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제6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남과 북은 서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있다.
  
당초 남한의 소위 "햇볕정책"에 대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했던 것은 작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남북회담에 응하면 북한에 대규모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실시하겠다고 언명한 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정치적 대(大)원칙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 북한의 기본자세이다. 그래서 먼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연방제통일방식의 모색이라는 대원칙을 확인하고 그 배경 하에 경제협력과 이산가족상봉을 추진키로 한 것이 6.15 남북공동선언이었다.
  
그런데 그 후의 남북관계의 추이를 보면 남측은 6.15 공동선언의 제 1항의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서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전혀 무시해 왔다. 대미 군사동맹관계를 보다 강화하고,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고성능 신무기들을 개발 또는 도입하고, 미국과의 공동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해 왔다. 또 민족자주를 주창하는 통일운동과 통일 지향적인 언론에 대한 고삐도 잠시 풀었다가 다시 조여들어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북회담의 내용을 미국에 죄다 알려주고 그 훈수를 받을 뿐 아니라 대북한 정책도 미국 및 일본과 사전 협의해서 수립, 실시하고 있다. 또 그나마 한동안 유지하던 대북 적극자세도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그냥 움츠려 들고 말았다. 이번에 말썽이 된 비상경계 조치도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북한의 반응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없이 경솔히 실시했으며 또 미국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남북관계의 파탄을 무릅쓰면서 북과의 타협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적어도 북한의 눈으로 볼 때 한국정부는 민족문제를 자주적인 자세에서 다룰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기는 해도 북에서 기대했던 과감한 경제협력이 추진되었더라면 남북대화의 끈은 그래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국내 보수세력의 벽을 뚫지 못해 사회간접자본의 투자 같은 것은 전혀 추진할 수 없었다. 금강산관광사업도 소신껏 밀지 못하였다. 북한에서 요청한 전력지원문제도 해주고는 싶지만 미국이 반대하기 때문에 못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북에서 볼 때, 남한은 정치문제뿐 아니라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완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이다. 북한당국은 남한을 상대로 아무리 회담을 해보아야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은  커녕 경제적 혜택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으니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은 고사하고 남북회담도 더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최근 남북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자세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남북회담 결렬에 대한 북한측의 생각은 15일 평양에서 발표된 "제6차 북남상급회담에 관한 상보"에 잘 나타나 있다. 북한은 홍순영 남한 수석대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언동을 "망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남한의 자세를 "민족보다 외세를 우위에 놓고 그에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사대주의적 근성"이라고 논박했다. 또 "6.15 공동선언의 근본핵은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며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다음 남측은 이런 "근본정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립장과 자세를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기간이 사실상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북한이 이와 같이 남측의 기본자세와 수석대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한 것은 이제 김대중 정부와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그늘에 안주한 채 북한을 구슬러 보려던 소위 "햇볕정책"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남북문제는 56년 전 미국의 한반도개입으로 생긴 문제이다.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에도 남북문제의 걸림돌은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정책이다. 미국은 왜 한반도 분단의 지속을 원하는가? 그것이 주한미군을 무기한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왜 주한미군을 무기한으로 두기 원하는가? 북한의 남침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 남한의 많은 보수적 인사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또 주한미군이 있어야 통일된 후에도 동북아지역의 안보가 보장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다 미국의 최면술에 걸린 사람들이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그의 최근 저서 "Does America Need A Foreign Policy?" 에서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남북한의 접촉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적으로 해소되면 주한미군의 필요성 여부가 논의될 수 있으며, 주한미군이 철수되는 경우에는 주일미군의 주둔도 어렵게 됨으로써 일본, 중국 및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의 고양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미국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의 동북아 패권유지를 위해서는 주일미군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도 미군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일본도 주일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이러한 패권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민족의 최대과제인 통일을 포기하면서까지 주한미군을 붙들어 들 필요가 있겠는가? 미국은 또 우리와 숙명적으로 통일해야 될 상대인 북한과 반세기동안 적대관계를 계속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한 미국하고 종속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북한과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내년의 대선을 치르고 등장할 남한의 새 정부가 어떠한 대북정책을 내놓을 것인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과 평화의 회복 그리고 교류협력과 궁극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간의 적대감의 해소와 신뢰회복문제, 그리고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극복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북한과의 진정한 대화를 가지기 위해서 미국과의 종속적인 동맹관계를 청산 내지 재정립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것은 꼭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한에 사는 모든 국민들에게 부과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결단도 없이 남북대화를 하자는 것은 정부나 국민이나 다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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