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요양원에 계신 고모를 찾아뵌 것은 길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일찌감치 한여름 날씨가 되어 버린 5월 연휴 때였다. 그 동안 코로나 19 때문에 면회가 안 되었다가 풀렸는데 남들은 그 동안 좀이 쑤셨다면서 산에 가느니 바다에 가느니 제주도에 갔다가 돌아온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판에 고모를 뵈러 간 것이었다. 고모가 요양원에 들어가신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그 동안 신돌석씨는 고모가 요양원에 들어가자마자 딱 한 번 찾아뵌 것이 전부였다. 하나밖에 없는 고모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한 일이었다. 이번에 새로 요양원을 옮기셨다고 해서 꼭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음먹자마자 코로나 19로 면회가 금지되어서 두 달 넘게 못 가다가 이제야 가게 된 것이었다.

신돌석씨에게는 친가 쪽이라고는 고모와 작은아버지뿐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일찍부터 멀어져서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러나 고모는 달랐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뒤에도 부모 없는 조카들을 당신께서 보살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주 드나드셨다. 그렇다고 고모가 신돌석씨 형제에게 크게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 고모 자신도 힘들게 사셔서 도와줄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모가 새로 들어가셨다는 요양원은 꽤 큰 곳이었다. 6층 건물 중 4, 5, 6층을 쓴다고 하였다. 고모는 5층 건물에 계셨다. 그 층만 해도 방이 10여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요양원 하면 자그마한 곳만 생각해 왔다. 지난번에 계셨던 요양원은 오피스텔 같은 5층짜리 건물 중 2, 3층을 쓰는 곳이었다. 너무 좁았다. 어르신들이 거실 같은 곳에 나와 있는데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요양원이 늘었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요양원이 많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신돌석씨 동네에도 방문 요양을 하는 곳이 두 곳이나 있고, 마을버스 타고 대로로 나오면 도시 곳곳에 요양원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빌딩 속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으로, 공간이 좁아 보였다.

신돌석씨가 요양원을 처음 가 본 것은 벌써 30년도 더 지난 1980년대 후반이었다. 1987년 이른바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되면서 신돌석씨가 있던 지역에도 여기저기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조가 생긴 곳은 거의 대부분 파업에 들어갔다. 신돌석씨는 두 해 전에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된 상태였다. 노동자의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신돌석씨처럼 노동자 출신으로서 현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을 절실히 찾던 때였다.

그렇게 파업사업장을 지원해 주다가 수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었다. 파업사업장을 지원해 준다고 수배가 된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당시에는 노동쟁의조정법에 ‘제3자 개입금지’라는 것이 있었다. 회사측은 경제단체, 변호사, 경찰 심지어는 노동청의 도움까지 받는데 노조는 일절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악법이지만 그 조항이 없어지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의 수배는 그 뒤 조직사건 때 수배되었던 것과는 달리 애매한 상태였다. 잡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수배가 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자연히 긴장이 풀어지면서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였다. 잠은 주로 파업사업장에서 잤다. 그런데 9월이 되면서 파업사업장들이 파업을 거의 풀었다. 그런 상태에서 추석 연휴가 되었다. 집에 갈 수도 없고, 몇 남지도 않았고 인원도 별로 없는 파업사업장에 그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아는 선배를 따라 충주에 내려갔다. 그 선배가 소개해 준 목사 집에 며칠 있었다. 목사는 아직 결혼 전이었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 편했다. 그 교회는 대대로 전도사만 있었다고 한다. 시골 교회라서 목사들이 잘 안 오려고 한다는 것이 신도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목사가 내려온 것이었다. 서울에서 부목사를 하던 사람인데 시골에서 목회를 해보려고 내려온 것은 아니었고, 일단 규모 있는 교회에 가기 전에 과도기로 잠시 생각도 정리할 겸 해서 온 것이었다. 신도들로서는 이런 목사를 붙잡을 필요가 간절한 듯하였다. 신도들이 추석인데도 혼자 있는 목사님을 그냥 둘리가 없었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신도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로 하였다.

추석날 아침 그 목사와 함께 간 곳이 그 교회 신도가 운영하는 양로원이었다. 그때는 요양원이란 말은 없었고, 양로원이란 말만 썼었다. 요즘은 양로원은 돈 많이 내고 가는 곳이라고들 하는데, 당시에 양로원에 대한 이미지는 마치 고려장 당해서 가는 곳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은 충주 시내로부터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양로원을 구경시켜 주는데 한 바퀴 돌면서 신돌석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토굴 같은 곳에 사람들을 넣어두었고, 열쇠까지 채워 놓은 상태였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고 물어 보려고 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런 눈치가 보였는지 원장이란 사람이 변명하듯이 말을 했다.

“마귀가 들린 사람들이 우리 시설에 오지요. 마귀 들린 사람들한테는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마음 약하게 먹었다가는 우리까지 마귀에게 잡아먹히게 되니까요.”

마귀가 들린 사람이라는 것은 정신 이상인 사람들이라는 말일 텐데, 멀쩡한 사람도 저런 데 가두어 놓으면 이상하게 될 것 같았다. 그때 보았던 느낌 때문인지 신돌석씨는 그 뒤 오랜 기간 동안 양로원 혹은 요양원에 대해 사람이 갈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고모가 이번에 옮긴 요양원을 보니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넓은 공간에 방도 많이 있고, 한 방에 세 명 정도씩 침대가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어나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었고, 텔레비전 시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요양보호사인 듯한 사람의 선창에 따라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함께 부르는데 장관이란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절규하는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부흥회를 하는 듯해 보이기도 했다.

▲ [삽화-백소(白笑)]

이 요양원에 오기 위해 보호자인 막내아들 현철이가 수도권에 있는 요양원을 죄다 뒤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찾아낸 곳이 여기인데 좋은 조건에 비하면 비용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6개월 대기라고 해서 일단 작은 곳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 들어갔던 요양원은 망했단다. 영세한 요양원들이 많아서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그 뒤로도 세 차례나 요양원을 옮겼다는 것이 현철이의 말이다.

고모는 거의 말씀을 못하셨다. 안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기력이 쇠해서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 요양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휠체어로 간신히 이동하는 것만 그렇지 말씀도 똑똑하게 했고 인지능력도 분명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렇게 기력이 쇠해서 이제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말씀도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치매 증상까지 나타나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도 잊어버린단다.

고모에게는 슬하에 2남 1녀가 있다. 첫째 현규는 신돌석씨와 같은 58년 개띠이다. 어렸을 때 참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외국에 살아서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둘째 현주는 두 살 아래인데 전라도 여수에 시집가서 역시 최근에는 거의 보지 못한다. 막내 현철이가 64년생인데 수원에 살고 있다. 요양원에 가끔씩이라도 가서 고모를 돌보는 것이 현철이 부부이다.

오늘도 현철이 부부와 함께 요양원에 왔다. 문득 SNS에서 본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요양원에 들어가면 울고불고 하는 것은 딸이고, 아들은 먼발치서 보기만 하며, 며느리는 문간에서 핸폰만 보고 있다고 한다. 아들 아들 해봤자 늙어서 거동 못할 때 슬퍼하는 것은 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 아들 하며 살아온 노인 세대들이 당해도 싼 것이라는 이야기다.

댓글에는 반대 견해도 있다. 며느리가 문간에서 핸폰 보고 있는 것은 요양원비 이체하느라 그런 것이란다. 딸들은 와서 울기만 하지 돈 내라고 해도 돈도 안 내고 노력 봉사도 안 한단다. 하긴 고모네를 보아도 직접 모시지는 않아도 가끔이라도 챙기고 보호자로 있는 것은 아들과 며느리이다. 딸이든 아들이든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붕괴되어 가는 우리네 가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했었다.

“엄마, 이 사람 누구예요? 알아보겠어요?”

현철이가 신돌석씨를 가리키며 말하자 맥이 풀려 있는 듯한 고모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돌... 석... 이...”

목이 쉬어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고모가 신돌석씨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기억하는구나. 신돌석씨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고모가, 그렇게 강하던 고모가 이렇게 간신히 이름을 부를 정도로 기력이 쇠하다니. 정말 인생무상이구나.

고모는 일찍 과부가 되었다. 고모부가 트럭을 몰았는데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때 막내 현철이가 고모 뱃속에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현철이는 유복자인 셈이었다.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이었다. 고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만삭인 몸으로 비통하게 울던 고모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고모가 현철이를 낳았을 때의 기억도 난다. 신돌석씨의 집에 와서 낳았다. 그래도 오빠 집이니 친정이라고, 방 두 개밖에 없는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와서 아이를 낳았다. 그 때문에 형은 고모가 구완을 마치고 일어날 때까지 외할머니 댁에 가 있어야 했다.

현철이를 낳았을 때 그래도 아들이라고 좋아하는 고모를 보고 신돌석씨가 왜 이렇게 못 생겼냐고 해서 고모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떠오른다.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후회가 들었고, 그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물론 현철이는 못 생기지 않았다. 아니 평균 수준 이상으로 잘 생겼다. 다만 어린 신돌석씨가 갓난아기를 보니 그냥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고모는 고모부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랬지만 돌아가신 뒤에도 억척스럽게 살았다. 신돌석씨네 집에서 산 능선을 따라 한참 가다 밑으로 내려가면 용산 쪽에 시장이 있었다. 거기서 고모는 주로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했다. 이것저것 주로 채소 종류를 팔았는데, 생선을 팔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가게 하나를 마련했다. 그때 기뻐하는 고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요양원에는 대개 간호조무사가 근무하고, 요양보호사 일도 같이 한다고 들었다. 여기는 간호사인지 간호조무사인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다. 다만 간호사로서 일이 많아서 그런지 요양보호사와는 일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듯했다.

간호사가 고모의 이불을 들춰내더니 엉덩이 쪽을 보여주었다. 현철이 처만 가만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연세가 많다고 해도 아들과 조카가 벌거벗은 엉덩이 부분을 본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항문 부분이 짓물러졌는데 지금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이어서 발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도 욕창이 생긴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매일 살핀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현철이와 현철이 처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발에 조금 흉터 같은 것이 보였다. 간호사가 처치를 하고 거즈를 대주었다. 이렇게 누워 있는 분들에게 욕창이 생기면 치명적이란 말은 신돌석씨도 많이 들어왔었다. 그래도 빨리 발견하고 처치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 요양원은 믿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는 요양원에 들어오기 전까지도 혼자 살았다. 그때까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었다. 현철이와 현철 처가 같이 살자고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고모는 막무가내였다. 아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다소 괴팍한 성정 때문에 며느리와 충돌이 생길까 저어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3년 전에 화장실에서 넘어졌다. 안타까운 것은 혼자 살았기 때문에 넘어져서 한참 동안 못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서 방에 가서 누웠지만 꼼짝하기가 힘들었다. 이틀 뒤에야 현철이가 알고 달려왔다. 현철이나 현철 처도 전화도 자주 하고 들르기도 하는데 매일 전화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화를 안 받아서 달려 와보니 고모가 누워 있는 것이었다. 바로 119를 불러서 병원에 갔다.

고관절이 부러졌다고 한다. 부러진 정도가 거의 분쇄된 상태인 모양이었다. 바로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대형병원에서는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그 병원에서 소개해주는 중간 정도의 전문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도 말들이 있었다. 여수 사는 현주가 올라와서 노인네 수술을 해서 잘못 되면 어떻게 하냐고 야단을 부렸다. 하지만 결국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관절이 부러져서 옴짝달싹 못하는데 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워서 시체가 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신돌석씨는 가타부타 의견을 내지 않았다. 형도 선옥이도 한 다리 건너인 조카들이 괜히 끼어들기 그래서 현주와 현철이 주고받는 말만 지켜봤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뒤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비용이 너무 들었다. 요양병원이라고 해서 나은 것도 없었다. 오히려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래서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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