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새벽에 잠이 깼다. 소변이 마려웠다. 나이가 들면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루로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조금 더 자야 한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옆에 누운 아내는 신돌석씨가 일어난 것을 모르고 곤히 자는 것 같다. 똑바로 누웠다가 아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반대쪽으로 돌렸다가 해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러고 나면 낮에 굉장히 힘들 텐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골목길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다. 힐끗 보고 지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젊은 남녀가 시시닥거리면서 걸어온다. 남자는 꽤 키가 크다. 여자도 키가 크다. 생긴 걸로만 보면 선남선녀에 들 듯하다. 이런 동네에 왜 와서 걸어 다닐까? 아니지. 이 동네라고 저런 애들이 없으란 법은 없지. 하지만 강남에서나 볼 듯한 분위기인데... 하면서 걸어가는데 남자 녀석이 신돌석씨를 툭 친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아씨, 뭐요 이거?”

 아씨라니, 아저씨를 빠르게 발음한 것인지 욕인지 구분이 안 간다. 설마 남녀를 구분 못해서 아씨라고 한 것은 아니리라.

 “왜 그래? 학생이 먼저 쳤잖아?”

 그냥 있는 게 그래서 한 마디 대꾸했다. 그런데 왠지 주눅이 들었다. 기분이 안 좋다. 왜 쪼는 거지?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이 두 년놈은 뭐하는 것들인가?

 “학생? 누가 학생이야? 이거 정말 재수 없으려니까.”

 이 정도 되면 신돌석씨도 그냥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신돌석씨가 젊을 때만 해도 학생이란 것은 그리 나쁜 호칭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자기를 어리다고 얕잡아 본다는 뜻인가? 아무튼 기분 나쁜 녀석이다.

 “젊은 사람이 뭐 하는 거야? 먼저 쳐 놓고서 웬 시비야?”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 녀석이 신돌석씨의 멱살을 잡았다. 옆에 있는 여자애는 말릴 생각도 안 하고 재밌다는 듯이 쳐다본다. 워낙 힘이 세서 어쩌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발로 가랑이를 찼다. 이 녀석이 어이쿠 소리를 치면서 손을 놓는데 여자가 들고 있던 가방으로 신돌석씨를 친다. 깜깜한 밤이라 아무도 없고 소리만 퍼져 나가는데 자동차 문이 열리면서 양복을 입은 녀석 둘이 나온다. 그리고는 신돌석씨를 다짜고짜 잡아서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뭔가 이상하다. 발버둥을 치자 머리를 바닥으로 쳐박는다. 젊은 남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째 이상하구나. 그런데 여기가 어디더라? 우리 동네는 아니고 모임이 있는 방에 가던 길이었던 것 같다. 신돌석, 까불지 말고 잠잠히 있어라. 낮고 굵은 목소리다. 팔을 뒤로 꺾더니 수갑을 채운다. 눈에 안대 같은 것을 씌운다.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쳐들고 옆에 있는 놈을 밀쳐 버렸다. 채 잠기지 않은 차문 밖으로 그놈이 나가떨어졌다. 됐다. 뛰었다. 그런데 가지 않는다. 왜 이러지? 계속 그 자리다.

 나자빠진 놈이 일어나더니 낄낄거리며 웃는다. 뒷덜미를 잡힌 듯하여 안간힘을 쓰는데도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몇 번 질렀을까? 누가 막 흔들었다. 눈이 떠졌다. 아내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본다. 왜 그래요? 흉몽을 꿨구나. 한참 동안 이불을 더듬고 방 안 가구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망 다니다 잡혀서 연행되어 가는 꿈이다. 가금씩 꾸는 흉몽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동안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꾸었었다. 신돌석씨만 그런 줄 알았더니 군대 갔다 온 사람은 거의 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하였다. 꿈속에서도 분명히 제대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다시 영장이 나오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느 때는 헌병이 잡으러 온 꿈도 꾸었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하고 수배 된 이후에는 도망가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번갈아 나타나고, 동시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군대 꿈은 빈도가 줄더니 거의 사라졌다. 도망가고 잡히고 하는 꿈은 최근까지도 나타났다. 처음에는 모임하던 방이 털리는 꿈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른바 안가에 끌려가거나 고문당하는 꿈이 많았다. 간밤의 꿈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검은 승용차를 타고 온 자들에게 끌려간 일은 없었다. 젊은 남녀가 한 통속이 되어 잡히게 만든 일도 없었다. 경험한 바에다가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들이 조합되고, 상상력이 보태져서 꿈으로 나왔다.

▲ [삽화-백소(白笑)]

오늘 오후에 지역 단체 사람들 몇 명이 남영동 인권기념관에 가기로 했다. 거기 해설사로 일하는 양숙씨가 이전에 지역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가 같이 가보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로 약속을 잡아 놓았다. 그것이 마음 깊숙이 감춰 두었던 생각을 끄집어낸 것일까? 한동안 덮어 두었고 잊힌 듯했던 것들이 다시 머리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영 개운치 않았다.

신돌석씨는 안가라는 곳에 끌려가 조사받은 일이 두 번 있었다. 90년대 초에 조직사건이 터지고 한동안 도망 다니다 붙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 경찰청 보안분실이란 곳으로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능이 상당 부분 홍제동으로 이관된 뒤였다. 신돌석씨 역시 홍제동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 전에 한 번 86년인가 끌려간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 생각에는 아마 그곳이 남영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 확실한 것을 알 수는 없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신돌석씨가 1호선 타고 지나다닐 때 많이 봤던 곳이다. 물론 그때는 그곳이 대공분실인지 뭔지 몰랐다. 다만 전철이 멈추는 곳 바로 앞에 검은 색으로 된 그럴 듯한 건물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곳이 멋있다는 것과 더불어 왠지 기분이 안 좋다는 것만 느꼈을 뿐 뭐하는 곳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없었다. 그러다가 노동조합 만들고 해고되고 이후 해고자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선배 노동자나 학생출신 활동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곳이 대공분실이란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남민전 조사도 했고, 학림 조사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 학림 조사 때는 학생들이 주된 조사 대상이었다지만, 노동운동의 선배들도 많이 끌려가서 조사받은 것으로 들었다. 그 중 몇 명에게는 그 경험에 대해서 듣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1985년 9월에 거기서 고문을 받고 재판을 통해 폭로하면서 일약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때는 신돌석씨가 해고된 직후였는데 김근태 의장에 대한 고문과 그의 모두 진술을 유인물로 해서 지역에 돌리던 때였다.

처음 그의 모두 진술을 읽었을 때 숨이 턱 막혀 왔다. 이런 일도 있는가? 그리고 그가 부인을 만나 발뒤꿈치 떨어져 나간 것을 건네고, 검찰청 창밖으로 보이는 인부들의 노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편으로는 나도 이제 운동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런 나쁜 놈들과 끝까지 싸우리라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곳에 끌려가면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가을이었다. 지역에서 노동자와 학생이 연대하는 가두투쟁(가투)이 계획되었다. 1985년까지 신돌석씨가 있던 지역에서는 가투라는 것이 없었다. 있어도 공단 입구에서 유인물을 뿌리다가 차도를 점거하는 것, 전봇대에 올라가서 선동을 하며 퇴근길의 노동자들이 구경하며 모이게 하는 것, 성당 등에서 추모제 등을 하고 나오면서 경찰과 몸싸움을 하여 부근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 따위였다. 그럴 때마다 신돌석씨는 앞장을 섰고, 그 결과 구류를 두 번이나 살았다.

1986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지역 내에 경비전투경찰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85년 말부터 추진되던 일이었다.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등 대도시에서는 이미 완비되어 가동되었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학생의 투쟁도 그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생들은 전투조를 만들어서 화염병을 던지며 강한 가두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헌의회(CA)그룹이 신길동에서 전경버스를 화염병으로 불태워 버리면서 전두환정권은 보란 듯이 그것을 신문에 대대적으로 싣고 학생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그 전투조가 신돌석씨 지역에 와서 가투를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고 하였다. 대개 그런 일은 학생운동출신 노동운동가들이 후배인 학생운동조직과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돌석씨로서는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다만 몇 날 몇 시에 하게 되었다는 것만 알게 된 것도 그들이 신돌석씨를 대단히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서노련이 주도하던 삼민헌법쟁취투쟁위원회 등과는 달리 노동자가 반드시 한 명 이상 주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등의 요구 조건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음 편히 시위에 참가하면 되었다.

그날따라 비가 심하게 내렸다. 비가 세차게 내리면 화염병이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최루탄 역시 물에 녹아서 별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시위 장소는 고개를 바로 넘으면 있는 시장 입구였다. 고개부터 장악하고 그 아래에서 올라오는 경찰을 향해 화염병이나 돌을 던지고, 반대로 돌아서 시장 쪽을 향해 아지를 하면 상당히 장시간 시위를 할 수도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아지는 아지테이션의 준말로 선동을 한다는 말이었다. 요즘 같으면 연설 또는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이후부터 시위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수 있는데, 당시에는 5분 내지 10분만이라도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할 수 있다면 성공한 시위였다. 물론 90년대 이후에도 그런 경우는 있었다. 그러다가 가두에서 오랜 시간 시위를 하게 된 건 90년대 말쯤부터이고, 그나마 야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2014년 헌재에서 집시법의 야간집회금지가 위헌이 된 이후이다. 물론 이것은 법과 제도로 그렇다는 것이고, 물리력으로 집회와 시위를 강행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보장되지 않을 때 광범한 대중이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그때까지 화염병을 던져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화염병 던지는 학생들의 뒤에서 보도블럭을 깨뜨리고 던지는 일을 하였다. 또 시장 통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즉석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연설은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선동적으로 짧게 해야 하였다. 주로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나눠 주는 화염병을 던져 보았다. 화염병이 날아가서 퍽 하고 터지며 불이 붙을 때 괜히 신이 났다. 하나 둘 던지다 보니 어느새 전면에 나서서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경찰이 구종점 쪽에서 몰려왔는데 역시 고개 위에서 아래로 던지는 화염병 때문에 좀처럼 올라오지 못하였다. 시간이 꽤 흘렀다. 아마 2-30분쯤 되었을 것이다.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그쪽에서 경찰이 올라와서 어느새 시장 입구의 대열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대원 쪽으로 온 전경기동대가 뒤쪽을 치고 올라온 것이었다. 아마 이들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해서 만든 88기동대인 듯했다. 이전의 전경기동대와는 달리 상당히 행동이 민첩하였다.

뒤쪽을 공격당하면서 별수 없이 전투조도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전경기동대와 사복체포조에 의해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신돌석씨도 함께 하던 사람들과 골목으로 들어가서 공단 쪽을 향해 뛰었다. 한참을 간 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으로 가자고 일행 중 누가 그랬지만 거기에 형사들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일단 흩어지기로 하였다. 노동자들은 여기 지리에 익숙하고 어디든 아는 사람 집이 있어서 갈 수 있겠지만 학생들이 걱정이었다. 길을 몰라 헤매다 검문에 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가 노동자들에게 학생들 한두 명씩 데리고 가자고 하였다.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남학생 하나가 신돌석씨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 김배영과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김배영은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학생 출신 활동가였다. 신돌석씨보다 나이는 두 살 어렸지만 조직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상부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때는 이런 사람을 지도선이라고 했는데 신돌석씨의 경우는 노동자 출신이고 나이도 많았기 때문에 꼭 그런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만나기로 한 곳은 서울이었다. 그리고 시간도 이미 많이 지났다. 하지만 가야했다. 당시에 조직에서는 2차, 3차의 약속까지 정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같이 가기로 한 학생에게 물으니 자기도 집이 서울이라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단 입구 쪽으로 걸어가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갔다. 공단 입구에서는 앉을 수 있어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정류장을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이 타서 만원 버스가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는 길에 있던 경찰서 앞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를 세웠다. 사복형사와 전경이 올라왔다.

이들이 비에 젖은 사람을 무조건 내리게 했다. 많은 사람이 끌려 내려갔다. 신돌석씨와 함께 있던 학생도 끌려갔다. 막아야 하는가 하다가 모르는 척 창밖을 보았다. 학생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이니까 그냥 지나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 가던 형사가 다시 왔다. 신돌석씨더러 신분증 좀 보자고 했다. 치고 튈까 했지만 그래 봤자 잡힐 상황이었다. 주민등록증을 꺼내 주자 이름을 몇 번 중얼대더니 내리라고 하였다. 지금 서울에 급히 갈 일이 있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팔을 잡아서 끌어내렸다.

그렇게 해서 경찰서로 갔고, 구류를 두 번이나 산 적이 있는지라 아는 형사들이 돌석이 또 왔냐고 한마디씩 했다. 끌려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강당으로 갔다. 신돌석씨는 무엇 때문인지 그들과 구분하여 정보과로 데리고 갔다. 전화에 대고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조사도 하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 1시간 가까이 지났을까. 무표정한 얼굴의 두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에게 끌려 밖으로 나가 검은 승용차에 올랐다. 눈이 안대로 가려지고 어딘가로 갔다. 한 시간 가까이 간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그곳에서 이전과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구타와 함께 물고문을 당해야 했다. 몇 시간 동안 집요하게 조철구가 있는 곳을 대라, 김배영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조건 모른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울면서 정말 모른다고 살려 달라고 하였다. 사실 몰랐다. 조철구는 물론이고 김배영이 있는 곳도 몰랐다. 김배영과 오늘 만나기로 했지만 그건 말해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리를 떴을 테고, 2차, 3차에서는 장소에 가 있으면 전화로 확인하고 오기로 했었다. 그러므로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참았다. 그러니까 한참 지난 뒤 고문을 멈추더니 신돌석씨만 남겨 두고 나갔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아까는 둘이서 했는데 이번에는 혼자였다. 이 사람은 앞선자들과 취조하는 투가 달랐다. 신돌석씨가 걱정된다는 투로 나왔다. 네가 그래 봤자 학생 애들한테 이용만 당한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사냐는 것이었다. 걔네들은 다 먹고 살 게 있다. 너는 이러다 감옥에라도 가는 날에는 앞으로 뭘 먹고 살려고 그러냐고 하였다.

“내가 잘 이야기해줘서 나가게 하겠다. 그러려면 나도 뭐라고 위에다 말해야 한다. 지금 현장에 있는 사람 하나만 대라.”

신돌석씨가 아는 현장에 있는 사람은 학생 출신이고 노동자 출신이고 10여 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돌석씨가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아는 집이라도 하나 대란다. 그의 끈질긴 유혹에 결국 아는 집을 하나 말해주었다. 그것을 신돌석씨는 지금까지도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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