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내 가슴에는 도덕률이 빛난다(칸트)


 백낙천  

 한 해에 세 벌의 옷만 있으면 되고
 두 끼 밥에 솥 밑만 녹슬지 않으면 되리다.
 밭에 가 아욱 따서 반찬하고
 숲 속의 가랑잎 거두어 땔감으로 족하다.
 그저 없어서 안되는 것은 잔 속의 미주라.
 그대들 내 살림 걱정들 하지만
 술에서 깨는 것이 걱정이지 가난을 걱정하진 않으니.


 우리는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산 지 오래되었다.

 우리 가슴 속도 별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가슴 속은 컴컴하기만 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칸트는 이 세상의 신비인 가슴 속의 양심(도덕률)을 깊이 연구한 철학자이다.

 그는 평생 하늘에 별이 늘 반짝이듯 지상에도 양심이 늘 빛나기를 원했다.

 우리도 안다.

 우리의 가슴에 양심이 늘 반짝이고 있음을.

 하지만 우리는 양심대로 살지 못한다.

 왜 그럴까?

 ‘양심’이라는 말이 워낙 오염된 말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양심’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부터 일었다.

 ‘양심’이라는 말은 강자가 약자를 윽박지를 때 흔히 쓰지 않는가!   

 사람들은 촛불 집회에서 ‘양심’을 정확하게 느낄 것이다.

 촛불을 켤 때 함께 켜지는 어두컴컴한 가슴 깊은 곳의 마음의 빛.

 그런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마음의 빛은 다시 어두컴컴한 가슴 깊은 곳으로 잠겨버린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의 빛이 이 세상에 가득 피어나게 할 수 있을까?

 칸트는 도덕률이 피어나게 하는 마음의 힘을 ‘미적 감수성’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가장 아름다울까?

 고흐는 말했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도 촛불 집회를 통해 알았다.

 사람이 그대로 무한히 아름답다는 것을.

 세상에서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추하게 보이는 기적을 경험했다. 
 
 우리가 전정으로 원하는 세상은 

 ‘술에서 깨는 것이 걱정이지 가난을 걱정하진 않으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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