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신형, 매미 소리 들려요. 여기 오니까 매미가 제법 시원하게 우네요.”

한 시간에 한 번 정도씩 10미터쯤 전진하던 차가, 나무가 축 늘어져 그늘이 생긴 곳에 다다랐을 때 김형수가 말을 건넸다. 듣고 보니 그랬다. 서울에서는 정말 매미 소리가 소음이었다. 특히 아파트 단지에서는 그랬다. 매미가 왜 그렇게 늘어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 녹화에 성공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그만큼 우리네 사는 환경이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매미의 천적인 새들이 없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므로 오히려 환경이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김형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방충망에 매미가 붙어서 운 적이 있어요. 난 처음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한참 지난 다음에나 알 수 있었지요.”

김형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일요일이었을 거예요. 그 전날 늦게까지 수술이 있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쉬다가 낮에 또 잠이 들었어요. 어둑해질 무렵 잠이 깬 거예요. 안방에서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먼저 아내가 소스라치면서 잠을 깨 일어나 앉는 듯했어요. 아이가 자다가 놀래서 울어댔고요. 안방으로 달려갔죠.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어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혹시 화재경보기가 아닐까 하는 거였어요. 복도에 있던 화재경보기 유리를 깨고 그것을 울려 대던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때를 기준으로 해도 10년이 더 지난 까마득한 일이었지만 그 소리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되었어요. 왜냐하면 그 소리는 계속 그 뒤 내 인생을 흔들어 놓았으니까요. 그 소리 뒤에 나는 편안히 앉아 있다는 것이 죄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소리는 아니었어요. 그러기를 몇 분, 아니 1분이 넘지는 않았을 거예요. 방충망에 붙어서 울어대는 매미를 발견했어요. 그 날 이후로 한낮에도 귀에 거슬리는 매미 소리를 들었어요. 집 주변은 온통 매미가 포위하고 있었죠. 매미는 밤낮이 없었어요. 가로수 어딘가에 숨어 쉬지 않고 울어댔어요. 특히 한밤중에 매미가 울어대는 날이면 날카로워진 신경이 무뎌질 줄을 몰랐어요.”

신돌석씨는 김형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하고 한참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장에는 그 뒤를 이어서 말하지 않았다.

“있는 놈들도 고생 좀 해야 돼.”

배에서 내려온 듯한 50대 정도의 여자들 몇이 걸어오다가 길게 늘어선 차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김형수와 신돌석씨는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있는 놈이라니. 고물이 다 된 중고 자동차 하나 갖고 있어도 있는 놈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일까.

85년에 운전면허를 딸 기회가 있었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공장에 운전면허 학원에서 나와서 단체로 배울 때 싼 가격으로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프레스반 반장을 비롯하여 몇 명이 등록을 하였다. 신돌석씨도 하려고 했다. 그때 그 정도 돈은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친목회를 하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 속에서 굳이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결국 그때는 운전면허를 따지 못했고, 그 뒤 운전이란 것은 사치스러운 것처럼 생각했었다. 그때 면허를 가졌으면 아마 또래 중에서 빨리 가진 사람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힘든 시절을 지내다 보니 40이 다 됐을 때 면허를 따게 됐다.

그리고도 차가 없어서 장롱 면허가 될 처지였다. 장롱 면허가 된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차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절이 변해 가면서 차가 없으면 놀러 가기도 힘들었다. 까짓것 뭐 그래도 좋았다. 놀러 가지 않으면 그만이고, 정 놀러 가고 싶을 때 대중교통으로 놀러 가면 되니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게 문제였다. 누이동생 선옥이만 해도 틈만 나면 함께 놀러 가자고 했다. 애들이 어릴 때는 껴서 타고 갔는데 애들이 크니까 한꺼번에 타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도 슬슬 차를 가졌으면 했다. 그러던 중에 이전에 같은 공장에 있었던 사람 하나가 중고차를 파는 사람이 있어서 엑셀 중고를 한 대 사게 되었다. 그걸 사고도 10년도 더 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변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직 차 몰고 섬에 들어왔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있는 놈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빈더 잘 있어요?”

차 이야기 때문에 잠시 끊어졌던 생각이 이어졌다. ‘매미 소리’ 때문이었다. 김형수는 처음 매미 이야기를 한 뒤 몇 차례 더 그 이야기를 했었다. 매미가 적당히 있을 때는 좋지만 그 다음에는 온통 매미만 보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미는 어쨌든 어떤 생물도 해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어떤 동물도 해치지 않는다. 나무즙을 빨아 먹고 살기 때문에 식물에게는 해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크게 문제 되는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매미를 해친다. 매미 소리를 좋다고 하다가도 많아지니까 소음이라고 한다. 어쨌든 매미와 사람은 공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매미를 적당한 선에서 유지되도록 보호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 끝에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었다.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었다. 그런 비유 자체가 좀 억지인 것 같았고, 그것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실제로 미경이를 죽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즈음에 신돌석씨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로부터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도 줄어들고 임금도 깎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많이 들었었다.

그런 생각을 바꾸게 하는 데 기여해 준 사람이 고빈더였다. 네팔 사람이었다. 박재우 전도사가 운영하는 선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신돌석씨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안녕하세요’라고 하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말을 처음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들었다면 한국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네팔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기 때문에 네팔인들이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 한국어를 특히 잘 한다는 것을 그에게서 처음 들어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특히 잘 했지만 그 뒤에 만난 네팔인 중에는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네팔인들 중에는 몽골리안도 있었는데 한국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생긴 사람도 있었다. 고빈더는 몽골리안은 아니었다. 아리안 계통이었는데 네팔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왔다고 하였다. 나이는 많지 않은데 일찍 결혼을 해서 딸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돌도 되기 전에 이별한 딸을 이야기할 때면 눈물을 글썽이곤 했었다.

“고빈더와는 연락이 끊어졌어요. 추방 뒤에도 한동안 연락이 되더니 언제부턴가 안 되더라고요.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마지막 면회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요.”

고빈더가 추방을 당할 때는 신돌석씨도 그에 대한 소식을 알았었다. 신돌석씨는 불법체류자였던 고빈더가 추방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얼마나 시달려 왔던가를 생각해 봤다. 고빈더는 네팔에서 대학을 다닐 때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그래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였고 돈을 벌어야만 했는데 특별한 직업이 없어서 막막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친구 중에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가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한국에 가서 돈 벌 것을 권유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관광 비자로 입국하여, 산업연수생을 하다가 이탈한 친구를 만나 그 친구의 소개로 중소기업체에 취직한 것이 91년쯤이었다. 군수품 제조 하청업체였다고 한다. 그는 그 회사에 취직한 뒤 처음에는 에끼셍이라는 것을 돌렸다. 에끼셍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손으로 돌리는 수동 프레스였다. 프레스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이것으로 돌려서 구부리고, 접고, 자르고 하였다.

그가 입사하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야간작업까지 다 마치고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기숙사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그러더니 좀 있다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그 공장 기숙사에서 고참으로 통하던 사람이었다. 그 회사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다가 제대한 뒤 다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마 스물네 살인가 됐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그런 작은 업체에서는 스물네 살만 돼도 나이 많은 행세를 하고는 했었다. 그가 방으로 달려들더니 다짜고짜 고빈더를 발길로 걷어찼다. 뭐라고 말하는데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향해 욕을 하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는 고빈더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 팬티 바람인 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 [삽화 - 김윤기]

옥상으로 끌려 가보니 각 방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 회사의 기숙사 방은 다섯 개였는데 모여 있으면 작당을 할까 봐 그랬는지 각 방에 나눠서 묵게 했었다. 옥상으로 끌려간 외국인 노동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고빈더처럼 팬티 바람인 사람 다섯에, 그래도 추리닝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반바지 차림이 한 사람이었다. 반바지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였다. 필리핀 사람이었다. 영어로 뭐라고 하려고 하자 대뜸 주먹이 배와 가슴을 후려갈겼다.

뭐라고 말하면서 팼는데 당연히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아마 영어를 지껄인 것이 못마땅하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방글라데시 출신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말로 하자면서 손짓 발짓을 했으나 역시 날아온 것은 몽둥이 세례였다. 두 사람은 대열 옆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하였다. 고빈더는 이때 자기가 먼 남의 나라에 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그 당시에는 했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므로, 충분히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77년 아니면 78년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연도는 이제 기억이 희미해져서 정확하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여기저기 다녔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다닌 공장 수가 몇인지조차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균 두 달을 못 다닌 것 같았다. 공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하루를 일하고 그 다음 날부터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풀칠을 하는 일이었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공장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나 잔소리를 하던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가기가 싫어져서 그냥 나가지 않아버렸다. 곧 군대를 가리라는 생각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대충이었기 때문에 이러기도 했지만, 그때 중소기업이나 가내공업에서는 웬만하면 그만둬 버리는 풍토가 아주 심했었다. 그만큼 공장이라는 곳이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뿌리내릴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우가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니다가 들어가게 된 어느 공장에서였다. 그곳도 고빈더가 다녔다는 곳과 같이 군수품 제조 하청업체였다. 부속품들을 만드니 무엇을 만드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라는 대로 프레스를 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이름에 ‘낙하산 후리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밖에는 무엇을 만드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고빈더가 했다는 에끼셍도 그 공장에 있었는데 주로 여자들이나 나이 어린 애들이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 공장에 들어간 지 한 일주일쯤 되었을까. 기숙사에서 자다가 끌려나갔었다. 각 방에서 둘째를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고참 몇 놈이 그랬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가슴과 배를 치고는 일장 훈계를 했다. 어이가 없었다. 당장 대들었다. 그들도 움찔했다. 설마 자기들에게 덤비랴 했던 것이다. 신돌석씨가 맞짱 뜰 태세를 보이자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한 녀석이 몽둥이로 치려고 했으나 최고참 녀석이 말리더니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말로 어르는 것이었다. 기숙사 군기 좀 잡으려고 하니 이해해라. 그렇게 해서 그냥 다시 대열로 가서 들어주는 시늉을 하게 됐다. 그 뒤 그들과 어울려서 술도 마시고 근처 강가로 놀러 가기도 했었다. 신돌석씨는 그때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남을 짓밟는 놈들은 세게 나가는 사람에게는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경험을 통해 감각적으로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고빈더로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뒤 고빈더는 여러 차례 맞았다고 한다. 일을 느리게 한다고 맞고, 시킨 일을 못 알아들었는데 말을 안 듣는다고 맞았다. 처음 맞을 때처럼 아무 까닭도 없이 끌려나가서 맞기도 했다. 아마 고빈더에게 다른 계기가 없었으면 고빈더는 한국 사람은 원래 그렇게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갖고 살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빈더가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될 일이 생겼다.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지, 나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에끼셍을 하던 고빈더를 어느 날 공장장이 부르더니 아래층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프레스를 하는 곳이었다. 에끼셍 하는 데 하고는 달리 컴컴한 데에서 대낮에도 불을 켠 채로 프레스를 돌리고 있었는데 고빈더에게는 겁이 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프레스 하던 사람 중 하나가 그만두자 당장 급한 대로 고빈더에게 일을 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프레스 하기를 한 일주일을 했을까. 어느 날 퇴근 시간을 십 분여 남긴 상태에서 그만 고빈더의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중소기업에서는 안전장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이 잘리는 일은 좀 과장해서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났었다. 고빈더는 일이 좀 익숙해져서 이제 좀 할 만하다 했는데 퇴근 시간을 눈앞에 두고 들뜬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손을 빼지 않은 채 스위치 구실을 하는 발판을 밟은 것이었다.

고빈더는 자신이 지른 비명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고 난 뒤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저만치 잘려나간 손가락 하나가 보였다.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반장이란 사람이 달려오자마자 큰소리로 욕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쯤에는 한국말의 욕은 대체로 알아들었다. 지금 기억해 보면 아마 ‘야 이 좆같은 새끼야. 누구 죽이려고 손가락을 잘라 먹었어. 이 개새끼야’ 뭐 이런 말인 것 같았다. 손가락 잘린 사람의 아픔보다 더한 것이 뭐길래 저렇게 욕을 해댈까. 어이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공장 안은 잠시 소란스러웠을 뿐 너무나 익숙한 일들이라서 그런지 이내 잠잠해졌다. 하긴 이 공장에는 사장부터 공장장, 직장, 반장 할 것 없이 손가락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 중소기업인 쇠공장은 대체로 그러했다. 신돌석씨의 기억으로도 프레스를 하는 공장에서 좀 오래 된 사람치고 손가락이 성한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만큼 산재에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조금 있다가 사무실 직원과 함께 가까운 회사 지정 병원에 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에도 접합 수술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되었고, 회사 측에서는 그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지 고빈더로서는 알지 못했다. 아마 비용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뒤 기숙사 방에서 죽치고 앉아 밥이나 먹고 뒹굴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그러자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만 해도 마음은 편했다. 이따금씩 손가락이 쑤시고, 또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면 처량해지곤 했지만,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어느 정도 편했다. 일주일인지 이주일인지쯤 지나 실밥을 풀러 갔다 온 뒤 사무실에서 불렀다. 상무가 봉투를 쥐어주었다. 딴생각 말라고 했다. 이것으로 끝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빈더가 한국말로 해서 못 알아듣자 ‘엔드’라는 말을 몇 차례 큰 소리로 말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그냥 ‘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에끼셍 하는 2층으로 올라가서 쉬엄쉬엄 에끼셍을 돌렸다. 그러다가 기숙사 옆방의 필리핀 사람의 소개로 김형수를 만났다. 그리고 좀 더 치료를 받았다. 김형수가 가서 따지라고 가르쳐 줬다. 그는 영어를 했기 때문에 고빈더는 그의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형수는 산재와 관련된 이런저런 절차를 말해 줬다. 하지만 고빈더는 그런 말을 옮길 수가 없었다. 우선 자기 자신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사무실에 가서 횡설수설하며 따졌는데 상무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때는 한국말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들은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불법체류자다. 네가 까부는 순간 우리는 너를 신고한다. 그러면 너는 추방이다. 너 같은 애한테는 산재보상은 물론 임금도 주지 않아도 된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고빈더는 그것보다 상무 주위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인상을 쓰고 있던 공장장과 반장들의 얼굴 표정에 더 신경이 쓰였다. 자칫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기숙사에서 내쫓겨나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움이 일었다. 그리고 고빈더가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검은 양복 차림의 사람이 사무실에서 나갔었는데 상무는 그를 가리켜 출입국관리소 직원이라고 하였다. 회사에서 너희들이 잡혀가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니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나오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아니라 거래처 직원을 그렇게 말하면서 협박을 했던 것이었다.

두려움 속에서 며칠을 억지로 버티며 일을 하던 고빈더는 마침내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김형수한테 찾아갔다가 소개받은 곳이 박재우가 운영하는 선교회였다. 고빈더는 그곳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린 뒤 취직도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일도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돌석씨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기어이 쫓겨났는데 이제 연락마저 끊긴 것이었다. 그때 조금만 더 잘 피했어도 취업 확인을 통해 체류 허가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4년 이상 불법체류자는 체류 허가가 되지 않기로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고빈더에게는 계속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으리라.

▲ [삽화 - 김윤기]

배에 올라탔을 때는 놀이 지고 있었다. 이 섬에 낙조가 일품이라고 하는데 금요일 밤에 비가 오고, 토요일에 구름이 잔뜩 껴서 보지 못했다. 아직도 구름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낙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신돌석씨의 차는 배의 맨 뒤에 자리 잡았다. 올 때는 자동차를 후진해서 배에 들어갔는데 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강화도에 있는 석모도에 갈 때도 자동차를 배에 실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전진을 해서 들어가서 배 안에서 차를 돌려 세웠었다. 나올 때도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뒤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좀 이상했었지만 선착장 구조의 차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섬에서 나갈 때는 전진으로 배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줄 앞에 선 차들은 그대로 전진하는 방향으로 들어가서는 배 안에서 차를 돌려세우고, 그럴 틈이 없게 될 때쯤부터는 후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돌석씨의 차는 줄의 거의 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배가 도착하자 전진으로 들어가서 배 끝부분에 거의 다 가서 차를 돌려 끝으로 후진해 들어가서 세웠다. 그래서 신돌석씨와 김형수는 배의 뒷부분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경치 참 좋네요. 저 놀을 어제 산에 올라가서 보았어야 했는데.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데가 있거든요.”

김형수는 여기에 자주 오는 모양이었다. 장애인 마을 때문에 그런 듯하였다. 그래서 이 섬을 꽤 잘 알고 있었다. 놀을 바라보는 김형수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졌다. 갑자기 김형수에게 묻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요즘은 왜 술 마실 때 기도하지 않아요.”

어제 술 마실 때 김형수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형수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알아차렸는지 씩 하고 웃었다. 김형수다운 호인풍의 웃음이었다.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은 둘이서 처음 술을 마시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저녁 무렵이었는데, 선교회 근처의 어느 호프집이었다. 호프집 바깥에 파라솔이 있고 거기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된 곳이었다. 그때 해 질 무렵의 놀이 제법 일품이었다. 김형수가 놀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술이 나오고 안주로 통닭이 나오니까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좀 놀랐다. 술을 마시면서 기도를 하다니.

알고 보니 김형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하였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기독학생회에 나가면서부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기독학생회라고 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김형수가 다니던 교회는 어느 정도는 보수적인 곳이었다. 그곳에 젊은 전도사가 한 사람 오면서 청년부와 대학생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대학생부에만 다니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교단 청년회와 관계를 갖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래도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던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그래서 변했다고 해도 민중교회 같은 식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학교 기독학생회에 들어가서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거의 모든 선배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그랬다. 교회 대학생부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선배들이 있었지만 교회 내에서는 피우지 않았고, 피우는 사람보다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다녀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김형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던 선배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1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복도에 화재경보기가 막 울리던 날이었다. 선배가 얼굴이 벌개진 상태에서 복도에서 화재경보기를 울려 대고 있었다. 같은 기독학생회 소속이던 동기 몇이서 스크럼을 짜고 복도와 강의실을 돌았다. 그러나 금세 짭새들이 들이닥쳤고, 스크럼을 짜던 애들 중 몇몇이 끌려갔다. 선배는 그런 와중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밤에 축제가 있던 날이었는데, 탈춤판에서 그 선배를 봤다. 김형수에게 유인물을 줬다. 그리고는 탈춤이 끝나자마자 춤판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구호를 외쳤다. 분위기가 뜨거웠다. 주변에 있던 짭새들이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김형수는 끝내 들고 있던 유인물을 뿌리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그 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 하숙방에서 잤는데, 친구 말로는 유인물 내용을 잠꼬대로 줄줄 외웠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김형수는 기독학생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자기도 선배처럼 시위 주동을 하고 감옥에 가리라 하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로 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3학년 때 대성리에 엠티를 갔다가 보안대가 들이닥쳐 연행되었다. 그리고는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강제 징집을 당했다. 제대한 뒤 복학하지 않고 현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복학을 했고, 졸업을 해서 의사를 하게 됐다. 김형수는 스스로 말했다. 자기는 앞장서지 못한다. 그렇지만 도망가지도 못한다. 그저 중간쯤에서 열심히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도망가도 도망가지 않을 사람이 바로 김형수일 것 같았다.

▲ [삽화 - 김윤기]

그렇게 살아온 김형수이지만 신앙만큼은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늦게 배운 담배라 그런지 하루에 두 갑을 넘게 피웠다. 어느 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신앙과 운동이 충돌을 했어요. 갑갑했지요. 거기에서 해답을 얻은 것이 민중이 곧 하나님이다였지요. 그런데 또 의문이 생기는 거예요. 민중이 곧 하나님이면, 뭐 하러 하나님이란 말이 필요할까. 그냥 민중을 위해, 민중을 섬기며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어요. 초월적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난 부정할 수 없어요. 그게 내 한계인지, 신앙심인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난 교회에는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가기 시작한 지 오래됐어요. 물론 박재우 전도사의 선교회에서는 예배도 보곤 하지만 말예요. 하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운동할 수밖에 없어요.”

신돌석씨도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녔었기 때문에 김형수와 문화적인 동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교회에는 매우 부정적인 것도 공감이 갔다. 그가 교회에 나가기 싫어하게 된 건 운동을 한 뒤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공부 못하면 공장 간다고 으레 말하곤 하였는데 그 말이 듣기 싫었다고 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더욱이 고등부 담당 목사가 그런 부모님의 말을 뒷받침해 줄 때 심각한 고민을 했었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신돌석씨는 그때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었다. 공장을 갈 가능성이 없는 김형수는 고민을 했는데, 공장에 거의 틀림없이 가게 되어 있는 신돌석씨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였을 것 같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당시에 유명하던 목사가 나와서 학생들과 대담을 하고 있었다. 그 목사가 외할머니가 이전에 다녔고, 서울에 올라올 때면 가곤 하는 큰 교회의 목사였기 때문에 친근감이 들어서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옆에서 누워 만화를 보고 있던 형이 빽 소리를 지르며 끄라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목사가 말했다. 이북에서 쳐내려오면 여러분들 모두 공장에 가야 한다고. 신돌석씨는 별 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형은 그때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형이 특별히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형은 본능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형의 그런 의식은 자신의 자그마한 성과를 지키려고 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었다. 반면에 그때 신돌석씨는 고등학생이라서 그랬는지 그런 말에 아무런 반감을 갖지 않았다. 아니 공장에 다닐 때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하면서 뭔가 알아가기 시작한 뒤에는 그 의미가 새록새록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목사의 말대로 한다면 당시 공장에 다니던 청소년은 다 뭐란 말인가. 이북이 쳐내려온다면 당할 수 있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 말종이란 것인가. 신돌석씨는 그런 사람이 숭앙되는 교회 분위기에 새삼 분노마저 느껴졌었다.

“신형 동네에서도 정치권에 간 사람 많지요?”

김형수가 화제를 돌렸다.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몰라서 의아해 하는 신돌석씨를 향해 김형수가 다음 말을 이었다.

“이명국이라고 기억나요? 그 사람이 우리 지역에 여당 지구당 책임자로 있어요. 그래서 도와 달라고 옛 동지들 만나고 다녀요.”

이명국이라. 김형수를 처음 만났을 때 만났던 의원 비서관이었다. 김형수와 그는 그때부터 알 만한 사이인 것 같았으나 모른 척했던 것 같았다. 나중에 김형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김형수가 제대한 뒤 현장에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들어갔던 조직의 대표격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형수는 그의 이름만 들어봤지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다. 물론 현장에 있을 때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조직이 와해된 뒤 듣게 된 것이었다. 그 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가 정치권에 나갔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박재우의 선교회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그는 신한국당으로 들어가서 한나라당 지구당 부위원장이었는데 박근혜 정부 때 탈당을 하면서 정치 낭인으로 있었는데 새 정부 들어선 뒤 여당 지구당 조직책을 맡았다고 하였다. 한나라당이라는 이유로 후배들로부터 백안시되고 본인도 소극적이었는데, 민주당에 가입한 뒤에는 좀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본인도 적극적으로 만나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 밀어주는 것 반대했어요.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에요. 신한국당을 택했던 것은 문제 있었지만, 민주당으로 간 사람 중에도 썩어빠진 친구들 많거든요. 나름대로 소신도 있고, 능력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제도정치 문제를 논의하는 순간 우린 항상 분열됐거든요. 지금도 그러지 않을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봐요. 그래서 그런 논의는 하고 싶은 사람만 하라고 했어요.”

신돌석씨는 김형수다운 말이라 생각했다. 제도 정치권과 고빈더. 그리고 공장으로 간 많은 청소년들. 무슨 관계일까. 배가 서서히 선착장에 닿았다. 차를 몰고 김형수의 차가 있는 곳까지 갔다. 한잔하고 헤어지면 좋으련만 이럴 때는 차가 있다는 것이 영 짐이 된다.

“있는 놈들이 되다 보니 술 한 잔도 하기 힘드네요. 다음에 해야겠네요.”

김형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차 앞에서 손을 흔드는 김형수를 뒤로 하고 선착장을 빠져나오면서 신돌석씨는 그렇게 붐비던 선착장과 달리 왜 도로가 이렇게 한산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매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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