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게임이다 (비트겐슈타인)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꽃 수북 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든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모 고교에서 일어난 사건. 교무실에서 여학생 둘과 남교사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다 교사가 ‘여고시절’을 꽃으로 비유하고, 한 여학생이 자신은 무슨 꽃 같으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그 남교사는 ‘장미’라고 했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학생이 ‘저는요?’ 물었단다. 그러자 남교사는 ‘흑장미’라고 했단다. 그 여학생은 흑장미라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고 생각해 그 남교사를 고소하고 그 남교사는 징계를 받게 되었단다.

 아마 그 여학생은 성희롱 교육을 받은 대로 했을 것이다. 그 여학생에게 흑장미는 ‘외설’ ‘비하’의 의미였나 보다. 그러면 그 남교사는 무슨 의미로 흑장미라는 말을 했을까?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이름 속엔 무엇이 있나요? 장미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로운 존재인 것을’ 우리는 곧잘 언어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라고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사물, 관념에 이름을 붙인다. 그때마다 우리는 뭔가 ‘어긋난다(의미가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가? 

 그래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게임’이라고 했다. 즉 ‘언어는 주고받는 사람들이 정한 게임 규칙에 의해 의미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한다. 하나의 단어가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그러다보니 숱하게 오해가 생겨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적에 들은 어른들의 대화는 참으로 풍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언어의 잔치였다. 그 분들은 많지 않은 단어를 서로 조합하여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마음들을 나누었다. 언어의 게임 규칙이 무궁무진했다.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살아오신 분들이라 언어에 의한 오해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커서 도시에 살게 되면서 들은 어른들의 대화는 너무나 건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들은 사전에 나와 있는 의미로만 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마음을 나누는 게 아니라 단어의 나열이 되고 마음이 허전하다보니 계속 반복해서 단어를 나열하게 되고 결국은 소음에 가까워진다. 술집에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다들 독백이다. 서로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떼운다. 

 비트겐슈타인은 또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진정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풍부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단어 받아쓰기의 학교 교육’를 받아왔고 ‘언론 매체들의 무미건조한 이야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황폐화되었을 것인가!   

 그 여학생들과 남교사는 어떤 ‘언어 게임’을 하고 있었을까? 아예 언어 게임이 없었던 건 아닐까? 서로 공유하는 게임 규칙 없이 각자의 언어로만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            

 비트겐슈타인도 처음부터 언어를 게임으로 본 것은 아니다. 초기엔 언어를 ‘그림 이론’으로 생각했다. 장미라는 언어는 장미라는 그림으로 나타낼 수가 있고, 흑장미라는 언어는 흑장미라는 그림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는 언어는 쓰지 말자고 했다. 그런 언어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언어는 그에 대응하는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고 오로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고 말하고는 학계를 떠났다.  

 학계를 떠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했단다. 어느 날 그는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아이들은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하며 노는데 그때마다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더란다. 그는 기존의 ‘그림 이론’을 폐기하고 ‘게임 이론’을 내세우며 학계로 돌아왔다.

 김경미 시인은 ‘야채사(野菜史)’를 읊조린다. 모든 것을 망치로 부수려 했던 철학자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을 썼듯이 야채의 계보를 파헤친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꽃 수북 했겠다’

 장미는 애초에 뭐였을까? 흑장미는? 어떻게 하다 장미가 ‘꽃 시절’이 되고 그 여학생에게 흑장미는 ‘폭력’이 되었을까? 그 남교사에게 흑장미는 뭐였을까? 어쩌다 흑장미가 두 사람 사이에 어긋나게 되었을까?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든가/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흑장미가 애초에는 두 사람에게 하나였을 텐데, 어쩌다 누구에게서 다른 종(種)으로 갈라져 나왔을까?

 학교는 학문(學問)을 하는 곳인데 배우고 묻는 곳인데, ‘흑장미’를 함께 배우고 질문하면 안 되나? 그러다보면 흑장미가 ‘향기로운 꽃’이 되어 그들 사이에 은은한 향기로 흐를 수도 있을 텐데. 징계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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