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건을 응시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갖출 때, 진리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 (알랭 바디우) 


 바람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이면 ‘사건’을 만난다.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스커트 자락의 상쾌!’ 

 남자인 나도 이런 ‘상쾌’를 만난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전에 오지에 갔다가 옷을 다 벗은 상태로 ‘원시인’이 되어 깊은 산속을 걸어 다닌 적이 있다.     
 
 이 때 느낀 게 바로 ‘상쾌!’였다. 온 몸과 정신이 함께 깨어난 상태. 그래서 삼라만상과 하나로 어우러진 상태. 

 아마 석기 시대의 원시인들은 이 상쾌를 일상적으로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몸과 정신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나아가 삼라만상과도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 환풍구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스커트가 휘날리는 마를린 먼로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그 몸짓과 얼굴 표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때 마돈나는 상쾌를 느끼지 못했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도 상쾌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 여성의 몸을 탐하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그 시선이 이제 세계화되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감각은 시각 중심이 된다. 다른 감각들은 다 죽이게 된다. 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소리, 냄새, 감촉들은 얼마나 불쾌한가! 오로지 두 눈만 똑바로 뜨게 된다. 인간에게 ‘시선’만 남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감이 깨어난 정신은 지혜의 빛이 되지만, 시선만 남은 정신은 ‘도구적 이성(理性)’이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이용하려는 정신이 된다는 것이다. 

 마를린 먼로는 스커트 자락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는 사건을 만나 스스로 탐욕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이 탐욕의 대상을 사진을 통해 탐닉하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는 사건을 통해 진리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 인간은 진정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과연 시각 중심의 사고에 젖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건들을 통해 진리를 만날 수 있을까? 사건을 응시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갖추지 못하면, 진리의 본질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해를 많이 한다고 한다. 항상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상쾌를 느낄 수 있을까? 몸에 칼을 그을 때서야 비로소 상쾌 비슷한 느낌이 올 것이다.  

 강의 시간에 한 수강생이 질문을 한다. ‘왜 진보 인사들이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나요? 일반고를 살리자고 하면서요.’ 

 나도 이런 사례를 알고 있다. 학생 운동을 하고 지금도 진보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모가 딸을 특목고에 보내려 고액과외를 시켰다. 딸은 강남식 과외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가출해 버렸다.       

 나는 이것이 상쾌를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얘기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도시문명에 젖어 ‘더불어 사는 상쾌’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특목고에 가고 스카이 가서 엘리트가 되어 이 세상을 잘 이끌면 되지 않느냐고. 

 시각 중심의 사고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사고를 넘어설 수가 없다. 나중에는 국민들이 ‘개돼지’여서 잘 이끌 수가 없다고 변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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