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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이야기,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2)<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6)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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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10  1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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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조철구가 해고된 지 2주일 만에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때 최광선이 노조에 가입하였다. 뜻밖이었다. 원형민은 입에 거품을 물면서 최광선 같은 놈은 받아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입하겠다는 사람을 못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때의 노동조합법은 임원의 자격을 3년 이상 근속자로 제한하였고, 집행부나 대의원도 1년 이상 근속자만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집행부나 대의원은 노조설립에 꼭 필요한 요건은 아니었지만, 위원장과 사무장 및 감사 등 최소한 4명이 3년 이상 근속자이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최광선처럼 4년을 근속한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이직이 심하던 그때의 중소기업에서는 정말 아쉬운 존재였다.

결국 최광선은 감사라는 직함을 받은 채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가 결성되던 날 원형민은 대낮부터 술을 잔뜩 마신 채 불만을 터뜨리더니 그 날 밤에 있었던 결성식이 열리던 장소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노조 결성은 신림동에 있던 금속노련 서울지부 사무실에서 있었다. 그때는 노조결성에 대한 방해공작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이렇듯 외부에서 비밀스럽게 하곤 하였다. 노총 산하 금속노련은 노조를 사측에 팔아넘겼다는 의혹도 받았지만, 그때는 노조가 많이 만들어지던 해이어서 한편으로는 자기 조직 기반을 넓히기 위한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노조는 순식간에 생산직의 90%가 가입하는 성과를 낳았다. 신돌석씨는 쟁의부장이 되었다. 신돌석씨에게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조철구와 박용수는 외부에서 노조활동을 지원해 주었다. 노조가 만들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은 노동가요를 비롯한 민중가요들도 배우고, 노동법도 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열정 하나만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일이 끝난 뒤 사무실에 모여 여러 모임을 했다. 집행부 회의도 하고 소모임도 했다. 그리고는 다시 회사 밖으로 나가 조철구와 박용수 등을 만났다. 대체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이란 곳을 이용하곤 했었다. 그리고 술 한잔하고 집에 가면 3시가 넘는 경우가 많았다. 신돌석씨는 그때 노조간부들과 술 한잔하던 날 최광선이 했던 말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정말 소나 개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왔어요. 한데 그게 아니었어요. 회사는 나를 속였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속일 수 있는 거예요? 정말 화가 났어요. 이젠 진짜 안 속을 거예요.”

최광선이 술좌석에서 그 말을 하던 날 노조집행부들 특히 노조준비모임부터 주도적인 구실을 했던 사람들은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에 들떴다. 신돌석씨 역시 그랬다. 최광선이를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꼭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최광선은 노조 결성 이후 노조 일에 열심이었다. 사무실에서 몇 차례 부르는 것 같았고, 반장도 따로 불러서 은근히 위협도 하고 회유도 하는 것 같았는데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반면에 원형민이는 노조 결성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예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사흘만 무단결근하면 자동 해고가 되었었다. 결국 원형민은 회사를 그만둔 셈이었다.

이렇게 잠도 자지 못하고 열정적으로 보낸 날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회사가 구사대를 만들어서 노조를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구사대라고 해봤자 회사 간부들 몇이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다. 노조가 강고한 단결력만 보였어도 물리칠 만했는데, 그때 노조간부들의 의식 수준은 그것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노조를 결성하고 정확하게 50일이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 회사와 임금 교섭을 두 차례 벌였었다. 그때 회사에는 사장의 처남이라는 전무가 있었는데 굉장히 극우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조철구 같은 사람을 보면 흥분을 참지 못했다. 조철구가 해고된 뒤 혼자 출근 투쟁을 할 때 혼자 뛰어나가서 조철구의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리지 않았으면 심각한 폭력 사태가 벌어질 뻔했었다. 그는 조철구를 보기만 하면 ‘이 빨갱이 새끼 순진한 근로자들을 물들여?’하면서 길길이 뛰었다. 그가 사장의 두 아들 즉 총무부장과 생산 2과장이었는데, 이들과 짜고 구사대를 조직한 것 같았다.

   
▲ [삽화 - 김윤기]

구사대가 노조사무실을 습격하던 날 신돌석씨는 전날 과음한 것 때문에 한쪽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금형반 기사인 손준호가 웃통을 벗어젖히고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와서는 노조사무실 집기를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들어온 구사대원들이 조합간부들을 한 사람씩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몇몇이 소리치고 저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조합간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신돌석씨는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뒤 상황 판단을 하는 데 어지간히 시간이 걸렸다. 열은 받았지만 이미 상황은 구사대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겁을 먹은 조합간부들이 무릎을 꿇은 채 운동장에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꼭지가 도는 느낌이었다. 손준호에게 달려가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이미 주변에는 구사대밖에는 없었다. 신돌석씨는 몇 사람에게 팔다리가 잡혀 있었다. 손준호가 쇠파이프를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 빨갱이 새끼. 아니 빨갱이 똘마니 새끼. 회사 망쳐 먹으려고 환장했냐?”

어이가 없었다. 손준호는 노조가 결성되자 노조사무실로 음료수를 사들고 오기도 했었다. 노조 측에서 간부 자리를 제의하자 사양은 했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극단적인 소리를 하는 것일까. 누가 공작을 한 것일까.

“손형,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아니란 걸 잘 알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요. 이래도 정말 되는 겁니까?”

“입 닥쳐 개새끼야. 죽여 버리기 전에.”

그러면서 손준호는 쇠파이프로 신돌석씨의 배를 갈겼다. 아프기도 했지만 너무 화가 나서 발을 들어 손준호를 가격하려 했으나 이미 구사대에게 잡혀 있는 몸이라 몸부림만 치게 됐다. 그러자 손준호가 다시 신돌석씨를 치려했는데 현장 지휘자격인 생산과장이 말렸다. 그리고는 끌어내라는 신호를 했다. 신돌석씨는 몸부림치다가 운동장으로 끌려나갔다. 신돌석씨는 끌려 나가면서 평소 그런대로 허물없이 지냈던 도장반 반장과 프레스반 반장을 향해 소리를 치며 따졌다. 그러나 이들은 신돌석씨의 눈길을 피하며 외면했다. 구사대는 너무 손쉽게 승기를 잡았다. 기가 꺾인 조합간부들은 저항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일단 끌려 나간 신돌석씨는 다시 생산과장의 지시에 따라 공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철문은 굳게 닫혔다. 밖에서 소리소리 질러 봤자 소용없었다. 좀 있다가 쪽문이 열리면서 하나씩 둘씩 조합간부들이 밖으로 쫓겨났다. 그렇게 그 현장의 노조는 허망하게 깨져 버렸다.

그날 밤 ‘함께 하는 집’에 조합간부들과 해고자들이 모였다. 다음날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시위를 했지만 회사는 요지부동이었고, 그 사이에 하나 둘씩 복직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한번은 쫓겨난 조합간부 및 열성조합원들이 회사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있다가 최광선을 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배구를 하였다. 그 중에 최광선의 모습이 보였다. 공이 담 밖으로 넘어오자 최광선이 문을 열려고 하다가 수위가 못 열게 하자 담을 넘어서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시위 대열에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한참 뒤 그가 조장을 거쳐 반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형민을 다시 본 것은 88년 경이었다. 지역에 있는 어느 현장의 파업 때 지역 노동자들이 그 현장에서 지원 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그를 만난 것이었다. 그 사업장을 그만둔 뒤 다른 사업장에 들어갔고, 노조 활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의 소식은 모른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렇게 깨진 노조가 다시 부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85년 가을에 노조가 깨졌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집행부가 깨진 것이었다. 회사는 어차피 노조는 있어야 한다는 시대의 흐름을 이해했는지 자기들 세력으로 집행부를 채워서 신고했다. 그러나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때 이 어용노조는 다시 민주노조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피 튀기는 파업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노조의 초대 집행부는 거의 노조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그들의 복직 여부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대했고, 이후에 들어선 민주노조집행부도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이후 조직사건으로 수배된 뒤 그 지역을 떠나면서 그 노조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도 무원칙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아하였다. 신돌석씨에게는 아직도 사람을 의리 위주로 보는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 때문에 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한테 오히려 말을 듣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돌석씨 자신도 문제라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았다. 또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잘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강진수 문제도 그랬다. 강진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다음 문제였다. 그의 개인주의적인 사고가 체질적으로 싫었다.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 달리 들리는 것도 그의 개인주의적인 체질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삽화 - 김윤기]

“눈앞의 이익만이 이익인가, 길게 볼 줄도 알아야지. 이라크전이 끝난 다음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어?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의 평화 호소를 들어줄 거야.”

김종성이 아까의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한마디 했다.

“길게 봐도 그렇지. 미국이 이길 텐데 우리가 동맹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될 거 아니야. 그리고 이라크와 북한은 다르지. 이라크는 쳐들어가서 석유를 얻어 낼 수 있지만, 북한에서 나올 게 뭐 있어?”

“왜 북한에서 나올 게 없어. 앞으로 러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동북아 경제권이 만들어진다고 하잖아. 미국놈들 거기에 파고들어서 자기 이익을 빼앗길까 봐 지금 그러는 거라고.”

김종성이 얼마간 서툴기는 하지만 확신에 찬 듯 나름대로 정세 분석까지 했다. 그러나 강진수는 씩 한 번 웃을 뿐 별로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투였다.

“만약에 미국이 지면 어떻게 할 거야. 괜히 미국 똘마니짓이나 하다가 세계적으로 찍히고 말 거 아니야. 그럴 때 우리는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웬수가 된다는 건 생각 안하나.”

강진수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듯 윤태형이 따지듯 말했다.

“미국이 왜 져? 틀림없이 이기지. 나하고 내기할까? 윤형은 미국이 지고, 나는 이기고.”

강진수는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갑자기 소리를 높여 가며 말을 했다.

신돌석씨는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이기냐 지느냐로 논점을 삼으면 결론은 이상하게 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윤태형이 한발 물러서면서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누가 미국이 진다고 그랬어. 그런 것까지 고려하면서 파병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금방 꼬리를 내리네.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러다가 때만 놓치지. 미국은 틀림없이 이겨. 그것도 단기간 내에 이긴다구.“

강진수는 평소 그답지 않게 신이 나서 말을 하면서 윤태형을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신돌석씨는 논란의 줄기가 이상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라크 문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계속 생각해 오던 바였다. 지역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강성욱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40대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등산을 하는 모임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원래 등산이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어린 시절에 산동네에서 살면서 오르내린 것이 산인데 무슨 산을 일부러 가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어울릴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작년부터 시간만 되면 이 모임에 나가곤 했었다.

   
▲ [삽화 - 김윤기]

작년 10월경에는 백운대를 등반했었다. 그때 미국의 이라크 침공 문제가 화제로 되었었다. 참석한 사람은 열 명 가량이었는데 이야기에 적극적인 사람은 강성욱과 인터넷 신문에 기자로 있는 황우경, 그리고 민노당 지역 간부로 활동하는 오창규 정도였다. 황우경은 미국은 틀림없이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한 뒤 이라크를 치느니 마느니 이야기가 오고 갈 때였다.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그 의견에 동조했지만 그다지 확신에 차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어서 황우경은 이라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황우경의 그런 의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견해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도 나왔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허망하게 깨져 버렸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일 뿐인 것 아니냐.

황우경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반탈레반을 표방하는 세력들이 있지만, 이라크에서는 반후세인 세력이라는 것이 미미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곤경에 빠질 것이고 제2의 베트남전이 될지 모른다고 하였다. 황우경의 의견은 상당히 논리적이었고, 우선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보 자체가 풍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을 하면서 듣기만 하였다. 그런데 강성욱만이 별로 흔쾌해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과연 그럴까. 강성욱은 황우경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는 전제를 말하였지만, 한 가지만은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그것은 이라크 역시 반이라크 진영이 약해도 정권 자체가 민중의 지지를 강력하게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베트남전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막상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이야기하고 여기저기에서 보도가 되면서 신돌석씨는 확실히 사람들은 자기의 바람에 따라 사실을 취사선택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라크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러시아의 소년이 미국방성 정보를 빼내서 인터넷망에 올리는 사이트가 있다고 하면서, 이라크군은 전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미군이 바그다드 근방으로 진격할 때만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젊은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때문에 신돌석씨는 미국이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놓고 판단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 자체가 매우 취약한 데다가 사람들은 그 취약한 정보를 주관적인 잣대로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윤태형도 그런 함정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틈을 강진수가 파고드는 것 아닌가.

“그럼 너는 미국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는구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이라크 침공을 한다는 것은 말야.”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신돌석씨가 끼어들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국제 정치는 실리 아녜요. 그러니 우리도 실리를 취해야죠.”

“실리라…”

신돌석씨는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혀 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그놈의 실리가 무엇인지. 실리라고는 별로 얻을 것도 없는 중소기업 프레스공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하긴 지금의 강진수보다도 더 가진 것이 없던 때에 신돌석씨도 그런 주장을 했던 적이 있었다.

85년도에 해고가 된 뒤 그 해 겨울에 ‘함께 하는 집’에서 해고된 노동자들 중심으로 몇 차례 교육이 있었다. 그 중 한 강의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강의에서는 베트남, 이란, 니카라과 등에서 있었던 민족해방운동의 소개와 그 의미 등이 이야기되었다. 신돌석씨는 다른 지역의 문제는 잘 모를뿐더러 크게 관심도 없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신기하다는 느낌도 가졌다. 그런데 베트남 이야기를 할 때는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있어서 되는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트남전은 신돌석씨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머릿속에 아주 깊이 새겨진 전쟁이었다. 그것은 악의 무리인 베트콩을 무찌르기 위해 미군이 싸운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정의의 사도로서 갔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고,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의 신돌석씨 생각이었다. 외삼촌이 베트남에서 전사한 특별한 인연도 그렇게 생각하는 데 한몫했었다.

하지만 강의 도중에는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강사에게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또 분위기 역시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혹시 웃기는 놈이나 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즈음에 신돌석씨는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인텔리라는 자들과 자신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우선 환경이 달랐다. 많은 인텔리들이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그러나 신돌석씨는 그럴 곳이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 출신들도 대부분 이전부터 ‘함께 하는 집’이나 노동교회 등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씨처럼 85년에 만들어진 노조 출신으로 해고된 뒤에도 계속 그런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과도 의식의 괴리가 느껴졌다. 그들은 이미 그런 문제는 다 소화하였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곤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인텔리든 노동자들이든 사실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그 당시에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모두 그런 고민을 넘어선 사람들 같았고, 그래서 짙은 소외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날 강의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가 오래 갔었다. 대부분이 돌아가고 몇몇 사람이 강사와 함께 계속 술을 마시게 되었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는 노동자 출신은 신돌석씨 혼자 남았던 것 같다.

“그런데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이득을 준 것 아닌가요?”

그때 왜 이득이라는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신돌석씨의 그 당시 생각이라면 베트남전쟁은 악의 무리와 싸운 정의의 전쟁 아니냐고 따져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득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강의 속에서 이미 원래의 생각이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니면 이전부터 그런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본디 이놈의 체제는 이득이 곧 정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만 부딪히면 오락가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강사는 술이 꽤 올라 있었다. 강사가 신돌석씨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신돌석씨의 머릿속에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의미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하겠다는 나라에 제국주의의 용병으로 가서 그 인민들을 살육하여 얻은 것이 도대체 뭐 말라비틀어진 이득이야?”

제국주의의 용병, 인민, 신돌석씨로서는 살벌하게 들리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돌석씨도 술이 오를 만큼 올라 있었다. 물러설 수는 없었다. 되든 안 되든 떠들었다. 우리는 그 뒤 잘 살게 되었다. 아니 아니라도 좋다. 그래도 보릿고개는 넘겼다. 월남전 때문이다. 많은 군인들이 실전 경험을 쌓았다. 등등. 이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마구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마음속에서는 내 생각이 틀렸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의 어린 시절 동네에 훈이 삼촌이란 사람이 있었다. 월남 갔다 온 사람이었다. 동네에서는 김상사라고 불렀다. 사실은 상사가 아니라 병장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하던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노래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술만 마시면 애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베트콩들 각을 떴다는 둥, 꽁까이들 배를 갈랐다는 둥 하는 이야기였다. 혼자서 베트콩 수십 명을 처치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베트콩은 어리버리한 조무래기 들이고 그 자신은 람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이야기를 신나게 들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끔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훈이 삼촌이란 사람이 인간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데 강사의 말을 들으면서 ‘살육’이라는 단어 속에서 어린 시절의 그런 느낌들이 마구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이제 신돌석씨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지탱할 힘이 없다는 것을 느껴가고 있었다. 다만 떠들어댄 것은 오랫동안 믿어 왔던 생각을 버려야 하는 허전함에 대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강사도 꼭 논박이라고 할 것도 없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잘못하면 싸움이 날 판이었다. 옆에 있던 조철구가 말렸다. 강사는 조철구보다도 한참 선배였다. 노동운동을 오래 한 인텔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눈빛을 보냈었고, 수녀원의 마리안느 원장도 존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노동운동을 하고 진보정치를 하다가, 보수정당에 가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통과될 때 그는 과연 어떤 데 손을 들지가 궁금하였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전에 재야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 다수가 파병 반대에 표결했다. 그런데 그는 기권을 하였던 것 같다.

그에게 가서 따져 볼까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하던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한번 각성하라고 호통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허나 그만두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에게 따질 일이 어디 그것뿐인가. 또 따지고 들 사람이 어디 그 하나뿐인가. 신돌석씨는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도, 진보적인 생각을 포기한 사람들 아니 자신의 이익과 맞바꾼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알량한 자부심이나 갖는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르랴.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었다.

“이왕 시작된 전쟁이니 빨리 끝내고 우리도 건설업체나 많이 보냈으면 좋겠어.”

뚱뚱한 몸집의 금형반 박한영이 이런 논쟁은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빨리 끝낸다는 것은 결국 미국이 빨리 이겼으면 좋겠다는 것 아닌가.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은 이 정도에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 전해 연말에 촛불 시위를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 12월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무지하게 추웠다. 힘찬이를 데리고 갔었는데 힘찬이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친구를 만났다. 같은 반 아이라고 했다. 교회를 다니는데 그 교회 교단에서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물론 기도회의 내용이 효선이 미순이 추모와 미국의 회개 촉구였다. 그때 힘찬이가 말했었다. 자기 반 애들 대부분이 미국을 싫어한다고. 신돌석씨는 그때 정말 이제는 뭔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신돌석씨 자신도 너무 역사를 가볍게 본다는 생각을 했다. 힘찬이가 학교에서 썼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주제였다. 그런데 미군의 한강 이남 배치를 우려하고, 그래도 지금 미군이 있어서 든든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가. 내가 아들을 잘못 가르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힘찬이는 신돌석씨가 그 나이일 때 비하면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대중 속에서 올바른 것을 찾아내며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그저 생각만 앞섰다가 언제 보니 생각을 내팽개친 사람이 되어서야 안 되지 않는가.

강진수는 실리 때문에 미국에 파병해야 한다고 하였고, 미국이 이긴다고 하였다. 어쩌면 이겨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미국은 이겼다. 그래서 그는 신나 했었고, 반대로 윤태형과 김종성은 기분 나빠 했었다. 물론 신돌석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라크는 미국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윤태형과 김종성이 강진수를 공격하고 있고, 강진수는 침묵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강진수 하나를 이겨서 무엇하랴. 사실 그의 말대로 그는 실리만 주어지면 미국을 반대할 사람이다.

그 옛날 노조를 굳게 지킬 수 있었다면, 그럴 힘과 의지가 있었다면 어쩌면 최광선은 성실한 노조 간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닌가. 다만 우리는 이제 미국을 정의의 사도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는 거인 정도로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 진보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길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승리의, 긴 안목에서의 이익을 생각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미국을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괴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런 괴물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다수가 갖게 될 것인가?

어느덧 사람들은 밥을 다 먹고 하나 둘 식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매듭도 없이 끝이 났다. 점심시간의 논란은 언제나 그렇게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현주소를 알려 주는 것이었고, 세월 속에서 무서울 정도로 그 내용이 바뀌어 갔다. 힘찬이가 어른이 되는 날에는 좀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이 논의 되는 점심식사 자리가 될 것인가? 되어야 하겠지. 아니 반드시 되고야 말 것이다. 신돌석씨는 두 손을 불끈 쥐면서 식당 문을 나섰다.

   
▲ [삽화 - 김윤기]

그 날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신돌석씨의 뒷덜미를 긁어 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오전 11시 경 한총련 소속 대학생 20여 명이 을지로에 있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성조기를 끌어내려서 불태웠습니다.”

밤 10시가 되었다. 후원의 밤도 마무리될 때였다. 대부분 가고 2차를 가는 분위기였다. 신돌석씨는 간만에 2차를 가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자고 마음먹었다. 이전에는 서울시 밖으로 나가면 시외요금으로 더 얹어주어야 했는데 요즘은 미터로 갈 수 있었다. 택시 손님이 줄어서 그런 것일까? 어르신들에게 2차에 가겠냐고 하니까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사양하면서 그만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회장이란 분이 손을 꽉 잡고는 좀 도와달라는 말을 힘주어서 했다.

‘우리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물론 돈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진실을 알자는 것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속아 산 세월이... 속아 산 세월이...“

국민을 사지로 내몰고 그 돈을 받아서 착복한 자들. 어르신들의 말대로 그야말로 야만이었다. 걸핏하면 정의니 민주니 자유니 들먹이면서도 무자비한 살육을 세계 곳곳에서 자행하는 미국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그 자체였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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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11-12 12:11:05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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