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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이 잊힐까 두렵다<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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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3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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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것 많아 세상 살기 힘들다. 흥겹고 즐거운 일도 담아두기 힘든 판국이다. 슬픈 일, 궂은 일, 괴로운 일들이야 안고 있어야 득도 없다. 어떤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적당히 잊고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인간은 잊은 만큼 새로워지는 동물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양심마저 무너뜨리는 건망증이 그것이다. 양심을 망각하면 존재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없다. 그저 아수라(阿修羅)나 야차(夜叉)처럼 먹고 날뛰고 살아갈 뿐이다. 사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양심의 망각은 나라마저 무너뜨린다.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말이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를 개척한 인물로, 오직 나라사랑과 독립을 업으로 살다간 못난이다. 갈등과 분열에 휩싸인 임시정부를 바라보며 삼불(三不, 不食‧不言‧不藥) 통탄하며 절명했다. 그가 남긴 『한국혼』이란 글도 망국에 대한 통언(痛言)이다. 마지막 유언 역시 임시정부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는 망국의 원인으로 법치(法治)의 문란, 기력의 쇠약, 지식의 몽매, 아첨과 나태, 당파적 사리사욕 등, 여러 요인들을 열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기를 이러한 여러 가지의 원인을 가져오게 한 것은 모두 양심(良心)을 잃어버린 까닭이라 하겠다. 이렇게 양심을 잃게 됨으로써, 일종의 흐리멍덩한 건망증을 낳아 잊어버리기를 잘하여, 첫째 선조의 교화(敎化)와 그 종법(宗法)을 잊어버렸고, 둘째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버렸으며, 셋째 국사(國史)를 잊었고, 넷째 국치(國恥)를 잊었으니, 이렇게 사람들은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보면 나라는 망하게 마련인 것이다.”(『한국혼』)

그가 말한 양심은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 보편의 아이덴티티와 부합한다. 또한 자아정체성만이 아니라 집단정체성의 준거로도 드러나 있다. 양심의 나무가 뿌리 째 뽑힌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예사롭지 않은 경구다. 신규식의 질책 가운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이 부끄러움의 망각에서 오는 망국론이다.

“아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이여! 우리가 몸소 그 해독을 받고도 일이 지나가고 환경이 바꿔지면 막연히 대처할 것이다. 우리나라 치욕사의 기록을 읽어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크게 슬퍼하고 한탄할 것이나, 지나쳐 버리면 막연히 대처할 것이니, 그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겠다. 한심한 것은 화친사절을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선물을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백주에 칼을 어루만지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밤중에 돈을 주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오오사카(大阪)의 포공창(砲工廠)을 한 번 보면 잊어버릴 것이고, 요주만(膠州灣, 지금의 칭다오 지역-인용자 주)의 선전문을 한 번 보면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고관대작에 후한 녹을 주면 기쁘게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관광을 시켜 영화를 누리게 하면 놓칠까 근심하여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심지어 우리들을 채찍으로 갈겨도 또한 그를 잊어버릴 것이고, 우리들을 어육으로 만들어도 그를 잊어버리고 말 것이니, 잊어버리는 것이 이렇게 많고서야 국치는 끝내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한국혼』)

참[眞]의 근본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된 가치다. 공자는 위선과 가식을 가장 염치없는 짓이라 했다. 제자인 좌구명(左丘明)의 말에 동조하며 교언영색(巧言令色)과 족공[足恭, 비굴한 공손]을 심히 부끄럽게 여긴 것이 그것이다. 맹자 역시 '수오지심의지단야(羞惡之心義之端也)'라 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의(義)의 근본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그 옳음[義]란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부끄러움은 곧 선을 구현키 위한 양심과 통한다.

불가(佛家)에서도 남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고, 요컨대 온갖 악한 일에 머무르는 까닭에 늘 부끄러워함을 참괴(慙愧)라 하였다. 이 참괴에 머무르면, 모든 무참무괴(無慚無槐)를 떠나 악을 없애고 착한 일을 사유(思惟)하여 불법의 완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걸머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참과 무괴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죄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無慚愧不重 於罪不見怖)”(『俱舍論』「分別根品」)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 역시 이와 다를 바 아니다. “부끄러움 없이 내가 주님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 하리이다.”(『시편』119:6)라는 구절에서도, 부끄러움이 기독교적 광명정대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부끄러움은 양심의 수면(水面)과 같다. 조금만 건드려도 파동이 인다. 옛사람들이 ‘염치(廉恥)없는 인간’이란 지탄을 가장 큰 모욕으로 여긴 것도 이러한 이유와 맞닿는다. 그러므로 한 집단의 양심 농도는 부끄러움의 감응과 비례한다 해도 억측이 아니다.

얼마 전 우리 사회의 양심 게이지(gauge)를 흔들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이 그것이다. 위로는 떳떳하고 아래로는 관용하던 옆 집 주인아저씨가 자살한 것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자 한 하회탈 같은 인간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그 동인이라 한다. 노예적 질곡 속에서 주인처럼 살고자 한 노회찬 아닌가. 그 주인된 자괴감을 못 이겨 이 세상을 떴다. 노예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은 진정한 주인만이 느낄 수 있는 가치다.

그의 불법을 옹호하거나 자살을 두둔하고픈 마음은 추호 없다. 더욱이 자살은 그 어떠한 이유로든 미화 되선 안 된다.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윤리적 관습의 틀에 갇힌 금기 행위다. 인간 사회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종교적인 기반에서 나온 것이든,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고 믿었던 윤리나 도덕의 기준에 의한 것이든,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나는 진보니 급진보니 하는 노회찬의 정치성향도 잘 모른다. 다만 여기서 연민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상대적 인간성이다. 정치적 양심을 놓고 저울질한다면, 노회찬 만한 비교우위적 인물이 누가 있을까. 세상이 태풍을 맞아 양심의 나무가 통째로 자빠져도, 부끄러움커녕 괘념(掛念)하지도 않는 요즘이다. 몰염치가 상식이요 철면피가 보통이다. 이 판국에 양심의 줄기가 끊긴들, 그 가지가 꺾인들 누구 하나 아랑곳 하겠는가. 그저 대세가 순리(順理)라고 합리화 하며, 양심을 적당히 비껴 행세하는 정치 군상(群像)이 서글플 뿐이다.

천품(天稟)을 인력(人力)으로 지켜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덕으로 문을 만들고 착함의 계단을 하염없이 쌓아야 지탱할 수 있는 업이다. 그럼에도 노회찬의 천품을 가린 홍진(紅塵)의 두께는 어느 인간보다도 엷은 듯하다. 그의 양심에 이는 부끄러움의 파동이 누구보다 예민했기 때문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정치인, 그가 바로 노회찬이다.

노회찬은 죽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소멸로 들게 한다. 단절, 망각, 산화와 같은 엔트로피의 질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죽음은 삶을 유한하게 하는 계기이고 삶은 죽음을 초월의 계기로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도 된다. 유한한 실존이 일상적 삶에서의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이 어떤 상실이나 회한,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기보다는, 또 다른 미래 사유로의 열림을 의미할 수 있다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이해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owith)의 말처럼, 자살 역시 인간이 가진 가장 빼어난 가능성이기도 하다. 또한 자살 현상이 개인적인 동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한 사회가 갖는 자살의 경향과 연관되는 사회적 요인과 밀접하다. 현상적으로는 자살이지만 수많은 사회적 타살이 존재하는 이유다.

한편 자살을 비롯한 죽음은 권력과도 밀접하다. 닫힌 사회의 새로운 돌파구를 죽음이 무너뜨린 사례도 적지 않다. 권력에 의해 죽음을 강요받는 사회에서는 자살이 또 다른 힘으로도 나타난다. 노회찬의 죽음 이후로 급격히 상승한 정의당의 지지율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의 자살이 권력으로 살아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때로는 권력이 죽음을 기반으로 나온다는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인간은 죽을 힘을 갖고 있다는 역설(逆說)에도 주목해 보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죽는다(sterben)’는 것은 죽음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오로지 인간만이 죽는다.

죽을 힘의 능력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의 힘이 그 죽음의 소멸을 감출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사라지고도 남을 잉여적 힘’이 죽을 능력이다. 삶의 힘이 없이는 죽을 능력도 없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죽음의 필연성에 대해 회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노회찬 삶의 가치는 정심(正心)과 정행(正行)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의 사심(邪心)과 사행(邪行)이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감출 수 없는 양심의 명령 앞에, 죽음으로써 삶의 용기를 연장시킨 것이다.

여기서 노회찬의 죽음을 미화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넘어서 존재하고자 했던 그의 몸부림에 가슴이 멘다. 산다는 것이 죽음을 위한 세레머니라면, 존재한다는 것은 진정한 삶을 위한 준비작업 아닌가.

문득 일제에 몸통으로 항거한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과, 그의 제자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의 사생관(死生觀)을 떠올려 보았다. 나철은 근대 정체성의 중심에 선 인물로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서일 또한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만주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시대의 무게를 걸머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들이다. 나철은 말한다. “죽고 사는 것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과 의리는 오직 정신이 증거한다.(死生不在軀殼 信義惟證神明)”고. 서일 역시 외쳤다. “마땅히 살아야 하지 않을 때 오래 살면, 이것은 도리어 욕됨이다.(不當壽而壽 斯反辱矣)”

노회찬의 사생관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분명 우리 정치사의 일획을 긋는 사건이다. 양심의 각성을 통해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라는 경종이다. 염치의 자각을 통해 가식(假飾)을 벗고 진정(眞正)을 추구하라는 목탁이다. 노회찬의 죽음 앞에 우리 모두 참회와 경건을 염두 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의 자살을 보며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인간들이 누구인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정치꾼들이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이란 일화가 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의미다. ​이제 죽은 노회찬이 산 정치인들을 환골탈태시켜 주길 갈망함은 나만의 소망은 아닐 듯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외침은 그저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나발소리다. 존재하려는 인간들에게 그 값싼 격언은 격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잊어야 할 가치는 그러한 구호 속에 녹아있는 비양심과 몰염치다. 노회찬의 자살은 망각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일깨워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왠지 건망증에 익숙한 우리의 세태 속에, 다시 그의 죽음이 잊힐까 두렵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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