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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이야기, 그래도 너흰 아니야 (1)<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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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15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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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토요일이면 거의 빠짐없이 광장에 나가곤 하였다. 주로 광화문이었고, 때로는 여의도로도 나갔다. 그러기 시작한 지 꽤 되어서 이제는 언제부터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2002년이던가 효순이 미선이 압사 사건 규탄에서부터 촛불이 시작된 듯하다. 그리고 노무현 탄핵반대시위, 광우병 규탄 시위 등을 거쳐 세월호 추모 집회를 하다가 드디어는 박근혜를 몰아낸 촛불항쟁이 되었다.

때로는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지만 어느 때는 초라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수구세력들의 반대 집회도 있었다. 그들은 항상 과격했지만 소수였고, 돈을 받고 동원되었다는 말들도 있을 정도였는데, 정작 그들을 밀어주는 정권이 붕괴한 뒤 그 수가 오히려 늘어나는 듯하다.

오늘도 광화문 광장에 나왔다. 사법농단대응시국회의가 주최하는 집회가 있다고 해서 북인사광장에 갔다. 거기서 인사동과 종로를 거쳐 세월호광장까지 행진을 한다고 하였다. 북인사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조계사 앞길을 거쳐서 한 무리의 대오가 나타났다. 성조기 부대였다. 특정 시기에 이들이 개신교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많이 모인다는 것은 알았지만 매주 이렇게 대규모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멈춘 이들이 ‘빨갱이는 물러가라’를 외쳤다. 여전히 7-80대로 보이는 노년층이 대부분이었지만 비교적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집회나 시위를 옆에서 보면 희한한 소리들을 많이 한다. 대통령더러 물러가라고 하고 탄핵하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또 대통령을 제외한 총리, 당대표, 비서실장 등이 밀실에 모여서 대통령을 소외시킨단다. 웃기는 자들이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 종로에 진입해서 행진을 하니 보신각 쪽에, 광화문 사거리에, 동화면세점 앞에 이들이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기세가 등등한 이들 앞에 경찰이 도열하고 있다. 이제 경찰의 임무는 이들과 우리가 충돌하는 것을 막는 일이 되었다. 집회를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경찰 본연의 임무가 되었다니 진짜 민주주의가 된 것인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들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그래도 너흰 아니야’이다. 이 노래가 한창 불리던 때는 2004년이었다. 노무현이 국회에서 탄핵되었을 때 분노한 민심이 탄핵반대집회를 주말마다 열었고, 그때 작곡되어서 집회 때 불리던 노래였다. ‘너희는 나랄 걱정할 자격 없어’라는 가사가 정곡을 꿰뚫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노무현 정권 때도 수구세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신자유주의에는 오히려 앞서서 받아들이는 듯하는 당시 정권에 불만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 정권의 비판에 앞장서기도 힘들었다. 그것이 곧 수구세력이 기뻐하는 일인 것 같아서 그랬다. 지금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부 여당을 두둔하고만 나갈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에 대한 비판도 확실히 하고 수구세력들의 반동도 막아낼 필요가 있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신돌석씨는 노무현 탄핵 당시를 떠올려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의 집회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서둘러서 왔건만 집회 장소인 종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작 시각인 5시를 30분 이상 넘긴 뒤였다. 신돌석씨는 이근영과 약속한 칼 빌딩 앞으로 서둘러서 갔다. 지난번까지의 집회와는 달리 한 시간 앞당겨서 집회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아직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른바 탄핵 정국이 시작된 뒤 광화문, 종로 일대에서 벌어지는 세 번째 대규모 주말 집회였다. 어쩌면 총선 전까지는 마지막 집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고건 대행체제에서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면 집회를 강력하게 막겠다고 하였고, 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국민행동도 선거운동기간에는 집회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돌석씨 주변 사람들만 보아도 오늘의 집회에는 꼭 가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욱이 수구세력들이 집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쪽수로 눌러서 찍소리 못하게 하자면서 꼭 가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구세력들은 원래 국민행동측이 집회를 하지 않으면 하지 않고, 하면 자기들도 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수가 적어서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중 일부가 그대로 강행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오늘 집회는 지금까지 중 최다 인원이 모일 것으로 예상들을 하였었다.

그런데 막상 집회 장소에 서둘러서 와 보니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지난 토요일이나 그 전 토요일과는 달리 한 시간 앞당겨서 5시에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5시에는 집회를 하기에도 좀 햇살이 따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돌석씨는 회사 사람들과 같이 올 걸 괜히 서둘러서 왔다고 생각했다. 신돌석씨가 회사 사람들보다 먼저 온 것은 이근영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를 통해 이근영의 연락처를 받았지만 연락을 미루고 차일피일 하고 있었는데 이근영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따로 연락을 잡느니 주말집회에서 만나서 끝난 뒤에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약속이 되고 서둘러 오게 된 것이었다.

칼 빌딩 앞에 도착해 보니 이근영이 이미 와서 입구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교조 조끼를 입은 모습이 퍽 잘 어울려 보였다. 이 사람은 처음 볼 때부터 정말 선생 하길 잘 한 사람이다 생각되는 사람이었는데, 이후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 또 전교조 활동하길 잘 했다고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전교조 전신인 전교협의 지역 조직인 서교협 활동을 할 때였다. 그는 그때 사립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신돌석씨가 속한 조직에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또 한 명의 고교 교사,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 약사, 대학원생과 함께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그 팀의 지도선은 학생 출신 현장 활동가인 김배영이었고, 신돌석씨는 그 팀이 구성된 뒤 두세 달 정도 지났던 86년 10월쯤에 결합이 되었었다.

신돌석씨가 듣기에 그 팀은 현장 활동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사람들로 묶은 팀이었는데, 전문직이나 사무직들을 조직해 나가고, 조직의 재정을 담당하는 구실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사들이 노동운동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노동운동은 생산직 현장으로 이른바 존재 이전을 한 혁명적 인텔리들이 하는 것이고, 사무직이나 전문직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면서 혁명적인 노동운동조직이 부여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던 때였다.

하지만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것에 비해서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어 가던 때였다. 85년 초의 2. 12 총선과 86년의 개헌투쟁을 거치고, 김근태 고문 사건과 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을 거치면서, 운동에 기여하고 싶어하는 학생운동 출신 혹은 학생운동에 우호적이었던 사무직 혹은 전문직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속해서 일할 대중조직은 거의 없었다. 청년운동조직인 민청련조차도 간부들 대부분이 수배가 될 정도로 운동의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조직에 가입하겠다고 하는 사무전문직 종사자들이 계속 늘어만 갔고, 그들을 위한 조직과 프로그램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그 팀에서 신돌석씨가 한 일은 현장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었다. 이근영은 신돌석씨보다 한 살 어렸으므로, 김배영보다는 한 살 많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이근영은 김배영에게 깍듯이 행동했다. 물론 김배영도 이근영에게 예우를 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지도를 하고 지도를 받는 그런 관계였었다.

그런 점에서 신돌석씨의 위치는 좀 묘했다. 현장 문제를 말할 때는 신돌석씨가 분위기를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팀의 구성원들은 현장 경험들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씨가 말할 때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내용을 귀 기울여 듣곤 하였다. 하지만 정세 이야기나 운동의 전략, 전술에 관한 이야기로 갈 때는 신돌석씨가 좀 서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돌석씨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들을 하였다. 어떤 때는 그 정도가 심해서 신돌석씨는 그 팀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개헌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이 팀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듬해 2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살해사건 이후 수시로 만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는데, 주로 집회 참석과 유인물 작업을 하였다. 조직에서 만든 유인물을 집회에 나가서 살포하기도 하였고, 한밤중이나 새벽에 주택가에 뿌리기도 하였다. 그런 작업들을 하면서 팀 구성원들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 [삽화 - 김윤기]

같이 만나서 술을 늦게까지 하는 일도 많았고, 서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근영은 그때까지 총각이었는데, 전교조가 결성되고 해직되던 해인 89년에 대학 후배이면서 역시 교사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가 다니다 해직된 학교의 제자들이 예식장에 몰려 와서 그를 헹가래 칠 때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그를 보면 조금씩 되살아나곤 한다. 정부 당국이나 학교는 그를 내쳤어도 그의 제자인 학생들은 진정 그를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신돌석씨 집에 놀러 오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하여 힘찬이 엄마와 그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평소에는 과묵한 편이었고 낯을 좀 가리는 편이었는데 술 한 잔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붙임성 있는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신돌석씨의 집에 갈 때는 대개 한잔 걸친 뒤였기 때문에 그는 아내에게는 재미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번에 아내가 그를 만난 것은 친정 오빠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장에서였다. 그는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해직된 뒤 해직 생활을 보내다가 복직을 하게 되었는데, 다니던 사립학교에서 복직을 거부해서 결국 공립 중학교로 복직하게 되었다. 복직을 한 지도 어느덧 1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동안 학교를 한 번 옮긴 뒤 신돌석씨의 처조카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를 만나고 온 날 아내는 정말 세상이 좁다고 하면서 신기하다는 듯 흥에 겨워서 그의 이야기를 여러 번 하였다. 올케에게 들어보니 이근영 선생은 그 학교에서 촌지 받지 않는 선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이번 해를 마지막으로 다른 학교로 옮긴다고 하여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이가 있는 학부모들이 서운해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해직되기 전에도 촌지를 받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대개 촌지를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난 전교조 교사들 사이에서도 촌지에 대한 견해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거부의 정도나 방식은 다양하였다.

이근영 같은 경우는 학부모가 놓고 간 봉투를 교문 밖까지 뛰어가서 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촌지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강하게 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근영 같은 사람의 고지식함을 농담 반 진담 반 식으로 놀려대면서 은근히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곤 했었다.

신돌석씨는 이근영 같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촌지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전교조를 흔쾌하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중성 때문에 화가 나곤 하였다. 처남댁만 해도 그랬다. 촌지 문제로 애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고민을 했고, 그때마다 아내는 그까짓것 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뭘 고민하냐고 타박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 언제나 처남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여편네라는 식으로 아내를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곤 했었다.

처남네 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전교조 선생이 담임을 맡은 적이 있었다. 처남댁은 촌지를 주지 않아도 좋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왠지 불안하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였다. 수업에 지장을 주거나 아이들에게 이상한 생각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친누이 같았으면 한마디 했겠지만 처남댁이라는 관계가 되다 보니 그런 싫은 소리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신돌석씨네는 촌지를 전혀 준 적이 없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힘찬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촌지라는 것은 꿈도 못 꿨다. 돈이 없으니 그런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크더니 벌써 고3이 되었다. 하지만 아름이의 경우는 달랐다. 그때부터 신돌석씨도 직장이 안정되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아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속된 말로 정말 ‘밝히는’ 선생을 만났다. 어떤 선생이 담임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내는 무척 불안해 하였다. 신돌석씨는 설마 애를 어떻게 하겠냐면서 신경 끄라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아내로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해 스승의 날을 앞두고 아내는 촌지를 주고 말았다. 이웃 여자들의 조언을 받아서, 스폰지 케잌을 산 뒤 그 밑에 봉투를 깔아 넣었다. 그때 돈으로 5만 원이었던 것 같다. 아내가 5만 원을 벌려면 하루 종일 미싱을 돌려야 한다. 촌지를 주러 가던 날 아내는 몇 번을 망설였다. 한편으로는 그 돈이 아깝기도 하였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한 말에 따르면 그보다 더 머뭇거리게 된 까닭은 혹시 선생이 적다고 타박이라도 주면 어쩌냐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지금 말하는 사람이 정말 아내가 맞나 생각할 정도로 의아하였다. 평소에 웬만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을 정도로 배짱 좋던 아내가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내가 걱정하는 내용을 나중에 자세히 들어보니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도 있었다. 아름이의 담임선생은 학부모가 선물을 가져오면 받은 자리에서 바로 뜯어보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속에 봉투가 없으면 표정이 갑자기 표변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고 그럴 리가 있느냐, 사람들이 괜히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가 한두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확신에 차서 말하자 차츰 아내의 생각에 따라가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날 담임선생은 뜯어보지 않더라고 하였다. 학교에 갔다 온 뒤 아내는 한 이틀을 앓아누웠다. 돈도 돈이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아내의 표정은 일그러지곤 하였다. 아내와 신돌석씨의 자존심이 더욱 상하게 된 것은, 그 일이 있고 일주일쯤 뒤에 지역 시민 단체에서 주최했던 강연 때문이었다.

어떤 극작가를 초빙해서 문화와 관련된 강연을 듣는 것이었는데, 내용이 뜻밖에도 촌지 문화로 흘러갔다. 그 극작가가 촌지와 관련된 드라마 단막극을 쓴 적도 있는 모양이었다. 강사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결국 촌지는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받는 사람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다른 일에서는 똑똑한 것 같은데 이럴 때는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것 같다. 사회운동에 앞장서는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선생에게 촌지를 준다.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이다.

   
▲ [삽화 - 김윤기]

그걸 듣고 정말 너무 부끄러웠다.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시민 단체 회원이면서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는 김진구라는 사람의 아내가 자재 값으로 만들어 놓은 봉투를 촌지 줄 때 잘못 줘서 100만 원이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10만원을 주려고 했는데, 100만원이 갔는데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너무 아까워서 일주일을 앓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선생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체념을 하고 좋은 일에 보시한 셈 친다고 했다.

이근영과 악수를 나누는데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진성우였다. 뜻밖의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놀랍기도 하였다. 진성우 역시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된 교사였다. 하지만 그는 복직을 하지 않았다. 이근영이 해직 기간 동안 전교조에서 상근하면서 활동했다면, 진성우는 학원에 나갔다. 그러다가 꽤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복직 기회가 왔는데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신돌석씨가 속한 조직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이근영과 같이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해직되었던 기간에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시간이 많을 때고 신돌석씨도 시간이 많을 때였기 때문에 서로 밤새도록 술을 마신 적도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가 학원가에서 바쁘게 되고, 신돌석씨가 직장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는 가끔 소식을 들었을 따름이었다.

“잘 지내죠? 여전히 재미 좋습니까?”

“죽을 맛입니다. 7차 교육과정이 되면서 영 망쪼예요.”

힘찬이가 고2가 되면서 입시 과정에 대해서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다. 7차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되면서 문과는 사회만, 이과는 과학만을 하게 됐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과학 중에서도 몇 과목씩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과에서는 수학을 안 해도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꽤 있고, 이과에서도 역시 국어를 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 여럿 있다고 하였다. 힘찬이보다 한 해 위의 학년부터 7차 교육과정이라고 했는데,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도 그때뿐이었다. 교육과정이 뭐 그렇게 어려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신돌석씨는 학교 다닐 때 문과였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고1 때 담임이 신돌석씨더러 수학을 못하니 문과로 가라고 해서 간 거였다. 수학을 못하면 문과라는 사실이 좀 웃기기는 했다. 힘찬이는 이과로 갔다. 자기가 원해서 간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힘찬이가 문과와 이과 중 선택할 때 아무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 은근히 힘찬이가 역사를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공부가 힘찬이에게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공부를 하겠다고 해도 뒷바라지 해 줄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조형권이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나타났다. 조형권 역시 전교조 교사였다. 이근영과 함께 같은 그룹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전교조 결성 당시 학교의 분회장을 맡기는 하였지만, 학교 내 역할 분담으로 해직에서는 빠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 다니던 학교를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다.

조형권과 인사를 나눈 뒤 옆에 있던 조형권의 아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조형권의 아내 역시 같은 조직에 있던 사람이었다. 조직 활동을 할 당시에는 서점에서 근무하였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듯하여 자리를 잡고 앉으려고 했는데, 아직 집회는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고, 노래만 계속 울렸다. 이번 탄핵 정국에 가장 히트한 ‘너흰 아니야’였다. 신돌석씨는 이 노래를 듣고 가사를 구하려고 공장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봤는데 알고 보니 인터넷에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늙으면 사라져야 하나 하는 씁쓸함이 돌기도 했다. 사실 몸이 늙은 것보다 생활 자세가 늙어서 적응을 못하는 것일 게다.

“집회가 꽤 늦어질 것 같은데 간단하게 식사나 합시다.”

이근영이 한마디 하였다. 사실 집회가 끝나려면 9시는 되어야 할 텐데 다들 저녁 전이라서 출출할 것도 같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이미 교통이 통제되어 있는 종로의 차도를 건너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차 한 대가 그 비좁은 골목길에서 나와서 이미 차량 통제가 되고 있는 종로통으로 나오려고 하였다. 사람들이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아도 막무가내였다.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와서 운전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뒤에야 차를 돌리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저 운전자는 집회 때문에 통행의 자유가 막혔다고 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다시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한 20명 정도 앉을 만한 곳이었다. 신돌석씨 일행만 해도 7명이 되었으므로 중국집은 비좁게 느껴졌다. 두 개의 탁자를 붙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바로 옆에 6-70대 정도 되는 노인들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탕수육, 팔보채 등을 놓고 소주와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다.

“노무현이 대단한 기라. 이번에 한나라당과 민주당 애들 꼼짝없이 당한 기지.”

머리가 허옇게 센 좀 뚱뚱한 노인이 한마디 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사람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빙신 새끼들 아니네. 그런 수에 넘어가다니. 그것보다 거저 그렇다고 날뛰는 것들이 진짜 문제야. 나라 망할 징조지.”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바짝 마른 노인이 한마디 했다. 신돌석씨 일행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이므로 자연히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턱이 팔초하고 신경질적인 표정을 한, 60대 초반쯤의 깡마른 노인이었다. 신돌석씨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자가, 저 자가. 어디서 봤던가? 어디서 봤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쁜 곳에서 봤던 얼굴이었다. 특히 요즘은 쉽게 들을 수 없는 평안도 사투리가 더욱 신돌석씨의 몽롱한 기억을 안타깝게 자극하였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던지 그 자도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돌석씨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짜장면과 볶음밥이 나오고 그것을 먹는 동안 신돌석씨는 그 자에게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신돌석씨는 끝내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 내지 못했다.

   
▲ [삽화 - 김윤기]

저녁을 먹고 나갔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대 앞까지 나가기에는 이미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지난주에 자리를 잘못 잡아서 불편했었다면서 조형권이 중간쯤에 놓인 대형 스크린 앞에 자리를 잡자고 하였다. 대형 스크린이 있는 차 앞에 가니 거기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자원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몇 줄 뒤에 가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형권의 가족 넷이 나란히 앉고, 그 옆에 진성우, 신돌석씨, 이근영의 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좀 있자니 2부가 시작되었다. 2부를 진행하는 사회라면서 영화배우 권해효와 최광기라는 여자가 나란히 나와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최광기라는 여자는 자신을 ‘광끼’라고 말했는데, 이번 탄핵집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사람이었다. 신돌석씨도 이 사람이 사회를 볼 때는 괜히 신이 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노래를 몇 곡 부르더니 7시경부터 시민 발언이 시작되었다. 명망가나 혹은 운동가들이 나와서 연설을 하던 이전 집회들과는 달리 이번 집회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시민들이 나와서 발언하는 기회가 많이 생겼다. 이럴 때 나와서 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들을 재미있게 잘했다. 이른바 명망가들의 판에 박은 말만 듣다가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정말 신이 났다. 이럴 때마다 신돌석씨는 이들이 정말 그냥 보통 시민 중 한 사람인지, 혹시 주최 측에서 연출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그만큼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87년이었던가.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연대에서 시청 앞까지 행진을 한 뒤 시청 앞에서 한동안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즉석 연설들을 하곤 했었다. 몇 마디만 들어보아도 운동가임이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진짜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도 많았다. 이때도 이른바 ‘시민’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내용이 많았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와는 또 달리 이번 집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발언 기회를 집회 속에 프로그램의 하나로 넣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발언을 매우 재미있게 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사람은 자신이 화천에서 올라온 농민이라고 하였다. 오늘 집회에 참석하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왔다고 하였다. 그는 이번 집회 이후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 집회를 막겠다는 고건 대통령 권한 대행의 방침을 비판하였다.

“교통 방해? 그러면 청계천 고가도로 철거는 왜 하는 거요? 그래도 대한민국은 오천 년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세요. 그래 집회 좀 했다고 나라가 어떻게 됩니까? 왜들 그러는 거요.”

그가 한마디 하고 잠시 뜸을 들일 때마다 박수가 쏟아졌다.

“이번에 탄핵할 때 수고한 양반들. 내가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최씨, 조씨, 홍씨, 김씨 등이라고들 하대요. 그 사람들 이번 사태 이후에 밥 못 먹을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비록 조그마한 농장을 갖고 있지만, 우리 농장에서 얼마든지 밥은 먹여 줄 수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가 누구를 거론하는지는 다들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밥을 먹여 주겠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조건은 있어요. 밥은 얼마든지 주겠지만 일을 좀 해야 돼요. 우리 집에서 개를 한 백 마리 키우는데 개밥 줄 사람이 없어요. 와서 개밥 좀 주면서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좀 배우세요.”

사람들 속에서 폭소가 터졌다.

“우리 집사람과 아들놈이 어제 이 발언을 과격한 발언이라고 지우라고 하더라구요. 사실은 그래서 지웠는데, 막상 나오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안 하고는 못 견디겠네요.”

그는 광끼씨가 이제 시간이 됐다고 그만 내려가라고 한다면서 그래서 그만하겠노라고 하면서도 10분가량을 더 이야기했다. 그가 내려가자 사회자가 자기는 그만하라고 한 적 없다고 하면서 괜히 그러신다고 하여 또 한 번 폭소가 터졌다. 그리고 사회자는 자기가 잔치 사회 같은 것은 잘 안 보지만 지금 말씀하신 어르신이 칠순 잔치 하실 때는 꼭 사회를 봐 드려야 되겠다는 말까지 곁들였다. 참 재치 있는 사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는 국악인이 나와서 각설이 타령을 불렀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조금 넘었다. 사회자가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집회 대열이 종각을 넘어서 종로 3가까지 대열이 불어났다고 하였다. 환호성이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종로 3가를 넘어 4가, 5가, 6가 동대문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하지만 신돌석씨는 아마 종각을 넘어갔다는 것은 사회자의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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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12-18 11:37:01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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