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욕망의 은유적 표현이다 (라캉)


 거울
 - 조말선

 아버지가 모종컵 속에 나를 심는다 아가야, 어서어서 피어라 너를 팔아 새 눈알을 사야지 그때서야 내 너를 볼 수 있지 나는 빛나는 아버지를 쬔다 일렬로 줄을 선 모종컵 속으로 골고루 아버지가 비친다 아버지는 사흘 만에 핀 떡잎을 보고 주문을 왼다 너를 팔아 새 다리를 사야지 그때서야 내 너를 업어주지 아가야, 어서어서 피어라 아버지의 얼굴에 무수한 길이 난다 아버지, 나는 어디서 나를 사나요 분무기에서 수천의 아버지가 쏟아진다 몰라, 몰라 이 길을 다 지워야겠어 내가 온 길을 되돌아가야겠어 나는 찢어지는 아버지를 받아 마신다 나는 쑥쑥 찢어진다 아버지가 환해진다
 모종컵 속에서 아버지의 사지가 하나씩 피어난다


 ‘동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행’이라는 제목의 글에 무수히 댓글이 달렸다.
 어떻게 동의를 받아야 하지? ㅋㅋ
 저번 TV에서 여성 연예인들이 ‘키스해도 될까요?’하고 묻는 남자는 매력이 꽝이라고 했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ㅉㅉ  
 동의를 어떻게 받지? 모텔에 들어가기 전에 녹음해 둬야 하나? ㅠㅠ
 ...... 대부분 남성들이 쓴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 셋과 논술을 함께 공부하던 여자 아이가 그만두겠다고 했단다. 남자 아이들이 그 여자 아이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겠다고 했단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남성 언어’와 ‘여성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남성 언어’는 명확하다(남성은 위계적인 질서 속에 살아왔기에 예, 아니오가 분명하다). 반면에 ‘여성 언어’는 애매모호하다(여성은 차이를 존중하고 타자를 포용하며 살아왔기에 서로 모순된 것들을 함께 받아들인다). 우리는 가부장 사회에 살고 있기에 ‘명확한 언어’에 익숙하다. 하지만 명확한 언어로는 우리의 오묘한 삶의 모습, 다양한 감정들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다. ‘삶의 실상(實像)’은 얼마나 애매모호한가!    

 그래서 노자는 ‘여성성’을 도(道)에 가깝다고 했다. ‘남성성’은 실용적인 삶에 가까울 것이다. 둘 다 우리의 삶에 필요하다.

 그럼 ‘남녀 간의 사랑’은 도에 가까워야 할까? 실용적 삶에 가까워야 할까? 니체는 ‘섹스는 인간 정신의 극한까지’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성(性)은 ‘육체적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사원에는 성행위 조각품이 많다. 인간 정신의 완전성을 표현한 것이다.

 동물들을 보면 수컷이 암컷의 간택을 받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한여름의 매미 울음소리. 깊은 가을밤에 들려오는 곤충들의 노랫가락들. 힘겹게 사냥한 물고기를 암컷에게 바치는 수컷 새들. 사랑은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후손을 남길 수 있으니까. 이게 삼라만상의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이리도 많은 것이다. 사랑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야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남녀 모두)는 애매모호한 여성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깨워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용적 삶’이 중심인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은 깊고 깊기에 실용적 삶만으로는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평생 잘 먹고 잘사는 데 목표를 두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비천한가!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고 한다. 명확한 언어는 인공 지능이 담당하고 애매모호한 여성 언어가 우리의 삶을 보듬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게 할 것이다.

 남자들이 여성 언어를 배운다는 건, 여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차별, 불평등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감수성을 기르는 일인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부장 사회가 우리의 ‘거울’이었다. ‘아버지가 모종컵 속에 나를 심는다 아가야, 어서어서 피어라... 분무기에서 수천의 아버지가 쏟아진다... 나는 찢어지는 아버지를 받아 마신다 나는 쑥쑥 찢어진다.../모종컵 속에서 아버지의 사지가 하나씩 피어난다’

 이경자 소설가는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에서 애초에 권력구조에 물들지 않고 남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계사회에서 비로소 깊은 안식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중국 소수민족인 모계중심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소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생의 비의를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를 크게 보면 다시 모계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 사회의 폭력성이 사라지는 아픔을 우리는 잘 견뎌내야 할 것이다. ‘미투 운동’은 우리의 성장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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