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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이 편지는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늦봄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첫 공개하는 박용길 여사와의 편지
강민화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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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9  00: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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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화 / 재일동포, 대동연구소 소장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재일동포 강민화 대동연구소 소장이 본사로 문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여사와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두 건과 사진 등을 보내왔다. 이 중에서 강 소장이 박 여사에게 보낸 편지는 문 목사 10주기에 즈음해 재일동포 잡지 『통일평론』에 실린 바 있으나 원본은 일본어였다. 따라서 두 건의 편지와 특히 액자를 담은 사진(비록 사진이기 하지만)은 사실상 최초 공개인 셈이다. 문 목사 방북 30주년과 서거 25주기에 즈음해 귀한 자료를 공개한 강 소장에게 감사를 드린다. / 펀집자 주

늦봄 문익환 목사가 1989년 정초에 남북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한 김일성 주석의 초청에 응해서 방북한 때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돌이켜 보면 내가 기자시절에 평양을 방문하고 귀환하는 도중에 도쿄에 들린 문 목사와 기자회견장에서 대면한지 30년, 내가 지어낸 책 『인간 문익환』의 인연으로 박용길 여사와 도쿄에서 처음으로 만난지 26년 세월이 흘렀다.

문 목사의 방북 30년을 맞으면서 나는 문 목사의 5주기(1999년)를 맞고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글과 이 글을 읽고 박용길 여사가 나에게 보내준 편지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 박용길 여사가 문익환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구절을 자필로 옮겨 써서 보내준 액자. [사진제공-강민화]

 

늦봄 문익환 목사님께

   
▲ 내가 지어낸 책 『인간 문익환』(1992. 일본 츠게쇼보=柘植書房). [사진제공-강민화]

문익환 목사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1989년 4월, 평양에 가셨다가 서울로 돌아가시는 도중 일본에 들리신 목사님께서 도쿄 와세다(早稲田)에 있는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지셨을 때 목사님의 바로 앞에 자리 잡았던 재일동포 기자입니다.

그때부터 벌써 10년, 또한 목사님께서 가신지 5년이 지나갔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저승이란 어떤 곳인가요?

그곳에서도 사상이나 체제의 차이 때문에 동족끼리 서로 다투거나, 큰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일에 간섭하는 일이 있습니까?

영혼이 된 동포들은 그곳에서도 분단되어 있습니까?

생전에 마지막 옥중생활을 보내시던 중에 손녀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옥살이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하셨던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혹시 그곳에서도 낙천적으로 지내고 계시는지요?

목사님의 방북 10돌을 맞이해서 서울에서는 무슨 행사가 열리는 줄로 알았습니다만 박용길 장로님께서 별로 계획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기일인 1월 18일, 서울에서는 “평양가는 차표를 다오”라는 주제 밑에 서울을 출발한 ‘늦봄호’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가는 내용의 가상극이 상연되었다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내에는 목사님의 육성이 흘렀다지요.

문 목사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에 대해서 “민주화•통일 운동의 지각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의 호 ‘늦봄’도 그에 유래한다지요?

그때까지는 구역성서 번역에 몰두하셨던 목사님께서, 과거에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냈으며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말한 장준하의 영향으로 민주화•통일 운동에 나서게 되신 것은 1976년에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3.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하셨을 때부터였습니다.

아버님이신 문재린 선생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시고, 죽마고우 윤동주의 영향으로 시인이 되신 목사님께서는 이때부터 ‘장준하의 대타’로서 민주•통일 운동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문익환’이라는 이름에 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시기에 첫 옥살이를 하셨기 때문에, 훗날에 유명해진 박 장로님과의 편지 교환도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아직 풋내기 기자라서 옥중에 계신 목사님과 바깥사회에 계신 박 장로님 사이에 “당신의 사랑 늦봄”, “당신의 봄길”이라고, 간수도 부러워했던 편지가 오갔던 사실을 알 리도 없었습니다.

   
▲ 1989년 북한을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는 문익롼 목사. [사진제공-강민화]

지금도 이따금씩 목사님의 평양방문에 관한 녹화를 보면서 혼자 감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만, 목사님께서 양 손을 높이 드시고 김일성 주석님에게 다가가시고는 두 분이 뜨겁게 포용하신 장면은 볼 때마다 깊은 감동을 느끼군 합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마십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치욕입니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잘하면 되겠지요.”

이것이야 말로 저 역사적인 회담 내용이 집약된 대화이자 결론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공산주의자와 종교인이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두분 사이를 가르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회담 석상에서 연방제를 한꺼번에 하겠는가 아니면 단계적으로 하겠는가, 남북관계에서 정치, 군사 문제의 해결을 우선해야겠는가 아니면 여러 분야의 교류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겠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기탄없는 얘기가 오가고 나중에는 주체사상을 둘러싼 논쟁까지 벌어졌는데도 오히려 두분 사이의 신뢰는 더 두터워졌습니다. 이것은 두분 사이에서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자고 하는 합의가 처음에 벌써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앞으로 남북의 당국자나 각계각층이 대화나 회담을 할 때 서로가 어떤 자세로 그에 임해야 되겠는가를 두 분은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목사님의 방북과 주석님과의 회담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만 목사님 생각은 어떠하신지?

그만한 쾌거를 이루신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종교인이자 시인이고 통일운동가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통일염원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인간 문익환’으로서 저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가 도쿄의 기자회견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정신없이 메모와 녹음에 쫓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우연히 목사님과 눈이 맞았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파이팅”이라고 말씀하시듯 시익 웃으셨습니다.

목사님과 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목사님의 5주기에 즈음해서 서울에서 출판된 『늦봄 문익환전집』이 며칠 전에 보내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생전에 쓰시거나 말씀하신 자료들과 창작하신 작품들을 책으로 엮으니 12권의 대작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1980년대 후반기부터 남, 북, 해외를 불문하고 겨레의 통일 기운이 전례 없이 높아갔으며, 도중에 남북이 유엔에 별도로 가입했는데도 남북관계는 국가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관계이며, 7.4공동성명에서 제시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재확인한다고 서문에 명기된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표되었던 나날이.

그러한 가운데 문 목사님의 방북이 단행되었으며 또한 “통일은 다 됐어”를 비롯한 목사님의 명언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사실 목사님 말씀대로 그 무렵에 남북 축구경기와 합동음악회, 탁구 통일팀이 실현되고 스포츠와 예술이라는 분야에 한정되기는 했습니다만 남, 북, 해외 동포들은 모두 처음으로 통일이라는 것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저 역시 그때 탁구 통일팀을 동행취재하면서, “통일은 이미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도 있는 완료형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라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감동 속에서 미숙하나마 제가 지은 책 『인간 문익환』도 세상에 나왔습니다.

책이 출판되었을 때 이제는 세상을 하직하신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서 이 많은 자료를 모았느냐? 수고 많았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전집을 펼쳐보니 내가 모우고 책으로 편집한 자료들 따위는 그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만나 뵈었던 박 장로님께서는 이것을 훌륭한 책이라고 하시면서 “감사합니다”고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날을 계기로 저와 장로님이 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훗날에 편지가 오가게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책에 대한 목사님의 소감이라도 듣고 싶어서 목사님께서 가석방되실 때마다 은근히 기대했었습니다만 끝내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쉽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과 목사님의 통일염원에 대한 주변의 평판은 초기에만도 “소영웅주의자” 혹은 “감상적 통일론”이라고 좀 차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문 목사님께서 통일을 외치셨던 그때 상황을 돌이켜 보면, 사람들의 통일 열의가 높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통일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심지어 범죄시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여섯 번이나 투옥되신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힘든 상황이 더 많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통일염원에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용의 마음과 동포애가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동포애가 목사님을 기도회나 강연회뿐 아니라 위험한 집회장이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투쟁마당은 물론, 사람들이 멀리 하는 빈민가, 나아가서는 분신자살 한 사람의 불에 탄 시체 곁에까지 가시게 떠밀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으로 하여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고귀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름을 분노와 슬픔을 담아 “○○○ 열사여!”라고 절규하시게 했습니다.

또한 그 관용의 마음이 목사이심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앞에서 합창하고 승려들을 숙연하게 하셨으며, 평양에서는 북에서 영웅이라면 민족의 영웅이라고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시고 사람들을 감동케 하셨습니다.

사회주의도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나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민족주의자라고 하신 김일성 주석님의 말씀에 목사님께서 감명을 받으셨다는 사정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습니다.

두분의 이러한 마음과 의지가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이해와 지지를 왜 받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유감하게도 한때는 그렇게도 높아갔던 통일기운이 같은 해에 목사님과 주석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식어버리고 남북관계는 다시 최악의 상황에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생전에 자주, 민주, 통일을 하나로 보는 통일론을 주석님 앞에서 피로하시고 남북이 함께 승자가 되는 통일을 주장하며 지향해 오신 목사님께서 이 같은 상황을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그러나 목사님, 지금의 상황이 결코 비관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작년 말부터 경제, 언론, 학술,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남북의 민간교류가 활발해지고 그것이 금강산관광의 실현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녘의 일반동포들이 금강산을 찾아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북의 동포들과 함께 합창했습니다. 만약에 목사님께서 계셨으면 틀림없이 박 장로님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류가 통일에로 이어질 것을 겨레는 모두 염원하며 확신합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도 염원하셨던 1995년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는 20세기도 저물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분단이 고착화되거나 통일을 외치는 목소리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미력하나마 노력할 것입니다.

편지가 좀 길어졌나 봅니다. 필력의 미숙함을 뉘우치면서 이만하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아쉽고 원통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에서 광주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우표를 붙여도 못 보낸다고 안타까워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셔서 “그 편지 나 줘, 광주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전해줄게”라고 하시며 아이들을 꽉 끓어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가 쓴 이 편지는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습니까.

                                                                                       문익환 목사님의 5주기에

※『통일평론』 1999년 3월호에 실린 글(원문은 일본어)을 수정·번역했음. / 필자 주

 

강민화님 1999.3.1

   
▲ 박용길 여사가 나에게 처음으로 보내준 편지. [사진제공-강민화]

80년전 오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생각하며 옷깃을 여밉니다.

2월 25일 금강산에서 도라오니 보내주신 편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92년에 귀한 책을 볼 수 있었는데 감옥에는 드려보낼 수가 없었고 93년 나오신 후에 문 목사가 보셨을텐데 인사를 못드리고 떠나셨군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人間 文益煥을 뒤지며 고마워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다섯부나 더 가지고 왔었는데요. 미안합니다. 그동안 너머 무심히 지내서 무엇 하나 보내드리고싶어서… 문 목사님 詩 중에서 좋아하시는 시를 골라 족자 혹은 액자로 만들어 보내고싶은데요. 많은 젊은이들이 애송하는 “꿈을 비는 마음”을 원본을 보냅니다.

목사님께 보내는 편지를 읽고 감격하였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은 이제 사단법인 인가를 얻어 활발히 일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협의회 초청으로 금강산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하고 왔는데 시인은 아니지만 즉흥시를 보내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이 계셨으면 좋아하셨겠지요. 아쉽습니다.

                                                                                                        봄길 박용길

금강산(Diamond mountain)

하늘을 찌르듯 높고 끝 모를 울창한 소나무숲
집채보다도 더 육중한 크고 큰 바위 넓고 넓은 바위
흰 눈 덮인 기암절벽을 감히 우러르다
대지에 내리꽂는 폭포는 얼어 붙었지만
내 귀에 들려오는 우렁찬 폭포소리는 신의 소리인가?
造物主의 비상하고도 오묘한 찬찬한 姿態들을
뜨거운 내가슴에 새겨준다

입이 닫혀지지 않는 저 太古의 장엄한
세계제일의 이 絶景은
한반도 땅에 조각한 신의 솜씨인가?
억만년 변함없이 우뚝 서 있을 침묵의 그 게세여!
손 잡고 가던 안내원 나班 1組 조장님이 나에게 물어온다
저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바위속은 비어 있을까요? 속이 차 있을가요? 라고
나는 대답한다 속이 꽉꽉 차 있을거라고
하느님이 우리 나라에 무게를 두시고 창조하신거라고

북한의 동포들과 마주치는 눈길은 따스하기만 하고
웃음꽃이 피어온다
어서 하나되는 날이 오기를 마음으로 기도한다

봄날보다도 따스한 구룡연 등산길
흰 눈이 소리 없이 휘날리는 만물상 등산길
몸이 불편한 분들도 같이 나서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등산길
하늘에 절하고싶은 축복받은 저 비경이여!

흰 눈 사이 얼음을 뚫고 흐르는 맑은 물을 한 우큼
두 손으로 입에 넣으니 아―시원타
차고 단 맛은 수천년 우리 겨레가 마셔온 한반도의 생명수로다
금강산은 영원히 우리 산이요 우리의 자랑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

자손만대에 길이 길이 솟아
신비로운 영산으로 빛나리라
수많은 시인과 墨客들을 매혹시키는
아니, 세계 만방이 우러르는 명산이어라

금강산이여! 영원하라!

                                            1999.2.23―24 등산
                                                               봄길

등산을 해본 일이 없는데 정상까지 단숨에 올라갔다온 것은 제 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술의 전당 공연부장이고 음악감독인 호근이(문익환 목사의 큰 아들=필자)와 매일 아침 열어 성경을 읽고 일본말을 가르칩니다.
문 목사님 시 한수 고르시고 족나나 액자, 횡서, 종서도 선택해 주세요.
그럼 건강하시고 통일운동에 앞장서세요.
저는 이번에 너무 환대를 해주어서 우리 동포들을 껴안고 황홀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용길

※ 박 여사의 편지와 시에서 쓰인 철자법과 표기들은 원문 그대로 살렸음. / 필자 주

   
▲ 서울에서 박용길 여사와 만난 필자(2002.10.1 롯데호텔). [사진제공-강민화]

 

(사진 수정-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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