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말에 시작된 촛불시위가 해를 넘기고 또 한 달을 넘겼다. 지속성과 규모가 그와 같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항의는 기성언론의 뒤틀림 속에서 생명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촛불시위는 대단한 위세의 과시였고 주권의 증명이었다. 4차산업혁명에 어울리는 4차정치혁명을 이 나라 국민만이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촛불시위는 썩어빠진 권위를 부정하는 불복종이자 국가를 쇄신하는 과정이다. 국민이 조물주이고 헌법은 그 피조물이라는 민주공화국의 근본공리를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국회도, 대통령도, 헌법재판소도, 특검도 피조물의 피조물일 뿐이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에서만 가능한 존재의 대연쇄다.

헌법재판소 소장의 퇴임 이후에 대통령측은 헌법재판소를 기능부전 상태로 만들고자 인해전술을 구사하고 극우적인 대중을 광장으로 소환하였다. 하지만 80퍼센트에 가까운 국민은 요지부동으로 대통령의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치며 대통령의 하야, 탄핵, 구속을 주장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시와 외면으로 일관하였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87년 민주화투쟁의 최대수혜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로, 헌법은 박대통령으로 하여금 탄핵심판과정에서도 온갖 권리를 알콩달콩 행사할 기회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헌법은 국민들에게 공직자가 탄핵될 때까지 꾹 참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어 대통령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통령은 검찰조사에 응하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특검조사도 갖가지 구실로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무책임한 존재로 굳혀 갔다. 이유가 무엇일까? 대통령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폭로자들의 증언이 점차 진실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대통령을 변론하겠다고 나선 변호인이나 청와대 측근들이 통치행위를 강변한 점은 더욱 애처롭다.

삶 전체를 통치행위라고 주장할만한 인물이 없지 않다. 이 나라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있고, 영국에는 찰스1세가 있다. 청교도 혁명기에 도끼질에 목이 달아난 찰스1세는 법정에서 “기억하시오. 나는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국은 왕의 것이고, 따라서 왕의 행동은 불법이 아니므로 신하가 왕을 범죄인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였다. 왕국에서 왕이 곧 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공화국의 대통령 측근들이 K스포츠, 미르재단에 관련한 구상을 대통령의 통치행위라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측은하다. 통치행위는 처음부터 위법적인 행위를 전제하는 개념인데다, 공익성과 긴급성을 이유로 그 행위에 대한 법적 잣대를 완화시켜 주자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아도 재단만들기가 중대한 공익성과 긴급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사사로운 이익추구가 통치행위라면 통치행위 반열에 들지 않는 대통령의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박대통령의 모든 행적은 사생활이거나 통치행위로서 법의 면책지대에 속하겠다.

현재 국민의 의사는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에 탄핵심판의 향방은 우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저항해야할 대상은 정치권력만이 아니다. 즉 박근혜 최순실 패당에게만 우리의 분노를 허비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정권과 정치권력은 유한하지만 경제권력이나 사회권력은 상대적으로 무한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력들은 항상 연합하며 무력한 자들을 압박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 확전을 저지하며 우리의 분노를 박근혜 최순실 패당에게만 국한시키려고 에쓴다.

그래서 정권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탄핵국면에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경제권력 삼성 앞에서 법치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재용을 감옥에 보내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법치주의 숭고성을 증명하는 미완의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그것은 공정한 사회로 가는 시작이다. 공정한 사회란 누구에게나 기회를 고르게 부여하고 불로소득을 철저하게 환수하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으면 늦게 온 사람 또는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에게는 기회와 부가 전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는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보여준다. 상속은 불노소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재용은 몇 푼의 세금만 납부하고 수조 심지어 수십조의 재산에 대해 편법적으로 상속하였다(그 재산이 전적으로 이건희의 재산이 아니라면 편법상속이 아니라 배임횡령에 해당한다). 세계는 3차산업혁명입네 4차산업혁명입네 난리법석을 부리는데 대한민국의 선도기업 삼성은 세대마다 세습혁명과 세법혁명을 완수하느라 여념이 없다.

1996년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발행은 그 시작이었고, 박근혜 정권의 국민연금은 그 작업의 대미를 장식해주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가진 게 없는 보통사람들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부의 세습을 위한 윤활제로 사용하고 삼성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국가는 국민에 대한 반역을 자행한 것이다. 또한 삼성의 부의 세습 프로젝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을 통해서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을 민주화하고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시민이 권력에 대하여 저항을 멈춘다면 가진 자들은 모든 면에서 더욱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대중은 그만큼 더 무력해질 것이다. 어떠한 경제체제나 정치체제도 결정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의 기본제도들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연적 사물처럼 보이는 사회 제도들도 잠정적인 것이며 저항과 실험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역사는 본디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을 통해서 발전해 왔으므로 저항은 정치의 원칙이지 예외가 아니다. 물론 현재의 제도 안에서 우리의 열망을 관철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러한 제도들이 인간적인 선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뜯어고쳐야한다. 그러한 변화는 일시적인 행위로 완결되지 않고 영구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의 속도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불복종을 정치적으로 생각할 때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주장을 교리로 수용한다. 그는 현실과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는 미국의 역사학자였다. 그가 제시하였던 시민불복종에 대한 지침을 여기에 첨부한다. 물론 시민불복종은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임을 전제한다. 처음부터 합법적 행위라면 골치아프게 불복종을 논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촛불시위는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념상 시민불복종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촛불시위를 지배적인 권력에 대한 정치적 항의로 이해한다면 시민불복종행위에 대한 하위드 진의 평가와 기대를 촛불시위에 온전하게 전이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에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겠지만 더 근본적인 민주화로 가는 길은 무수한 시민불복종행위를 필요로 할 것이다. 국가제도와 공직자들이 국민의 열망을 구현하지 못하는 때에는 국민은 압도적인 저항과 불복종을 통해서만 주권자임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새겨볼만하다.

하워드 진-시민불복종에 대한 일곱 가지 지침

1. 시민불복종은 중요한 사회적 목표를 위한 신중하고 선별적인 법위반이다. 기본적 인권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데에 법적인 수단들이 부적절한 때에 시민불복종은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시민불복종은 악법을 위반하거나 부정의한 조건에 항의하는 형태를 취하거나 바람직한 법과 조건을 도입하라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것은 헌법이나 국제법에 비추어 적법한 것으로 주장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행동의 목표는 민주주의 발전의 무한한 과정으로서 법과 정의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2. 법에 대한 일반적 복종의 사회적 가치는 법에 대한 일반적 불복종의 사회적 가치보다 높은 것이 아니다. 법의 지배에 대한 추상적인 복종을 주입시키는 수단으로서 악법에 대한 복종은 시민들에게 권위의 힘에 굴복하고, 현상 타파를 포기하게 하는 경향을 강하게 주입시킬 뿐이다. 법의 지배를 절대적인 것으로 찬양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징표이며, 민주주의의 많은 특성을 간직한 사회에서 전체주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악법에 불복종하는 시민의 권리와 위험한 법에 불복종하는 시민의 의무를 촉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한다. 민주주의는 정부와 법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생명, 자유, 행복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들이라고 상정한다. 도구들은 없어도 되는 것이지만 목적은 그렇지 않다.

3. 시민불복종은 중요한 쟁점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그 자체로 해롭지 않은 법의 위반을 포함할 수도 있다. 각 사안별로 법위반의 중요성은 쟁점의 중요성에 견주어서 평가되어야 한다. 도로교통법이 일시적으로 침해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동차에 치여 사망한 아동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관공서의 불법침입은 전쟁에서 사람들의 살해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다. 건물의 불법점거는 인종주의적 교육만큼 나쁜 것이 아니다. 특정한 법률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조건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부당하지 않은 법도 항의행동을 통해 위반할 필요가 있다.

4. 시민불복종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항의행동이라면 그러한 행동에 관여한 사람들의 투옥은 부도덕한 것이며, 바로 그 목적에 비추어 반대하고 항의해야 한다. 항의자는 자신이 깨뜨린 규칙을 수용할 필요도 없고, 처벌의 규칙을 수용할 필요도 없다. 항의자들이 자신들의 항의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동료시민들에게 부정의를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감옥에 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례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불복종과 관련하여 규칙의 일부로서 그들이 반드시 감옥에 가야 한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감옥에 가든 감옥을 피하든 중요한 것은 항의의 정신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후회하면서 규칙에 대한 복종으로서 감옥을 수용하는 것은 갑자기 굴종의 정신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항의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짓이다.

5.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항의의 효과 및 쟁점의 중요성과 조화되도록 가능한 한 비폭력적인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무질서의 정도와 쟁점의 중요성 간에는 합리적인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해악과 재산에 대한 해악의 구별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재산에 대한 전략은 효과와 쟁점에 따라 가치저하(불매운동), 손해, 일시적 점거, 영구 취득을 포함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시민불복종 행위의 힘은 항의 대상에 명료하게 그리고 분별력 있게 집중해야 한다.

6. 시민불복종에서의 무질서의 정도는, 국제적으로는 전쟁 속에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고, 국지적으로는 현대사회의 부정의를 은폐하는 질서의 허상 아래서 감춰진바, 현상유지를 위한 허구적 평화의 관점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는 진정한 무질서 및 폭력과 비교해야 한다.

7. 시민불복종 논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국가가 이해관계에서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며, 국가행위자들이 이 점에 대해 우리를 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권력, 영향력, 부 등을 목적 자체로 추구하고, 개인은 건강, 평화, 창의적 활동, 사랑을 추구한다. 국가는 권력과 부로 인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한 수많은 나팔수들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민은 독자적으로든 동료와 연대해서든 사유하고 행동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 번역은 Disobedience and Democracy. Nine Fallacies on Law and Order, South End Press, 2002, 119-122쪽.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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