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 아무 것도 아닌 수數이다. 수의 강력한 힘을 알려면 ‘학생민주화혁명’이란 말보다는 ‘4.19’가 ‘군사쿠데타’보다는 ‘5.16’이 ‘광주민주화혁명’보다는 ‘5.18’이 더 강한 힘을 주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가 여론조사의 수치에 좌지우지 되고 있다. 권위 있는 여론 기관에서 발표하는 대통령과 여야 정당의 지지율은 경천동지 할만하다. 야당의 여당에 대한 공격도 지지율에 따라 달라진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수와 수들>>Number and Numbers 이란 자기 책에서 수가 얼마나 위력적이고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가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 철학자는 수학, 특히 칸토어의 집합론으로 철학 전체를 망라해 섭렵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인 45%라고 한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고, 반대하는 자들은 기고만장이다. 물론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박근혜와 이명박 같은 자들이 다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유한국당이 다시 집권하는 날이 온다는 것은 가슴 쓸어내리는 일이라 아닐 수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오늘 아침에는 구약 <출애굽기>를 읽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직후 사람들은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탈출해 나온 그 자체를 후회하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습니까?”(출애굽기 14장 11절-13절)

만약 그 당시에 여론조사 기관이 있어서 지금과 같이 조사를 했더라면 모세의 지지율은 짐작컨대 바닥을 칠 정도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출애굽기를 기록한 저자는 매우 신랄하게 극적으로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잘 그려 내고 있다.

모세를 향해 우리가 죽어 묻힐 묘 자리가 없어서 이 춥고 배고픈 황량한 사막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왔다는 말이냐? 떠날 때에 모세 당신을 향해 광야에서 죽느니 차라리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며 노예 노릇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고 모세에게 달려들었다.

모세,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결국 우리 주장이 옳았지 않았느냐고 할 때에 모세의 자존심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렸다. 지금 경제가 바닥을 쳤다고 하고 한 구석에서는 IMF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고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직후와도 같아 보인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 망쳐 놓은 다음에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겪는 경우와는 다르다 할 수 있다. 국민들은 멀쩡하게 잘 살았는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다음부터 못 살게 되었다고 하는 상황이 마치 출애굽 직후 모세가 겪는 형국과 같아 보인다. 모세가 이끌고 나온 사람 수는 4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는 5천 만 명이다. 그렇다면 문재인의 비중은 모세보다 훨씬 커 보인다.

아무튼 모세와 문재인 두 사람의 경우가 비슷한 것은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다가 당신 때문에 못 살게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만약에 지지율 여론 조사를 한다면 비슷한 형편에서 하는 것이 되고 양자의 비교는 정합성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비슷한 상황에 대처하는 두 지도자의 태도부터 보자.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출애굽기 14장 13절-14절)

모세의 원대한 꿈은 저 강대국 이집트의 속박에서 자기 백성들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이집트 바로왕의 아들로 자라났지만 자기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바로의 아들로 영화롭게 사는 것보다 내 동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길을 택했다. 그의 총명과 능력은 바로의 왕위를 계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말이다.

모세와 대조되는 우리 국내 정객들의 행각을 보자. 일제가 이완용에게 수여하던 그 훈장을 전직 국무총리를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지금까지 받아 오고 있었다고 한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자기 일신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 해방된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잔악무도한 짓을 한 일제로부터 훈장 받는 것을 앞 다투어 경쟁하고 있는 것이 우리 정계의 지도자들, 특히 야당 지도자들이라는 사실 앞에 모세 같은 인물이 과연 우리에게 누구인가? 이들이 얼마나 일제 치하에서 영화를 누렸으면 지금도 그 향수에서 젖어 살고 있단 말인가?

모세는 자기가 걸어오고 선택한 길을 자기 백성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앞에 자기가 바로왕의 아들이었지만 지금 당신들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자랑하지도 않았다. 어느 유명인사의 명언과 같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사람들 앞에서 포효咆哮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자기가 믿는 신이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만을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면 그 신이란 존재란 누구이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세는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시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무엇일지는 모세 자신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5천만 국민들을 이끌고 저 이집트의 굴레보다 더 큰 힘의 굴레에서 출애굽의 순간에 서 있다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이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소실대탐小失大貪하자고 해 보았자 알아들을 리 없다. 대중이란 항상 자기 눈앞의 이익에 어두운 것이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을 향해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단순히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집트’와 같은 큰 굴레서 탈출하는 것이다. 지금 야당이란 존재는 어느 하나 출애굽을 바라거나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의 천박한 근성을 자극하여 눈앞의 안전과 안주에 급급하도록 만들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을 마치 이집트와 같은 외세에서 해방 국면으로 보고 외세에 굴종과 예속을 기정사실화 하고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이집트로 되돌아 갈 것을 선동하고 있다. 모세가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기다려 보라고 한 말을 이해하자면 그의 출애굽 이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출애굽 이전의 두 가지 사건들을 보면 모세의 됨됨과 행보를 알 수 있다. 어느 날 고된 노동 현장에서 동족인 히브리인이 이집트인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돌로 쳐 죽이고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2장 13절) 이번에는 같은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14절) 하니 그 잘못한 사람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14절) 하고 달려들었다. 모세는 이제 바로로부터 동시에 동족 구성원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이 두 사건은 모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방향타가 되고 말았다.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 찾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서 머물렀다”(15절)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로는 누구이고 이집트는 어디인가? 그리고 같은 동족끼리 모세를 바로에게 고발하고 고자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한국 야당들이 그런 존재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희망 사항일 뿐이다.

모세는 삼각파도 속에 휘말렸다. 바로로부터는 물론이지만 자기 동족으로부터도 협공을 받고 있었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 속에는 항상 배신과 반역의 유전인자를 가진 분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일왕日王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 한 여인이 야당 원내 대표가 되었다. 이 여인이 모세를 위협하던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만 바란다.

모세에게 지혜를 알려준 신의 이름은 “나는 곧 나다”(I AM THAT I AM)이다. 너는 너의 백성에게 가서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3장 14절)고 한다.

신이 모세에게 언명하는 듯한 이 말은 너는 너 자신의 중심을 바로 잡고 너 자신이 “나는 나다”라고 다짐하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의 중심을 바로 잡는 ‘주체의식’이야 말로 해방이고 자유라는 것을 명한 것이다. “나는 나다”는 신이 모세에게 한 말을 너머 모세 자신이 이집트도 아닌 그 어느 것도 아닌 나는 나라고 하는 주인의식의 확고한 정립을 다짐하는 소리이다.

모세는 죽는 날까지 한 번도 ‘나는 나다’라는, 그래서 너 이집트의 왕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는 내 동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나다.” 그래서 출애굽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행군이라도 감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오직 내가 나답기 위해서이다. 이집트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입어도 그것은 내가 나답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많은 우중들은 나답지 않아도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세의 지지율은 하락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지지율 하락 앞에서 모세는 “나는 나다”라는 의식을 다짐할 뿐이다. 지지율이 바닥을 쳤지만, 이러한 다짐 직후에 모세는 홍해를 건넜다. 다시 말해서 지지율이 가장 낮을 때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현대 구약 학자들은 홍해가 아닌 갈대밭이라고 하나 성서 기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한 가지 사실 그리고 그것은 ‘나는 나다’라는 다짐 앞에서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성서 기자는 출애굽기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이시여, 지지율 하락을 괘념치 마시고 우리 민족 주인의식을 공고히 하소서. 이집트도, 자기를 저버린 사람들도, 상관치 마시고 “나는 나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세우시라. 그러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에 지지율을 높이려 좌고우면은 절대 금물이다. 촛불 속에 홍해의 기적이 반드시 있다는 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추가: 오후 9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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