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크리스마스 날 오후에 58년 개띠들의 회갑 모임이 있었다. 지금 세상에 누가 회갑연을 하랴마는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지금도 하고 있는 몇 년 아래 후배들이 회갑연이 거창하면 술 한 잔 하는 모임이라도 굳이 하자고 해서 마지못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모임 장소는 노량진에 있는 구 수산시장이었다. 며칠 전에 투쟁결의대회를 한다고 해서 거기서 모인다고 했는데 신돌석씨는 다른 일이 겹쳐서 가지 못했었다.

노량진 구 수산시장에 가니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가운데 자가발전으로 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얼마간 어둠침침해 보였지만 그래도 상인들은 그 나름대로 활기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신돌석씨는 노량진 수산시장 이전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싸우면서 구 시장을 유지하려고 하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 있으리라는 연대의식은 갖고 있었다.

신돌석씨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난 2004년부터 국책사업으로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사업'을 정부가 착수하면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정부나 수협의 주장은 이렇다. 수산물 유통체계를 개선해야 하고, 건립된 지 48년이 지나 노후화된 구 시장의 안전문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인들 상당수는 임대료가 너무 비싸고 점포 면적에 문제가 있다면서 입주를 거부했다. 또한 통로가 좁아 물건 진열과 작업이 어렵고 기존 물류시스템이 반영되지 않아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상인들 상당수가 입주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에서 수협은 기존 냉동 창고를 헐고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을 착공하여 지난 2015년 10월에 완공해 버렸다. 신 시장은 이듬해 3월에 정식 개장했다.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중재나 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시가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50여 차례의 회동에도 입장차만 확인하고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 사이 상인들이 하나 둘 신 시장 쪽으로 이전하였다. 남아 있는 상인들은 점점 더 강경해졌고, 신 시장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수협은 힘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마침내 수협측은 지난해 4월과 지난 7월·9월에 구 시장에 대한 강제집행에 나섰지만 상인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강제집행에 앞서 수협은 구 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명도소송을 냈다. 지난 8월 대법원은 구 시장 부지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358명에게 가게를 비우라며 수협의 손을 들어 줬다. 촛불 정부라고 하는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제집행이 시작되었고, 사법부 역시 힘 있는 쪽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에 상인들은 무척 허탈해 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신돌석씨는 직접 간접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만 해도 그렇다. 힘 있는 자들은 자기 요구대로 하라고 하면서 듣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는 물리력을 사용한다. 공권력은 쉽게 개입해서 힘 있는 자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었는데 요즘은 방관한다. 국가권력이 공정한 중재자가 되기보다는 방관자가 되어서 힘 있는 자가 행사하는 폭력을 방치한다.

마침 노량진에 오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10여 년 전 일이다. 묘하게도 오늘 이른바 유치원 3법의 통과가 국회에서 좌절되었다. 이와 결부되면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때의 사학법 개정 문제였다. 당시도 민주정부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였다. 사학이 얼마나 썩었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국민 여론의 힘을 받아서 사학법이 개정되었다. 그런데 당시 야당인 박근혜 등의 투쟁에 밀려서 사학법을 재개정해 버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유치원은 사학보다 훨씬 더 썩었다. 유치원들의 비리가 폭로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이 이제 제대로 되나 보다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에 댄 칼날이 무뎌지더니 드디어는 법이 통과가 안 된 것이다. 도대체 이렇게 되면 정권을 바꿔서 적폐청산이 될 수 있는 것이냐?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신돌석씨는 사학법 개정이 한창일 때 노량진에 왔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신돌석씨가 대한학원이란 곳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대한학원이 있다는 노량진 전철역은 출구가 2층으로 육교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육교로 나서자마자 왼쪽 오른쪽으로 모두 학원을 선전하는 커다란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돌풍 어쩌구 하는 곳도 있었고, 전통의 명문 어쩌구 하는 곳도 있었다. 이 동네는 학원가로 유명했는데 아마 이곳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곳과 새로 생긴 곳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서 저런 간판들이 크게 붙어 있는 모양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대한학원의 간판은 왼쪽으로 저 멀리에 보였다. 걸어서 약 10분 거리라고 했으니 아마도 왼쪽의 끝 편에 있는 모양이었다. 육교를 내려가서 걸어가는 도중에 아줌마들이 마치 열병을 하듯이 늘어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홍보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몇 백 미터쯤 지나갈 때까지 아줌마들은 신돌석씨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드물게 신돌석씨에게 홍보지를 나누어 주는 아줌마가 있었다. 받아서 보니 ‘공인중개사 시험 대비 강의’를 선전하는 홍보지였다. 픽 웃음이 나왔다. 공인중개사 시험도 이렇게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는 모양이었다. 신돌석씨 나이쯤 되면 혹시 수험생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공인중개사 수험생’일 것이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가 어울리지 않게 학원가에 찾아온 것은 이번에 수능시험을 본 맏아들 힘찬이의 대학 진학 상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힘찬이가 이 학원에 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힘찬이는 초등학교 때 잠시를 빼고는 거의 학원을 다녔던 적이 없었다. 학원 보낼 돈도 문제였지만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신돌석씨와 힘찬이 엄마의 생각이었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학교에서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는 소박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찬이가 다니는 학교는 밤 10시까지 애들을 잡아 놓고 공부를 시켰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그 이후까지 학원에 다니게 하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힘찬이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학교 앞에 늘어서 있는 학원 버스를 보고 신돌석씨는 기가 질렸었다. 도대체 애들을 몇 시까지 공부시킨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기라도 하면 대체로 반응들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원을 보내지 않는 것이 과연 잘 된 결정인지 항상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가 아들 힘찬이나 딸 아름이를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책가방끈이 긴 것도 아니었다. 힘찬이가 고1 때였던 것 같다. 신돌석씨와 노동운동을 함께 한 친구가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뒤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었다. 노동운동을 정리한 뒤에는 학교로 돌아가더니 조금 있다가 유학을 갔고 결국 학자가 되었다.

그 친구가 힘찬이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보더니 나중에 술좌석에서 힘찬이를 빨리 학원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특히 영어는 지금처럼 기초가 부족해서는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과외를 시켰었다. 동네에 사는 대학생한테 배우게 했다. 그런데 대학생이란 녀석이 사흘이 멀다 하고 빠졌다. 결국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걱정이 태산 같아진 힘찬이 엄마가 여기 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전에 알고 지냈던 최창규가 대한학원의 종합반에서 강의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에게 문의를 해서 그 뒤부터 대한학원 단과에 방학 때마다 보내곤 했었다.

최창규는 신돌석씨보다 한 살이 아래였는데, 80년대 후반에 전교조를 만들 준비를 할 때부터 신돌석씨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같은 조직은 아니었지만 그때 지역교사협의회(지역교협)를 만들면서 지역 내 이런저런 단체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술자리도 갖고 정세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지역교협은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하부 조직으로 전교조의 모태가 된 조직이었다. 최창규는 학창 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대에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복학한 뒤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학생운동 때 함께 하던 사람들과 이야기가 되면서 지역교협을 만들려고 하는 준비모임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최창규가 근무한다는 종합반의 교무실은 4층에 있었다. 4층에 올라가자마자 문 바로 앞에 교실 하나를 비워서 상담실로 쓰고 있었다. 먼저 그곳에 들어가 보니 이 학원만이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신돌석씨가 학교 다닐 때부터 유명했던 학원들의 배치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대한학원에서 만든 배치표는 한 무더기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자기 학원 것이니까 많이 놓아서 가져가게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책상마다 선생과 학생이 마주 앉아서 심각하게 상담을 하고 있었다.

넓은 배치표를 이리 저리 돌리면서 보는 모습들이 어찌나 진지한지 좁은 교실이 터져 나갈 듯한 분위기였다. 그 주위에 둘러서서 벽에 붙은 배치표를 보거나 둘 셋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생들도 보였다. 그 중에는 부모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다.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체로 엄마들이었지만, 아버지들도 몇 있었다. 신돌석씨는 여기 올 때 아버지가 온다는 것이 좀 우스운 것 아닌가 하고 망설였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라도 나온 사람이 가라고 아내가 신돌석씨를 떠미는 바람에 마지못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아버지가 온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는 듯하였다.

최창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실을 나와 문 바로 옆에 있는 교무실로 들어갔다. 교무실은 그 교실의 몇 배는 되어 보였다. 교무실에도 여기저기에 선생들이 앉아서 학생들을 옆에 앉히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신돌석씨가 들어가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워낙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창쪽 끝 부분에 앉아서 상담하고 있는 최창규가 보였다. 신돌석씨가 다가가도 최창규는 상담에만 열중하느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 앞에 가서 서 있으려니까 비로소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아, 신형. 일찍 왔네. 조금만 기다려요. 이 학생 하던 것 마저 하구.”

그리고는 다시 배치표에 얼굴을 묻고 학생과 심각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돌석씨는 하릴없이 한 자리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도 학생이나 학부모가 앉아서 자기가 만나러 온 선생이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이런 광경들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이런 일과 관련이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학 입시라는 것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보면 이것처럼 심각한 일도 드물다. 자녀 둘이 대학 시험을 치른 경험이 있는 사람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마 우리나라는 대학 입시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전이라도 벌어질 것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았는데 여기 와 보니 조금 과장되긴 해도 그럴 듯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돌석씨는 최창규가 학원 강사가 됐다고 했을 때 과연 그가 학원을 오래 다닐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었다. 왠지 그는 학원에 어울리지 않을 사람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학원에 나온 지도 10년이 훨씬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지역교협을 하다 전교조가 설립되자마자 자연스럽게 전교조에 가입했다. 아니 전교조 창립 발기인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학교에서 해직되었다. 복직 투쟁을 하느라고 고생깨나 했는데 그러다가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 말대로 학원 수입이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는 결국 복직을 할 수 있었는데도 복직을 하지 않고 그냥 학원에 남았다. 물론 그의 복직은 원래 다니던 사립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다니던 사립학교가 복직을 거부했기 때문에 공립중학교로 가야 했다. 그때 사립학교 출신들은 거의 다 그렇게 됐다.

최창규를 기다리는 시간은 30분이 넘었는데 상담은 겨우 10분 만에 끝났다. 줄을 지어서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 더 오래 하자고 하기도 어려웠다. 성적을 물어 볼 때 잘 안 나와서 라고 얼버무리면서 성적표를 주었다. 그는 다 그렇게 말하지 라고 하면서 성적표를 훑어보더니 배치표와 대조하였다. 어쩐지 병원에서 의사 만날 때와 비슷하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신돌석씨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배치표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신돌석씨의 마음은 마치 의사 몰래 술 마시고 담배 피우다가 진찰 결과를 통고받기 전 상태 같았다. 그런 식으로 생활해서 죽지 않기를 바라냐고 야단 칠 것 같은 의사의 말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배치표에 눈을 둔 채 입을 열자 신돌석씨의 걱정은 금세 날아가 버렸다.

“어쨌든 서울에는 가도록 해야겠지.”

그러면서 그는 요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 서울대라고 하였다. 그가 추천한 대학은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그 교수들이 언론에도 자주 나오기 때문에 신돌석씨도 익숙하게 듣던 학교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대학을 잘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명성이나 캠퍼스의 화려함 들에 끌리는 것이 요즘 학생들의 추세라고 하였다. 힘찬이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신돌석씨로서야 반대할 뚜렷한 이유가 없으므로 그의 추천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최창규는 힘찬이가 갈 곳으로 가, 나, 다 세 군마다 하나씩 서울 혹은 수도권에 있는 대학들을 추천해 주었다. 그러면서 좀 있으면 전문대도 시작하니 한번 넣어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가, 나, 다 세 군에서 하나씩 지원한다는 것도 신돌석씨는 처음 알았다. 신돌석씨는 최창규가 추천해 주는 곳이 혹시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신돌석씨의 체면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슬쩍 들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인 것 같아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박진환 선배랑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안 만날래요.”

상담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4층 입구까지 배웅을 하면서 최창규가 한 말이었다. 처음에 신돌석씨는 못 알아들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박진환이라면 10여 년 전에 보고는 더 이상 본 적이 없었다. 최창규와 같은 학교에 다니다가 먼저 해직당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해직당한 데는 신돌석씨의 책임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를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박진환을 처음 만난 것은 86년 가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 최창규는 지역에 있는 교사들과 함께 교사협의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박진환을 신돌석씨에게 소개해줬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소개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때 지역 교사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교사들이 ‘함께 하는 집’이라고 하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선교회관에 자주 왔는데 그곳에 함께 와서 인사를 하게 한 것이었다. 그때 만난 교사들이 여럿 있었는데 박진환의 인상은 아주 특이하였다. 우선 나이가 많았다. 그때 대부분 20대들이었는데 이 사람은 이미 30을 넘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는데,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 [삽화 - 김윤기]

그들이 다니던 학교는 사립학교였는데, 지역에서도 문제 많기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엄마가 이사장이고 아들이 교장이었다. 이사장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아무튼 돈 좀 번 뒤에 학교를 설립했는데 독신이었다. 따라서 아들은 친아들이 아니고 양자로 들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감이 오빠의 아들, 교무부장이 조카사위. 이런 식이었다. 이사장인 여자는 학교를 설립한 뒤 자기 돈을 학교에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긁어 가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들이지만 유령 교사들이 여럿 있었고, 그 때문에 두세 과목씩 가르쳐야 하는 선생도 있어야 할 지경이었다. 교사들 중 상당수는 친인척으로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거나 그들의 인척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 이외에는 대부분 당시에 벌써 500만 원씩 주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박진환은 80년대 초부터 그 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에서 서무주임을 하는 배아무개라는 사람이 박진환과 사돈지간이었는데 그 덕에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박진환의 집안은 충남 어딘가에서 꽤 세력이 있는 지주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박진환의 아버지가 광복 직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그 때문에 박진환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검정고시로 야간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였지만 번듯한 직장에는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배아무개란 사람이 이 학교에 취직을 시켜준 것이었다. 배아무개의 처가가 박진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아마 옛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집 장인이나 장모의 압력 때문에 그리한 것이라고 박진환은 생각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박진환은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특별히 학교와 마찰을 빚을 이유도 없고, 그럴 위치도 못 되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 일에 앞장서서 나설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에 변화가 생기는 계기가 생겼다. 최창규가 학교에 들어온 것이었다. 최창규 역시 아버지가 교감과 인연이 있어서 들어올 수 있었다. 최창규 아버지는 군 장교 출신이었는데 교감이 그 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둘이는 술 때문에 친해졌다. 박진환이나 최창규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술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만 끝났다 하면 모여서 술을 마셨다.

최창규도 처음에는 의욕이 없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 써클에 가입했다가 2학년 때 그 써클 선배들이 조직 사건 때문에 대거 구속되거나 군대로 끌려가면서 최창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고 하였다.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최창규는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함께 시위를 하자는 친구도 있었고, 써클을 다시 재건해 보자는 친구나 후배들의 제의도 있었지만, 최창규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술만 마시며 보내다가 군대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군대에서 이른바 녹화사업을 당하고는 복학하였다.

복학하고 보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총학생회가 만들어졌고 적어도 교내에서 집회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창규는 선뜻 그 대열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군대에서 녹화사업을 당할 때 무엇을 했는지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후배들의 냉정함에 기가 질려 버렸다. 그것은 최창규가 프락치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나머지 대학 생활 역시 무기력하게 술과 씨름하면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는 졸업을 하고 원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주선으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 박진환과는 그저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어울리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그가 학교에 들어갈 때를 전후해서 세상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85년 2월에 2. 12 총선에서 양김씨가 사실상 주도하는 신민당이 총선에서 압승하였다. 그리고는 전국적으로 개헌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대학가가 술렁이고 있었고,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최창규가 있던 지역의 공장에서도 크고 작은 소요들이 인다는 소문들이 돌았다. 심적 갈등이 심했다. 그런 갈등을 박진환에게 털어놓았다. 박진환은 일그러진 표정만 지을 뿐 묵묵부답이었다. 그때까지 최창규는 몰랐지만 박진환은 자기 집안의 내력 때문에 좀처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하였다. 최창규가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현실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다니던 학교가 워낙 치사하게 나오다 보니 그에 대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다니던 학교가 있던 지역의 공장에 취업해 있던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가 최창규를 박진환과 함께 만난 것은 저녁 7시가 넘어서였다. 힘찬이 대학 입학 상담만 하고 오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저녁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저녁에 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정말 오랜만에 박진환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다른 일들을 미루고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노량진 수산시장이었다. 물론 그때는 정상적으로 활기차게 시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 생각해 보니 이미 그때 이른바 현대화를 위한 이전 계획들이 추진되기 시작했었다.

7시 조금 넘은 시간에 수산시장 2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보니 최창규와 박진환이 이미 와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박진환의 모습은 약간 늙어 보인다는 것뿐 10여 년 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듯하였다. 박진환은 전교조가 결성되기 전에 해직되었는데 그 뒤 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복직되어서 지금은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전교조 조합원이기는 하지만 열성적으로 뛰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보다는 고전에 대한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아져서 주역을 공부하러 다닌다고 하면서 계면쩍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배부장인가 하는 자는 지금도 그 학교에 있나요.”

술이 몇 잔 오고 간 뒤에 신돌석씨가 물었다. 배부장이라고 하면 이사장의 친정 조카인데 박진환이 해직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배부장은 그 당시 박진환보다 아래라고 했으니까 잘 해야 서른이 갓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파격적으로 학교의 연구부장으로 기용되었다. 사회 과목을 가르친다고는 했는데 사실 자격증이나 있는지 의문스러운 인물이었다.

“벌써 그만뒀지. 이사장이 일회용으로 써먹으려고 데려온 거니까. 중국에 가서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돈 많이 벌었다고도 하고 사기꾼으로 살아간다는 말도 있고. 정확한 거야 알 수 있나.”

이사장이 배부장을 기용한 것은 그의 저돌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100킬로에 육박하는 거구를 가진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었다. 연구부장이면 연구와 관련된 일을 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학교 전반의 일을 자기가 다 처리하려고 하였다. 말이 연구부장이지 거의 교감의 역할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나이가 많은 선생들도 그와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심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처음 들어온 건 85년 겨울이었다. 교무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그는 처음에는 선생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듯하였다. 선생들과 술자리도 자주 가지려고 하였고, 연배가 비슷한 박진환도 그와 여러 차례 술좌석에서 어울리곤 하였다. 그러다가 새해가 되면서 갑자기 연구부장이 되었다. 선생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이사장의 뜻이라는 교장의 말 때문에 모두 수긍한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연구부장이 되면서 교무회의는 거의 그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사장님 말씀을 전하겠다고 시작하면서 지침을 하달했던 것이다. 교무부장 등 고참 선생들은 물론 교감, 심지어 교장까지도 그가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박진환이 그의 그런 점에 제동을 걸려고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진환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이건 이상하다고 생각된 것이었다. 그래서 몇몇 고참 선생들에게 문제를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배부장에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한 것으로는 그것보다 먼저 그가 박진환을 누르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배부장이 연구부장이 되면서 학교 행사가 부쩍 많아졌다. 학교에서 30분쯤 걸어서 가야 되는 거리에 이사장 아버지의 묘소가 있었다. 배부장은 학생들을 일주일마다 한 번씩 그곳에 가서 묘소 정비를 하게 하였다. 인솔해 가는 선생들은 불만이었지만 그것을 대놓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불만을 대놓고 말한 것도 아닌데 시범 케이스라면서 두 명의 선생을 해직해버렸다. 한 사람은 학생들이 수업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린다는 것이었고, 또 한 사람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자기에게 잘 봐달라고 로비를 했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런 사람부터 먼저 자르니까 그런 생각 행여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해직은 교장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지만 교무회의에서 자기가 했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이런 일이 있을 때까지도 박진환과 최창규는 술자리에서 불만을 말할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4월쯤 되면서 배부장이 박진환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놓고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다. 박진환이 없을 때를 골라서 박진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박진환이 교실에 들어가 있을 때 소리소리 지르면서 박진환을 교무실로 불러 오라고까지 했다. 이유인즉 박진환이 자기 지시를 어겼다는 것이었다. 그 지시라는 것은 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복사를 할 때 빈 공간 없이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진환이 그것을 어겼다고 하였다. 사실 그것은 박진환이 한 것이 아니었다. 박진환이 배부장에게 갔을 때는 이미 그 사실이 알려진 뒤였다. 그러자 그는 박진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사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그때부터 그 학교 교무실에는 복사기가 사라졌다. 선생들은 복사를 하려면 학교 앞 문구점에서 자비를 들여서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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