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럼프, 후퇴는 불원

1) ‘어른’들의 판 뒤집기

미 행정부 고위 관리가 9월 4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익명 칼럼에는 “실제 대통령인 트럼프의 시책이 시행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는 이중의 대통령이 있으며” 그 ‘어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북에 대해 호감을 가지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는 대목이 있다.

두 달 앞으로 바짝 다가온 중간선거(11.6)를 트럼프 대통령의 무덤으로 삼으려는 미국 주류 진영 포격전의 첫 포성에 해당하는 이 익명 칼럼은, 현직 대통령의 도덕성과 지도력에 상처를 내려는 목적이지만 미국 민주주의가 혼수상태, 중환자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북미 협상의 진전을 통해 중간선거 승리의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려던 트럼프가 종전선언 직전 멈춘 이유를 보다 큰 그림으로 보여준다.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 협상의 불충분”을 이유로, 즉 책임을 북에 돌리며 품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한 8월 24일 이후 그 주변 ‘어른’들은 아예 판을 뒤집으려 팔을 걷어붙인다.

첫째는 미 국방부의 한미 훈련 재개 발언이다. 매티스 국방장관은 8월 28일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군사훈련을 더 이상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북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동결, 핵 실험장 폐쇄,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 등 여러 조치를 트럼프는 한미 훈련 중단, 그 한가지로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걸 허물겠단다.

만약 매티스가 10월 중 한미 훈련을 재개, 북의 대응조치를 부른다면 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그보다 큰 낭패는 없다.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제주 국제 관함식을 명분으로 한국에 진입하는 미 항모가 그 길에 한국 해군과 훈련을 한다면? 트럼프는 아찔했을 것이다.

둘째는 미 국무부의 남북정상회담 견제다. 8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9월 중 개최”만 합의 했을 뿐이어서 날짜와 의제 등 추가 합의가 필요한데, 후속 회담 없이 벌써 8월 말이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이 고개를 들던 그 무렵 나워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8.29)에서 “북한 비핵화의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다음 달로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취소하라고 요청할 계획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협상을 중단시켜 비핵화 진전 가능성을 차단한 다음, 그것을 명분으로 남북정상회담 무산까지 몰고 가려는 ‘어른’들의 논리가 국무부 출입 기자를 통해 공론화된 것이다.

나워트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에 한 말을 되짚고 싶다. 비핵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문 대통령 스스로도 명확히 했다.”고 대답한다. ‘선 비핵화’를 들이대서 평양행의 발목을 잡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연초, 북미 협상의 판은 남북 관계 개선 흐름 속에서 나왔다. 또한,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 3항은 “4.27 판문점 선언 내용을 재확인한다.”고 해, 미국이 더 이상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을 담았다. 그런데 8월 말 현재, 남북정상회담 성사 전망이 불투명하다. 트럼프는 속이 탔을 것이다.

2) 대북 특사 파견

8월 29일 트럼프는 백악관 명의의 성명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다. 특유의 개인 정치행위를 하되, 백악관이라는 국가체계 최상층의 공식성을 업은 것이다.

첫째 “현시점에서 워 게임(한미 훈련)에 막대한 돈을 쓸 이유가 없다.” 둘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환상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등 두 가지 내용이다. ‘어른’들의 판 뒤집기에 대한 정면 반격, 현재의 성과를 지키겠다는 투쟁 선언이다. 이로써 품페이오 방북 취소 이후 오리무중이던 트럼프의 속내가 드러났고,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일신됐다.

다음날(8.30), 유엔군사령부(주한미군사령부)가 남북 철도 공동조사를 위해 8월 23일 서울역을 출발, 북으로 향하려던 열차의 방북을 가로막은 사실이 보도됐다. 일주일 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그때까지 비공개됐다가 갑자기 알려진 것이다.

정전협정에 따라 남과 북을 나누는 휴전선의 남쪽 경계는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한다. 그 권한을 이용, 남북 철도 공동조사를 막고,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차질을 조성해온 것이다. 이를 넘어서려면, 우선 유엔군사령부의 방해 행위가 세상에 알려져야 하는데, 그 첫 수순이 결국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8.31) 통일부는 남북 철도 공동조사는 유엔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계속 추진 의사를 밝힌다. 같은 날 청와대는 대북 특사의 9월 5일 파견을 북에 제안, 북의 수용 의사를 이끌어낸다.

2. 트럼프, 전진은 불가

1) 대북 특사가 전달한 트럼프 앞 ‘선물’

9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북 특사단이 평양을 방문, 김정은 북 국무위원장을 만나는 등 협의를 하고 당일 저녁 돌아왔다. 다음날(9.6) 오전 정의용 실장의 방북 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식 발표문은 1)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2)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본인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고, 이를 위해 남북 간에는 물론 미국과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3) 현재 남북 간에 진행 중인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대화를 계속 진전시켜 나가고, 남북정상회담 계기에 상호 신뢰 구축과 무력충돌 방지에 관한 구체적 방안에 합의하기로 했다. 4) 남북은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남북정상회담 개최 이전에 개소하기로 하고, 필요한 협력을 해나가기로 했다 등 네 개 항이다.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날짜와 의제가 합의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이어, 정의용 실장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1)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밝혀, “환상적인 관계” 발언을 보증했고, 2)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 내 비핵화를 희망한다고 말해, 미국이 강력히 요구해온 비핵화 시한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며, 3) 종전선언과 한미 동맹 약화, 주한미군 철수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발언, 종전선언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등 북의 ‘선물’은 트럼프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하나같이 약발이 넘치는 것들이었다.

북은 9월 6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 땅을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며 자신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보도, 정의용 실장의 전언에 힘을 실었다.

2) 트럼프, “시간 충분, 제재 계속”

북이 요구하는 상응조치, 즉 종전선언은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 카드 한 장이면 반대 세력의 ‘우려’를 간단히 해소하면서 북미 관계를 크게 진전시키고, 이를 통해 중간선거 승리로 성큼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첫째, 그는 정의용 특사단장의 방북 결과 설명을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서 한 번 걸러 들었으며, 그에 대한 공식 반응도 볼턴이 발표토록 했다. 북미정상회담을 처음 추진할 때 정의용 실장을 백악관에 초청, 대면 설명(3.8)을 들으며 분위기를 띄우던 모습과 대비된다. 9월 6일 정의용 실장은 볼턴과 통화, 방북 결과를 전달했다.

그 직후 볼턴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자신의 트위터에 “18-20일 남북정상회담과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참석을 앞두고 계속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는 것만 올린다. 정의용 실장이 전했을 북의 전향적인 입장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북의 ‘선물’을 중간에서 빼먹은 것이다. 그 ‘선물’의 존재를 모를 리는 없으므로 사실상 트럼프 스스로 그 활용을 포기한 것이다.

둘째, 트럼프는 그날(9.6) 밤 몬태나주 선거 유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나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슬쩍 자랑한 다음, “그들이 지금 당장 비핵화를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인질들을 돌려받았다. 더 이상 미사일 실험도 없고, 더 이상 일본 위를 날아가는 미사일도 없다. 더 이상 핵 실험도 없다(한겨레.9.7)”고 한다. 그러면서 “(비핵화를 위해) 시간을 충분히 가져도 된다. 제재는 계속되고 있다(같은 기사)”고도 한다. 현상 유지 태도가 역력하다.

셋째, 김정은 북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받는 과정 역시 대동소이하다. 9월 7일 판문점 북미장성급회담에서 북의 친서가 미국에 건네졌다. 그런데 이 서한은 대통령에게 곧장 전달되지 않았다.

9월 7일 트럼프는 “북의 친서가 오는 중”이라면서 “품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 나에게 전달 될 것”이라고 한다. 9월 8일 <CNN 방송>은 친서가 품페이오에게 전해진 사실을 보도했다. 9월 9일 <AP 통신>은 친서가 아직 품페이오에게 머물러 있다고 했다.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이 친서 수신 사실을 발표한 것은 9월 10일이다.

친서는 하루 이상, 이틀 가까이 품페이오 책상에 있었다. 북미정상회담을 조율 중(샌더스. 9.10)이라는 말이 못미더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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