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울 것 없이, 올해도 지나간다. 아무리 올해 별일이 많았다 해도,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어쩐지 시간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만이 딴 짓하지 않고 성실히 제 할 일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아, 물론 선생님도 고생하셨지요. 아무렴요.

아무리 엄청난 일이 벌어져도, 마치 당장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 것만 같아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대충이라도 수습이 되고 끝내는 잊히는 게, 예전에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게 오히려 조금은 다행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온전히 내 힘으로는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열정과 비관, 뭐 이런 것으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24시간 1년 내내 분노와 정의감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 전에 내가 자연발화로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장렬히.

보름 남짓 올해를 남겨둔 지금도 역시 대한민국은 역동적으로 시끄럽다. 우병우가 ‘숙명’처럼 구속되었고, 이명박은 올해를 무사히 넘기는 분위기다. 최순실은 “옥사하라는 말입니까!” 울부짖었고, 덩달아 류여해도 페이스북 라이브로 울부짖었다. 그나마 축구가 일본에 오랜만에 승리해서 덜 우울했다. 뭐, 이젠 적어도 일본에겐 질 수 없다는 오기도 결기도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올 해를 맞았다. 2016년엔 마이클 코넬리의 <클로저>였다. 2018년은 어떤 책으로 시작될지 아직 모르겠다. 올 초, “올해는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깊게 읽자”고 다짐한 바 있다. 그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깊게 읽지도 못했고, 많이 읽지도 못했다. 부끄럽진 않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깨지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정성스럽게 글을 많이 짓지 못했다는 것은 영 아쉽다. 능력의 부족이다.

아, 참고로 지금은 하드보일드의 거장 로스 맥도널드의 분신 루 아처가 활약하는 <블랙 머니>를 읽고 있다.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기에 2018년까지 붙잡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속절없이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겁이 더 많아지고,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약해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무지한 녀석이니 무슨 말을 해도, 또 그 무슨 말 때문에 설사 비난을 받는다 해도 전혀 겁날 것이 없었는데, 이젠 말 하나 글 하나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그 사이 더 신중해졌다거나 지혜와 지성이 충만해졌을 리는 만무하고 단지 겁만 늘어난 것이다. 비겁함만 늘어난 것이다.

특히 어떤 상황이나 특정 개인을 내 가치관과 기준에 맞춰 평가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비난이 두려운 것은 아닌데, 완전히 잘못된 평가나 판단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커진 것 같다. 이래저래 어째 인간이 가면 갈수록 덜 되어 먹어가고 있다. 벤자민 버튼도 아닌데.

촛불의 함성으로 맞이했던 올 연초, 미셸 푸코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진정한 해방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지금 난 과연 나의 그 ‘생각’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여전히 꽁꽁 묶인 채 부질없이 남들 탓만 하거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두남두고 버텨온 것은 아닐까. 세상 모든 윤똑똑이들을 비웃으며, 정작 내 얼굴에 묻은 똥은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어느 새 울뚝밸이 치밀 때마다 ‘그럼 넌 얼마나 치열하기에?’ 되묻는 나를 느끼게 된다. 분명히 철이 들었다거나, 성숙했다거나 이따위 차원은 아닐 것이다. 전혀 대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애면글면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열심히 훌륭하게 만족스럽게 올해를 살지 못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지 못했고 내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아냈다. 때문에 그 무슨 거창한 송년회 따위 할 생각이 없다. 그저 보기 싫은 얼굴들을 뒤로 한 채 술 한잔 시원하게 하고 푹 잠들면 바랄 게 없다.

▲ 니이츠 하루코 지음 / 황세정 옮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청소부』, 성림원북스, 2017. 9. [자료사진 - 통일뉴스]

새해에는 이 책의 저자처럼 무엇이든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고, 무언가 배우는 그 과정 자체에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일지라도, 책임감과 프로의식을 가지고 그 분야의 마스터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난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죽거나 좌절할 생각은 전혀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공감이, 결국 눈물이 되어 흘러내릴지 아니면 더 큰 힘이 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질지 모르지만, 스스로 톺아볼 수 있는 힘이라도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면 되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청결하다는 일본 하네다 공항의 청소 실기 지도자다. 환경 마이스터라는 명칭을 얻은 청소의 장인이다. 남들이 꺼려하는 청소부라는 직업을 장인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다. 그녀는 마음을 담아 일을 한다는, 진심으로 일을 할 때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와 같은 범인이 범접하기엔 까마득한 경지다. 일본인 전쟁고아 2세 출신인 그녀의 도전과 성공은 분명 많은 울림을 준다. 요리의 장인이나 청소의 장인이나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당장 주위를 돌아보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이용하고 누군가를 디딤돌 삼아 하찮은 권력과 명예를 얻고자 한다. 그를 위해 누군가 망가져도, 누군가 상처를 입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의, 패거리의 마지막은 대부분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이 대의라고, 정의라고 아무리 믿는다 해도, 포장한다 해도, 세상엔 윤똑똑이들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때문에 그런 이들에게 듣그럽겠지만 명토 박아 말해주고 싶다. 당장 앞에 있는 쓰레기부터 치우고 먼지부터 닦으라고,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묻은 똥을 닦으라고 말이다.

어쩌면 저자 같은 이들이 가득한 세상은 조금은 재미없을지 모르겠다. 내 주변에 온통 근면성실에다가 자신의 일에 진심을 담아내고, 장인의 경지에 오른 마이스터들만 산다면, 숨이 막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괜한 걱정이다. 거울이 없거나 부러 외면하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정작 적폐임을 모른 채 다른 이들을 향해 살천스레 적폐라 부르댄다. 똥 냄새가 여전히 사방에서 진동한다.

머라이어 캐리도 이제 나이를 많이 드셨다. 오랜만에 <Music Box> 앨범을 꺼냈더니, 1993년이라는 연도가 보인다. 그마나 최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나카시마 미카의 베스트 앨범도 2005년이다. 순간의 빛을 발하고 스러지는 아름다움도 잊을 수 없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나와 오래 지내온 것들도, 못지않게 아름답고 소중하다. 시간은 부질없기에 아름답다.

참 더러운 세상에서 적당히 같이 뒹굴며 때 묻히며 껄껄거리며 잘 살아냈다. 주제넘게 설쳐대는 설치류가 있다면 침 한 번 퉤 뱉어주고 내 갈 길을 가는 그런 녀석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올 한 해 다들 잘 살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떠나간 이들이여, 아무 걱정 말고 쉬소서. 여기 일일랑 다 잊으시고….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