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녘에서 촬영한 다큐영화 <사람이 하늘이다>를 제작한 김대실 감독과 10월 29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제일 처음 어느 학생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손을 들고 질문이 있다고 그래서 무슨 질문이냐고 그랬더니 나와 가지고 무슨 커멘트를 했는지 한번 상상해 보겠어요?”

팔순 노파라고는 믿기지 않는 김대실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되려 엉뚱한 질문을 던져놓고는 “선생님 머리가 참 멋있습니다.” 자답하며 소녀처럼 맑게 웃는다.

어쩌면 그의 이런 엉뚱한 듯 진솔한 인간미가 북녘에도 통했는지 모르겠다. 2013년, 2014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사람이 하늘이다>는 다큐영화를 제작한 김대실 감독과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 감독을 소개한 정연진 AOK(Acion One Korea) 상임대표도 배석했다.

<사이구> <잊혀진 사람들> <침묵의 소리> <사람이 하늘이다> 등 그의 작품은 일관되게 아픈 역사, 낮은 곳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전하고 있다. 아니, 인터뷰 중간중간에도 목이 메이고 눈물이 글썽이기 다반사다. 50에 영화감독을 시작해 종심(從心, 70)의 단계를 훌쩍 지났건만.

새로운 다큐영화 <철조망 600리>를 제작하러 방한했다는 그는 <사람이 하늘이다> 감독으로 지방 곳곳의 초청을 받아 공동체상영을 하기도 했다. 90년대부터 미국에서 인연을 맺어온 정연진 상임대표가 단체들을 연결시키는 중간다리 역할을 맡고 있다.

1938년 북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던 일곱 살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이북을 떠나왔다는 그가 반세기가 넘어 다시 찾은 고향땅에서 “진짜 사람들”을 봤다는 극적인 이야기는 우리 현대사의 한켠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10월 29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영어 문장은 가급적 우리말로 옮겨 적었다.

“나는 L.A.로 갈 거다. 가서 영화를 찍을 거다”

▲ <철조망 600리>를 제작 중인 김대실 감독은 80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달했다. [사진 - 정연진]

□ 통일뉴스 : 언제 입국했고, 언제 귀국하나?

■ 김대실 감독 : 9월 27일 도착했고, 뉴욕에 11월 12일에 도착할 예정이다. (인터뷰 이후 12월 1일로 귀국이 늦춰졌다)

자주 못 온다. 여기가 얼마나 먼데, 내가 80인데 아주 힘들다. (앞으로) 서울에 다시 오는 게 한번쯤 더 될까 생각한다.

□ 이번 방문은 한달 보름 정도인데, 주요 일정을 소개해달라.

■ 이번에는 아주 목적을 가지고 왔다. <철조망 600리>라는 영화를 만들러 왔다. 만들고 있는 중이다.

□ 목적만큼 잘 되고 있나?

■ 글쎄. 영화라는 건, 글쓰는 것도 똑같지만, 목적에 어느 정도 닿는지는 해봐야 알겠다. 목적을 머리속에 그리고 왔지만 해보면 자꾸 틀리니깐.

□ <철조망 600리>면 전방지역을 가게 될 것 같은데, 이번이 처음인가?

■ 갔었다. 지난 번에도 왔다가 봤었다. 철조망 600리가 쭉 이렇게 깔린 게 너무 가슴에 와서 닿았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져서 다시 왔다. 다시 와서 찍어보니까 찍을 게 더 많다. 그래서 걱정이다.(하하)

□ 다큐지만 주인공이 따로 있나?

■ ‘철조망 600리’가 주인공이다. 가만히 보니까, 이 친구(정연진)가 모르는 게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와서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고 있다.

□ 주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다큐에 담았다. <사이구>(LA폭동), <잊혀진 사람들>(사할린), <침묵의 소리>(위안부) 등을 만들었다. 이런 다큐를 만들게 된 배경은?

■ 내가 미국 와서 박사하고 대학교수 생활 10년 하고, 연방정부 상등공무원 생활을 한 10년 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하고 미국에 왔는데 교수니, 연방정부니 다 남의 일을 해주는 것 같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워싱턴 집에 왔다.

워싱턴 집에 와서 있을 때 4.29가 났다. 로드니 킹을 때림으로써 (구타 경찰관을 무죄 판결해) 일어난 것이 L.A. 폭동인데, 집에서 가만히 보니까 주류사회의 백인들이 이 ‘4.29 폭동’이라는 거는 한인과 흑인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일어났다고 쫙 그렇게 밀고 나가는 거다.

그래서 내가 너무 분통이 터져서 “그런 개소리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라. 이 4.29라는 거는 미국 사회에 존재했던 흑백의 갈등 속에서 마침내 터진 건데, 그 책임을 너희가 한인과 흑인한테 넘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하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내 남편이 미국사람인데, 그 앞에서 소리를 질러댔더니 우리 남편이 “맞다. 어떡할 건데?” 그러더라. 그래서 “나는 L.A.로 갈 거다. 가서 영화를 찍을 거다” 그렇게 돼서 L.A.에 갔다.

L.A.에 갔더니 한국 여성 한 명이 “선생님, 여기 오셔서 참 반갑습니다. 지금 어디를 가시면 좋으냐면, 폭동이 났을 때 단 하나의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문간에 서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데요. 죽은 지 뻔히 알면서도. 거기를 가보셔야 됩니다.”

그때 56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에 한국 사람이 딱 하나 죽었는데, 이재성(당시 18세)이라는 한국 청년이었다.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그랬는데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가봤더니 정말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그게 100일째인데. 그래서 그를 인터뷰하기 시작해서, 거기(LA폭동)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까 이게 뭐 끝이 없더라.

영화나 글을 쓰는 것은 초점이 있어야 되는데, 포커스를 희생받은 한국 여인들로 해보자. 왜냐하면 내가 미국에 와서 오래 있으면서 여성들이 말하지 못한 억울함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 가지고 한국 여성들만 인터뷰하기 시작해서 나온 영화가 <사이구>다.

내가 62년 미국으로 유학생으로 떠날 때 4.19가 터졌다. 그래서 이것은 4.19가 아니라는 걸 굉장히 조심해서 구분해서, <사이구>라는 제목을 붙였다. 영어로도 <SA-IGU>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다.

<사이구>가 다 끝나지도 않았을 때 워싱턴에 들어왔더니 스미소니언에서 프리뷰를 하자고 청탁이 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더니, 끝나지 않아도 좋으니까 있는 걸 보여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스미소니언에서 그것을 보이겠다고 했더니 그걸 보러 온 사람들이 이렇게 쭉 나래비를 서서 길게 뻗쳐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관심이 굉장히 높았다. 그래서 이재성의 엄마를 내가 강단에 올렸다. “당신이 이야기하라”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당신이 이것 때문에 외아들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라”고.

그는 영어를 못하니깐 내가 통역을 해야 해서 둘이 섰다. 그랬더니 가만히 기도를 하는 것처럼 있더니 하는 말이 “여기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갖다 묻고 아이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울먹임)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그걸 통역을 못하겠더라. 그래서 그 엄마보다도 더 눈물이 나서 가만히 있다가 그걸 통역을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게 <사이구>다.

“카메라맨이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한이다”

▲ 김대실 감독과의 인터뷰에는 정연진 AOK 상임대표가 자리를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그 이후 계속 <잊혀진 사람들> <침묵의 소리> 다큐를 계속 해나가다가 <사람이 하늘이다>를 제작했는데, 북한에 직접 가서 찍었다고 들었다.

■ 두 번 갔었다. <잊혀진 사람들>은 사할린에 가서 했다. 사할린 비행장에 딱 내리니까 경상도 노인 두 분이, 한 번도 못 만나본 노인 두 분이 두리번 두리번 거리더라. 그래서 내가 보니까 저분들이 날 만나러 온 사람들이다 금방 느껴지더라. 그래서 그분들한테 가서 “선생님들이 저를 만나러 왔죠?” 그랬더니 그런 것 같데. 사할린 노인회에서 회장하고 다른 직을 맡은 임원들이 온 거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가서 사할린 노인회, 남자들만 가득한 데로 갔다. “우리한테 뭐를 들으려고 오셨습니까? 우리가 할 말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손자나 손녀의 손목을 잡고 이제 죽을 날이 가까운데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세상을 떴으면 좋겠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그 이야기를 저한테 들려주시면 됩니다” 그랬다. 그랬더니 알겠다고. 그렇게 해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 <사람이 하늘이다>는 언제 찍었고, 최근에는 방북한 적이 없나?

■ 2013년 하고 14년에 찍어서 15년에 영화가 완성돼서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방북한 적이 없다.

□ 평양에 얼마나 머물면서 찍었나?

■ 평양에 두 번 들어가서 한 2주일쯤 있었다. 그런데 굉장히 오래 있은 거다. 왜냐하면 내가 하루에 14시간, 18시간씩 일을 했으니까.

□ 2주 정도 평양 가서 찍고 와서 편집했을 텐데, 작품은 마음에 흡족했나?

■ 흡족이라는 말은 해당치 않은 것 같다. 마음이 굉장히 슬픔과 분노와 아픔과 고통이 한꺼번에 이렇게 섞여 있었다.

내가 처음에 간 데가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호텔인가 그렇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대동강가를 혼자 걸었다. 이렇게 걷는데 저쪽에서 여자 두 분이 오더라. 오면서 노래를 한다. 그런데 노래가 뭔가 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그 노래를 하는 거다.

내가 요렇게 가서 “어머나, 어머나, 계속해서 하세요” 그랬더니, 그분들이 그 노래를 하는데, 이북에서 내가 7살 때 떠나서 서울에 와서 밤낮 부르던 노래다.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서 하던 노래가 “나의 살던 고향은” 그건데, 그들이 그 노래를 하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가슴이 뭉클하고 기쁘고 고통스러운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정말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분들하고 같이 어저께 떠났던 이웃들과 만난 그런 기분으로 손을 붙잡고 나도 그 노래를 불렀다. 그때 내가 데리고 간 카메라맨이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한이다. 혼자 (산책)갔으니까.

□ 다큐 제목 ‘사람이 하늘이다’는 동학의 명제인데, 동학과는 어떻게 접목됐나?

■ 그걸 미국에 가져와서 편집을 하면서 이렇게 보니깐 다른 게 아니다. 결론이 사람이다. 사람이 하늘이다. 그래서 동학과 연결이 되더라. 그래서 그 제목이 편집을 하면서 탄생한 거다. 내가 그 제목을 가지고 간 게 아니다.

□ 평소에 동학에 관심이 많았나?

■ 동학에 관심이 많이 있다.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동학이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종교 아니냐.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는 들어온 종교고,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생긴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기게 됐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종교 중에 사람을 그렇게 승화한, 그런 게 동학 아니냐. 그런 점에서 ‘사람이 하늘이다’ 하는 것이 내 가슴에 와서 굉장히 많이 부딪쳤다.

평양에서 인민대학습당에 가서 밑에를 내려다보니까 정치하는 사람, 그런 게 전부 밑에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 인민대학습당을 우러러 보더라. 거기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 다큐를 못 봤는데, 고향인 신천에도 간 것으로 안다.

■ 고향이다. 그래서 신천에 갈 때 내가 굉장히 부담감이 있었던 게, 신천에서 많은 학살이 일어났었다. 내고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그게 굉장히 여기 와서 닿아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신천에 가니까 우리 집이 어디 있었던가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옆에 논이 있는 데를 쭉 가면서, 저게 어쩌면 우리집의 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땅이 많은 지주였다. 그 정도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신천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 범죄를 알리는 신천박물관이 있지 않나.

■ 거기 갔었다. 거기 있던 분이 이 쪼그만 데서 몇백명인가 학살이 됐다고 그걸 얘기할 때 정말... 그리고 그분하고 나와서 얘기했는데, 식구가 여섯이었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다 거기서 돌아가시고 살아남은 건 자기밖에 없다고. 내가 그래서 “어머니 얼굴이 생각나세요?’ 그랬더니 ”너무 오래돼서 어머니 얼굴도 생각이 희미하게 나는데 사진 한 장이 없는 것이 지금 제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합니다“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머리가 참 멋있습니다”

▲ 김대실 감독은 인터뷰 도중 눈시울을 적시거나 소녀처럼 웃기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김대실 감독은 자신의 헤어스타일에 대해서도 아기자기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북한에 2주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상에 남거나 만나보고 싶은 사람 있나?

■ 나는 북한 사람들이 참 좋았다. 내가 북한 평양국제비행장에 딱 내렸지 않나. 그게 인터내셔날 에어포트가 아니다. 미국 시골 비행장과 아주 비슷하더라.

그런데 사람을 보니까 내가 7살 때 이북을 떠나서 이남을 간다고 할머니 손을 붙잡고 떠날 때 뒤에 두고 온 그 사람들이다. 내가 그냥 가슴이 뭉클하고 너무너무 반가운 거다. 진짜 사람들을 거기서 본 거다. 그 이북 사람들한테 받은 감정을 서울에서는 못 찾는다.

□ 서울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있나?

■ 서울 사람들은 꼬이고, 발전하고. ‘이 사람은 무슨 생각하고 있나’ 이러는데, 이북 사람들은 일단은 아주 반가운 생각이 먼저 든다. 서울에서는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건가,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많은 상상을 해야 되는데 이북 사람을 보니까 ‘어 여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정말 반갑다’ 그 생각이 먼저 온다.

□ 방북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나 다시 한 번 꼭 기회가 된다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나?

■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어져서 모르겠다. 이북에서 대표로 오는 사람들이 뉴욕에 있는데, 이북에서는 여기는 대사관이 없지 않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유엔을 통해서 일을 한다.

그런데 내가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콜럼비아대학에서 시연회를 했었다. 사람들 반응이 어떤가 보려고. 그때 유엔에 나와서 일하는 이북 대표들이 왔더라. 나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인사를 하면서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여태까지 이북에 대해서 영화를 만든다는데 이렇게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이북을 보면서 우리들한테 페어하게 만든 걸 못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더라. 그래서 그들하고 친해졌다. 우리집에 불러다가 밥도 해주고 술도 먹이고 좋은 친구가 됐다. 그런데 그들이 이북으로 갔는데 못 만났다.

□ 국내에서 상영됐나? 어디에서 주로 상영됐나?

■ 2016년에 DMZ 국제평화영화제에 초청받아서 그때 왔었다. 연진 씨 때문에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 정연진 상임대표 : 내가 2016년 가을에 공동체 상영을 14군데 조직을 해서 전국 각지를 돌면서 공동체 상영을 했다.

올봄 서울에서는 3.1절 때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3월 2일 상영됐고, 5월에 부산에서 6개 단체가 공동체 상영을 해서 반응이 좋았다. 부산의 영화상영을 했던 단체들이 감독님을 직접 모시고 얘기 듣겠다고 해서 11월 8일 부산에 가서 공동체 상영했던 사람들을 만나기로 돼 있다.

■ 그때(2016년) 왔을 때 (미국) 대사관에서 주최해서 서울대와 성균관대에서 보여줬다. 학생들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왔더라. 제일 처음 어느 학생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손을 들고 질문이 있다고 그래서 무슨 질문이냐고 그랬더니 나와 가지고 무슨 커멘트를 했는지 한번 상상해 보겠나? 아주 잘생긴 멋진 학생이 “선생님 머리가 참 멋있습니다.”(웃음)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랬지 어떡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머리가 멋있데. 성공회대도 갔었다.

“트럼프 때문에 미국을 떠날까도 생각했다”

▲ 지난달 30일 서울 성동문화재단 초청으로 공동체 상영을 한 뒤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제공 - 정연진]

□ 지금 미국에는 트럼프라는 대통령이 있고, 한반도 문제에 깊이 연관돼 있다. 한국인들이 궁금한 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도 의외였고, 또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의로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떻게 보고 있나?

■ 트럼프? 나는 트럼프 때문에 미국을 떠날까도 생각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트럼프가 머리가 좋은 건 확실하다. 머리가 좋지 않고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가 없고. 지금 대통령까지 됐는데, 트럼프를 선거한 사람이 미국 사람 아니냐. 그러니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주 묘한 나라인 거다.

트럼프가 내가 없는 동안에 어떤 짓을 해놨는가는 모르지만, 그 트럼프가 거기서 대통령이 됐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다. 많다. 깊다. 그런데 한국에서 어떻게 그렇게 트럼프가 호의적인 반응을 일으켰을까?

□ 한반도 평화 문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그러지 않았겠나?

■ 그런데 내가 이렇게 보니까, 김정은 씨가 트럼프 씨하고 대하는 걸 보면 김정은 씨가 트럼프 씨를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트럼프한테 아이가 어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것처럼 하는 게 나를 굉장히 슬프게 한다. 내가 잘못 본 건가?

□ 일부는 그렇지만 다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 물론 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말해서 김정은 씨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데리고 노는데, 여기서는 매달린다. 내 인상은 그렇다. 내가 틀렸다고 그래 줬으면 좋겠다.

□ 여기는 아무래도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미국이 강국이니까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달리는 것 아닌가.

■ 그런데 언제 미국에 매달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 남북이 통일되면 그렇지 않겠나.

■ 글쎄, 모르겠다. 남북이 통일된다고 미국하고 매달리지 않을 거 같나?

□ 뭐. 지금보다는 덜 하지 않겠나.

■ 아유... 나는 자신할 수 없다. 통일이 된다고 매달리지 않을까.

□ 통일이 된다면 좀더 위치가 넉넉해지지 않나. 지금이야 그 과정에 있으니까 강대국들의 눈치를 더 봐야 되는 것이고.

■ 그런데 내가 보니까 남한에서는 “왜 통일을 원하느냐”고,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내가 하루종일 강남 지나가는 젊은이들, 노인들, 부인들 다 붙잡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대다수가 “왜 통일을 원하느냐”고 반문을 한다.

이북 땅을 디디면서부터 통일을 원하느냐고 물어봤더니 모두가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다. “우리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애써서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지금 왜 들추느냐”. 그게 내가 본 여기 태도다. 내가 잘못 본 건가?

□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는데, 인종차별 문제도 지적했다. 또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있는 국가라고도 했다. 오래 살아본 미국에 대한 평가나 소회는?

■ 미국이라는 나라가 문제가 많은 나라고, 결점을 말하자면 수없이 많지만 거기 장점이라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사람을 많이 모아놓고 영화를 보이고 강연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그 사람들이 그걸 받아드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여기서 내가 미국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내가 이렇게 안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내가 굉장히 샤프하고 크리티컬하게 말하는데 그걸 받아드린다. 그게 그 나라의 장점이다.

□ 미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 미국이 영원히 세계 최강국으로 지탱해 나갈 것인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강대국으로 쭉 계속해서 남을 거라는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희망은 사람들이다. 미국에는 각종 없는 사람이 없지 않나. 그 사람들의 힘으로 미국이 지탱해 나갈 거다. 트럼프가 지탱하는 게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내 남편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배운 사람이다”

▲ 김대실 감독은 영화를 마치면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올해 연세가 팔순인가? 건강은 어떤가?

■ 1938년생이다. 오늘은 피곤한데, 건강이 80노인 치고는 괜찮다.

□ 그런 것 같다. 긴 여행도 하고, 귀도 밝고, 인터뷰도 하고.

■ 그런데 얼마나 계속 그럴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피곤하다.

□ 건강을 유지하는 무슨 비법이 있나?

■ 없다. 비법은 내가 계속해서 일을 하는 거다. 일을 안 하면 이렇게 가라앉는다.

□ 헤어스타일은 원래 그런가?

■ 머리는 볶아서 이렇다. 헤어스타일이란 게 파마를 해서 이런 거다. 내 친구 중에 거의 천재에 가까운 그림 하는 아이가 있는데, 2004년에 저 세상 갔다. 고등학교 때 국전에 참여해서 당선한 아이다. 내 베스트 프랜드였는데, 하루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뭐라 그러냐면, “야 대실아, 너 정말 못났다” 그러더라. 그러면서 이렇게 보면서 “그런데 네가 그 못난 이유 중의 하나가 이마가 너무 짧은데 그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을 해야겠다.”

하루는 나를 한국 사람이 하는 미장원에 데리고 가서 뭐라 그러냐면 “얘 머리를 흑인들의 머리처럼 이렇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미장원 사람이 거절을 하더라고. “왜 흑인들 머리처럼 하느냐”고. “아니, 돈 드린다는데 해달라는데 안 해주냐”고. 그래서 내 머리를 그냥 흑인들 머리처럼 볶아 놨다. 그때부터 내 머리 스타일이 이렇게 된 거다.

□ 정연진 상임대표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

■ 정연진 : ‘위안부’ 운동을 오래 했지 않나. ‘위안부’ 운동을 할 때 감독님이 <침묵의 소리>로 거의 처음으로 본격적인 다큐를 만들고 책으로도 썼다.

90년대 중반부터 감독님이 L.A.에 와서 영화상영도 하고 그때부터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엄마랑 고등학교 동창인 거다. 두 분이 친하신 건 아니고 같은 학교를 다닌 정도다.

■ 그런데 요번에는 내가 서울에 올 생각이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요번에 온 것은 연진 씨의 영향이 많다. 하루는 전화를 걸어와 뭐 부산에서 어디서 <사람이 하늘이다> 영화를 보고 반응이 많다고 가야되겠다고 그래서 내가 용기를 얻어서 온 거다.

□ 새로운 영화를 찍기 위한 것 아닌가?

■ 거기에 용기를 얻어서 <철조망 600리> 그걸 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긴 거다.

□ 지금은 영화 만드는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 남편하고 나하고 아이오와에 땅이 조금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을 남편이 간 다음에 내가 팔아 가지고 ‘단 깁슨 스칼라쉽 펀드’라는 걸 했다. 그래서 대학생, 고등학생 장학금을 2,3년 줬다. 그런데 요번에는 스칼라쉽을 안주고 그 돈을 훔쳐가지고 왔다.(웃음)

□ 다큐를 직접 찍고 편집하고 하나?

■ 찍고 편집하고, 사운드 하는 것은 사람을 쓴다. 내가 50에 영화를 시작했는데, 내가 나레이터하고, 내가 라이터하고, 내가 프로듀서하고, 내가 디렉팅하지만 기술이 들어가는 거, 찍는 것, 사운드 그런 것까지 내가 다 할 자신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게는 못한다. 그래서 돈이 들어간다.

□ 먼저 돌아가신 남편이 미국인 걸로 안다. 단행본 <단을 그리며>(Looking for Don)을 냈고, <어깨동무> 출판을 계획 중이라고 했는데, 출간했나?

■ 아니다. 인제 가면 해야 한다. 그런데 하여튼 나는 단이라는 내 남편을 통해서 인종이니 뭐 나라니 그런 걸 다 초월해서 인간의 가치를 배운 사람이다.

□ <철조망 600리>를 일단락하면, 이후 여유있는 말년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이후 계획은?

■ 그 다음에 죽을 지도 모른다. 내가 80인데. 끝나고 나면 글을 쓰려고 한다. 왜냐하면 글은 돈이 안 들지 않나. 영화는 돈이 많이 들어서 너무 피곤하다.

□ 한국에 오면 만나는 지인들이 있나?

■ 한국에는 이화고녀 동창들이 많은데 이번에 와서는 연락을 하나도 안 했다. 그들은 다 부자가 됐고 만나면 돈 이야기하고 뭐 할 얘기가 없다. 그런데 국민학교 친구가 하나 있다. 딱 한 친군데 그 친구는 지금 만난다. 그때 만났던 감정하고 똑같다. 다른 친구들은 너무 변해서 말이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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