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득식/소원도(訴願圖)/종이에 담채/27*33cm/평양조선미술박물관/18-19세기. [자료사진 - 심규섭]

긍재(兢齋) 김득신은 화원가문 출신으로 궁중화원을 지냈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넣은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고 평가한다.

풍속화는 영.정조시대를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 배경에는 백성의 삶을 더 잘 이해하여 민본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흐름에 따른 것이다.
초기 풍속화는 선비화가들의 의해 단발적으로 그려졌지만, 이후 도화서와 같은 국가미술기관에 소속된 화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창작된다. 다시 말해 국가 주도로 풍속화가 창작되었다는 말이다.

풍속화의 주인공은 백성들이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이 풍속화를 감상하고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백성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는 선비나 관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선비나 관료들이 백성들의 생활을 몰랐거나 훔쳐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림은 구체적 행위의 결과물로 인식될 수 있다. 선비나 관료들이 백성의 생활을 담은 화첩이나 병풍을 소유하고 감상한 것은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를 하고 있다는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이는 정조가 [책가도]를 좋아하자 양반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것과 비슷하다. 도화서 화원들은 퇴근하자마자 주문 받은 [책가도]를 그리기에 바빴고, [책가도]만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원가문이 생겨날 정도였다.

김홍도의 풍속화도 유명해서 [행려풍속도]처럼 큰 화면의 비단에 정교한 필치와 채색을 하여 병풍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병풍 그림은 양반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렸을 것이다. 어쩌면 주문에 따라 같은 그림을 여러 벌 제작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김득신의 풍속화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작품의 제목이 [반상도], 혹은 [노상알현도]라고 되어 있다. 실제 그림에 제목은 적혀있지 않다. 그러니까 후세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임의로 정한 것이다.
반상(班常)은 양반과 상민이란 뜻으로 신분차별을 뜻한다. 또한 노상알현(路上謁見)은 길거리에서 지체가 높은 사람을 찾아 인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니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따른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단다.

하지만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면 제목이나 설명이 맞지 않다. 틀리는 정도를 넘어 상당히 악의적이다.
왜 그런지 그림을 살펴보자.
나귀를 타고 가는 일행이 길거리에서 남녀를 마주치고 있다. 나귀를 탄 사람은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다. 특이하게 갓 안에는 선비들이나 관료들이 쓰는 두건을 하고 있다.
벙거지 모자를 쓴 사람은 관청에 속한 마부이다. 또한 등짐을 진 사람은 갓을 쓴 것으로 보아 노비나 짐꾼이 아니라 아전일 것이다.
따라서 나귀를 탄 사람은 마부를 두고 아전의 수행을 받는 지역 수령일 가능성이 높다.
옷차림으로 보아 공무수행보다는 행사에 참가하러 가거나 돌아오는 길이다.

허리를 구부려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는 커다란 패랭이를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이는 남자의 신분이 천민은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가 평상복이 아니라 두루마기를 입은 것은 이 만남을 의도해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전모를 쓴 여성은 장식이 있는 가방을 매고 있으며 그 안에는 곰방대로 보이는 물건이 들어있다. 전모는 여성이 외출할 때 쓰는 모자인데 일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작심하고 외출했다는 의미이다.
남녀의 관계가 부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남매이거나 부녀일수도 있다. 이런 추정은 남자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반해 여성의 얼굴은 앳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남녀는 뭔가를 목적으로 의복을 갖추고 외출한 것이다.

얼핏 길거리에서 기세 높은 관리를 우연히 만나 허리를 구부려 인사하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자세는 절이나 인사하는 모습이 아니다. 일단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손을 모으고 뭔가를 하소연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그렇다. 이 남녀는 수령에게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민원을 넣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억울함을 해결해 주기를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민원을 넣는 백성의 모습을 보는 수령의 표정도 무시하거나 거만해 보이지 않고 진지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마부는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뒤쪽의 아전은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약간 성가신 표정이다.

이 그림 속의 모습처럼 길거리에서 민원을 넣은 것을 격쟁(擊錚)이라고 한다. 비록 징이나 꽹과리를 치지는 않지만 왕이나 수령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문서가 아닌 말로 하소연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이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중 「태수의 행차-취중송사」와 주제가 비슷하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점을 감안한다면 김득신이 같은 주제로 좀 더 현실적인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길거리 민원제기를 풍속화로 그린 이유는 뭘까?
풍속화는 특별한 사건을 다루기보단 백성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는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는 이런 길거리 송사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조선시대 민원(소원)제도는 「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의 소원(訴寃) 조항에 규정되어 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서울은 담당 관청에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러한 이후에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신고한다. 그런 후에도 다시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신문고는 의금부에서 당직을 서는 곳에 있다. 무릇 올려진 말(민원)은 당직을 서는 관원이 사헌부에서 각하한 문서를 살펴보고 나서 받을 수 있는 내용이면 받아 왕에게 아뢴다. 의금부나 사헌부에서 처리한 것은 각하한 문서인지 살피지 않는다. 무릇 올려진 말은 왕의 결재가 난 후 5일안에 해당 관청의 보고가 있어야 하고, 만약 그 시일을 넘기면 그 이유를 보고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몰래 사주하여 소송을 내게 한 자도 죄가 이와 같다. 자기의 원통한 일을 고소하는 자는 모두 들어주어 심리하되 무고한 자는 장(杖) 100대에 유(流) 3천리를 부과한다. 품관과 서리, 백성은 역시 그 동네에서 내쫓는다."

위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민원처리 절차였다.
이 외에도 지금의 감사원과 비슷한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3사가 있어 부정부패와 비리를 전문적으로 조사 처벌하였다. 3사의 관료들은 젊고 기개가 있는 5품 정도의 관료들로서 자신의 후임자도 자체적으로 천거함으로써 독자성과 권위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3사의 관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정과 비리를 냉정하게 적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 민의수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비나 관료들의 여론은 여러 제도를 통해 수렴되었지만 일반 백성의 경우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다. 그것은 글자를 몰라 문서를 작성하기 어려웠고 방법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 상언, 격쟁과 같은 소원제도를 만들었다.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한 것으로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은 신문고를 쳐서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이용하는 사람은 백성들이 아니라 양반이나 관료였고 특히 한양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실효성이 크지 못한 신문고에 비해 상언, 격쟁은 백성들에게 보다 쉬운 방식이었다.
상언(上言)은 국왕이 행차할 때 자신의 사정을 글로 써서 아뢰는 것이고 격쟁(擊錚)은 대궐 근처나 왕 행차 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말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정조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자신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자 상언과 격쟁의 제한을 완화시켰다.
실제 정조는 숱한 출궁을 통해 백성들의 민원을 살폈다.
왕이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챙기는 판에 관료들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특히 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경우는 수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득신의 풍속화를 [반상도], [노상알현도]라고 제목을 붙이고 신분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조선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본 내용을 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술작품을 이용해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시민이나 노예들에 비교하면 훨씬 약했다.
흔히 기생, 갖바치, 백정, 재인 같은 천민이나 노비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고 하지만 구체적 실상은 다르다. 천민은 토지를 배급받지 못했고 과거시험 따위에 응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면세에 군역, 노역도 없었다. 이들의 직업은 다른 사람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 독과점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시켰다. 실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된 천민들도 많았으며 이들의 재산은 법적으로 보호되고 상속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들도 당시 천민이 가진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신분차별에 따른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양식 역사관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양반과 백성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반상도]라는 제목을 지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간다.
그렇다고 이런 신분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의 한계는 인정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림의 내용처럼 길거리에서 민원을 넣은 모습을 그대로 옮겨 [노상소원도]라고 새롭게 제목을 붙였다.
조선시대 미술작품은 유물이자 역사적 증거이고 사료이다. 우리그림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와 문화를 통해 우리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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