2 김현희는 자기 아버지가 앙골라 주재 북한 외교관이라하여 KAL기 테러는 국가범죄차원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고 안기부도 88년 3월 일본문예춘추에 현재확인중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 확인결과는 무엇입니까?

Ⅰ-3 정부는 김현희 일행에 일본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사람은 일본 침투 북한 간첩 `이 경우` 라고 발표하여 KAL기 사건과 북핸범행의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공안당국은 `이 경우`가 KAL기 사건 발생하기 2년전에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있습니다. 이미 죽은자를 어떻게 조사했는지 죽은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덮어 씌운 것이 아닌지 자세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Ⅱ  너무나도 부실하게 진행되었던 수색작업과 관련하여
 
Ⅱ-1 사고가 나면 일단 사람부터 구한 후 기체 잔해를 찾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범인을 색출해내는게 일반적 순서입니다. 그러나 사고발생 이틀만에 바레인에서 김현희 일행이 수사대상에 부각되자 정부와 언론의 관심은 수색보다 수사쪽에 치우쳤습니다.
  그후 자연 수색은 소홀해져 수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최종교신지점조차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당시 정부에선 최종교신지점을 어디스로 파악했으나 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등에는 어디스보다 훨씬 서쪽인 토리스라고 보도하고 있는바 둘중 어느것이 맞습니까?

Ⅱ-2 항공기 사고에서 사고위치와 사고원인을 규명하는 열쇠로서 수색에 있어 불랙박스 회수는 제 1순위입니다. 불랙박스 발신음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갖추지 아니하고 망망대해의 수색에 나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Ⅱ-3 KAL기가 사라졌다고 하는 미안마령 안다만 해역은 우리나라 서해같이 수심이 낮고 어선이 많은 바다입니다. 그런데도 잔해한점, 시체한구, 유품한점 찾지 못하고 단 10일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킨 사유는 무엇입니까?

Ⅱ-4 정부에서 KAL기 폭파증거로 제시한 것은 구명보트에 내장된 공기압축펌프의 불탄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명보트의 발견회수상태는 인조피혁으로 만든 표피가 멀쩡할 뿐 아니라 내장된 50점 물품 중 공기압축펌프 하나만 파손되었고 49점 물품은 온전했습니다. 대통령님, 가령 안방의 장롱이 불에 탈 때 장롱은 멀쩡하고 그 안의 이불, 옷, 담요, 넥타이 중 넥타이 하나만 탈 수 있을까요?


Ⅲ. 사진속의 화동은 김현희가 아닙니다.

88년 정부는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이라는 간접증거로 그녀가 어릴적 화동 사진 3장을 공개했습니다. 첫 번째, 72년 평양을 방북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준 화동의 귀는 각진 네모형이나 현재의 김현희 귀는 역삼각형으로서 완전히 타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꽃다발을 주기 위하여 줄서 있는 맨 앞의 소녀를 김현희라고 했으나, 그 소녀는 평양이 아닌 개성의 왕영숙이라는 소녀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세 번째, 88년 3월 일본의 하기와라 기자는 자신이 72년 평양주재시 찍은 소녀를 김현희라고 99% 확신한데 대하여, 김현희 자신이 이 사실이 맞다고 하여 안기부는 이를 언론에 공개했는데, 나중에 하기와라 기자는 그 소녀가 김현희라는 확신을 부인했고, 99%의 소녀는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성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결과 머슥할 수 밖에 없는 김현희와 안기부는 아직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엉터리도 엉터리입니다만, 한눈에 드러나는 거짓말이 14년간 감춰져온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대통령님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Ⅳ. 정부는 약자를 철저히 짓밟고 외면했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은 대부분 가난한 중동건설현장의 노동자였습니다.
그들은 김현희의 자백만을 근거한 정부발표를 믿지 않고 물증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묵살하고 협박했습니다. 하도 답답하여 대통령께서 총재를 맡고 있던 평민당사에서 농성까지 했고 남북공동조사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황당한 일은 정부에서 실종유예기간 1년도 끝나기 전에 서둘러 호적에 사망처리한 것입니다.이에 한맺힌 가족 일부는 재판을 제기, 97년 7월 실종선고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죽었던 자도 살려낸 해괴한 일이 이 땅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정부에서 서둘러 사망 처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준 대책은 무엇입니까?


Ⅴ. 정부와 국민, 언론 모두는 이제까지 방치해 왔습니다.

`김현희의 귀` `김정일 친필` 등 이 사건은 정부수사 발표 당일부터 거짓말이 드러난 허술한 사건입니다. 누구라도 `김현희의 귀가 왜 다른가` 한마디만 외쳤어도 진상이 밝혀졌을텐데, 공포에 질려 철저히 침묵하고 언론은 북한범행의 천동설로 굳혀왔습니다.
98년 1월 국민의 정부는 이 사건을 조사하려다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대책은 어떠합니까?
 

Ⅶ. 이사건의 중요성으로 비추어볼 때 남쪽만의 조사보다는 남북공동조사단이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대통령의 의향은 무엇입니까?

 

국정원에 보내는 공개질의서

KAL858기 폭파<또는 실종>사건은 1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답방관련 사과문제가 걸려있어 단순한 과거지사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화해에 직결된 사건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사건의 수사는 귀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담당하였는바 88년 1월 15일 당시의 수사발표에는 의혹투성이였고, 이에 115명의 탑승자 가족을 비롯한 각계에서 재수사 요구가 줄기차게 제기되었으나 역대정권은 이에 대한 공식적이고도 진지한 답변을 한번도 보여준바 없습니다. 115명의 죽음의 원인에 대하여 이렇듯 많은 의혹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공식적인 재수사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문을 더해주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대다수 국민의 뇌리에는 `천동설`처럼 굳어진 `북의 사주에 의한 테러`라는 정설은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금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에 더할수 없는 걸림돌이 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됩니다.
당시에 이 사건이 준 국민적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고 지금 이것을 재수사한다는 것은 그자체로 너무나도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사발표에 너무나도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이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여야 한다는 문제들이 제기된다면 사건의 중요성이 크니 만치 반드시 다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로 됩니다.
그러므로 귀 국정원은  115명의 가족들의 14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눈물어린 재수사요구, 그리고 지금의 정세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한 절박한 과제라는 사정을 반영하여 반드시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다시 한번 조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진상을 조사함에 있어 대표적인 의문점을 몇가지 추려 공개질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1. 안기부는 수사발표시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72년 남북조절위 장기영대표에게 꽃다발을 준 화동이 김현희라는 사진을 제시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화동의 귀는 둥그런데 김현희의 귀는 역삼각형입니다. 귀는 평생불변, 만인부동이므로 김현희라고 볼수없습니다. 더욱이 이해할수 없는 것은 수사당일, 안기부수사관과 기자와의 일문일답입니다.
88년 1월 16일자 한국일보는 안기부측에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준 화동사진을 김현희에게 보이면서 "사진과 닮지 않았다"고 묻자 김현희는 자기의 귀를 가르키면서 "내귀와 똑같지 않는냐"고 말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귀원에서는 김현희의 귀와 화동의 귀 모양이 같다고 봅니까? 다르다고 봤다면 어떻게 추궁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 88년 3월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72년 평양주재시 찍은 사진의 소녀가 99% 김현희가 확실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김현희는 자기가 맞다고 재확인하여 안기부는 언론에 공개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기와라 기자는 화동과 김현희의 귀가 다르다는 이유로 애초, 김현희가 확실하다는 발언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면 하기와라 기자와 김현희 및 안기부의 입장이 상치되는바 귀원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3. 수사발표시 김현희의 아버지는 `현재 앙골라주재 북괴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했으나 안기부는 88년 3월호 일본 문예춘추에 확인중이라고 바꿔말했습니다. 그러면 미확인사항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이며 확인결과는 무엇입니까?
4. KAL기 사건은 김정일의 친필지령에 의하여 자행된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안기부 직원은 실제 지령문이 아니고 구두로만 지시된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곧 물증없이 김현희의 자백뿐인데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그런사실이 없다`고 부인할 경우 달리 입증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5. 안기부는 김현희 일행이 바레인에서 극약앰플로 자살한 수법이 종전의 북한 간첩이 사용했던 행동수법과 동일하다고 하여 북한범행임을 간접 입증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동수법은 72년초에 북한에 밀사로 간 이후락 정보부장도 음독자살용 극약앰플을 소지한 사실이 있는바 이에 대한 귀원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6. 수사발표시 김현희와 2인1조를 이룬 김승일이 영어 등 4개국어에 능통한 전자기술 전문의 정예공작원으로 묘사했으나 일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어를 전혀 못했고 87년 12월 국과수의 사체부검결과 키 1m 71cm에 49. 95kg의 체중으로 위의 거의 전부가 수술로 절제된 70세 환자로 밝혀졌는바 이러한 상태로선 일국의 위신이 걸린 국가테러의 적임자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한 귀원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7. 김현희 일행은 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황에서 검문을 받자 돌연 음독자살을 기도하여 김승일은 그 자리에서 죽고 김현의는 치사량 미달로 살아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김현희를 최초로 응급처치한 바레인 의사는 그녀가 음독한 흔적이 없었다고 기자회견을 했는바 귀원에서는 바레인 의사의 기자회견을 배척할 증거를 달리 가지고 있습니까?

8. 김현희 일행에 위조일본여권을 만들어준 자는 일본 침투 북괴간첩이라고 했는바 그는 KAL기 사건발생 2년전 간암으로 죽었을 것으로 일본 공안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귀원에서는 이미 죽은자에 대하여 어떻게 조사했습니까?

9. 김현희 일행은 폭약을 비닐 쇼핑백에 넣어 기내 선반에 그냥 두고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내에서 그들을 목격한 KAL기 박길명사무장은 남자는 짐이 없었고 여자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비닐 쇼핑백은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에 대한 귀원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10. KAL기 사건은 폭파사건이라 하나 잔해한점 시체한구, 유품한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세계 여객기 추락사상, 유례없는 미스터리인바 그 이유는 무엇으로 생각합니까?

11. 안기부와 김현희는 KAL기 폭파를 위한 행적을 언급하면서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입국시 빈의 남역에 내려 암파크링 호텔 603조에 투숙했다고 했으나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 일본기자들의 추적에 의하면 남역이 아니라 서역, 암파크링 호텔 603가 아니라 322호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현희는 91년 출간된 자신의 수기에 일본기자의 추적을 인정하였는바 곧 안기부와 자신의 당초 자백을 부인한 셈입니다. 이러한 엇갈림이 80여개에 이르는바, 이에 대한 귀원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12. 90년 8월초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는 KAL기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안기부는 김승일의 위조여권이 만들어진 과정을 추정하다가 `이경우`라는 조총련계간첩이 관계한 것임을 밝혀내 처음부터 북한에 의한 테러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김이 청산이 든 앰플을 깨물고 죽자 대공수사에 30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한모과장을 바레인에 급파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김승일이 죽은후 `이경우`가 등장하는데 조갑제의 글에는 안기부가 김승일이 죽기 전부터 `이경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귀원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