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시사기획 창’의 <밀정> 방영 탓에 이름이 알려진 애국지사 이정(李楨)은 1895년 12월 2일 함북 경원 안농면 양동리 출신으로, 본관은 성주다. 1963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1975년도 국립서울현충원 내에 위패가 설치되었다.

▲ 애국지사 이정(1895~1943). [사진제공 - 이상욱]

공교롭게도 밀정 이정(1883~1943)과 한자도 같고, 북로군정서 활동도 겹치고, 사망연도까지 같은 바람에 일시 혼동이 있었다. 밀정 이정은 충북 음성 출신으로 본관은 합천, 호는 회봉(晦峯)으로 동명이인이다.

이정 지사는 1908년 3월부터 3년 간 향리에서 한학을 배웠고, 일제 강점 후 민족교육의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왕청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했다.

명동학교는 백포 서일(1881~1921)이 설립했는데, 서일 역시 경원 출신으로 그의 고향 금희동(지금의 류다섬리)과 양동리는 이웃 동네였다. 이정은 훗날 북로군정서 총재가 되는 서일의 제자였던 것이다.

1914년 7월 8일 서일이 주관하는 동도본사에서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8년 11월 26일 영계와 참교 교질을 받았다.

이정은 연길현으로 건너가 광성학교 사범반에 입학해 1917년 4월 졸업했다. 이동휘가 세운 광성학교는 원래 간민교육회의 기관 학교로서 간도에서 가장 과격한 항일학교였다.

1920년 3월 다시 왕청현으로 돌아와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속성과를 수업하였고, 1921년 7월 왕청현 사립 융동소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8년 간 재직했다. 1930년 4월 왕청현 공립제10소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6년간 시무했다. 1936년 5월부터 공무원으로서 영안현 신안진 농무계 사무원으로 2년, 1938년 3월부터 수도계원으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백산 안희제가 회장으로서 1939년 10월 3일 조직한 대종교교적간행회에 12월 24일 입회하였고, 1942년 10월 1일 지교로 승질되고 대종교 중진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의 민족정신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자 임오년 곧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과 동시에 대종교 핵심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 끝에 10명의 순교자가 발생한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오교변’이라 한다.

당시 순교자에는 독립운동가 안희제, 의사학자 김두종의 친형 김서종, 대종교 초대 교주 나철의 친아들 2명이 포함되었다.

이정은 1942년 11월 19일 자택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원래 신체 건강한 장년이었으나 4개월 간 고문을 받아 병들고 야윈 상태로 병마에 신음하다가 1943년 7월 20일 영안현 액하감옥 병감(病監, 병든 죄수 감방)에서 48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당시 액하감옥에 갇혀 있던 교주 윤세복(1881~1960)은 이정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시 ‘이정을 곡함(哭 李禎 棣)’을 남겼다.

福堂何日始聞名 복당(감옥)에서 어느 날 비로소 명성을 들었으나
脈脈相看不識情 하염없이 서로 보면서도 마음을 몰랐었네.
一死報倧君有志 한번 죽어 대종교에 보답하는 뜻을 그대는 가졌는데,
愧吾無德又無誠 내 덕도 없고 정성도 없음이 부끄럽구나.

임오교변 사건 희생자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대부분 높은 훈격을 받았다.

<대종교 순교자 10인(일명 임오십현) 명단> (*포상 연도순)

1.안희제 1962 독립장

2.강철구 1963 독립장

3.이정 1963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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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서종 1991 애국장

5.나정련 1991 애국장

6.나정문 1991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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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오근태 1995 애국장

8.이창언 1995 애국장

9.이재유 1995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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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상익 1996 애족장

※ 이용태(당시 생존지사) 1990 애국장

 

▲ 최준항(1898~1985) 여사. [사진제공 - 이상욱]

3살 연하의 미망인 최준항(1898.5.5~1985.8.29)과 유족들은 지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신안촌 영가툰 서산에 안장했다. 이후 5남 3녀의 자녀들을 키우느라 최준항 여사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4일 선생의 기일을 맞아 장남 이철원 자택에 윤세복 이하 교인들이 모여 첫 치제식(제사)을 지냈다. 안타깝게도 중국의 개발로 인해 유해는 유실되고 말았다.

1946년 중국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가 서울로 환국하고서 윤세복은 194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을 기해 순교십현의 살신성인 정신을 받들고 찬양하는 뜻에서 교당 전면 오른쪽에 십현감실을 설치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지켜져 오고 있다.

유가족들은 비록 중국에서 태어나 여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러하듯 어렵게 생활했었고, 1998년, 2008년 조국을 찾아 귀화한 뒤 현충원 선조의 위패 앞에 모여 매년 3회 제례를 지내며 애국지사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한국 시민으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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