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12.14 토 10:25
홈 > 오피니언 > 기고
넷째 이야기, 길 따라 흐르지 못하는 물(2)<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8)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8.09.17  10:29:09
페이스북 트위터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이 땅에 마귀 꽉 차서 성도를 삼키려 하니 겁내지 말고 싸워라…”

  전도사와 유권사는 구호를 외치듯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말을 세 번 크게 하더니 찬송가를 불렀다. 그 교회만의 방식으로 박수를 치면서 몸을 들썩이는데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신돌석씨의 집이 날아갈 듯하였다. 그들의 찬송가 소리에 어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는데, 그러기를 얼마 동안 하다가 다시 겁먹은 표정으로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너 정갱이지? 정갱이 이녀언 빨리 나오지 못할까? 어서 빨리 김집사 속에서 나와라!”

  어머니를 정갱이로 몰아붙이면서 이들은 어머니가 대꾸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소리를 쳤다. 김집사는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더니 유권사라는 사람은 어머니에게 달려들어서 목덜미를 눌러댔다. 그리고 전도사가 안수를 하듯이 어머니의 머리 뒷면을 세게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몸부림을 쳐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는 방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사람을 밀쳐 냈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었다. 신돌석씨는 그때의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그 뒤 여러 차례 했었다. 빨리 집에서 나갔어야 했다는 후회를 그 뒤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내가 정갱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구나, 하하하, 하하하…”

  어머니 입에서 폭소와 함께 나온 말이었다. 정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치 살아생전의 정갱이의 그 쉰 목소리와 너무나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도사와 유권사는 다시 어머니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서 아랫방에 있던 또 한 사람과 윗방에 있던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신돌석씨는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머니한테로 달려가서 말리지도 못했고, 뛰쳐나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기를 얼마나 했는지 어머니가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유권사는 씩씩거리면서 어머니를 계속 다그쳤다. 정말 기운이 놀랄 만했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나중에 생각했다.

  유권사가 성경책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유권사에게 집어 던졌다.

  “이건 니꺼다. 너나 가져라.”

  성경책을 집어 던지다니. 신돌석씨는 딛고 있는 구들이 꺼지는 것 같았다. 저기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리고는 다시 몸싸움이 벌어지고, 또 소강상태가 되기를 몇 차례나 했다.

  이런 희한한 의식은 형이 오고서야 끝이 났다. 그때 형은 공고를 다니고 있었다. 학교를 마친 뒤 일 하러 나가려고 집에 잠시 들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것이었다. 형은 전도사와 유권사에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형이 오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눈물만 계속 흘렸다.

  “저것 봐라. 저 교활한 것 봐라. 네 동생이 안다. 저건 네 엄마가 아냐. 정갱이 귀신이 조종하고 있는 거다. 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네 엄마 아주 잃는단 말야.”

  전도사와 유권사 들은 이런 말을 형에게 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형은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 엄마를 괴롭히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형의 확고한 태도에 기가 질려서 투덜대면서 돌아갔다. 그들이 나가자 형은 신돌석씨를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찼다. 그러면서 한심한 놈이라고 욕을 했다. 신돌석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형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아까 그 장면을 생각하면 그들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어머니에게 그들이 왔던 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있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할 뿐이었다. 가끔씩 방언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기를 몇 달쯤 했을까? 어머니는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더니 끝내는 자리에 누웠고, 그 해 여름을 넘기지 못했다.

  그 날 가투에 신돌석씨 지역이 동원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설득하는 사람의 확신에 찬 말에 찜찜하면서도 반박을 못하던 당시 얼굴들을 떠올리면 쓴웃음이 났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신돌석씨가 만약 어머니가 집단 구타를 당하는 것을 막았다면 그 뒤 어머니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그게 왜 또 가투 생각이 나게 하는 것일까?

  신돌석씨와 함께 가투에 가기로 뽑힌 사람은 최윤호였다. 또 한 사람은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가투 현장에 오지 않았다. 최윤호는 야간 고등학교를 늦깎이로 다니면서 공장을 다니다가 해고된 사람이었다. 그가 해고된 것은 당시로서도 좀 의아한 것이었다. 그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파업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노조가 결성되지도 않았다. 다만 학생 출신 활동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추석 휴가를 이틀밖에 주지 않는 회사 방침에 항의해서 반 사람들과 일상 투쟁을 벌였었다. 그때는 추석 연휴가 지금처럼 사흘이지 않았다. 다만 공장들은 관례상 사흘 이상을 놀았다. 그런데 그 회사는 이틀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 그 회사도 매년 사흘씩 휴가를 주어 왔었는데, 이 해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이틀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일상투쟁이 벌어졌다.

  그가 해고되게 된 계기가 된 일상투쟁은 지금은 있을 수도 없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는데, 단체로 결근을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추석 연휴 뒤에 이틀을 더 쉬었던 것이었다. 이틀을 무단결근한다고 해도 당시 근로기준법이나 취업 규칙상 문제될 게 없었다. 문제는 단체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자기가 그냥 결근한 것이라고 발뺌을 한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하나씩 불려가면서 협박을 당하면 단체 행동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두들 단체 행동이었음을 시인하게 되었고, 결국 학출 활동가와 또 한 사람이 해고되게 되었다. 그런데 최윤호는 끝까지 자기 혼자 한 일이라고 우겼다. 우직하게 원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자기들은 그에게 야간학교 다니는 것을 보장해 줄 정도로 배려를 해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배신이었다. 결국 그는 해고되었다. 그런 뒤 그는 해고자들과 만나면서 급격하게 생각이 변해 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좀 우려스러울 정도로 빠른 변화를 보이던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그 날 신돌석씨는 깃발을 가방에 넣어서 들고 갔었고, 최윤호는 유인물을 몸속에 지니고 갔었다.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이 사전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신돌석씨를 흥분하게 하였다. 신돌석씨는 종횡무진 현장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전경들한테 붙잡혀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연행될 뻔할 때까지 그는 최윤호가 어디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풀려나서 혼자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면서 빗속을 걸어가다가 그때서야 최윤호 생각이 났다. 유인물을 몸에 지닌 채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빗물에 녹아내리는 최루가스처럼 사라져 갔다. 알아서 잘 갔겠지 생각한 것이었다.

  “형처럼 뛰어 보지도 못하고 초장에 잡혔어요. 그리고는 몸수색을 당해서 유인물이 발각됐죠. 죄송해요. 정말 난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어요. 검문하는 전경을 한 대 패고 튈 수도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뒤 일주일쯤 뒤에 최윤호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왠지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사 받으면서 많이 맞았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견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없어진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투에 단순히 참가한 사람이 아니라 유인물을 뭉텅이로 몸에 지닌 사람이 어떻게 며칠 만에 나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심을 가져볼 만도 하건만 그 당시에는 그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신돌석씨는 그때 오히려 이런 의심을 하는 학생 출신들을 싫어했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을까? 신돌석씨는 그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그것이 신돌석씨의 인간미라고 누구는 말하기도 하고, 한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듬해 봄부터 해고자들 중 노동운동조직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다시 현장에 재취업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자 출신들은 대부분 그랬다. 최윤호도 어느 전자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취직한 지 2주일 만에 현장에서 사라졌다. 조직에서는 그가 연행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상이 걸렸다. 그가 알고 있는 자취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피 생활로 들어갔다. 비상 연락망이 짜이고 정상적인 모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윤호가 사라진 것과 거의 동시에 학생 출신 노동자 하나가 연행되어서 ‘사문서 위조 및 동 행사’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 동생의 이름으로 취업했는데 그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것도 최윤호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모두들 궁금해 하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최윤호가 연락이 되지 않으니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고도 했고, 경기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고도 했다. 그에게 조직의 구성원 중 현장에 있는 사람들 특히 학생 출신을 두 명만 대면 풀어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소문일 뿐이었다. 진원지를 추적해 보면 최윤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최윤호의 일처럼 추측해 본 것이었다. 사실 그때 정보기관에서는 현장에 들어간 학생 출신들을 잡아내기 위한 공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학생 출신 둘을 불면 풀어 준다는 것은 공단에서 돌던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몇 달이 지난 뒤 더 이상 최윤호와 관계 되는 피해의 낌새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면서 조직은 정상적인 연락망을 갖춰 갔다. 그러나 최윤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고향에도 연락을 해 봤으나 거기서도 그의 소식을 궁금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신돌석씨가 그를 만난 것은 3년이 더 지난 때 어느 노동자의 결혼식에서였다. 노동조합의 위원장도 했었던 사람이었는데 동거를 하고 있다가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이 사람은 워낙 지역에서 발이 넓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다 보니 꼭 노동운동 하는 사람만이 하객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는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뒤라서 지역에서 노동운동세력이 양적으로 급격하게 팽창한 때였다. 최윤호의 일은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그나마 아는 사람들은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실은 나 형 만나러 왔어요. 형을 만날 수 없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거예요.”

  피로연 자리에서 신돌석씨가 앉은 자리로 오면서 최윤호가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그 날 최윤호의 자취방에 가서 잤다. 최윤호는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그때 왜 현장에서 사라졌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신돌석씨 역시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에 있는 많은 것을 신돌석씨에게 이야기했다.

  “형, 이런 일 있어요? 신문에 어떤 사건이 났어요.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때 그 범인이 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신돌석씨는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나 생각했다. 왜 자기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냥 듣기만 하다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현장에서 잡혀간 학생 출신이 있어요. 위장취업자라는 게 밝혀진 거죠. 그때 처음에는 어떻게 회사에서 알았을까? 아니면 경찰에서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다가 그 생각을 자꾸 하면 내가 혹시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야, 임마 자기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를 왜 몰라. 그걸 모르면 그거야 정신병자지.”

  신돌석씨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최윤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형, 나 말예요. 회사가 끝난 뒤에도 다시 회사에 자꾸 가요. 뭔가 치우고 오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가서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쇳조각 하나하나를 깨끗이 치워요. 그리고는 나왔다가 다시 가죠. 또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어느 때는 야근까지 다 끝나서 회사 정문이 잠겼을 때 담 넘어가서 치운 적도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던 최윤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형, 맞아요. 나 좀 이상해요. 나 지난 몇 달 동안 치료 좀 받았어요. 그런데 그만두기로 했어요. 의사는 말해요. 물 흐르듯이 살라구요. 물처럼 길 따라 흘러가며 살지 못하니 그러는 거래요. 그러면서 아무 생각 말고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래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의사는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왜 괴로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형 생각이 났어요. 형이라면 내 마음을 알아 줄 것 같다고요. 그리고 뭔가 해결의 길을 알려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신돌석씨는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바꿀지 알지 못한 채 그냥 최윤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고된 뒤에 학생 출신들이 나한테 변증법도 가르쳐 주고 유물론도 공부시킨다고 했지만 어느 학생 출신보다 형이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형은 삶 그 자체가 변증법이고 유물론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형을 만나기로 결심했어요. 형을 만나서 내 속에 품은 이야기를 하려구요.”

  이 정도 되자 신돌석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신병자 운운했는데 최윤호가 치료를 받았다고 하니 그랬고, 어느 학생 출신보다 자신이 더 변증법이나 유물론을 잘 이해한다고 하니 그랬다. 하지만 그 말은 한편으로는 신돌석씨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마음을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뭐든지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물 흐르는 대로 가는 것보다는 물길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사고방식이었다.

   
▲ [삽화 - 김윤기]

  “형, 나 그때 현장에서 그냥 나왔어요. 내가 그냥 나온 거예요. 무서웠어요. 또 다시 끌려가서 두들겨 맞을 생각을 하니 두려웠어요. 친구집을 돌아다니다가 일주일쯤 뒤에 자취방에 돌아갔는데 거기에서 끌려갔어요. 어딘지는 몰라요. 차에 태워진 뒤 눈이 가려졌어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혹시 말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거기서 풀려 나온 뒤에 조직에 연락을 취했어야 했는데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너무 괴로워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들도 잘 모르겠어요. 집에서는 내가 어디를 나갔다 온 뒤에 온통 흙투성이였대요. 내가 야산에 끌려가서 생매장 당할 뻔했다고 하더래요. 그런데 솔직히 나 그 일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아요.”

   
▲ [삽화 - 김윤기]

  제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 사진 앞에 몇 가지 음식과 과일이 단촐하게 차려져 있었다. 음복을 했지만 축문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이 집의 제사는 기독교 신자들이 하는 추도식과 혼합된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신돌석씨가 중학교에 들어간 해인 1971년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1975년까지 어머니의 제사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한동안 부산에 살던 외할머니가 올라와서 어머니의 제사를 드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사라기보다는 추도식이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그 교회에 다니게 한 사람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외할머니는 부산 피난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온 뒤 이필수 아버지가 장로인 교회에 다니다가 여자 전도사가 따로 교회를 이끌고 나오자 그리로 적을 옮겼다. 그러면서 외삼촌과 어머니, 이모들을 데리고 다녔다. 외삼촌과 이모들은 금세 그만두었지만 어머니만은 계속 외할머니의 뜻에 따랐다. 아니 외할머니의 뜻에 따랐다기보다는 그 교회가 어머니의 생리와 처지에 맞았을지도 모른다.

  외할머니는 한동안 그 교회에 열심이었다. 그러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올라와서 그 여전도사가 인도하는 예배를 보고 가기도 하였다. 이북에서 외할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생과부로 젊은 날을 보낸 외할머니는 굉장히 생활력이 강했고, 어떤 일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그런 외할머니의 드센 성품을 고스란히 받아주어야만 할 대상이 어머니였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그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던 때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교회를 그만두고 일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더러 그 교회를 그만 다니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평생 할머니 말만 따라 하던 어머니가 그것만은 따라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지독히 싫어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외할머니는 신돌석씨의 집에 거의 오지 않았다. 서울에 왔으면서도 신돌석씨의 집에 들르지 않고 가기가 일쑤였다. 어쩌다 들르는 경우에도 두 사람은 소 닭 보듯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싫어하는 까닭이야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신돌석씨 형제들은 누구편도 들지 않았다. 다만 신돌석씨는 심정적으로 아버지 쪽에 가까웠고, 선옥이는 외할머니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형은 두 사람 모두에 대해서 냉정하였다. 외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가끔 들렀는데 형과 가까워지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형은 신돌석씨 집의 문제의 원인이 마치 외할머니에게도 있다는 듯이 대했다.

  그러던 외할머니도 어머니의 제삿날을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드디어 저 세상으로 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형이 중동에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제사는 그때부터 형수의 몫이었다. 형수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시어머니의 제사를 올렸다. 물론 외할머니가 올 때도 제사상을 차리는 일은 형수 몫이었다. 전체적인 주관을 외할머니가 한다고 해도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일하는 건 형수 몫이었던 것이다. 형수가 입원을 하고 형이 오고 그 뒤 형수가 집을 나간 뒤에도 어머니의 제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 같다. 신돌석씨만이 수배되었던 두 해 동안 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가셨다. 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천당이나 지옥에 갔는지 아니면 썩어서 흙이 되어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만약에 천당이나 지옥이 있다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많은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예수 안 믿어도 천당 갈 사람이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살아생전에 어머니를 괴롭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마치 자신의 죄과를 씻기라도 하려는 듯 입에 거품을 물고 그런 말들을 했다. 신돌석씨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을 참아내느라 애를 썼다.

  최윤호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일까? 신돌석씨와 만나는 동안 최윤호로서는 정말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이 생겼고, 또 한편에서는 정신과 의사 같은 부르주아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우쭐대는 마음도 싹텄다. 그런 생각 끝에 최윤호와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했다. 함께 공부도 해보자고 제안했다. 최윤호는 그 뒤 상태가 조금 좋아져서 방위에 갔다. 그 동안 정신과 병력 때문에 신검에서 계속 재검 판정을 받아온 모양이었다.

  방위 근무를 하는 동안에도 정기적으로 만났다. 최윤호가 방위 근무를 할 때 신돌석씨는 그에게 방위를 마치면 대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최윤호는 늦깎이이고 야간 고등학교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좀더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를 계속 만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아서 그랬다. 그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좀더 안정된 사회적 지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최윤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신돌석씨의 지도 아래 학생운동을 하러 대학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로서는 좀 난감한 일이었다.

  최윤호는 방위를 제대한 뒤 대학입시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재수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정기적으로 보기로 했는데 그만 조직 사건이 터지고 신돌석씨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정신없이 한 달 정도를 보낸 뒤 여러 사람을 통해서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그래서 새로 약속을 했는데 최윤호는 그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것일까 걱정도 했었다. 혹시 그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면 뜻하지 않은 결과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약속에 못 나온 것은 그때 또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최윤호는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입원한 뒤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시골로 내려간 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돌석씨 역시 그의 소식을 모르며 지냈고, 살기에 바빠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 [삽화 - 김윤기]

  다음 날 아침까지도 비가 내렸다. 새벽에 잠시 그치는 듯했지만 곧 이어서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아파트 입구에서 마을버스를 타는데 빗물이 모여서 인도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언젠가 최윤호에게 의사가 말했다는 것처럼 대부분의 물은 길 따라 흐르는데 그러지 못하는 물들도 있었다. 길 따라 흐른다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일 텐데 어떤 때는 그것이 좀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인간사도 그런 것인가? 최윤호는 결국 길 따라 흐르지 못한 물이 되었다. 어느 시궁창에서 썩었는지 말라서 날아갔는지 모를 일이다.

  최윤호가 몸을 맡겼던 물은 처음에는 길을 벗어난 물이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빗물이 길을 만들면서 개천을 지나 한강으로 가고 바다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듯이 극소수의 노동자들이 싸우던 시절에서 노조들을 결성하고 전노협을 거쳐 마침내 민주노총의 깃발을 휘날리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일탈해 버린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원해서 그랬으면 모르지만 최윤호처럼 원하지도 않았는데 길 따라 흐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빽빽이 사람들이 들어찬 마을버스에서는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저 세상에서, 아니 더욱더 많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이 땅에서 울어야만 하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마을버스가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닿을 때까지 버스가 가는 데 따라 이리저리 길을 바꾸며 흘러가는 물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삽화가 착오로 연재가 이틀 늦게 게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양해를 바랍니다. / 편집자 주)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트위터 뒤로가기 위로가기
댓글
아이디 비밀번호
(현재 0 byte/최대 500byte)
댓글보기(1)
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09-17 12:50:54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1 0
통일뉴스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후원하기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3-2번지 삼덕빌딩 6층 | Tel 02-6272-0182 | 등록번호 : 서울아00126 | 등록일자 : 2000년 8월 3일 | 발행일자 : 8월 15일
발행·편집인 : 이계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계환
Copyright © 2000 - 2015 Tongil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il@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