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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①<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9)-제1부 해방 전야(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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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9  09: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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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만주사변·중일전쟁으로 급변한 독립운동 정세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최종 목표는 조국의 해방이었다.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민족군대를 조직해 조국으로 진격작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한 열망이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한 순간도 이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전쟁을 벌였고, 주권을 빼앗긴 뒤에는 해외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애국지사들은 1910년대 남만주(서간도)와 동만주(북간도), 러시아령 연해주를 중심으로 교육기관과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3.1운동 이후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대 내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무장활동을 전개하며 조국으로의 진공을 꿈꾸었다. 

그런데 1931년 9.18 만주사변과 함께 상황이 급변하였다. 일본군이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괴뢰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수중에 넣으면서 만주지역 독립운동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중국 관내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주도하는 무장유격투쟁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 중국 선양에 있는 9.18역사박물관(사진=임영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1930년 이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한 반일무장유격대 조직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반제통일전선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유격대를 근간으로 다양한 반일부대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중 인민의 연합부대였던 동북항일연군 등에서 핵심간부 등을 맡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민족주의계열의 조선혁명군·조선혁명당은 1936년까지 만주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무너졌고 남은 이들은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투쟁을 끝까지 이어갔다.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만주사변 이후 중국 관내로 이동한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 계열의 원로 민족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과 통일전선적 유일당이 주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김원봉의 의열단도 국민당 정부와 함께하면서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서 김구를 지원하거나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을 지원했다. 김구나 김원봉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군사조직의 창설이었으나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일단체를 지원하고 있는 사실조차도 공개하기 꺼려했다. 

그러나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만주침략 때는 소극적이었던 장제스가 적극 항일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장제스가 항일전에 나선 것은 중국 인민의 항일 요구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1936년 말에 발생한 ‘시안 사변’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성사된 점도 중요한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장제스에 이어 2인자로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동북군벌 장쉐량(장학량)은 1931년 9.18사변 당시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총 한방 쏘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중국 관내로 철수해 공산군과의 싸움에 내몰린 장쉐량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양후청(楊虎城)과 공모해 1936년 12월 2일 공산군과의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과 항일전을 압박하는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황급히 비행기를 타고 시안으로 날아온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중국공산당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937년 2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중단,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보장, 정치범 석방, 정치세력의 통합을 통한 공동항일체제 구축, 거국적인 대일항전 준비 등을 제안했고, 국민당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런 가운데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에서 일본군이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조작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시작했다. 7월 말 일본군은 3개 사단을 파병, 화북지역 공격에 나섰고, 1937년 말 일본군은 바오딩(保定), 다퉁(大同), 스좌장(石家莊), 바오터우(包頭), 타이위안(太原)까지 진격했으며, 마침내 전선은 남쪽으로 상하이, 항저우, 난징까지 확대되었다.(주1)

장제스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7.7사변 직후인 1937년 7월 17일 장제스 중국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루산(廬山)에서 국방위원회 회의를 열고, “최후의 관두(關頭)에 이를 경우, 희생을 불구하고 항전할 뿐”이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루산에서 국민당대표 장제스와 공산당대표 저우언라이 사이에 국공합작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8월 16일 국민당정부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전국을 4개 전구로 나누어 항전체제를 갖추었다. 8월 21일 「중·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22일 중국공산당 홍군 3개 사단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 및 신사군으로 개편되었다.(주2)

1937년 9월 23일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중국공산당의 지위를 인정하고,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국내 상황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항일전쟁의 동반자로서 대접받는 정치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11월 17일 중국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우한에서 소집된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는 「항전건국강령」을 채택했다. 전시총동원체제 확립을 목표로 국민 민의수렴 기구 구성, 농촌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책 마련, 경공업과 수공업의 장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등 일련의 민주화 조처를 시행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거국일치의 항전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주3)

   
▲ 일본의 중국 침략 지도

중국 관내 최초의 조선인 무장대 조선의용대

한인독립운동가들은 중일전쟁의 발발을 독립운동 진영에 유리한 정세 변화로 보고 이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당정부와 공산당정권은 공통적으로 국제 반제·반파시즘 연대투쟁의 슬로건을 내걸고 아시아 피압박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대만과의 공동항일을 강조했다. 한국과 대만이 일제의 식민지라는 현실과 더불어 지정학적 측면이 고려되었으며, 한국과 대만의 해방을 중국항일전쟁의 한 부분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한인독립운동가들은 이미 항일의지와 함께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기반으로 중국항일전쟁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한인들은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비롯하여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대일본 의열투쟁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한인공산주의들의 경우 중국공산당과의 광둥코뮌과 대장정 과정, 그리고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지역 동북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활동에서 한인 혁명가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일본어 구사가 능숙한 한인들의 경우, 대일본 첩보전과 폭파, 특수 활동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한인독립운동가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이자 연대세력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중 연합의 공동항일’ 구호에 무게가 실릴 수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중일 전쟁과 함께 중국 내 항일전선의 환경 변화를 한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파악하고 한인운동세력 내부의 단결과 통일에 노력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1937년 7월 16일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설욕보국(雪辱報國)의 시기가 도래”했다면서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유동열, 지청천, 이복원, 현익철, 안공근, 김학규 등 조선혁명당 출신들을 군사위원으로 선임하였다. 8월 17일에는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되어 미주 대한인국민회(후에 북미대한인국민회),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등 9개 단체가 참여하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일명 ‘광복진선’)를 결성하였다.(주4) 

   
▲ 조선의용대 결성(1938. 10. 10)

한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던 민족혁명당 등 좌파계열도 적극적으로 세력 규합에 나섰다. 1937년 4월 지청천, 조소앙 등이 탈당한 뒤 민족혁명당은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변경하고,(주5) 김원봉 중심의 지도체제를 확고히 구축하는 한편, 남경한족회, 조선혁명자 연맹 등 좌익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중일전쟁과 우익세력의 광복진선 결성은 좌익세력의 통합 움직임을 가속화시켰다. 1937년 12월 초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혁명자연맹) 등 세 단체는 우한에서 좌익세력의 전선조직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이하 ‘조선전선연맹’)을 창립하였다.

조선전선연맹은 강령으로 전민족적 반일통일전선 건립, 전민족의 혁명적 총동원, 중국항일전쟁 참가, 세계 모든 반일세력과의 국제적 연대형성과 함께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 국민기본권 및 남녀평등 보장 등을 제시하였고, 기관지 <민족혁명>을 한글과 중국어로 발행했다. 또한 조선전선연맹은 1938년 10월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결성했다. 조선의용대의 궁극적 목표는 “전국적 총폭동을 조직하고 군사행동의 실행을 준비”(주6)하여 조국으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보다 2년이나 앞서 조직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조직된 조선인 무장부대였다.

   
▲ 조선의용대 창건 기사

일본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가 만든 ‘국제의용군 조직방안’

조선의용대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에서 양성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의열단이 설립, 운영했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제1기생으로 서휘, 윤세주, 김세광 등 18명, 제2생으로 윤공흠, 허금산, 이대성, 홍순관 등 55명, 제3기생으로 장지민, 이홍염, 주연, 한청 등 36명으로 모두 109명이 배출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민족혁명당은 간부학교 출신들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성자분교)에 입학, 훈련시켰다. 이때 입학한 사람들 중에는 간부학교 출신 외에 문정일, 김학무 등 난징 중앙대학에서 온 사람들, 김창만, 이상조, 노민 등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온 사람들, 이유민, 김학철 등 상하이에서 온 사람 등 100여명에 달했다. 특별훈련반 졸업생들과 이 학교 교관들은 이후 조선의용대(군)의 핵심간부 대부분을 차지했다.(주7)

특별훈련반 학생들은 처음에는 중국인 학생들과 섞여 훈련을 받았으나 노력 끝에 조선인 학생들로 구성된 독립중대를 편성하는 상대적인 자주권을 인정받았다. 교관 중에 조선인으로 김두봉, 한빈, 윤세주, 김홍일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학습내용과 학습방법 문제를 두고 대립이 있었다. 민족혁명당 내부에는 1937년 초 최창익, 김학무 등 사회주의자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공산주의자전위동맹’(전위동맹(주8))이 있었는데, 이들이 중국공산당에 의거하여 동북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동북노선)을 제기하면서 노선투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비해 김원봉 등 민족혁명당 지도부는 국민당에 의거하여 서쪽으로 나아가자는 ‘서북노선’을 주장하였다. 이 노선투쟁 과정에서 전위동맹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 조선의용대 간부를 양성하는 밑거름이 된 난징시 소재 천녕사에 위치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훈련소 자리(사진=독립기념관)

1938년 5월 하순 특별훈련반을 졸업한 80여명의 조선인 청년들은 무장한 채 우한(무한)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최창익의 동북노선을 지지하는 특별훈련반 졸업생 35명을 포함한 49명이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했다. 이때 전위동맹의 간부였던 한빈 등은 최창익 등의 분열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혁명당과 함께 했다. 전시복무단을 결성했던 이들은 사실상 동북 진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금난으로 사실상 유지가 어렵게 되자 1938년 9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이름으로 다시 민족전선연맹에 합류했다.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에 따르면, 이 무렵 중국 국민당은 일본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주9)가 작성한 ‘국제의용군 조직계획방안’에 따라 조선인 군사대오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인 좌파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은 남의사(삼민주의역행사)가 담당했으나 1938년 6월부터는 군사위원회 정치부(1938년 2월 설치)가 담당하였다. 군사위원회 정치부는 ‘국제의용군 조직계획방안’에 따라 김원봉을 지원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역할을 추진했다. 1938년 7월 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은 아오야마 가즈오를 만나 ‘조선인 무장부대를 편성하여 중국 항전에 참가시킬 국제의용군 부대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듣고 “뜨겁게 호응했다.” 오래 전부터 군관학교 졸업생을 무장시켜 군대를 조직하고자 했던 김원봉은 독자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인들과 협력해 해결하기로 했다. 중국 국민당의 의도에 따라 아오야마 가즈오는 김원봉 등 조선인측과 긴밀한 논의를 진행하여 국제 의용군 창설안을 마련하였고 장제스의 승인을 얻어냈다.(주10) 

상대적이지만 자주성을 확보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는 조선전선연맹의 무장대였지만 국민당정부의 일정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조선의용대가 결성될 때는 2차 국공합작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중국 국민당도 유연한 입장이었고, 군사위원회 또한 좌우합작의 분위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조직의 결성 과정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지도위원회가 조직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하였고, 조직 창설 후에는 지도 기구로 기능했다. 지도위원회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4명, 민족전선연맹 산하 단체인 민혁당, 전위동맹, 해방동맹, 혁명자연맹의 대표인 김원봉, 김학무, 김성숙, 유자명 등 4명, 그리고 지도위원회 주임인 하충한(賀衷寒)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지도위원회의 상급기관은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였고, 또 그 위에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중연대기구였던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는 상대적이지만 자주성을 확보하였다.(주11)  

원래 아오야마 가즈오의 계획안에서는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이 조선인 군사대오를 지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김원봉 등은 이를 막아내고 일정한 자주권을 확보했다. 훗날 중국공산당 지역에서도 이 문제가 재차 반복되었으나 화복조선청년연합회와 그 휘하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자주권을 지키지 못하였다. 두 단체는 1941년 10월에 결성된 중국인·조선인·일본인 등으로 구성된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대동맹(반파쇼동맹)에 참가했는데, 1943년 중국공산당은 반파쇼대동맹이 독립동맹의 상급단체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의용대를 개편한 조선의용군의 지휘권을 독립동맹에서 반파쇼대동맹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반파쇼대동맹 주석은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주덕)가 겸임하였는데, 중공당은 반파쇼대동맹이라는 국제조직을 앞세워 조선인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던 것이다.(주12) 

중국 국민당은 장악하지 못한 지휘권을 중국 공산당은 장악했다. 김원봉 등은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중국측을 설득하였고 중국측은 조선인의 자주적 활동을 일정하게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애초 의용군으로 하려던 목표는 좌절되어 의용대로 결정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한국광복군의 경우 중국 국민당정부는 1941년 11월의 ‘한국광복군 9개준승’을 통해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통제 아래 두었는데 아마도 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 지휘 아래 놓이자 임시정부의 노투사들은 계속되는 문제제기를 통해 1945년 4월 지휘권을 회복하는 개가를 올렸다. 

민족과 국가 간의 자주성 문제는 이념을 넘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특히 남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문제는 늘 고민거리였다. 1921년 6월 러시아에서 있었던 ‘자유시 참변’도 그렇고, 1930년대 초중반 만주에서 있었던 항일연군의 ‘민생단 사건’도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상황에서 독자성, 자주성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독립투쟁 무장부대들이 이 문제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용대의 경우, 상대적 자주성이 확보되었다고 해도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거나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활동 범위와 내용 또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점령 지역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했는데,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 행위보다는 정보 및 무장 선전 활동을 주로 전개하였다. 1) 일본군의 정황 및 점령구역 내의 정보수집, 2) 일본군 포로의 취조 및 교육, 3) 일본군대에 대한 선전공작, 4) 중국군대 및 조·중인민에 대한 선전 활동 등이었다.

   
▲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지겸(1939. 10. 10).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의용대는 초기 지대부(支隊부)와 산하 2개 구대부(區隊部)로 편제되었으나, 1939년 10월 조직을 개편하여 지대는 총대(總隊)로, 구대는 지대로 각각 승급했고, 최초 2개 구대를 3개 지대로 확대하였다. 제1지대와 제3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원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제1구대는 장강(양쯔강) 이남의 제9전구사령부의 창사(長沙)에 배치되었고, 제2구대는 장강 이북의 제1전구사령부의 뤄양(洛陽)과 제5전구사령부의 후베이성(湖北省) 라오허커우(老河口)에 배치되었다. 1940년 2월경 조선의용대는 총대(總隊)본부 94명, 제1대(지대장 박효삼) 7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 63명 등 모두 314여명의 대원이 활동하고 있었다.(주13)

공산당군(팔로군)의 평형관 전투와 백단대전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군이 공격함으로써 중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일본은 근대화된 산업과 현대식 무기로 무장되고 잘 훈련된 30만명 이상의 정규군과 일본군에 의해 지휘되는 만주국군과 내몽골인 부대 15만명, 200여만명의 예비군, 세계 3위의 해군력과 육군·해군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중국 국민당은 4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기로 무장되고 제대로 훈련·조직된 정예부대는 장제스 직속의 10여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부대들은 지방군벌들이 장악한 부패하고 무능하며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 수준에 불과했다. 중국군은 변변한 해군도 없었고 항공력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주14)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중국군을 몰아붙였다. 1937년 7월 28일 일본군은 중국 29군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 7월 30일 베이징, 텐진을 점령하였고, 국민당군은 전략상 허베이(河北)지역을 포기하고 주력군을 양쯔강 유역에 집중시켜 방어전을 폈다. 장제스는 8월 7일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전면항전을 선언하고 12일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8월 13일 일본군은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국제도시이며 외교 및 해외 물자공급의 주요통로였던 상하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중일 전쟁은 화북지역을 넘어 화남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처음 일본군의 화북지역 공격은 순조로웠으나 중국 공산당군(팔로군)이 활동하고 있던 산시성(山西省) 지역에서부터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산시성은 군벌 옌시산(閻錫山)이 1911년 신해혁명 후 30여년간 지배하였는데, 대장정 이후 옌안에 수도를 정한 공산당의 홍군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뒤 중국공산당의 홍군(팔로군)은 중국국민혁명군에 편제되어 옌시산의 지휘를 받게 되지만, 국공합작이 무너지면서 양측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종전 후 국공내전 과정에서 공산당군에 패배한 옌시산은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넘어가야 했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는 국공합작에 동의했지만 국민당 내부의 강경파들의 반발로 쉽게 타결되지 못한 채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군의 화북지방 지방 침략(7.7사변)을 계기로 중국 본토 침략이 본격화되고 상하이 공격이 벌어지는 등 위기가 깊어졌다. 이에 9월 22일 중국 공산당이 ‘일치단결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자’고 선언하고, 다음날인 23일 장제스가 이에 호응하면서 국공합작이 완성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공농홍군은 독자적인 명칭을 포기하고 중국 국민혁명군 제8방면군, 제18집단군 등으로 편제되었으며 통칭 팔로군으로 불렸다. 

팔로군은 산시 방면 총사령관 옌시산의 제2전구에 편입되어 항일 작전을 펼쳤다. 또한 10월 12에는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던 홍군부대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약칭 ‘신사군’)으로 개편해 고축동의 제3전구에 편입시켰다. 국민당정부로부터 상당량의 무기와 장비를 지원받은 공산당은 팔로군 3개 사단과 신사군 1개 사단을 조직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부대 개편 이후 공산당부대들은 국민혁명군 팔로군 총사령 주더(朱德), 부사령 펑더화이(彭德懷), 참모장 예젠잉(葉劍英), 115사단장 린뱌오(林彪), 제120사단장 허룽(賀龍), 제129사단장 류보청(劉伯承), 신사군 군장 예팅(葉挺) 등으로 정비되었다.(주15) 

   
▲ 평형관을 통과하는 팔로군(사진=나무위키)

10월 25일 중국공산당의 홍군 지휘관 린뱌오가 이끄는 팔로군 115사단과 허룽이 지휘하는 120사단이 평형관(平型關)에서 매복해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처음 이 전투에 대해 주석 마오쩌둥과 총사령관 주더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린뱌오가 “대승은 거두지 못할지라도 패전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하며 임전태세를 보이자 허락했다. 린뱌오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트럭 300여대를 파괴했으며 야포 1문과 중·경기관총 20여정, 소총 3,000여 정 및 탄통 20여개, 군마 53필, 군복 1만여점, 식량 10트럭분, 일본화폐 30만 엔, 그밖의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노획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주16) 이 평형관 전투는 그 후의 ‘백단대전(白團大戰)’과 함께 중공군이 거둔 대표적인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백단대전이란 1940년 8월부터 1941년 1월까지 허베이(河北) 지역에서 벌어진 중국 공산당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를 말하는데, 이 전투에 팔로군 100개 연대가 참여했다고 하여 백단대전이라고 불렀다. 중국 팔로군은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광산, 수송 통로를 기습 공격하고 120사단, 129사단 등이 게릴라전을 펼쳐 일본군 2만여명과 황협군(일본의 중국괴뢰군) 5천여명을 섬멸하는 전공을 올렸다. 중국은 이 전투를 기념하여 영화 <백단대전>(2015)을 제작하였다. 이에 충격받은 일본군은 1941년 1월부터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 중국 영화 <백단대전> 포스터

대륙 오지로 철수해 버티기에 나선 장제스

일본군 지도부는 중일 전쟁을 시작할 때 3개월이면 장제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상하이 공략에만 3개월 이상이 걸려 11월 5일에야 가까스로 점령하였다. “상하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될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주17)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인적 물적 피해를 크게 입은 일본군은 그후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였고, 결국 난징 대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12월 초부터 시작된 난징 공격은 2주일만에 끝났으나 난징을 장악한 일본군은 12월 중순부터 약 6주간에 걸쳐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고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르며 30만명을 학살하였다.(주18) 

   
▲ 난징 대학살 기념관 앞의 학살자 30만명을 알리는 표지판.

1938년 1월 일본군은 화남지역에서 난징과 항저우를, 화북지역에서 산둥성 제난(濟南)을 장악하고, 산시성 방면에서는 타이위안(太原) 공략해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내륙으로 몰려들었다. 중국군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계속 밀렸다. 4월 6일 국민당군은 아이얼좡(台兒莊)에서 일본군 제10사단과 제5사단을 포위, 공격해 3만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는데, 중국 국민당군이 거둔 최초이자 유일한 승리였다. 일본군은 5월에는 쉬주(徐州)를, 6월에는 카이펑(開封)을 함락하고 8월에는 중무(中牟)·웨이쓰(尉氏)까지 진출했다. 

화남지역에서도 일본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수도 난징을 빼앗긴 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우한으로 철수하였고, 국민당정부는 우한 방위에 전력을 쏟았다. 일본군의 공세에 두려움을 느낀 장제스는 홍수를 이용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6월 9일 오전 9시 황허강 제방을 터뜨리자 엄청난 양의 흙탕물이 중국 동남부 일대의 대평원으로 흘러들었고 허난성(하남성)과 안후이성(안휘성), 장쑤성(강소성) 지역이 수몰되었다. 3개성 11개 도시와 4,000여개 마을이 물에 잠겼고, 200만명이 집을 잃었으며, 농작물도 모두 망쳤다. 이같은 고육책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3개월간 저지시켰으나 끝내 우한 방어전은 성공하지 못했다.(주19) 

9월 말 일본군은 우한 방어의 거점이었던 텐지아진(田家鎭)을 점령하고 우한의 진입로인 한커우(漢口)로 향하였다. 우한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장제스는 10월 25일 일본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20여일에 걸쳐 우한은 화염의 도시로 변했고, 패주하던 중국군은 후난성도 창사마저 불바다로 만들어 장제스는 국내외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전쟁 개시 1년 만에 베이징, 텐진, 칭따오, 상하이, 난징, 광저우, 우한, 창사 등 대도시와 동부 해안지역을 모조리 빼앗기고 해안선을 완전히 봉쇄당한 중국정부는 우한을 떠나 중국 내륙이 깊숙이 자리잡은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항전에 돌입하였다.(주20) 중국 국민당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해 내륙 깊숙한 오지로 철수하여 굳게 버티는 작전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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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임성모, 「만주국협화회의 대민지배정책과 그 실태: ‘동변도치본공작’과 관련하여」, 『동양사학연구 42』, 동양사학회, 100~101쪽

2)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92쪽

3) 한상도, 위의 책, 194쪽

4) 신주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1930년대 정당통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한국근현대사학회편), 국가보훈처, 1999, 529쪽 

5)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한국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미주대한인독립당 등 당시 활동하고 있던 대부분의 항일단체들이 참가한 유일당 성격이었다. 당 명칭을 두고 논란을 벌이다가, 중국정부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를 상대로 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영문명으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내에서는 ‘민족혁명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창당 얼마 뒤부터 김원봉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민족주의계열이 이탈하자 1937년 4월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했다. 민족혁명당 창당을 반대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고수파는 1935년 11월 독자적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합쳐져 충칭임시정부의 여당이 되는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6) 신주백, 위의 글, 530쪽

7) 염인호,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역사비평, 1994.8, 171〜173쪽

8) 전위동맹의 모체는 ‘10월회’였는데 핵심 멤버인 이익성, 왕자인, 김학무, 문정일 등은 원래 김구 휘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중첩자였던 이웅을 암살한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것이 드러나 김구 진영에서 배척당하자 모두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염인호, 위의 글, 173쪽) 

9) 본명은 구로다 요시하루(黑田善治). 일본 동경 출신으로 명치대학 법과 전문 중퇴하고 은행 근무하면서 고고학·인류학 연구. 1933년 5월경부터 일본의 전투적 무신론자동맹에 참가해 1934년 2월 검거, 8월 기소됐으나, 전향해 1935년 9월 징역 2년 집유 4년 형 받고 출옥. 중일전쟁 직전인 1937년 3월 중국 상해로 망명, 상해 함락 후 홍콩과 베트남에서 활동함. 그 후 무한에서 활동했는데 일본군의 남경 학살을 폭로하는 데 앞장섬. 그의 배후에는 일본주재 중국공사관 참의를 지낸 중국인 실력자 왕봉생(王芃生)이 있었고, 아오야마의 ‘국제의용군 계획안’에는 그의 의도가 많이 담겼다고 한다.(염인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독립기념관, 2008, 28〜29쪽)

10) 염인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독립기념관, 2008, 23〜33쪽

11) 염인호, 위의 책, 34〜36쪽

12) 염인호, 위의 책, 37쪽

13) 김영범, 「조선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478〜498쪽;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조선독립동맹 자료 1』, 거름, 1986, 20〜21쪽

14) 나창주, 『새로 쓰는 중국 혁명사 1911-1949』, 들녘, 2019, 464〜466쪽

15) 나창주, 위의 책, 481〜482쪽

16) 나창주, 위의 책, 482〜485쪽

17) 나창주, 위의 책, 471쪽

18) 자세한 내용은 아이리스장,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아이리스 장,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미다스북스, 2014); 저우얼푸, 『난징함락과 대학살(총4권)』(이담북스, 2015); 가사하라 도쿠시, 『남경사건』(어문학사, 2017); 장롄홍, 쑨자웨이, 『난징대학살 진상과 역사 기록을 담다』(민속원, 201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9) 나창주, 위의 책, 486〜489쪽

20) 나창주, 위의 책, 489〜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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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20-06-30 08:34:21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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