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시대

21세기는 창조성의 시대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벤처기업의 사장이 된 젊은이의 이야기는 별로 낯설지 않고,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교육에서 창조성 교육은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창조적인 생각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덕목으로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 아주 멋있고 독창적인 은장도를 만든다고 치자. 예전에는 이런 은장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은장도를 만드는 장인에게 무릎을 꿇고 은장도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은을 다루고, 녹이고, 세공기술을 익히는데 족히 10년은 걸리고, 다시 자신만의 독특한 은장도를 만들려면 10년, 이러저러한 시간을 합친다면 대략 20년 정도는 걸린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멋있고 독창적인 은장도를 도안해 공장에 맡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인력과 자본이 많이 드는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간단한 디지털 캠코더나 컴퓨터를 이용해 만들 수 있다. 실제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도심의 조각물의 경우, 작가는 조그만 모형을 만들어 주물공장이나 석재공장에 맡기면 크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주물공장 사장이나 석공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마지막 서명은 조각가가 하는 것이다.

흔히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고통이 뒤따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창작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를 것이다. 화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형태를 정확히 잡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거나 혹은 원하는 색상을 내지 못하거나 구도를 잡지 못해 고통스러워 할 것 같은가? 그림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의 경우는 이해가 되지만 미술대학을 나왔거나 창작경력이 10년 이상 되는 사람이 만약 이 정도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면 차라리 그림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경우는 게으름 같은 자기관리 문제이거나 무엇을 그릴 것인가라는 미학적인 문제로 고민한다.

그렇다면 `창조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으레 기발한 생각이나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현상적인 것이다. `창조성`의 실체는 세계관이다. 세계관의 변화 없이는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똑같은 정물이나 풍경을 그려도 세계관이 다르면 전혀 다른 작품이 만들어진다. 노동자를 그려도 마찬가지고, 물건을 디자인해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를 만들 때 친환경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과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민을 할 것이다. 물론 결과도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문제는 사람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치를 하더라고 정치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통치방법이 달라지고, 회사를 운영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북한의 화가가 미술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와 그것이 북한인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혹은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서양의 명화를 감상하는 것은 그 작품 속의 인류 보편적인 내용에 공감하자는 것이다. 북한미술의 감상에 있어서도 단지 `북한에는 이런 그림을 그린다`가 아니라 작품 속에 녹아있는 인류 보편적인 알맹이와 교류함으로써 대결과 반목, 전쟁과 멸시가 아닌 평화와 화해, 상생의 가치를 공유하기 위함이다.

창조성은 사회를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힘이다. 창조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걸맞은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세계관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정도의 생각이다. 2000년 전 한 성인이 목숨을 걸고 말했던 것이기도 하고.

백두산

▶조종(祖宗)의 산 백두산/최하택/유화/180.5*112/1990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북한화가 최하택이 그린 <조종의 산 백두산>이라는 유화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3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에 출품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온 백두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으레 백두산 하면 천지연이 보이고 그 주변으로 높은 산이 둘러쳐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백두산의 옆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아주 새로운 느낌을 준다. 또한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백두산의 모습을 그린 것도 특이하다.

아침햇살인지 혹은 저녁노을 받아 붉은 것인지 어떻게 아냐고? 굳이 설명을 하자면, 저녁노을을 받는 백두산의 풍경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침은 희망과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저녁은 몰락과 우울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을 보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북한쪽에서 백두산을 본다면 오른쪽은 동쪽이므로 아침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작품은 유화로 그린 것이다. 조선화는 수성물감을 사용하기 때문에 맑고 수려한 색상과 미끈한 표면질감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거칠거나 두터운 느낌을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생긴다. 이 작품은 조선화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백두산의 야성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유화 특유의 거친 마티에르와 붓질로 표현하고 있다. 가로 크기가 180cm 정도로 큰 작품이기에 실제 작품 앞에 서서 감상을 한다면 엄청난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드문드문 잔설이 보이는 걸로 봐서 겨울인데 그런 차가운 느낌과 붉게 타는 듯한 백두산의 풍경을 대비시킨 것은 작가의 어떤 의도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자상하게 작품의 의도를 설명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백두산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붉게 타는 백두산, 이 작품을 보면 볼수록 쿵쾅거리는 가슴의 울림과 호흡이 거칠어지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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