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
내가 본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것이란 모두 한낱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토마스 아퀴나스) |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풍이 마냥 아름다웠을까? 내 뇌리에는 흑백 사진처럼 새겨진 학창 시절의 소풍 장면이 몇 개 있다.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 인 것 같다. 양촌의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 고종 사촌 누나가 나의 보호자로 동행했고, 누나가 숭늉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갔다. 다른 아이들 몰래 목으로 넘기던 그 미지근하고 구수한 숭늉. 다른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사이다나 콜라를 마셨다. 나의 오감은 다른 아이들, 학부모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인 것 같다. 소풍이 끝나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왔다. 햇살이 마을 앞 시냇가의 모래밭에 눈부시게 빛났다. 내 눈시울에서 아롱거리던 그 경외스러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시절의 소풍 장면들은 그리 강렬하게 남아 있지 않다.
소풍은 일상의 일탈이기에 일상의 세계가 경이로운 장면으로 바뀐다. 내가 뛰어난 화가라면 그 장면들을 명화로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은 남들의 눈에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고흐의 가난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그림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처럼.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부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본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것이란 모두 한낱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그리고는 ‘신학대전’의 집필을 중단했단다.
그의 눈에 비치는 일상의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자신의 초라한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 하느님을 만났을 것이다. 그 눈부신 만남이 세상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게 했던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이 세상의 눈부신 광경들을 본다.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왜 그의 눈에 이 세상이 그리도 눈부시게 보였을까? 그는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는다. 그의 지옥의 경험이 이 세상을 낙원으로 보게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하고 노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한평생 힘들게 살다가 죽을 때 비로소 편안하고, 소인배는 한평생 즐겁게 살다가 죽을 때 힘들다.’
그래서 그의 인생을 달관한 듯한 ‘귀천’의 노래는 죽음이 왔을 때 비로소 고단한 삶을 쉴 수 있다는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들린다.
여고생 두 명이 동반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기에 이 세상이 자살해야만 하는 세상으로 보였을까? 옥상에서 떨어지며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고갱은 10여년의 주식중개인의 삶을 청산하고 문명의 도시를 떠나 야생의 섬, 타히티로 갔다. 그는 거기서 깊은 안식을 얻었다고 한다. 이 세상이 ‘타히티’가 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